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 (Battle of Sekigahara)에서 동군 총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 1543 ~ 1616) 승리로 전국시대 종결
세키가하라 전투 (Battle of Sekigahara, 일: 関ヶ原の戦い, 1600년 10월 21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게이초 5년 음력 9월 15일 (서기 1600년 10월 21일)에 미노국 후와군 세키가하라 (지금의 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정)를 주전장으로 하여 행해진 야전이다.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을 중심으로 일본 전국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져 ‘세키가하라의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라고도 불린다. 전투 당시는 난보쿠초 시대의 옛 전장 (古戰場), ‘아오노하라’ (青野原)나 ‘아오노가하라’ (青野カ原)라고 쓰여진 문헌도 있다.
주전장이 된 세키가하라 옛 전장터는 나라 지정의 사적이 되고 있다.
이 전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 豊臣 秀吉, 덴분 6년 2월 6일 / 1537년 3월 17일 ~ 게이초 3년 8월 18일 / 1598년 9월 18일) 사후에 발생한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정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 徳川 家康, 1543년 1월 31일 ~ 1616년 6월 1일)를 총대장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동군과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하고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반도쿠가와 서군의 양 진영이 세키가하라 전투를 포함해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역 결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하는 동군의 승리로, 패장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 등이 참수되어 도요토미 정권은 통일 정권의 지위를 상실한 반면,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고 막번 체제 확립의 길을 열게 된다.
○ 다이묘들의 분열
– 도쿠가와 관저로 모여든 주요 다이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와 나가마사(長政) 부자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와 요시나가(幸長) 부자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아리마 노리요리(有馬則頼)와 도요우지(豊氏) 부자
교고쿠 다카쓰구(京極高次)와 다카토모(高知) 형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신조 나오요리(新庄直頼)와 신조 나오타다(直忠) 형제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
모리 다다마사(森忠政)
호리 히데하루(堀秀治)
가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
다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 등.
– 마에다 관저에 모여든 주요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
오다 히데카쓰(織田秀雄)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
나쓰카 마사이에(長束正家)
마에다 겐이(前田玄以)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
○ 전투 진행
9월 15일 동서 양군은 세키가하라에 집결했다. 동군 82,000명, 서군 104,000명, 도합 18만이 넘는 병력이 좁은 세키가하라의 분지에 집결했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 군사고문으로 일본을 찾았던 독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세키가하라에서의 양군의 포진을 접하고 서군의 승리를 장담했다고 한다. 그만큼 서군 측은 미쓰나리가 있던 사사오 산 (笹尾山), 우키타 히데이에가 있던 덴만 산 (天満山),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小早川秀秋)가 있던 마쓰오 산 (松尾山), 그리고 모리 히데모토 (毛利秀元)가 포진한 난구 산 (南宮山)을 연결하는 전선으로 동군을 감싸 안은 학익진 (鶴翼の陣)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형적 이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동군은 골짜기에 갇혀 꼼짝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서군은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동군 역시 이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장담했는데 그것은 서군쪽의 다이묘들간의 불화가 극심하다는 것을 동군측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분명 정상적인 군대간의 전투였다면 동군이 이길 수 없는 상황이였으나 서군의 조직력은 이미 군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와해된 상태였다. 물론 이 점을 염려한 오타니 요시쓰구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명망이 없는 이시다 미쓰나리 대신 명망이 있는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옹립하여 보완책을 강구했으나 결과적으로 별 소용이 없었다.
세키가하라는 이른 아침부터 깊은 안개가 생겨 근처 아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에야스로부터 선봉의 약속을 받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곧바로 개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 전투 개시
짙은 안개 속에 양군은 2시간 정도 대치가 계속되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힐 때쯤 후쿠시마 부대의 옆을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소부대와 이이 나오마사가 박차고 나갔다. 이에야스로부터 선봉을 맡고 있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급히 그들을 저지하고 이유를 묻자, “정찰”이라고 말하면서 후쿠시마 부대 전방으로 나아갔다.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소부대는 돌연 서군의 주력인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를 향해 발포하고, 여기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서막이 열리었다.
이 공격에 대해 우키타 부대는 즉시 응사했고, 세키가하라는 순식간에 격전의 장소로 변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 6,000명과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 17,000명은 치고받으면서 양쪽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고, 구로다 나가마사 부대 5,400명, 호소카와 다다오키 부대 5,100명 등은 일제히 미쓰나리를 향해 공격에 나섰다. 미쓰나리 부대도 휘하의 시마 기요오키와 가모 사토이에 (蒲生郷舎)의 분전으로 공격해온 적을 격퇴했다. 그리고 서군의 오타니 요시츠구는 동군의 도도 타카토라와 맞붙게 된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에게 배신을 약속받은 데다가 서군의 다이묘들간에 불화가 극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특히 서군의 다이묘 중 불화의 중심이 되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계속 패배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뒤로 물리지 않고 그냥 싸우도록 내버려 둔 것이였다.
미쓰나리는 전투를 시작한 후 2시간을 경과할 때쯤 아직 참전하지 않은 무장들에게 전투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노로시 (狼煙; 말하자면 봉화)를 올렸다. 거기에 시마즈 부대에 응원 요청의 사자를 보냈다. 서군의 총병력 중 전투를 벌이던 병력은 겨우 35,000명에 불과했기에 전투 상황을 유리한 상황으로 옮길 수 있었다. 여기서 마쓰오 산 (松尾山)의 고바야카와 부대와 난구 산의 모리 부대가 동군의 측면과 배후를 공격한다면,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바야카와 부대 등이 임진왜란 당시 보여준 무능한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면 서군의 승리는 확정적이 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한강으로 몰아넣은 일본군(이 전투 당시 일본군의 지휘관은 가토 기요마사를 제외한 모두가 서군)이였으나 권율에게 일방적으로 패퇴한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시마즈는 응원 요청을 거부했다. 또한 모리 히데모토는 깃카와 히로이에 (吉川広家)에게 길이 막혀 참전할 수 없었다.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 소유의 영지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이에야스 측과 내통하고 있었다.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반
정오가 지나자, 이에야스는 배반을 약속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부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초조해한 끝에 마쓰오 산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선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안코쿠지 에케이의 친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격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성격상의 결함 등을 저울질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의 독촉을 받고 뜻을 결정하여 마쓰오 산을 내려갔다. 결국 히데아키는 선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안코쿠지 에케이의 친분을 무시해버리고 만다.
고바야카와 부대는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 우익을 공격하였다. 요시쓰구는 히데아키의 배반을 예측하여 온존하게 남아 있던 500명의 직속부대로 맞서 싸워 15,600명의 고바야카와 군을 300미터 정도 후퇴시켰다. 이때 고바야카와 군 무장인 마쓰노 시게모토 (松野重元)는 “방패 속의 반역은 무사로써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한 부대를 이끌고 방관했다. 이것이 고바야카와군의 후퇴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도도 다카토라 등의 모반책에 따라 그때까지 관망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게타다, 아카자 나오야스, 구쓰키 모토쓰나 등의 서군 여러 부대도 고바야가와 군에 호응하여 동군으로 돌아섰다. 사실 동군으로 돌아서기 이전 이미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사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행주산성 전투에서 자신의 부대를 똑바로 지휘하지 못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인 끝에 대패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바 있는 와키자카 야쓰하루로서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신뢰할 수가 없었다. 이시다 미쓰나리 수준의 무능함이면 자멸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였다. 예측하지 않았던 4부대의 배신으로 치열한 난전이 순식간에 동군의 압도적인 우세로 변하게 되었다.
서군은 유리한 학익진을 형성하였고 동군을 골짜기에 가둬놓았지만, 학익의 날개 부분에 해당하던 상당수의 무장이 배신하거나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하게 되어 전투는 서군 내에서의 내분과 동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전황이 역전되었고, 거기에 시마즈 요시히로와 모리 데루모토 등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서군 측 다이묘들이 따로 놀면서 엉뚱한 행동들을 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 서군의 패배
서군의 자멸 속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퍼붓고는 곧장 이에야스 본진을 통과하면서 철수하는 이른바 “전진철수”를 개시했다. 이 행동에 후쿠시마 부대는 그대로 그들을 보내주었으나, 이들을 쫓았던 부대 중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는 저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고, 혼다 다다카쓰는 타던 말이 총에 맞아 낙마했다. 시마즈 부대는 시마즈 도요히사 (島津豊久)와 아다 모리아쓰 (阿多盛惇)의 희생으로 약 80기 전후의 소수만이 살아남아 철수에 성공했다.
모리아쓰는 요시히로가 히데요시에게 선물 받았던 진바오리 (陣羽織)를 몸에 걸치고, 요시히로 대신 “효고두, 무운이 다하여 여기서 최후를 맞이하겠다.”라고 말하면서 할복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서군 부대는 괴멸하여 패주했다.
○ 전후 처리 및 논공행상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에서 승리 후 서군 측 다이묘의 처벌 및 동군 측 다이묘의 포상을 하였다.
– 서군
.전투 후 9월 21일 이시다 미쓰나리는 옛 친구였던 다나카 요시마사 부대에 체포되었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9월 19일에, 안코쿠지 에케이는 9월 23일에 각각 체포되었다. 이들은 이후 오사카, 사카이로 끌려다니다가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석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강제로 가토 기요마사에게 붙여버렸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아들들은 승려가 되어 평생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종교활동만 전념하는 조건으로 목숨만은 연명하게 했으며 장남인 이시다 시게이에 (石田重家, 1583 ~ 1686)는 103살까지 살아 천수를 모두 누렸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사쓰마로 도망쳤다가 1603년 말 시마즈 다다쓰네 (島津忠恒)가 이에야스에게 끌고 갔다. 다다쓰네와 아내의 친가인 마에다 도시나가가 구명 탄원하여 죽음은 면했으나, 스루가 구능산에서 유폐된 후, 하치조시마 (八丈島)에 유배되어 사망할때까지 장장 50년동안 하치조시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4대 쇼군 이에쓰나의 치세 때까지 살았고, 그의 자손은 마에다가의 지원을 받아 메이지 유신 때까지 가문을 지켰다.
.나쓰카 마사이에는 거성 오우미 미즈구치 성으로 도망쳤으나, 동군의 이케다 데루마사 부대의 추격을 받자 10월 3일 자결했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인해 공격을 받던 중 포위당해 자결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처벌은 여러 방면의 회유 끝에 1602년 4월 이에야스는 “요시히로의 행동은 당주가 인정한 것으로 나쁘지 않다.”라며 요시히로의 형 시마즈 요시히사에 대해 영지를 인정해주고, 가문을 시마즈 다다쓰네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죄를 용서했다.
.모리씨에 대해서 모리씨의 당주 모리 데루모토가 서군의 총대장으로 오사카 성에 있었기 때문에, 깃카와 히로이에의 영지 안전의 약속은 파기되었고, 모리 가문의 영지가 몰수되는 대신 히로이에에게는 스오와 나가토의 2개 구니가 영지로 내려졌다. 이에 놀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영지를 모리 가문의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히로이에의 간청은 수락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영지를 삭감당한 것이 되어,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으로부터 본가를 팔았다는 비난을 받고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되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마에다 도시나가를 통쾌하게 격파했던 니와 나가시게도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나중에 무네시게와 시게나가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계획에 따라 다이묘로 복귀하고, 무네시게는 옛 영지까지 돌려받게 되었다. 특히 무네시게의 경우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무훈을 세우게 되어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섰던 과거를 완벽하게 상쇄했다.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사죄했지만, 오해와 가신의 참언이 원인이 되어 형 쓰노 지카타다 (津野親忠)를 살해하여 이에야스의 분노를 사서 영지를 몰수당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아이즈(会津) 120만 석에서 나오에 가네쓰구의 영지였던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크게 삭감되었다.
.사타케 요시노부도 히타치(常陸) 미토(水戸) 54만 석에서 데와(出羽) 아키다(秋田) 18만 석으로 크게 삭감되었다.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으로 돌아섰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지쿠젠(筑前) 나지마(名島) 36만 석에서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 57만 석으로 증감하여 옮겼다. 그러나 히데아키는 1602년에 겨우 21살의 젊은 나이로 미쳐서 죽었고, 후사가 없어 가문은 단절되었다.
.히데아키의 배신에 호응하여 돌아섰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구쓰키 모토쓰나는 영지를 그대로 인정받았으나, 오가와 스케타다와 아카자 나오야스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히데아키, 야스하루, 모토쓰나 이외의 배신한 자들에 대해선 이에야스는 엄중히 처단하였다. 스게타다는 배신한 과거가 많았고, 거기에 아들이 미쓰나리와 친했던 일 때문이었고, 나오야스는 “총성에 놀라서 배신했다.”라고 말한 이유가 원인이었다. 스게타다는 전투 후 다음해에 죽고, 나오야스는 마에다 도시나가를 섬기다가 1606년 엣추(越中)에서 익사했다.
.소 요시토시의 경우는 비록 서군에 가담했고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점이 있었으나 요시토시는 평소에 임진왜란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자마자 요시토시는 스스로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인 마리아와 이혼한 데다가 이에야스에게 항복과 동시에 순종을 선언했으며, 특히 이에야스의 입장에서 요시토시는 그 해당되는 번이 쓰시마 후추 번인 관계로 조선과의 외교적 문제 때문에 요시토시라는 인물이 반드시 필요해서 요시토시에 대한 상벌은 생략하고 그대로 쓰시마 후추 번주의 직위를 유지하고 석고의 삭감도 없었다. 그 대가로 요시토시는 1607년까지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힘을 써서 조선과 일본간의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사쓰마 번 (薩摩藩)의 시마즈 가문과 조슈 번 (長州藩)의 모리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원한이 그대로 남아 250년 후 막부 말기에 이르러 막부 타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일컬어진다.
– 동군
동군의 여러 다이묘는 대폭 증감이 있었다.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단고 미야쓰 18만 석에서 부젠 오구라 40만 석
.다나카 요시마사는 미카와 오카자키 10만 석에서 치쿠고 야나가와 32만 5천 석
.구로다 나가마사는 부젠 나카쓰 18만 석에서 치쿠젠 나지마 53만 석
.가토 요시아키라는 이요 마쓰마에 10만 석에서 같은 마쓰야마 20만 석
.도도 다카토라는 이요 사카시마 8만 석에서 같은 이마하루 20만 석
.데라자와 히로타카는 히젠(肥前) 가라쓰(唐津) 8만 3천 석에서 12만 3천 석
.야마우치 가쓰토요는 도오토미 가쓰가와 7만 석에서 도사 우라토 24만 석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 기요스 20만 석에서 아키-빙고 히로시마 49만 8천 석
.이코마 가즈마사는 사누키 다카마쓰 6만 5천 석에서 17만 1천 석
.이케다 데루마사는 미카와 요시다 15만 2천 석에서 하리마 히메지 52만 석
.아사노 요시나가는 가이 부츄 22만 석에서 기이 와카야마 37만 6천 석
.가토 기요마사는 히고 구마모토 19만 5천 석에서 51만 5천 석, 단 이 경우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석고 24만석을 모두 몰수해서 가토 기요마사에게 증감시킨 것을 포함했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데와 야마가타 24만 석을 57만 석
.다테 마사무네는 무쓰 이와테야마 57만 석을 62만 석
다만 여기서 보더라도 도요토미 측과 인연이 있던 다이묘에 대해서 이에야스는 영토를 늘려주는 대신 서쪽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쓰가루 다메노부는 동군 측에 가담하기는 하였으나, 그 맏아들 노부타케가 오사카 성에서 도요토미 가문에 봉사했고, 전쟁 후에는 노부타케와 함께 온 이시다 미쓰나리의 아들을 보호해주는 등 양측에 모두 발을 대는 듯한 모습을 보인 탓인지 별다른 포상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다메노부와 셋째 아들 노부히라가 군영에 참여한 것에 대하여 고즈케 국의 2천 석 영지가 약간의 은상으로 내려졌다.
.이에야스 자신의 직할령에 대해서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는 250만 석인 것을 400만 석으로 대폭으로 늘려 전국에서 제일 많은 영지를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 이것은 일본 전토의 1380만 석의 30%에 달하는 대단한 비율이었으며 도쿠가와 자신의 절대권력의 크기를 과시하여 다른 다이묘들이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이기도 했다. 도쿠가와는 다른 다이묘들에 비해 최하 4~6배 이상의 석고를 짊어지고 있었으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힘은 막강했다고 볼 수 있다.
.도요토미 씨의 영토에 대해선 히데요시 시대 222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크게 삭감했다. 도요토미 씨의 재정을 지탱하던 사카이와 나가사키의 교역항 등도 도쿠가와 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완전히 도쿠가와 씨와 도요토미 씨의 입장은 역전되고 말았다.
.한참 후대에 이르러서 도쿠가와 막부는 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오사카 전투로 멸망시킨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이 직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를 완전히 단절시키고 그 영지를 모두 몰수하며 끝없는 영지개발을 통해 기어이 500만 석을 채우고야 만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치세기간에 이르러서는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고 도쿠가와 직할령과 그 나머지 영지 총합이 대등한 수준까지 도달해 모든 다이묘들이 전부 힘을 합쳐야 도쿠가와 가문과 대등했다.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로 일본의 사항을 알려주고 있다.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온 하동(河東)의 교생(校生) 강사준(姜士俊)과 여진덕(余進德) 등의 초사(招辭)는 다음과 같다.
“대체로 적정(賊情)은 병신년부터 천재(天災)가 자주 있고 지진이 너무 심하여 공사(公私)의 가옥이 무수히 파괴되었고, 심지어는 산릉(山陵)과 천택(川澤)이 이동하고 균열되어 압살(壓殺)당한 민간과 가축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무술년 8월 18일에 평수길 (平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병사(病死)하면서 그의 폐노(嬖奴) 석전 치부경 (石田治部卿: 이시다 미쓰나리)·증전 우문승 (增田右門丞: 마시타 나가모리) · 장속 태장승 (長束太臟丞: 나쓰카 마사이에) 등 3명에게 유언하기를 ‘너희는 어린 수뢰 (秀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라. 나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또 내부 가강 (內府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관동북 (關東北) 33주(州)를 네가 진복(鎭服)시켜야 어린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 하고, 다음으로 중납언 휘원 (中納言輝元: 모리 데루모토)에게 ‘관서 (關西: 간사이 지방)의 남쪽 30여 주에서는 네가 우두머리이니, 모름지기 나의 아들을 부탁하는 근심을 가련히 여겨 삼가 후사(後事)를 보존하도록 하라.’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해 겨울 가등청정 (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과 갑비수 (甲斐守: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풍신수길 (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살았을 때에 석전 치부경이 권세를 잡고 자기들을 야박하게 대한 것에 앙심을 품고 가강에게 아부하여 석전 치부경을 강주 좌우성 (江州佐祐城)으로 내쫓았는데, 기해년 가을에 가강이 또 수뢰 (秀賴)의 유부(乳父) 시전비전수 (蒔田肥前守:마에다 도시나가)를 가주 (加州 가슈)로 내쫓고서 자신이 복견성 (伏見城: 후시미 성)으로 들어갔으며, 동년 9월에 수뢰를 문안한다는 핑계로 또다시 수뢰가 있는 대판성 (大坂城: 오사카 성)으로 들어가 그대로 웅거(雄據)하고 있으면서 군국(軍國)의 모든 일을 제맘대로 하였으므로 상하가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중납언 경승 (中納言景勝: 우에스기 가게카쓰)이란 자가 있는데 3주(州)를 거느린 장수로서 동북 (東北: 도호쿠 지방) 지역에 있으면서 가강이 수길의 부탁을 배반한 것을 매우 싫어하여 비로소 가강을 따르지 않을 뜻을 두어 가강이 재삼 불렀으나 끝내 그에게 복속하지 않았습니다. 경자년 9월에 가강이 5∼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의 본진(本鎭)인 월주(越州)와 능등 (能登 노토) 지역에 달려가 그의 얼자 (孽子) 삼하수 (三河守: 유키 히데야스)라는 자를 보내 5∼6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아 경승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일곱 번 싸워 다섯 번 패하여 다시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석전 치부경 등이 가강이 수길을 저버리고 국사를 제맘대로 농락하는 것을 증오하고, 병권(兵權)을 가지고서도 온유(溫柔)한 휘원(輝元)을 사모하여, 대소(大小)가 모두 휘원을 권하여 허점을 틈타 입성(入城)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증전 우문승으로 부장(副將)을 삼아 수뢰가 있는 곳에 머물도록 하고, 석전 치부경은 비전주 중납언 (備前州中納言) 평수가 (平秀家: 우키타 히데이에)와 소서행장 (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 살마 도주 (薩摩島主) 도진 (島津: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군대 4∼5만 병력을 거느리고서 중로병(中路兵)이 되어 미주 (尾州 비슈) · 농주(濃州 노슈) 지역 대원성 (大垣城: 오가키 성)으로 가서 진을 치고 장속 대장승 (長束大藏丞)과 안국사 (安國寺: 안코쿠지 에케이) 2인을 군총(群總)으로 삼아, 휘원(輝元)의 양자(養子) 예주 재상 (藝州宰相) 수원 (秀元: 모리 히데모토)과 용장사 (龍藏寺) · 운주 시종 (雲州侍從: 깃카와 히로이에) 등의 4만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우로병 (右路兵)으로 삼아 이세주 (伊勢州 이세슈)로 가서 진성 (津城: 쓰 성)과 송오성 (松鳥城)을 함락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가강에게 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군대를 농주 (濃州 노슈)의 관원 (關原: 세키가하라정)으로 이동시키고, 대전 형부경 (大田刑部卿)이 산구인 번수 (山口因幡守) 등의 7천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좌로병 (左路兵)으로 삼아 월후주 (越後州 에치고 국)에서 항전을 하였는데, 당시 가강과 같이 일을 도모한 왜장 시전비전수의 군대가 추격하였습니다. 3로의 군대가 농주 관원에서 합진(合陣)하여 가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강은 휘원이 이미 대판성에 입성하여 군대를 출동하여 항전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에게 붙은 8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야로 달려 농주(濃州)의 청원(靑原)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혹전갑비수 (黑田甲斐守: 구로다 나가마사)란 자가, 휘원의 사위 축전주 중납언 (筑前州中納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과 휘원의 종제(從弟) 운주 시종 (雲州侍從)이 속으로 휘원에게 붙으려 하지 않는 뜻이 본래부터 있음을 알고서 몰래 가강에게 내통하니, 가강이 즉시 갑비수를 시켜 반간계 (反間計)를 사용하였는데, 축전주 중납언 등이 그 말을 달게 여기고 약속하기를 ‘9월 14일에 정예 기병 (精銳騎兵)을 정돈해서 기습해 오면 우리는 거짓으로 3로의 선봉(先鋒)이 되었다가 되돌아서서 관원 (關原)을 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이 과연 그 약속대로 하니 축전 중납언 등이 역시 약속대로 하여 주야로 연전(連戰)하였는데 관원의 3로병이 크게 패퇴하여 수가(秀家)와 대소 형부경 (刑部卿: 오타니 요시쓰구) 등은 다 전사하고, 그 나머지도 모두 궤산(潰散)하였으며 가강은 승승장구하여 근강주 (近江州 오미슈) 세다교(勢多橋)에 도착하여 운주 시종 (雲州侍從)이란 자를 불러 ‘너의 종형 휘원이 성문을 열고 스스로 물러가면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휘원이 속임수인 줄을 모르고 그 말을 믿고서 겁이나 성을 버리고 본진(本津)으로 물러가니 같은 달 27일에 가강이 다시 수뢰(秀賴)의 성으로 들어가 증전 우문승 (增田右門丞) 등 자기를 배반했던 10여 인을 추격해서 체포하여 할복 자결하도록 하고, 또 석전 치부경 (石田治部卿)과 평행장 (平行長) · 안국사 (安國寺) 등 셋을 잡아다 도시(都市)를 돌면서 죄를 성토한 후 경동교(京東橋) 앞에서 효수(梟首)하였습니다. 그리고 휘원에게 협박하기를 ‘네 죄는 의당 죽여야 할 죄이나 너의 애첩(愛妾)과 자식 수취 (守就: 모리 히데나리)를 볼모로 보내면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니, 휘원이 그 말대로 하였습니다. 가강은 그들을 볼모로 잡고서도 또다시 휘원의 식읍(食邑) 8주 중에 6주를 빼앗고 협박하여 중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경승(景勝)은 군대가 매우 강성하여 그 주변의 적추(賊酋) 6∼7인이 그에게 붙었고, 가강의 얼자(孽子) 삼하수 (三河守: 유키 히데야스)란 자도 역시 제 아비를 배반하고 경승에게 합세하였는데, 경승은 눈이 녹기를 기다려 대대적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하므로 이는 가강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며, 또 토좌 시종(土佐侍從) 이란 자가 남경로 (南京路)에 있는데, 가강에게 붙지 아니하고 있으며, 살마 시종 도진 (薩摩侍從島津: 시마즈 요시히로)이란 자는 휘원과 같은 무리인데 가강이 지난 10월에 그의 손자 사위인 청정(淸正)으로 장수를 삼아 4만 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도진(島津)과 싸우도록 하였으나 네 번 싸워 모두 패하자 군사를 퇴각시키고, 강화(講和)를 요청하였으나 도진이 병선(兵船) 70여 척을 준비해서 중국으로 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친다고 합니다. 적의 속셈을 미리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도진이 가강과 서로 대치하여 변란을 대처하고 있으면서 필시 가강이 오는 것을 이용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중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선조 136권, 34년 (1601년: 신축 / 명 만력 <萬曆> 29년) 4월 25일 (임진) 11번째 기사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