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년 3월 24일, 제임스 1세 (James I, 1566 ~ 1625)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등극해 첫 “그레이트 브리튼의 국왕”
제임스 1세 (James I, 1566년 6월 19일 ~ 1625년 3월 27일)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이다. 휘는 제임스 찰스 스튜어트 (James Charles Stuart). 모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군주 제임스 6세 (James VI)로 즉위하였으며 후에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종손 자격으로 그녀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였다.

– 제임스 1세 (James I)
.휘: 제임스 찰스 스튜어트 (James Charles Stuart)
.출생: 1566년 6월 19일, Edinburgh Castle, Edinburgh, United Kingdom
.사망: 1625년 3월 27일, Theobalds Estate, Goff’s Oak, United Kingdom
.매장지: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가문: 스튜어트 (Stuart)
.부모: 부)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모) 메리 스튜어트
.배우자; 아나 애 단마르크
.자녀: 웨일스 공 헨리 프레드릭, 보헤미아 왕비 엘리자베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 찰스
* 스코틀랜드 국왕
.재위: 1567년 7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대관식: 1567년 7월 29일
.전임: 메리 스튜어트 / 후임: 찰스 1세
*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국왕
.재위: 1603년 3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대관식: 1603년 7월 25일
.전임: 엘리자베스 1세 / 후임: 찰스 1세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의 국왕이다. 최초로 브리튼 제도 전체를 다스린 왕이자 최초로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 아일랜드 · 웨일스를 총괄해서 통치하게 된 영국의 국왕으로, 스스로를 “그레이트 브리튼의 국왕”으로 칭했다.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는 ‘제임스 6세’,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는 ‘제임스 1세’라고 불리는데, 대체로 제임스 1세로 더 유명하다. 대영제국 (British Empire) 시대의 첫 왕이다.

○ 생애 및 활동
– 혈통
제임스의 모친 메리 스코틀랜드 여왕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에 의해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들 제임스에게 양위하고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제임스는 그녀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후에 엘리자베스 잉글랜드 여왕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에도 올랐다. 제임스는 혈통상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의 자격이 있었는데 그의 증조모이자 외증조모가 동일인물인 마거릿 튜더이기 때문이다. 마거릿은 영국왕 헨리 8세의 친누나이며 마거릿과 헨리 튜더는 영국왕 에드워드 4세의 외손들이다. 마거릿은 스코틀랜드왕 제임스 4세와의 사이에서 제임스 5세를 낳았고 얼마 지나지않아 남편을 사별하게된다. 이후 마거릿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라스와 혼인하여 마거릿 더글라스를 낳았다. 마거릿 더글라스는 레녹스 백작 매슈 스튜어트와 혼인하여 아들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를 낳았다. 제임스 5세와 마거릿 더글라스는 동복남매이며 제임스 5세의 딸 메리와 헨리 스튜어트는 사촌간이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스코틀랜드왕으로 즉위한 제임스 6세이다.
– 정치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의회는 독점권 부여를 에워싸고 국왕과 대립해 있었는데 제임스 시대에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한 의회 세력은 강력해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신흥 세력을 충분히 평가하지 못하였고 의회에 부여되어 있던 특권·관행에도 무지하여 종교 · 재정 · 외교 문제로 사사건건 의회와 대립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서 영국을 다스렸으나 엘리자베스 1세의 위대한 업적에 가려져 별 볼일 없는 왕으로 평가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국민들은 위대한 엘리자베스 시대에 향수를 느끼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제임스 1세의 인기는 점점 없어져 갔다고 한다.
– 국기의 변화
맨 처음 영국 국기는 잉글랜드 국기였으나 1606년 제임스 1세가 영국의 국왕이 된 계기로 스코틀랜드 국기와 합쳐져 최초의 영국 국기가 탄생하였다. 또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른 1607년 5월 14일 영국인이 배를 타고 북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갔었는데 그곳을 제임스타운이라고 부른 것도 이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제임스타운을 포함한 당시 13주가 영국의 식민지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줄무늬가 13개로 된 비공식 국기가 탄생하였고 이는 곧 미국 국기의 유래가 되었다.

– 종교 정책
제임스 1세는 영국 국왕에 오른 이후 의회를 해산시키고 청교도에게 영국 성공회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는 등 독재 정치를 폈다. 이에 1620년 청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자유를 찾기 위해 북아메리카 신대륙으로 떠나 그곳을 퓨리턴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모순된 사실은 종교적 사유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온 청교도들이 정작 미국에서는 영국의 박해자들이 그러했듯이 미국 원주민들의 종교를 사탄 (악마) 숭배라며 말살시킴으로써 미국 원주민들의 종교의 자유를 박해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미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미국 원주민 강제 이주 학살 등으로 미국 원주민들의 자유와 생명권을 짓밟았다.
이는 자신들을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No Bishop No King’- 제임스 1세는 주교에 강력한 권한을 주는 것이 왕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1604넌 헴튼 법정에서 가톨릭과 청교도 학자들이 모이게 한 뒤, 청교도에 적대적인 고교회파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입장을 가졌다.

– 킹 제임스 성경 편찬
“번역은 빛이 들어오도록 창문을 열어주고, 성스러운 땅이 보이도록 장막을 걷어주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우물 덮개를 치워주는 것이다”
제임스 1세가 발간한 킹 제임스 성경의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여 일반인들이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윌리엄 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박해와 체포 위협 속에서도 유럽 대륙을 떠돌며, 라틴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전에 의한 번역 작업을 계속해 1526년 영어 신약 성서를 완성하고 독일에서 인쇄해 영국으로 보냈다.
틴들은 1535년 네덜란드에서 가톨릭 교회에 붙잡혀 화형당하고 그의 성서는 제임스 1세의 킹 제임스 성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제임스 1세는 47명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위클리프의 필사본 성서, 윌리엄 틴들의 성서, 『대성서』, 『제네바 성서』, 『비숍 성서』 등을 종합적으로 참조하여 최고의 영어 번역 성서를 출판했다.
이것이 오늘 날까지 내려오는 킹 제임스 성경이다.
킹 제임스 성경은 윌리엄 틴들 (William Tyndale, 1494 ~ 1536)이 성경을 번역하다 화형을 당한 이후 영국의 제임스 1세가 그의 유업을 이어받아 자신이 임명한 학자들에게 지시해, 에라스무스에 의하여 번역된 TR (텍스투스 리셉투스, 표준 원문) 헬라어 번역 사본을 기반으로 중역하여 다시 번역하고 출판된 성경이다.
제임스 1세가 임명한 당대 최고의 학자 47명이 1604년부터 세 곳에서 6개 집단으로 나뉘어 작업한 끝에 탄생했다.
번역에는 히브리어·아람어·그리스어로 된 성경 원본이 사용됐지만 학자들은 불가타 성경(405년에 완역된 라틴어 성경)과 기존의 영어·스페인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독일어 성경들도 참조했다.
종교개혁의 여파 가운데 국왕의 명령으로 당시에 존재했던 사본들과 번역본들을 수집하여 비교 및 수정하고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다.

– 화약 음모 사건
제임스 1세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을 때 잉글랜드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의 전투 이후부터 심화된 반가톨릭적 정서가 강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1세가 시행한 가톨릭 정책은 그 당시로서는 놀랄 만큼 온건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제임스 1세의 대가톨릭 정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를 암살하고자 시도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605년 가톨릭 교도인 가이 포크스에 의해 저질러진 화약음모사건이다.
이 사건 직후 제임스 1세의 가톨릭 정책은 강경책으로 돌아섰지만 그렇다고 가톨릭에 대해 가혹한 박해로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역사가들은 제임스 1세가 종교적 관용의 정신에 따라 가톨릭을 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사망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1625년 3월 27일에 59세로 병사했다.

○ 평가
제임스 1세의 치세에는 의회의 입김이 늘어났고, 제임스 1세 자신조차 전국에 성공회를 강요하는 등 여러 마찰을 빚었다. 때문에 암살당하지 않았느냐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 시절과 달리 대외 전쟁에 시달리며 국고가 파탄나는 일만은 피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대체로 사랑받았다. 또한 처음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왕국을 다스리면서도 본인의 치세에는 큰 혼란없이 나라를 유지하였다는 치적도 있다.
역사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의 후광에 짓눌려 암군의 평가를 받았으나 최근에 와서 어느 정도 무난하게 나라를 다스린, 뛰어난 명군은 아니지만 암군이라고는 할 수 없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 잉글랜드만 다스렸던 엘리자베스와 달리 스코틀랜드의 군주까지 겸임해야 했기 때문에 통치의 난이도도 높았던 제임스 입장에서 엘리자베스와 직접 비교하는 건 간단치 않다. 실제로 잉글랜드 중심의 보편적인 영국사에서 스코틀랜드가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던 비중과 그 역사가 제대로 조명받게 된 건 역사학계 내에서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잉글랜드 왕이 되기 이전 스코틀랜드에서의 시절은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다가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스코틀랜드 역사와 그 안에서 제임스의 비중이 부각되었으며, 그 내부를 뜯어보면 이러나 저러나 정복왕 윌리엄 이후 전통적으로 왕권이 강력했던 잉글랜드와 달리 스코틀랜드는 군주의 역할이 지극히 힘들었던 곳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평가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
또 그가 지시하여 번역한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은 현대 영어의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제임스 1세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제임스 1세는 근본적인 국정의 방향은 동시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 국왕으로 재위기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는데, 그 아들 찰스 1세는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어려움을 당했다. 실제로 청교도 혁명의 직접적인 발단도 국교회 강요에 의해 스코틀랜드에서 터진 반란이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