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년 3월 16일, 조선 14대 국왕 선조 (宣祖, 1552 ~ 1608) 타계
선조 (宣祖, 1552년 11월 26일 / 음력 11월 11일 ~ 1608년 3월 16일 / 음력 2월 1일)는 조선의 제14대 국왕 (재위 : 1567년 음력 7월 3일 ~1608년 음력 2월 1일)이다. 휘는 연 (昖), 초명은 균 (鈞), 본관은 전주 (全州)이며, 즉위전의 작호는 하성군 (河城君)이었다.

– 선조 (宣祖)
.출생: 1552년 12월 6일 (음력 명종 7년 11월 11일), 한성부 인달방 덕흥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사망: 1608년 3월 16일 (향년 55세, 음력 선조 41년 2월 1일), 한성부 정릉동 행궁 정전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능묘: 숙릉 (肅陵) → 목릉 (穆陵)
*조선의 제14대 국왕
.즉위: 1567년 8월 17일 (음력 명종 22년 7월 3일),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재위기간: 1567년 8월 17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선조 즉위년 7월 3일 ~ 선조 41년 2월 1일)
조선의 제14대 국왕. 묘호는 선조(宣祖), 시호는 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휘는 연(昖).
중종과 창빈 안씨의 차남인 덕흥군 이초와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3남으로 태어나 ‘하성군 (河城君)’에 봉해졌다.
조선 왕조 최초로 적통 출신이 아닌 국왕이다. 원래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예정이었던 순회세자가 갑자기 이른 나이에 요절하면서 명종의 뒤를 이을 친자식이 없자, 왕실 종친 가운데 후사 (後嗣)를 정하도록 하였고, 덕흥군 제삼자 (德興君第參子) 즉, 어린 하성군이 선택되어 명종과 인순왕후의 양자로 들어가 명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초창기에는 숙모이자 법적으로 어머니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지만,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곧 정치력이 뛰어나 무난히 조정을 이끌었다.
조선 역사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으로, 왕위 계승도를 보면 선조 시기와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계보도가 나눠지며, 이후 조선 임금들은 모두 선조의 직계 후손들이 된다.

○ 생애 및 활동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 (李岹)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동부대부인 (河東府大夫人) 정씨 (鄭氏)이다.
이복 숙부인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의 양자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모가 왕과 왕비가 아닌 최초의 서자가문 출신의 왕이며, 조선 최초의 방계 혈통의 왕이기도 하다.
재위기간 중, 사림에 의한 정계 장악이 확고해진 후, 1575년에 동서분당 사건으로 인해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어 당쟁이 시작되었다.
1589년에는 정여립이 연류된 기축옥사가 발생하여 많은 인재들이 숙청되는 일이 있었다.
또한, 1592년에 일본의 침입으로 발발한 임진왜란이 7년간 이어지며 국토가 황폐화되고 전국이 전쟁터가 되어 개국 이래 200년만에 내외적으로 가장 혼란한 상황을 맞았다.
임진왜란 직후 조총과 화승총 기술이 발달했고, 선조는 왜군과 명나라가 남기고 간 군사 무기를 수집을 명하여, 병장기를 개선시켰다.
그러나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경작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를 회복하고 전쟁으로 소실된 토지대장을 재정비하기 위해 1601년과 1603년에 어사를 파견해 전국적으로 양전 (量田)을 실시했다.
또한 전쟁중에 명군의 식량 조달을 위해 실시했던 납속 (納粟)을 더욱 확대했다. 납속책의 실시는 부유한 상민·천민의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해 조선 후기 신분제 변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각 궁방 (宮房)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임시변통으로 왕자·옹주 23명에게 예빈시 (禮賓寺)에 소속되었던 어전 (漁箭)· 염분 (鹽盆)· 시전 (柴田)을 획급했는데, 이후 궁방전의 시초가 되었다.
1604년 호성 (扈聖)· 선무 (宣武)· 정난 (靖難) 공신 등을 녹훈함으로써 전쟁중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표창했다.
그리고 유정을 일본에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었으며, 왜관 (倭館)을 열어 개시 (開市)하는 것을 허락하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 했다.
그이전 선조는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북벌을 감행하게 되는데 32년 (1599 기해 / 명 만력 [萬曆] 27년) 7월 5일 (임자) 1번째기사 에 의하면 여진족은 함경도를 넘어 수시로 약탈을 감행하여 백성들이 크게 힘들어하는데 선조는 32년 (1599년) 7월 5일에 여진족 토벌을 추진하게 되고 윤승훈은 크게 반대를 하지만 선조는 끝내 반대의견을 뿌리치고 북벌을 감행함으로써 1600년 4월 기병 5천을 중심으로 노토부락 정벌을 감행한다. 명천현감 (明川縣監) 이괄 (李适)· 회령부사 (會寧府使) 조경 (趙儆)· 길주목사 (吉州牧使) 양집 (梁諿)이 4월 14일 초저녁에 좌위, 우위, 중위 3갈래로 나뉘어 좌위는 어유간 (魚游澗)에서 중위는 함경북도 무산 (豊山)에서 우위는 풍산 (茂山)에서 각각 나뉘어 진격한다.
여진족 복병 4~5명이 조선군 척후를 발견했고 이들은 즉시 달아나 온 부락에 침공사실 알렸다.
조선군 기병5천은 적들의 노토부락을 공격하여 여진족들의 집은 흙을 발라 매우 견고해서 지붕의 풀은 타도 벽은 불에 타지 않았는데 조선의 정예병은 도끼로 다 때려부수고 다시 태워서 방한칸 남기지 않았고 무려 1천채가 넘는 집을 한꺼번에 태우니 연기는 하늘에 치솟았으며 땅속에 묻어둔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고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밞아버렸고 마을외 부락의 성채도 태워버리니 그때까지 다른 부락과는 비교가 안되는 넉넉함을 누리던 노토부락 예하 6개 마을은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고 여진족은 도망가기에 이른다.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으나, 반면에 여진족은 참수된 군사들만 115명에 이르렀다. 조선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선비들은 선조의 이런 면을 두고 이렇게 평하였다.
“선조께선 북로 (北虜, 여진) 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 (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선조는 생전 초상화 그리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런데 전란의 혼란 중, 누군가 전립 (戰笠)과 군복을 착용한 선조의 초상화를 그린 것을 윤탁연이 발견, 이를 입수하여 비밀리에 보관해왔다.
윤탁연은 자신의 일기인 관북일기 책 속에 선조의 초상화를 보관해두었고, 후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서자의 후손으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라는 두가지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는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뜻이 옳다하며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인목왕후 (인목대비)의 섭정을 계획하였으나, 5세부터 18세까지 13년간 섭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선조는 임진왜란 때에도 분조를 경영한 적이 있던 광해군을 결국 왕세자로 승인한다.
중풍으로 인한 증세가 악화되어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고명 (顧命)을 남기고, 아침 식사를 겨우 먹은 뒤 55세를 일기로 재위 40년 7개월 간의 치세를 마감하게 된다.
당시 그의 마지막 수라를 준비하던 궁녀 중에 김개시가 있었다.
이후 그가 죽기 전에 먹었다는 음식에 독이 들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선조의 독살설이 의혹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를 소경 (昭敬)이며, 처음 묘호는 선종 (宣宗)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극복한 공로가 있다는 점과 새 왕통을 시작하는 군주라는 광해군의 뜻이 감안 되어 1616년 (광해군 8년) 8월 4일 선종에서 선조 (宣祖)로 묘호가 격상되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내 경역에 있는 목릉 (穆陵)이며, 전 (殿)은 영모전 (永慕殿)이다.
목릉은 선조와 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 있다. 동구릉 중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의 목릉에는 의인 왕후의 유릉(裕陵)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새로 능을 건설할 여력이 없었던 탓으로 정자각을 선조의 능침 쪽으로 옮겨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원래 묘호는 선종 (宣宗)이었으나 1616년 8월 4일 선조 (宣祖)로 개정되었다.
존호는 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이고, 시호는 현문의무성예달효 (顯文毅武聖睿達孝)이다.

참고 = 위키백과,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