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2월 24일, 병자호란 : 삼전도의 굴욕 (정축하성; 丁丑下城, 1637)
정축하성 (丁丑下城)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농성 59일만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 1637년 2월 24일 (정축년 음력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한 것을 말한다. 흔히, 삼전도의 굴욕 (三田渡의 屈辱)이라고 표현된다. 다만 당시 인조는 절대 항복하지 않고 단순히 성에서 나온다는 뜻인 하성이라고 표현했고, 신하들에게도 이를 강요했다.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청으로 인질, 노예 등으로 끌려가는 사람을 이름)가 만 명을 헤아렸다. ㅡ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1637년 2월 24일 (인조 15년 음력 1월 30일)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그러나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를 맺으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한다.
실록의 기록 (효종실록, 현종실록 등)을 보면, 정축년 1월 초에 성에서 내려왔다는 의미로 정축하성 (丁丑下城)이라고 했다.
삼전도 (三田渡)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및 석촌동 부근에 있던 하중도의 나루터였다. 지금 그곳은 개천을 메워 섬이 아니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적어둔 비석인 삼전도비가 원래 세워진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 남아있었는데 2007년 훼손으로 2010년 복원하여 원래 있었던 위치인 롯데월드 석촌호수 근처로 돌아갔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조선왕조 최대의 굴욕으로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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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