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0년 2월 8일, 오스만 제국 17대 술탄 무라트 4세 (Murad IV; 1612 ~ 1640) 타계
무라드 4세 (튀: Murad IV; 1612년 7월 26일 / 27일 ~ 1640년 2월 8일)는 아흐마드 1세의 5번째 아들이자 오스만 제국의 17번째 통치자 (재위: 1623년 9월 10일 ~ 1640년 2월 8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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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트 4세 (IV. Murat)
.출생: 1612년 7월 26일 / 7월 27일,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파티흐구)
.사망: 1640년 2월 8일 (27세),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오스만 파디샤
.재위기간: 1623년 9월 10일 ~ 1640년 2월 8일
오스만 제국의 17대 술탄이자 11대 파디샤. 대표적인 혐연가이자 애주가로 유명하다.
무라드는 1612년 7월 27일,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흐마드 1세였고, 어머니는 마흐페이케르 쾨셈 술탄이었다.
황자 시절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오스만 2세의 시대에 한차례 처형당할 위기를 겪었다고 전해진다.
오스만 2세 사후 각지의 봉기로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즉위한 무라드 4세는 실권을 거의 가지지 못했었다.
그러나 무라드는 1632년에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뒤 반란 세력을 일소했고, 이후 압바스 대제에게 상실한 이라크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런 한편 보수적인 개혁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체제를 다졌다.
유목제국의 대칸에 걸맞는 개인적 무력과 용병술을 지녔던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전사 술탄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무라드의 뒤는 동생인 이브라힘 1세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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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 어린시절
1612년 7월 26일, 혹은 7월 27일에 아흐메트 1세와 쾨셈 술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623년 9월 10일부로 정신이 혼미했던 숙부 무스타파 1세가 강제 퇴위 당하면서 즉위하였다.
- 재위
무라트 4세는 과감한 개혁가로 유명했는데, 특히 무능한 파디샤들이 줄줄이 즉위하면서 문란해진 오스만 제국의 법 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법을 정비했으며 그 법을 어기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했다고 한다.
그가 겨우 11살 나이였지만 즉위할 때 내란에 개입된 혐의로 재상 토팔 레제프 파샤를 처형하며 황권 강화에 집중하였고 반정 음모자들을 탄압하였다.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반오스만 반란이 벌어지자 손수 군대를 이끌고 철저하게 뭉갰는데 다른 건 몰라도 군사적 지휘에서 상당히 유능했다고 한다. 무라트 4세는 60킬로그램에 달하는 둔기를 한 손으로 휘둘렀고 50킬로그램짜리 대검도 애용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 그가 쓰던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또한 맨손 격투에도 능에 여럿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혼자서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덧붙여, 오스만 제국의 역대 파디샤 가운데 몸소 전장에 나가 군대를 지휘한 것은 무라트 4세가 마지막이다. 참고로, 무라트 이전에 몸소 군대를 지휘한 파디샤는 명군 쉴레이만 1세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해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여, 타브리즈와 하마단을 정복하고 바그다드를 되찾는 등 상당한 전공을 올렸다.
그 밖에도 무굴 제국과 전쟁을 치우려 했다지만 당시 무굴 제국 술탄 자한기르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상당히 유능했기에 지금 맞붙다가 양 측이 엄청난 피해를 본다고 하여 그냥 참았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장 육로로는 양 제국 사이에 이란의 사파비 제국이 있었다. 사파비 제국도 제대로 정복하지 못했는데 무슨 수로 무굴 제국과 전쟁을 한단 말인가? 해상을 통한다 하더라도 역시 대규모 선단의 동원이나 보급이 거의 힘들어서 가능성이 없었다. 오히려 무라드 시대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은 사파비 제국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통하는 면이 있었으므로, 우호 관계를 수립했다.
군사적인 지휘 말고도 정치적로도 꽤 유능하여 여러 개혁 정책을 취했으며 건축학에 흥미가 커서 건축가들을 우대하고 여러 건축 제작에 참여하며 이름을 남겼다. 폭군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정치적 역량이나 업적을 보면 폭군이나 암군은 아니었다. 어려서 즉위한 탓에 십수년간 정권을 농단하던 관료들과 외척들을 손수 척결하고 황권을 강화한 것 하나만으로도 평가할 가치가 있다. 위에서 이름만 나온 무스타파 1세를 비롯, 이 시기의 다른 파디샤들에 비하면 오히려 오래간만에 명군이 나왔다고 할 정도다.
- 흡연자들의 사신 (死神)
담배를 매우 싫어하여 부하들을 변장시켜 이스탄불 및 전국 각지에 잠복시켰다고 한다. 적발된 자들은 무조건 죽이진 않고 경고와 함께 막대한 벌금을 먹이며 처음은 봐주었었다. 하지만 또 걸리면 그땐 처형시켰는데 약 3만명이 담배를 피운 이유로 사형당했다. 야사에 의하면 무라트 4세가 애용하던 철퇴로 직접 여러 번 걸린 흡연자의 머리를 깨부숴 죽였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어쨌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귀족이든 아니든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된 자들은 모두 사형시켰다. 이에 대하여 담배를 개인적으로 싫어한 점도 있었지만 1633년에 있던 코스탄티니예 대화재가 담뱃불에서 시작되었고 이 화재로 엄청난 인적, 경제적 피해를 봤기에 더더욱 강력하게 금연 정책을 시행했다는 분석도 있다.
외국인에게도 용서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프랑스 대사관은 이를 무시하고 대사관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무라트 4세는 관리를 보내 경고하면서 대사관 안에서도 금연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를 무시하자 군대를 보내 대사관 안으로 쳐들어가 담배피던 대사관 직원을 잡아 귀를 자르고 프랑스로 추방시켰다. 당연히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가 대사관 안으로 들어오는 건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분노했는데 무라트 4세는 한마디로 답변했다.
“대사관 직원이기에 특권으로 죽이지 않고 귀 자르는 거로 봐줬던 거요. 프랑스의 명예를 생각한 일인데 왜 이리 분노하시오?”
사실 무라트 4세가 흡연자들을 이렇게 잡아들였던 이유의 이면에는 마약이 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는 담배를 피우는 척 마약을 흡입하는 사람의 수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이를 보다 못한 무라트 4세가 철퇴를 내렸다는 것이다.
때론 부하들이 매수당하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거지로 분장하고 거리에 직접 나가 거리를 둘러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런 상황에도 꾸준히 담배를 피운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 향수가 제법 인기를 끌었는데 담배를 피운 다음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였다. 향수 대신에 레몬즙으로 담배 냄새를 지우는 관습이 이 당시에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튀르키예에서 많이 뿌리는 콜로냐 (kolonya)라는 레몬 향수는 이때 생겨났는데 이것 또한 담배 냄새를 지우고자 널리 퍼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들은 흡연 사실을 적발당하지 않기 위해서 손이나 입가에 레몬향수를 뿌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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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 금지
금연정책 자체는 그렇다 쳐도 무라트 4세가 폭군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는 비단 담배 뿐만 아니라 커피까지 싫어해 카흐베하네 (카페)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무슬림들은 음주를 하면 안되지만 오스만 황실이 기원한 튀르크계 유목민들 자체가 한지에서 오랜 기간 추위에 노출되는 삶을 사는 만큼 음주에 너그러운 편이었고, 오스만 지도부가 유목 생활에서 벗어난 이후로도 동로마 제국의 황실 문화를 받아 들이고, 포도주가 생필품인 유럽과 깊게 외교적,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하다 보니 오스만 제국의 음주 정책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유연한 편이었고, 바예지트 1세나 셀림 2세 같이 본인들부터 앞장서서 주당이었던 파디샤들도 많았다. 술 구하기도 매우 쉬웠던 게,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 인구의 절반이 그리스인이었던 시절이라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리스인 동네에 가서 술을 마시면 그만이었다. 다만 술 취한 사람에 대해 좋지 않게 바라보는 건 이슬람교나 정교회나 마찬가지라, 만취한 상태로 술집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어선이나 갤리선 노예가 되어있는 모습도 흔했다고 한다.
흡연가를 사형을 시킨 적은 있지만 커피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오고간다. 10만 명 이상이 커피를 마셨다고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담배와 달리 커피는 그 정도는 아니라는 반론이다. 게다가 당시 오스만 제국이 아랍과 북아프리카 커피 원두를 독점하여 유럽 수출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와중에 이런 금지 정책이 반발도 심했기 때문이다.
한편, 카페를 금지시킨 건 커피를 싫어했다기보다도 카페가 정치적으로 불온한 세력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근대 유럽에서도 카페나 술집 등에서 혁명을 논하는 사상가들이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 방법이 조금 과격하긴 해도 경계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 당시 코스탄티니예의 커피숍들은 대부분 예니체리들에 운영되고 있었고, 그들의 중요한 부수입이자 때때로 반란의 근원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예니체리들을 경계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커피 금지령도 사실이므로 반발이 심했다. 담배와 커피는 오스만 제국에서 다양한 계층이 즐기던 기호품이었다. 특히 커피는 애초에 이슬람권에서는 아침 기도를 드리기 위해 복용하고, 많은 사람들이 술 대신 마신 깊은 전통과 인기를 자랑하는 기호품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다.
- 애주가
금주 정책이 원성을 들었던게 당장 자기 신민들은 술과 커피 좀 마시고 담배 좀 폈다고 사형을 시키는데 무라트 4세 본인은 상당한 주당이었기 때문이다. 무라트 4세는 이슬람에서 금지하던 술을 즐겨마시던 애주가였기에 무함마드가 금기시하는 술을 마시는 주제에 그동안 문제시하지 않던 담배와 커피를 금기시하는 악마라는 비난에 직면했다. 그것도 그 당시 술이라고 해도 그래도 무함마드도 즐겨마신 대추야자로 만든 아락 같은 술은 음료로서 술이 아니라고 이슬람 종파에 따라 즐겨 마시기도 하고 문제시하지 않았지만 무라트 4세는 이슬람권에서 이블리스가 건네준 타락의 상징인 포도주를 유달리 좋아했으니 신학자들이나 보수층에서 분노했음은 당연했다. 더 웃긴 건 이런 비난에 한 변명이다.
“포도주가 참으로 악마이기에 짐이 그걸 모두 마셔서 백성들이 그걸 못 마시게 하며 보호하는 것 뿐이다.”
당시 오스만 황제들의 흔한 취미였던 궁중 터키어로 쓰인 시들을 보면 ‘흐르는 강물이 포도주가 된다 해도, 짐의 잔을 다 채울 순 없으리라.’라든가 ‘술이 참으로 악마라,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짐이 다 마셔버리겠노라’ 같은 소리들을 써놨다.
사람 기호품 가지고 파디샤가 수도에서 시민들을 죽이고 있는데 막상 본인은 본을보이지 못하니 군주로서의 능력 자체는 아무리 좋아도 당장 신민들이 좋아할만한 지도자상이 아니었다는 건 확실하다. 게다가 정복과 팽창으로 일구어낸 대제국의 파디샤답게 훌륭한 군사적 능력을 가진 것 자체는 좋은데, 17세기 중반이면 오스만 제국도 이미 역사가 350년 가까이 됐고, 지도자 개인의 무력을 통한 카리스마로 유지하는 유목 제국에서 한자리에 정주해 체계적인 법전과 훈련 된 관료들의 법치로 돌아가는 정주민의 법치 제국으로 변신한 지 이미 한참 지난 때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디샤들이 먹고 살았던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의 동로마 시절부터 물려받은 뿌리 깊은 세련되고 세계시민적인 도시 문화가 어디 간 것도 아니고, 이 시점에서 파디샤가 수도에서 매일 보던 제국의 핵심 엘리트 가운데 적어도 절반 가량은 말타고 노략질하며 활 쏘던 아나톨리아 튀르크족이 아니라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발칸 반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즉 아무리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는 하더라도 이들의 기본적인 문화적 성향은 ‘노략질하며 활 쏘던’ 것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15세기 초반이라면 몰라도 17세기 중반의 파디샤가 코스탄티니예 시가지에서 말타고 활쏘며 사냥대회 열고 유목민 처럼 운영하는걸 동시대 신민들이 좋게 생각했을 리가 없다. 결국 이런 저런 동시대 수도의 문화적 조류에 반대되는 본인의 개인적이고 상당히 작위적이기까지 한 성향을 강제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능력 자체는 뛰어났지만 인기는 없었다. 무라트 4세의 치세보다 백년 전 사람이긴 하지만 마키아벨리를 인용하자면 전형적인 두려움에 기반한 존경은 받아도 사랑은 받지 못한 군주상이다.
객관적으로, 군주로서의 자질과 업적만 따지면 폭군이라 부르는 건 지나치지만 성군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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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결국 음주가 문제가 된 건지 1640년 2월 9일, 27살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통풍으로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본인이 일찍 죽은 데다가 무라트 4세의 자식들도 아버지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리는 바람에 후계자가 없었다. 거기다가 무라트 4세는 자신의 아우인 바예지트, 쉴레이만, 카슴 황자들을 죽였고 결국 하나 남은 아우 이브라힘이 파디샤로 즉위했다. 이브라힘도 담배를 싫어하여 형의 금연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그래도, 그는 최소한 담배 피웠다고 죽이는 일을 피하고 벌금이나 투옥으로만 처벌했다. 더불어, 그는 술을 싫어하고 커피를 즐겨마셨기에 커피 금지정책을 폐지했다. 그리고 이브라힘이 1648년 33살 나이로 폐위당하고 그 뒤를 이어 재위한 메흐메트 4세는 애연가였기에 그는 제위하자마자 담배 금지령을 없애고 당연히 흡연율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전술한 대로 그 나름대로 공도 있고 암군은 절대 아니었으나, 일찍 죽었고 역사적으로는 흡연가들에게는 마왕같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 기타
무라트 4세는 생전 자신의 아우들 3명을 죽였고 야사에 의하면 죽기 직전, 하나 남은 동생인 이브라힘까지 죽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하마터면 오스만 황실 핏줄이 끊어질 뻔했던 셈이다. 당연히 이브라힘은 죽지 않았고 제위에 오른 이브라힘은 아들들을 많이 낳아 오스만 제국 제2의 창시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이다.
튀르키예 사극 드라마 위대한 세기: 전사 군주라는 역사 속 기록답게 극중 묘사되는 무라트 4세는 출중한 무력을 가진 군주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의심과 불안 속에서 흑화하며 모후와의 대립 속에서 야사대로 자신의 동생들을 모두 죽여 황실의 혈통을 끊으려 한다.
20세기 초 미국 등지에서 오스만제 담배가 유명했는데 그리스계 미국인이 만들어 유명해진 담배 이름이 무라트 (MURAD)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군과 연합국 병사들이 함께 피우는 터키 담배라는 컨셉의 무라트 담배 광고를 보자면 당시 동맹국에 속했던 오스만 제국 군인들은 못 피우고 오스만 제국의 적들이 사이좋게 피우는 터키 담배가 된 아이러니한 물건이 된 셈이다.
글라이더를 타고 직접 하늘을 날았다는 헤자르펜 아흐메트 첼레비 (Hezarfen Ahmet Çelebi, 1609 ~ 1640)가 무라트 4세 시절의 인물이다. 아흐메트 첼레비는 1632년에 바람이 세게 부는 날 갈라타 탑 꼭대기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한 글라이더를 개량시킨것을 타고 직접 뛰어내려서 3,358m 떨어진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위스퀴다르까지 날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그는 이 실험으로 무라트 4세의 총애를 받았지만 “감히 알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려 한다!”라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반발로 인해 결국 알제리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풍토병으로 요절했다. 그의 글라이더의 모형과 비행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갈라타 탑에 전시되어 있다. 다만 오늘날 현대 튀르키예 학자들은 정말 헤자르펜이 날았는지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다. 여러 설이 있는데 아예 과장, 신화라는 이야기에서부터 글라이더 같은 걸 타고 난 것 같긴 한데 보스포루스를 횡단한건 거짓이라는 말도 있다.
- 대중매체
튀르키예의 드라마 위대한 세기: 쾨셈에서 무라트 4세의 어린 시절은 카안 에페 아크가, 술탄은 메틴 악뒬게르가 연기했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에서 무라트 4세는 오굴잔 아르만 우슬루가 연기하고 칸 굴두르가 어린아이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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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