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6년 9월 2일, 영국의 런던 대화재 (Great Fire of London, 1666년 9월 2 ~ 6일) 발생
영국의 런던 대화재 (Great Fire of London, 1666년 9월 2일 ~ 6일)는 1666년 9월 2일 일요일부터 9월 6일 목요일까지 영국의 런던을 휩쓴 화재이다. 화재는 시티오브런던의 내부에 있는 런던 월을 대부분 태웠으며, 시티오브웨스터민스터의 귀족 지구와, 찰스 2세의 화이트홀궁 또는 많은 슬럼들까지 위협했으나 도달하지는 못했다. 화재로 인한 피해는 13,200채의 가옥과 87채의 교구 교회, 세인트폴대성당, 그리고 대부분의 건물들을 파괴해 버렸다. 이는 도시의 8만 명의 주민들 중에서 약 7만 명의 집을 파괴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자 수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사망이 정확히 확인이 되었던 사망자가 6명이었기에, 6명 혹은 그 이상이지만 많은 숫자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추측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중산층 사람들의 죽음이 세어지지 않았고, 화재의 열기가 많은 사망자들의 흔적을 녹였을 가능성이 높아서 최근에 이 의견이 뒤집히고 있다. 불이 시작되었던 푸딩 레인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녹은 도자기 조각은 온도가 1,250 ℃ (2,280 ℉; 1,520 K)도까지 올라갔다는 것이 밝혀졌다.
○ 화재의 원인과 결과
런던 대화재의 시작은 9월 2일 일요일 자정이 지난 직후에 푸딩 레인의 토마스 패리너가 운영하던 제과점에서 불이 시작되었다. 불은 동풍으로 인해 서쪽으로 번지며 시티오브런던을 덮치게 됐다. 당시의 주요 화재 진압 방법은 건물을 철거하며, 그곳에 방화벽을 설치하여 소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방화벽 설치는 당시 런던 시장경이었던 토마스 블러드워스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지연이 되었고, 일요일 밤에 대규모 철거의 명령이 내려졌을 때에는 이미 바람이 제과점의 불을 더욱 거세게 키워버려서 계획이 흐지부지됐다. 불은 월요일이 됐을 때, 시내의 중심부로 파고 들었다.

길거리는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에 가득찼다. 수상하고 이상한 외국인들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그 원인이었는데, 당시 영국은 제 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한창이었고,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었다. 이로 인해 화재로 집을 잃어버린 노숙자들은 길바닥으로 앉게 되었고, 이상한 소문으로 인해 린치와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버렸다. 화요일에는 불이 도시의 더 많은 곳을 파괴하였다. 또한 세인트폴 대성당을 파괴하고, 플리트 강을 뛰어넘어서 화이트홀에 위치한 찰스 2세의 화이트홀궁을 위협하자,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일제히 불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다행히도 불을 번지게 했던 강한 동풍이 잦아들었고, 런던탑의 수비대들이 화약으로 하여금 효과적인 방화벽을 만들었다는 두 가지 요인 덕분에 불이 더 이상 번지지는 않았다.
대화재로 인하여 야기된 사회· 경제적 문제들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 정도까지 부풀어 오르게 되었다. 찰스 2세는 런던 시민들에게 다른 곳의 정착을 고무하기도 했고, 몇몇 난민들을 추방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비용 절감을 위한 추방 정책으로 인해 찰스 2세는 런던 내에서의 반란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런던은 급진적이고 효율적인 다른 도로 재건 제안에도 불구하고, 화재 전에 사용되었던 도로와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을 사용해서 재건을 하게 된다.
한편 졸지에 집을 잃고 길거리로 나앉은 시민들이 분노하자 정부는 엉뚱한 사람을 방화범으로 몰아 처형했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 등 재앙이 생길 때마다 희생양을 만들던 악습이 화재 현장에서도 등장한 것이다.
방화범으로 지목된 사람은 로버트 허버트라는 프랑스인이다.
두 다리가 불편한 허버트는 로마 교황의 사주를 받아 빵집에 폭발물을 던져 불을 내고 달아난 혐의를 받았다.
방화 증거가 없고 목격자 진술 신빙성이 매우 떨어졌는데도 허버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런던 대화재 방화범으로 몰린 프랑스인이 누명을 벗은 것은 처형 후 320년 만이다.
처음 불이 난 빵집 주인 토마스 페리니의 후손이 경영하는 런던 베이커가 1986년 침묵을 깨고 런던 대화재 진상을 공개했다.
빵집 여직원이 화덕에서 일하다가 실수로 불을 내 대화재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런던 대화재는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 1657년 도쿄 대화재와 함께 세계 3대 화재 사건으로 꼽힌다.
- 런던 대화재를 계기로 많은 제도 개선

런던 대화재를 계기로 많은 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근대 소방시스템 구축
민간조합 소방제의 문제점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소방차를 갖춘 근대 소방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오염시설 이전
템스 강 연안 건축을 금지하고 벽돌이나 돌 주택만 허용했으며 매연을 배출하는 양조나 염색 공장은 도심 밖으로 내쫓았다.
.화재보험 탄생
현대식 화재보험회사도 탄생했다.
대재앙 15년 만인 1681년 의사 출신 건축가인 니콜라스 바본이 영국 최초 화재보험회사를 설립한다.
판잣집이 난립하던 도시 공간을 현대식 주택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화재보험은 높은 인기를 끌었다.
시민들이 화재를 계기로 죽음 공포에서 벗어난 것은 최대 소득이다.
.흑사병 종식
유럽인 약 2천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이 한동안 잠잠하다가 화재 1년 전인 1665년 런던에서 다시 창궐해 무려 6만8천여 명이 숨졌다.
그해 4월부터 온몸이 새까맣게 변해가며 죽는 환자가 속출해 런던 도심에 시체가 즐비했고, 악취가 진동했다.
시 당국은 큰 구덩이를 파서 시신을 집단으로 파묻는 것 외에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시민들은 자구책으로 소변 목욕이나 꽃향기 요법을 써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흑사병 원인을 혈액 오염으로 진단한 의사들이 정맥피를 빼내는 치료를 하다가 과다 출혈이나 빈혈로 환자가 죽는 사례도 빈번했다.
유대인과 노숙인, 집시는 희생양이 됐다. 마을 우물 등에 독을 타거나 병균을 퍼트린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기 때문이었다.

개와 고양이는 떼죽음을 당한다.
흑사병을 옮기는 동물로 의심받아 고양이 약 20만 마리와 개 약 4만 마리가 도살됐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진짜 전염 매개체인 쥐가 대량 번식을 하면서 흑사병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흑사병 피해도 신분별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서민들은 성 밖으로 피신하려다가 시 당국의 불허로 꼼짝없이 갇힌 탓에 피해가 컸다.
성 밖 출입에 필요한 건강증명서를 시 당국이 귀족이나 부유층에만 발급했기 때문이다.
영국 왕 헨리 8세 왕이 사냥터로 쓰던 하이드 파크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으나 임시 흑사병 피신 캠프로 활용된 것을 계기로 시민 휴식처로 바뀌게 된다.
지구 종말을 몰고 오는 듯했던 흑사병은 이듬해인 1666년 런던 대화재를 계기로 감쪽같이 사라진다.
런던 판잣집을 맘대로 돌아다니며 흑사병 전염 균을 퍼트리던 쥐들이 모조리 불에 타 죽은 덕분이다.
- 문화
윌리엄 해리슨 에인즈워스의 「Old St Paul’s」는 런던 대화재가 그 배경이다.
〈The Great Fire〉는 2014년 ITV에서 방영한 미니 시리즈이다.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시나리오는 푸딩 레인의 제과점을 운영하는 가족이 가톨릭 음모사건과 연루된다는 이야기이다.
“London’s Burning”은 런던 대화재를 노래하는 돌림노래이다. 1580년에는 “Scotland’s Burning”이란 곡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