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7년 5월 7일, 독일의 작곡가•피아니스트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 (Johann Jakob Froberger, 1616 ~ 1667) 별세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 (Johann Jakob Froberger, 1616년 5월 19일 ~ 1667년 5월 7일)는 17세기에 활약한 독일의 바로크 작곡가이자 건반악기 연주의 대가이다.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나, 슈투트가르트 궁정악장이자 오르가니스트로 재직중이인 아버지 바질리우스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이후 슈타이더클레더에게 사사했으며 1637년부터 빈에서 궁정 오르간 주자로 일했다. 그 급여로 이탈리아에 유학해 프레스코발디에게 사사했으며 이듬해 귀국한 후에도 20년 이상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다.

–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 (Johann Jakob Froberger)
.출생: 1616년 5월 19일, 독일 슈투트가르트
.사망: 1667년 5월 7일 (50세), 프랑스 왕국 몽벨리아르
.직업: 작곡가, 건반악기 연주자
.사조: 바로크 음악
독일의 작곡가, 건박악기 연주자이다.
바로크 중기의 건반악기의 대가이며 중요한 건반음악을 다수 남겼다.
음악사적으로 프로베르거는 유럽 각지의 춤곡을 바탕으로 한 바로크 모음곡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으며 한 세대 후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와 두 세대 후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비롯한 독일 바로크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베르거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생애 및 활동
프로베르거의 유년 시절을 알 만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1616년 슈투트가르트 (Stuttgart)에서 태어난 그는 14세 때인 1630년 비엔나의 성가대에 들어갔으나 변성기 때문에 곧 그만두었다.
이후 20세였던 1637년에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빈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 기록되어있다.
그후 페르디난트 3세의 후원으로 로마로 4년여간 유학을 가 당시 성 베드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였던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를 사사했다.
그후 1645년부터 이탈리아와 벨기에 등지에서 활동하게 되며 1652년 파리를 거치는데, 여기서 샹보니에르나 루이 쿠프랭, 자크 갈로와 드니 고티에 등 당시 프랑스의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분산양식 (style brise)에 영향을 받았고 1653년 빈으로 돌아왔다.
요한 마테존의 전기에 따르면 프로베르거는 1657년에 드레스덴에서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2세가 주관한 건반악기 경연에 참가하였다.
상대는 드레스덴 궁정의 오르가니스트 마티아스 베크만이었으며 이후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1653년부터 1657년 동안에 다시 비엔나로 돌아와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였으며, 1657년 드레스덴에서 마티아스 베크만과 경연하여 친교를 맺고 강한 음악적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든 시기 얼마 동안에는 뷔르템베르크의 궁정에서 지빌레 공작부인을 위해 봉사하였고, 그 이후 1667년 프랑스의 동부 몽벨리아르 (Montbeliard)에서 생애를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음악활동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에게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의 생활을 다소 어렵게 했지만, 유럽 각국의 음악가에 의한 영향으로 아직 자신의 초기 인생에서부터 여러 전통 음악의 섭렵함으로써 도시의 음악 생활은 보다 풍부하고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실제 음악 교육에 대해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음악 스승은 아마도 요한 울리히 슈타이글레더(Johann Ulrich Steigleder, 1593-1635)를 포함하여 1627년 슈투트가르트를 방문하는 동안의 사무엘 샤이트(Samuel Scheidt, 1587-1654)를 만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궁정 문서 기록에 의하면 당시 궁정에서 고용된 영국의 류트 연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앤드류 보렐(Andrew Borell)이 1621-1622년 사이에 바실리우스 프로베르거(Basilius Froberger)의 아들 중 하나에게 류트를 가르친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 아들이 그였는지 확인은 불가능하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프랑스 류트 음악에서 그의 관심을 설명하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바실리우스 프로베르거(Basilius Froberger)의 음악 자료는 아마도 그의 조기 음악 교육에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죠스캥 데 프레(Josquin des Prez, c. 1440-1521)와 사무엘 샤이트(Samuel Scheidt, 1587-1654) 및 미하일 프레토리우스(Michael Praetorius, 1571- 1621)의 작품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뉘른베르크 학교(Nuremberg school)의 설립자 인 요한 슈타덴(Johann Staden, 1581-1634)과 조반니 발렌티니(Giovanni Valentini, c. 1582–1649)와 당대에는 매우 명성이 높았던 빈(Wien) 태생의 악장들의 작품 등 100개 이상의 컬렉션을 포함하는 것으로, 나중에는 이 자료를 교재로 삼아 자신의 제자인 요한 카스파르 케를(Johann Kaspar Kerll, 1627-1693)을 가르쳤다.
1634년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의 궁정 성가대는 뇌르틀링겐의 전투(Battle of Nördlingen Nördlingen)에서 신교도들(Protestants)의 패배로 인해 해체되었다. 요한 마테존(Johann Mattheson, 1681-1764)은 자신이 저술한 《Grundlage einer Ehrenpforte》(Hamburg, 1740)에서 당시 스웨덴 대사가 그의 음악적 재능에 감동한 나머지 아직 18세에 불과한 빈(Wien)의 어린 음악가인 그를 궁정에 천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스웨덴 제국과 루터교파의 뷔르템베르크(Lutheran Württemberg) 공국이 동맹관계에 있었다는 정황과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는 아마도 1634년 무렵에 빈(Wien)을 떠나 스웨덴 제국의 궁정 예배당에서 가수로 고용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다.

1637년 그의 아버지 바실리우스 프로베르크(Basilius Froberger)와 그의 아내 및 외동딸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인 아이작 프로베르크(Isaac Froberger)와 함께 뷔르템베르크 궁정(Württemberg court)에서 아버지의 음악 원고(악보)를 판매하였는데, 같은 해 그는 볼프강 에브너(Wolfgang Ebner, 1612–1665)의 추천으로 빈(Wien) 궁정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 해의 6월에 그는 궁정으로부터 휴가와 장학금을 수여받아 로마로 가서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Girolamo Frescobaldi, 1583-1643)의 문하에서 배웠다. 그는 분명히 다른 많은 음악가들과 같이 가톨릭교도(Catholicism)로 개종하고 이로부터 3년여 동안 이탈리아에서 체류하면서 음악을 공부했다. 그는 1641년 빈(Wien)으로 돌아와 자신이 두 번째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 1645년 가을까지 궁정에서 오르간과 실내악 연주자로 봉사했다. 일설에는 그 이전에 그가 자코모 카리시미(Giacomo Carissimi, 1604-1674)에게서 음악 공부를 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아마도 그가 로마에서 성직자이며 작곡가였던 아타나시우스 크리거(Athanasius Kircher, 1601-1680)로부터 음악을 배웠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만약에 이들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의 음악에는 제1작법(prima pratica)에 의한 숙련된 성악 작곡 양식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그에게 기악 반주를 수반하는 제2작법(seconda prattica)의 성악 양식을 가르친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Girolamo Frescobaldi)는 1643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1648년에서 1649년 사이에 요한 카스파르 케를(Johann Kaspar Kerll, 1627-1693)을 만났으며 이 시기 동안 그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1649년 그는 다시 오스트리아(Austria)로 여행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이탈리아의 피렌체(Firenze)와 만토바(Mantua)를 경유하면서 아타나시우스 크리거(Athanasius Kircher)로부터 배운 강력한 작곡 기법의 ‘arca musurgica’를 이탈리아의 왕자들에게 소개했다. 같은 해 9월 그는 빈(Wien)에 도착하여 열성적인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황제에게 ‘arca musurgica’의 작곡 양식에 대해 실례를 들어가며 설명하였고, 또한 그는 자신이 작곡한 컬렉션 《Libro Secondo》를 헌정하였다(“Libro Primo”는 현재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9월에 그는 영국의 외교관인 윌리엄 스완(William Swann)의 앞에서 연주했다. 외교관 윌리엄 스완(William Swann)을 통해 그는 자신과 평생의 친구가 되는 콘스탄테인 호이헨스(Constantijn Huygens, 1596-1687)를 비롯하여, 자크 샹피옹 드 샹보니에르(Jacques Champion de Chambonnières, c. 1601/2–1672)와 데니스 고티에(Denis Gaultier, c. 1597 or 1602/3 -1672) 그리고 에네몽 고티에(Ennemond Gaultier, c. 1575-1651)와 같은 당대 프랑스의 대가들의 작품과 작곡가를 알게 되었다.

황제 아우구스트(August)의 황후 마리아 레오폴디네(Maria Leopoldine, 1632-1649)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궁정의 음악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아마도 황제의 위임에 의해 제국의 외교와 주변국의 정세를 파악하고 특별한 음악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빈(Wien)을 떠나 향후 4년 동안 널리 여행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세하지는 않지만 이 기간 동안의 항해 여정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이때 드레스덴(Dresden)은 그가 이 여행 중에 방문한 첫 도시 중의 하나였으며, 그는 작센(Sachsen)의 선제후인 요한 게오르크 1세(John George I )의 궁정에서 연주를 하고 그의 작품이 수록된 컬렉션을 선제후에게 헌정하였다. 그는 드레스덴에서 체류하는 동안 마티아스 베크만(Matthias Weckmann, 1616- 1674)을 만났고, 두 사람의 이때의 만남은 이후 평생에 걸쳐 서로에게 우정을 나누는 친밀한 관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서신 교환을 계속하는 가운데 그 또한 자신의 음악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마티아스 베크만(Matthias Weckmann)에게 자신이 구성한 음악의 일부를 직접 필사하여 동봉하기도 했다. 그에게 음악을 배운 제자의 언급에 따르면, 그는 드레스덴(Dresden) 체류 이후 쾰른(Cologne), 뒤셀도르프(Düsseldorf), 질랜드(Zeeland), 브라반트(Brabant)를 거쳐 앤트워프(Antwerp)를 방문했으며, 그리고 오늘날 확인 가능한 기록들에서 그는 런던(London)과 적어도 1650년 및 1652년에 브뤼셀(Brussels)을 방문하였고, 1652년에는 가장 중요한 파리(Paris)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리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여 자크 샹피옹 드 샹보니에르(Jacques Champion de Chambonnières), 루이 쿠프랭(Louis Couperin, c. 1626-1661), 데니스 고티에(Denis Gaultier), 그리고 어쩌면 프랑수아 더포(François Dufault, c. 1604 이전-c. 1672)가 포함된 동시대 최고의 프랑스 작곡가들과 교류하였던 것 같다. 후자의 두 작곡가들인 데니스 고티에(Denis Gaultier)와 프랑수아 더포(François Dufault)는 당대의 유명한 류트 연주자로서 ‘변주 양식(style brisé)’에 기반을 둔 독특한 프랑스적인 악구들은 훗날 그의 하프시코드 모음곡들(harpsichord suites)에 영향을 주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루이 쿠프랭(Louis Couperin) 역시 그의 음악 양식에 있어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정형적이지 못한 서곡(preludes ) 중의 하나로서 <à l’imitation de Mr. Froberger>라는 부제(subtitle)의 작품은 이의 좋은 실례이다. 1652년 11월 그는 자신의 친구이며 유명한 류트 연주자인 쉬르 드 블랑클로셰(Sieur de Blancrocher, 1605-1652)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았다(일설에 의하면 그의 팔에 안긴 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도 한다). 비록 쉬르 드 블랑클로셰(Sieur de Blancrocher)가 자신의 시대에서 중요한 작곡가는 아니었지만 음악사에 있어 혁신적인 족적을 남긴 음악가였다. 그는 프랑스의 동료 작곡가들이었던 루이 쿠프랭(Louis Couperin), 데니스 고티에(Denis Gaultier), 프랑수아 더포(François Dufaut)과 더불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를 썼다.

1653년 4월 그는 마침내 빈(Wien)으로 돌아가기 전에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와 뉘른베르크(Nuremberg)와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를 차례로 들렀다. 1656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수록한 《Libro Quarto》를 포함하여 하나 이상의 컬렉션을 더 상재하였으며(“Libro Terzo”는 현재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4년 동안 빈(Wien)의 제국 궁정에서 봉직했다. 1657년 4월 그는 황제 페르디난트 3세(Emperor Ferdinand III, 1608-1657; 재위 1637-1657)가 죽음에 따라 깊은 애도의 분위기가 확연한 애가(lamentation)를 썼다. 페르디난트 3세의 뒤를 이은 후임 황제 레오폴트 1세(Leopold I, 1640-1705; 재위 1655-1705)와의 관계는 정치적 이유로 매우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당시 다수의 선제후들은 그의 황제 계승을 반대했는데, 반대파 선제후 중에 마인츠의 선제후이자 대주교(Elector-Archbishop of Mainz)인 예수회(Jesuit)의 요한 필립 프란츠 폰 쇤보른(Johann Philipp Franz von Schönborn, 1605- 1673; 재위 1647-1673)은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멘토(mentor)이자 친구인 아타나시우스 크리거(Athanasius Kircher)는 역시 그에게 있어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음악가의 하나였으며, 그는 특히 아타나시우스 크리거(Athanasius Kircher)와 궁정에서 강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궁정에서 이러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 레오폴트 1세(Leopold I)에게 자신의 새로운 컬렉션을 헌정하지 않았으며, 1657년 6월 그는 제국의 궁정 예배당 음악가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마지막 보수를 지급받았다.
그의 마지막 10년의 생애에 대해 약간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콘스탄테인 호이헨스(Constantijn Huygens)와 몽벨리아르 귀족의 미망인으로 알려진 공작부인(Duchess of Montbéliard) 시빌라(Sybilla, 1620-1707)와 교환하였던 서신의 내용에서 비롯되고 있다. 공작부인은 1662년 자신의 남편인 뷔르템베르크-몽벨리아르(Württemberg-Montbéliard)의 레오폴트-프리데릭(Léopold-Frédéric)의 죽음 이후 몽벨리아르 인근의 에리쿠르(Héricourt)에서 살았으며 그는 이 무렵부터 그녀의 음악 교사가 되었다. 그는 공작부인 시빌라(Sibylla)가 사별한 남편으로부터 유산으로 상속한 샤토 드에리쿠르(Château d’Héricourt)의 저택에서 살았다. 호이겐스와 시빌라(Huygens-Sybilla)의 서신들은 1665년 그가 마인츠(Mainz)의 선제후이며 대주교인 요한 필립 프란츠 폰 쇤보른(Johann Philipp Franz von Schönborn)의 궁정으로 이동하여 봉직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콘스탄테인 호이헨스(Constantijn Huygens)를 만나게 되는 정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1666년 어느 특정 시점에서 그는 빈(Wien)의 제국 궁정으로 복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궁정으로 복귀하는 대신에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1667년 5월까지 여전히 에리쿠르(Héricourt)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현존하는 작품의 특징은 오르간 작품이 소수의 교회 성악 작품들에 비해 수적으로 비교가 안될 만큼 많다는 점이다. 그의 생애 동안 오르지 건반 악기를 위하여 헌신하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그의 음악에서는 그의 스승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Girolamo Frescobaldi)의 이탈리아 토카타(toccata)와 17세기 초의 푸가(fuga) 양식과 발전된 비가(Lamento) 등을 흡수하였으며, 또한 최초로 그의 조(모음)곡에서 알르망드(Allemande)-쿠랑트(Corrente)-사라반드(Sarabande)-지그(Gigue)의 순서를 확립하기도 하였다. 짧은 무곡 악장의 조용한 아름다움으로부터 뛰어난 토카타와 쉼표가 없는 광시곡적인 즉흥 부분이 포함된 대곡을 포함함으로써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iedric Handel, 1685-1759)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독일 건반 음악의 머릿돌과 같은 존재로서 그의 음악은 힘차며 감정 표현이 심오하고 서정적이지만 화성적인 구성에서는 빈약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옛 작곡가들 중에서 음악적으로 매우 흥미가 깊은 개성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며,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이따금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을 느낄 수가 있다. 폭풍 속의 항해한 추억이나 이국 도시에서 냉대를 받던 일과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등의 감정들이 마음 아프게 나타나 있다. 이것은 당시의 음악적인 조류로 볼 때 매우 색다른 예로 생각되고 있는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당연시되던 낭만적 아름다움이 그의 애도곡(Lanmentation; 추도곡(Tombeaux) 또는 비가(Plaintes)의 총칭)들에서 나타난다.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던 전형적인 비가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보다 진지하게 개인적인 감정을 깊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19세기의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나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 (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의 건반 작품과도 비교되는 부분이 있다. 그는 토카타(toccata) 작품들에서 자신의 스승인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Girolamo Frescobaldi)의 영향을 도외시하였지만, 이 작품은 프랑스 클라브생(하프시코드) 양식에 있어 숙련된 솜씨를 입증해낸다. 이 선율은 추도곡(tombeau)의 장르 안에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 류트 연주자들과 하프시코드 연주자들이 그들의 동료들 중 어떤 이의 죽음 시에 관습적으로 썼던 것이다. 그는 이 추도곡(tombeau) “그의 Imperial Majesty Ferdinand 3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함의 애가, 세심함을 가지고 느리게 연주”를 1657년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작곡하였는데, 그는 일찍부터 빈(Wien)의 제국 궁정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봉직하였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전통을 지키는 하나의 느린 알라망드(Allemande)이지만, 그것의 망설임과 즉흥적인 빠른 음표들은 이것을 무곡으로부터 배제시킨다. 이러한 양식의 파괴(style bris)를 통해 그는 류트 음악을 하프시코드에 모방한 선두 주자 중의 한 명이 되었는데, 이것이 구조를 장악한다. F장조의 드문 조음(key)과 마지막의 주요한 3중 F들은 황제의 이름을 암시한다. 또 다른 표제적인 접촉은 베이스의 깊은 곳에서부터 최상 성부에 이르는 마지막 두 마디의 아르페지오(arpeggio)로, 황제의 영혼이 승천함을 나타낸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25곡의 토카타, 8곡의 환상곡, 6곡의 칸초나, 18곡의 카프리치오, 14곡의 리체르카레, 30곡의 모음곡 또는 파르티타가 유명하다.

○ 음악세계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Johann Jakob Froberger)는 독일의 작곡가이며 오르간 및 건반 악기 연주자였다. 그는 17세기 중기 바로크시대에 독일 출신의 걸출한 작곡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 (Girolamo Frescobaldi, 1583 ~ 1643)의 제자이며 비엔나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서, 베네룩스 (Benelux)와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로 여행과 연주로 자주 왕래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독일의 다양한 성격들을 그의 건반 음악에 담았으며, 그의 건반 음악들은 18세기 독일 음악에 현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의 탁월한 작곡가이며 음악 이론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못하고 있다. 특히 18세기에 요한 고트프리트 발터 (Johann Gottfried Walter, 1684 ~ 1748)와 요한 마테존 (Johann Mattheson, 1681 ~ 1764)에 의해 기록되었던 전기에서조차 매우 부정확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가족은 그의 할아버지 시몬 프로베르거 (Simon Froberger)가 살았고, 그의 아버지 바실리우스 프로베르거 (Basilius Froberger, 1575 ~ 1637)가 태어난 할레 (Halle)로부터 이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99년 그의 아버지 바실리우스 (Basilius)는 슈투트가르트 (Stuttgart)로 이주하여 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 공작의 궁정 예배당에서 테너 가수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1605년 이전에 슈봐비안 (Schwabian)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슈투트가르트에서 혼자 기숙하던 안나 슈미트 (Anna Schmid, 1577 ~ 1637)와 결혼했다. 그가 태어날 무렵에 그의 아버지 바실리우스 프로베르거 (Basilius Froberger)는 음악가로서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고 1621년에는 궁정 성가대의 악장으로 지명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안나 슈미트 사이에서 태어난 11명의 형제 중에서 4명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 <Johann Jokob Froberger>를 포함하여 요한 크리스토프 프로베르거 <Johann Christophe Froberger>, 요한 게오르크 프로베르거 <Johann Gorge Froberger>의 4형제. 이들은 모두가 슈투트가르트의 뷔르템베르크 공작 궁정에서 음악가로 활동하였다)이 훗날 음악가로 성장하였고, 이들은 일찍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조기에 음악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프로베르거의 토카타, 리체르카레 같은 작품은 이탈리아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지만 반면에 프로베르거의 건반 모음곡들은 당시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프로베르거의 음악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뿐 아니라 독일과 네덜란드의 스타일 모두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건반악기를 위한 춤 모음곡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프로베르거 본인은 알르망드 – 쿠랑트 – 사라반드 형식을 주로 작곡했고 후에 알르망드 뒤에 지그를 끼워넣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지그가 맨 뒤로 가게 된다.
작품번호는 FbWV로 표기한다.

○ 작품
《오르간과 클라브생 (하프시코드) 곡집》
The Strasbourg Manuscript,Ludger Rémy Cembalo
Capriccio III
Allemande (Suite G Minor), Andreas Martin, Lute
Sllemande (Suite G Minor) – Andreas Martin, Lute
Sarabande (Suite G Minor), Andreas Martin, Lute
Courante (Suite G Minor), Andreas Martin, Lute
Tombeau fait à Paris sur la mort de Monsieur Blancheroche
Tombeau fait à Paris sur la mort de Mr. Blancrocher (FbWV 632)
Suite en e Gustav Leonhardt Harpsichord
Capriccio in G – Markus Märkl, Organ
Suite No.7 in E minor – Bob van Asperen
Suite II in D minor
Allemande (Lamento) in C Major Sheet Music
Allemande faite en passant le Rhin dans une barque en grand p.ril.
Note the 26 numbered passages with explanations of each
Canzon in C Major Sheet Music
Capriccio in C Major Sheet Music
Capriccio in F Major Sheet Music
Fantasia in E Minor (phrygisch) Sheet Music
Recercar in G Major (mixolydisch) Sheet Music
Suite in E Minor Sheet Music
Suite in F Major Sheet Music
Toccata in D Minor (dorisch) Sheet Music
Organ Works
One of the toccatas from the Vienna manuscripts
The fourth suite from one of the Vienna manuscripts

- Notable recordings
Johann Jakob Froberger: Works for Harpsichord (1990). Gustav Leonhardt (harpsichord). Deutsche Harmonia Mundi RD77923
A selection of 18 works for harpsichord, concluding with the Tombeau faict à Paris sur la mort de Monsieur Blancrocher.
Johann Jakob Froberger: The Complete Keyboard Works (1994). Richard Egarr (organ, harpsichord). Globe GLO 6022–6025
Organized by manuscript and retains the original order of the pieces; works discovered after 1994 are not included. Also includes several works by other composers that were previously attributed to Froberger.
The Unknown Works (2003/4). Siegbert Rampe (organ, harpsichord, clavichord). MDG 341 1186-2 and 341 1195-2
A recording of some 20 newly discovered works (mostly suites) and pieces of doubtful authorship.
The Strasbourg Manuscript (2000). Ludger Rémy (harpsichord). CPO 9997502
Includes fourteen suites from the recently discovered Strasbourg Manuscript, only three of them known from autograph sources.
Froberger Edition (2000–). Bob van Asperen (harpsichord, organ). AE 10024, 10054, 10064, 10074 (harpsichord), AE 10501, AE 10601, AE 10701 (organ)
The series is designed to be in 8 parts. Volume 4 makes use of the newest discoveries from the manuscripts of the Berliner Singakademie.
Johann Jakob Froberger: Complete Music for Harpsichord and Organ (2016). Simone Stella (organ, harpsichord). 16 cd box Brilliant Classics BC 94740
As of 2016, this is the most updated complete recording. Organized by sources; includes newly discovered works.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