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5년 3월 21일, ‘서양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 ~ 1750) 출생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구력 3월 21일 / 신력 3월 3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본명: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출생: 1685년 구력 3월 21일 / 신력 3월 31일, 작센 아이제나흐 공국 이제나흐
.사망: 1750년 7월 28일 (65세), 작센 선제후국 라이프치히
.직업: 오르간 연주자, 작곡가
.장르: 서양 고전 음악
.악기: 오르간
.활동 시기: 1703년 ~ 1750년
.종교: 루터교
*직위: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칸토르 (1723년 5월 ~ 1750년 7월 28일)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 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가계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 (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 (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 (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 (1615 ~ 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642 ~ 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 (1648 ~ 94)는 음악사 (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 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 (1802)를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 생애 및 활동
– 유년 시절 (1685 ~ 1703)
1685년 구력 3월 21일 / 신력 3월 31일 거리의 악사 (바이올린 주자) 요한 암브로지우스 (1645 ~ 1695)의 막내아들로서 튀링겐 지방의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3월 23일에 그 곳의 성 (聖)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출생한 것은 3월 21일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하였다. 9세에 양친을 잃은 바흐는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671 ~ 1721)와 함께 살게 되어 오르돌프 시로 옮겨가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기초를 배웠다. 그러다 형이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 생활이 어려워지자, 15세 때 북부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게오르크 뵘 (Georg Bhm, 1661 ~ 1733)과 얀 아담스 라인켄 (Jan Adams Reinken, 1623 ~ 1722)을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
– 아른슈타트 시대 (1703 ~ 1707)
18세로 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곧 자활할 필요에 쫓겨, 1703년 4월부터 한때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고, 그해 8월에는 아른슈타트의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었다. 이 시대에는 북독일의 뤼베크를 찾아가 대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1637 ~ 1707)의 작품과 오르간 연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영향은 이 시기의 화려한 오르간곡에 명확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아른슈타트 시대는 오르간의 연주와 작곡에서 바흐가 개성적인 양식의 기초를 굳힌 중요한 시대인데, 그를 감독하는 입장에 있었던 성직회의 (聖職會議)와 자주 충돌하여, 1707년 6월 새로운 직장을 찾아 같은 중부독일의 도시 뮐하우젠으로 갔다. 뮐하우젠에서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활약하는 한편 교회 칸타타의 작곡에도 힘을 들여 제71번, 제131번, 제106번 등 초기 칸타타의 명작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루터파 내부의 정통파와 경건파 사이의 분쟁에 말려들어 겨우 1년 만에 이 곳을 떠나게 되었다.
– 바이마르 시대 (1708 ~ 1717)
다음으로 바흐를 맞이한 것은 바이마르 궁정이었다. 한때는 한낱 악사로서 취직하였던 추억의 고장으로, 이제 젊은 대가가 된 그는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돌아온 것이다. 1708년 7월 23세 때의 일이다. 이 바이마르 시대 (1708 ~ 1717)는 바흐의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곡의 태반이 여기서 작곡되었으며, 비할 데 없을 만큼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로서 그의 이름은 독일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714년에는 궁정악단의 콘서트마스터에 임명되어, 매달 1곡씩 뛰어난 교회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당시의 가장 새로운 음악이었던 비발디 등의 협주곡이 즐겨 연주되었는데, 바흐는 그것들을 열심히 연구하여 이탈리아 협주곡의 형식과 기법 (技法)이 바흐의 그 후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717년 8월, 바흐는 쾨텐 궁정에 악장으로서 취임하였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이며, 음악을 사랑한 젊은 영주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이례적 (異例的)인 후대를 베풀었다. 쾨텐의 궁정은 깔뱅주의여서 교회음악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으므로 바흐의 중요한 직무는 영주나 귀족들을 위하여 세속적인 합주곡이라든가 실내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BWV1046-1051),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BWV1001-1006), ‘무반주 첼로 모음곡’ (BWV1007-1012)을 비롯하여 그의 세속적 기악곡의 대다수가 이 시대에 작곡되었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풍성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다.
– 쾨텐 시대 (1717 ~ 1723)
뮐하우젠 시대인 1707년, 바흐는 먼 친척의 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에 7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쾨텐 시대인 1720년에 이 부인이 병사했다. 다음해인 1721년, 그는 16세 손아래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고, 13명의 아이를 얻었다. 합계 20명의 자녀 가운데서 약 반수는 어렸을 때에 사망하였는데,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1710 ~ 1784),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1735 ~ 1782)은 음악사 (史)에 이름을 남기는 뛰어난 작곡가로 성장하였다. 쾨텐 시대에는 이들 아이들이나 또는 바흐의 명성을 흠모하여 모여든 제자들을 위하여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 (BWV846-869), ‘인벤션’ (BWV772-801)을 비롯한 수많은 클라비어곡도 작곡하였다.
– 라이프치히 시대 (1723 ~ 1750)
좋은 환경 속에서 쾨텐 영구거주를 한때 결심 했었으나 1723년 여러 사정때문에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독일 바로크의 중요한 작곡가 요한 쿠나우 (Johann Kuhnau, 1660 ~ 1722)의 후임으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 (합창장)에 선출되었다. 175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27년간, 이 곳에 머무르며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또 사실상의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시대의 창작중심은 ‘마태오 수난곡’ (BWV244), ‘나단조 미사’ (BWV232),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BWV248), 약 160곡의 교회 칸타타 등의 교회성악곡이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의 최초의 수년간에 작곡된 것이라 한다. 자기의 이상을 끝까지 관철코자 했던 바흐는, 시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임자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교회음악의 일에 점점 열의를 잃어간 것같이 생각된다. 1724년 이후, 교회음악의 창작은 급격히 수요가 줄고, 그 대신에 세속 칸타타나 세속적 기악곡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1736년경부터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전에 작곡한 것을 고치기도 하고 몇 편의 작품을 곡집 형태로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 (BWV825-830), ‘이탈리아 협주곡’ (BWV971),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988) 등이 그 예이다. 1747년 5월, 바흐는 포츠담의 궁정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하고,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의 묘기를 보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작곡한 것이 대왕에게 헌정한 ‘음악적 헌정’ (BWV1079)이다. 그리고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최후의 대작 ‘푸가 기법’ (BWV 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1749년 5월 뇌일혈로 졸도하여 시력도 잃어 ‘푸가 기법’의 완성을 보지 못한채, 1750년 7월 28일, 사망한다.
○ 바로크 음악과 바흐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바흐는 대위법 기술의 정수를 다한 사람이나,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당시에 이미 궁정문화에 침투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양식을 스스로 받아들여 칸타타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했다. 거기에는 그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배운 여러 나라의 온갖 요소가 모두 투입되어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최고로 천재적이게 융화되어 일치미를 이루고 있다. 콘티누오 (통주저음)만으로 반주되거나 또는 여러 개의 악기로 반주되는 독창이나 중창에 의한 이탈리아식 다 카포 아리아, 오페라적인 아리오소와 레치타티보, 가장 초기의 가브리엘 형태에서 바흐 시대의 프랑스식 서곡에 이르기까지의 관현악 신포니아, 협주곡, 트럼펫의 팡파르, 풍요한 장식성을 지니고 성악성부에 얽혀드는 기악의 오블리가토 성부, 복합창형식, 때로는 성악에까지 적용되는 프랑스의 리드미컬한 춤곡, 이러한 것이 독일의 오랜 전통인 코랄과 결부되고 있다. 대체로 바흐만큼 코랄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또 코랄을 창작의 중심으로 삼기에 정당함을 느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 양식의 혼합은 기악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베르거의 전통, 쿠프랭의 프랑스 모음곡형식, 쿠나우에 의하여 전해진 이탈리아의 소나타 다 카메라양식,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건반 텍스처 (鍵盤書法), 푸가에 있어서도 클라비어 푸가는 이탈리아 협주양식의 영향을 나타내나 오르간 푸가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비발디가 모범으로 숭앙되며, 가장 이탈리아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바흐의 작품은 매우 많은 여러 가지 양식을 포함하고, 또한 작곡한 분야도 넓으며 바흐 개인으로서도 시대에 따라 기술적, 내용적으로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개인양식을 간단히 종합하기란 곤란하다고 하겠다.
○ 바흐의 유산
바흐는 생전에도 동시대의 음악가였던 비발디나 텔레만과 같이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음악가는 아니었다. 사후에는 당시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작곡가로서는 완전히 잊혀진다. 바흐 생애 후반부에 이미 고전파 음악의 전조가 시작되었고 바흐 음악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바흐는 비발디나 헨델과 같이 음악가의 프리랜서화를 선도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끝까지 교회 음악가로 남았다. 고전파 시대에 바흐는 고전파의 문을 연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오히려 유명하였다. 유명인 중에는 모차르트가 바흐의 악보를 찾아서 탐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차르트 음악에 가끔 훌륭한 푸가가 보이는 것이 바흐의 영향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베토벤 또한 바흐를 연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영향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바흐를 극찬하는 말을 남겼다고하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닌 아들 바흐에 대한 찬사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사후 완전히 잊혔던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 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 (1802)를 발표함으로써 바흐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근대 인문학으로서의 음악사학의 발전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전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이들의 작품을 출판,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바흐는 그 핵심 레파토리로 떠오른다. 바흐 생존 시기나 고전파 시대의 지명도와는 달리 낭만주의 시대에 바흐는 이전 시기 어떠한 음악가 보다 높이 평가되기 시작하여 멘델스존 이후 음악가들 중 바흐를 연구하지 않은 작곡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바흐에 대한 관심은 바흐가 많이 참고하고 편곡을 했던 다른 음악가들, 특히 비발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바로크 음악의 부활을 이끌기도 하였다. 오늘 날에도 바흐는-그의 음악이 바로크 음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바로크 시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도 아니었지만-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 바흐의 가족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흐의 가문에서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1710–84)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1714–88)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1732–95)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1735–82)
그리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아내 마리아 바바라 (m. 1707 ~ 1720), 안나 막달레나 (m. 1721 ~ 1750)와 함께 평생 동안 20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의 첫 번째 아이는 바흐가 23세였던 1708년에 태어났으며, 작곡가가 57세였던 1742년에 마지막으로 딸이 세상에 나왔다.
10명만이 성인되어서도 살아남았다.
바흐 가문은 항상 악기로 가득 찬 집을 가진 음악가 집안이었고 요한 제바스티안은 항상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 곡을 작곡하는 데 열심이었다. 바흐는 자녀사랑과 교육열도 대단해서, 친구에게 “아무래도 쾨텐 궁정악장 자리를 그만두고 라이프치히로 가야겠어. 라이프치히 대학을 목표로 아들 공부를 시켜야겠으니”라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 바흐의 첫째와 둘째 아들은 당시 명문 대학인 라이프치히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바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음악가로써 귀족, 왕족들에게 하인 취급받지 않으려면 학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바흐는 자식들의 음악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정기적으로 가정음악회를 열어 음악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그의 장남이 10살이 되던 1720년에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소품집’을 작곡하여 그의 아들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교육을 위해 작곡된 것이었다. 그의 가문이 200년간 약 60여 명의 작곡자를 배출한 뛰어난 음악가문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자식들 중에는 걸출한 인물이 3명이나 있다.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W. F. Friedemann Bach, 1710∼1784)’와 특히 둘째 ‘칼 필립 에마뉴엘 바흐 (C. P. E Bach, 1714∼1788)’는 전고전주의 양식을 이끈 감정과 다양식의 대가였으며 가장 유명했던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J. Christian Bach, 1735∼1782)’는 런던 바흐라고도 불리며 그의 부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재조명되기 전에는 당시 ‘바흐’라고 하면 차남 엠마누엘과 동시에 이 인물이 지칭될 만큼 아버지 보다 더 유명한 작곡가였으며 모차르트와의 우정이 매우 깊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8살 모차르트는 크리스티안에게서 작곡법을 배웠으며, 건반 앞에서 크리스티안의 무릎 위에 앉아 그와 함께 연탄곡을 연주한 적도 있다. 크리스티안은 모차르트처럼 돈은 그럭저럭 벌었지만 관리엔 능하지 못했는 듯 하다. 비서가 돈을 몽땅 횡령하는 바람에 말년에 가난과 빚더미에 시달리다가 47살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음악계의 커다란 손실”이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 바흐의 자녀들
– 장녀 카타리나 도로테아 바흐 (1708 ~ 1774)
바흐의 첫 아이. 작곡은 그 당시 여성들에게는 선택사항이 아니었지만, 카타리나는 가수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종종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1710 ~ 1784)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곡가 되었다.
– 차녀 마리아 소피아 바흐 (1713), 차남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 (1713)
바흐의 셋째와 넷째 자녀인 쌍둥이는 바흐가 28세였던 1713년 2월 23일에 태어났다. 요한 크리스토프는 태어난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죽었고, 마리아는 몇 주 후인 1713년 3월 13일경에 죽었다.
– 차남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1714 ~ 1788)
바흐의 자식중 가장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작곡가였다. 모차르트는 C.P.E. 바흐에 대해 “그는 아버지고 우리는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문서 참고.
– 4남 요한 고트프리드 베른하르트 바흐 (1715 ~ 1739)
1715년 5월 11일에 태어났으며, 형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문 음악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대학에 갈 기회가 없었고,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비밀리에 음악 활동을 포기했다. 그는 24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 5남 레오폴드 아우구스투스 바흐 (1718- ~ 719)
11월 15일에 태어난 바흐의 7번째 아이는 짧은 10개월 동안 살았고, 1719년 9월 29일에 묻혔다. 그의 대부인 왕자가 레오폴드라고 이름지었고, 1717년에서 1723년 사이에 바흐를 카펠마이스터로 고용했다.
– 3녀 크리스티아나 소피아 바흐 (1723 ~ 1726)
바흐의 아내 마리아 바바라가 죽은 후, 그는 안나 막달레나 윌케와 결혼했다. 그들의 첫째 딸은 1723년에 태어났고, 같은 해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토마스칸토르가 되기 위한 계약을 맺었다. 크리스티아나는 3년 후에 죽었다.
– 6남 고트프리드 하인리히 바흐 (1724 ~ 1763)
고트프리트는 어떤 면에서는 약간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 징후는 어릴 때부터 포착됐다. 다행히 그에게는 많은 형제자매가 있었고 그를 보살펴줬다. 그의 형 C.P.E. 바흐는 그의 동생이 ‘발달하지 못한 위대한 천재’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 7남 크리스찬 고틀립 바흐 (1725 ~ 1728)
비극적으로 단명했던 크리스천 고틀립은 겨우 3년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1728년 9월 21일에 죽었다.
– 4녀 엘리자벳 줄리아나 프리데리카 바흐 (1726 ~ 1781)
1726년은 바흐 가문의 기쁨과 비극의 해로,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지 2달 만에 언니 크리스티아나가 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고, 아버지의 제자 중 한 명인 독일의 오르가니스트 요한 크리스토프 알트니콜과 결혼했다.
– 8남 어니스터스 안드레 바흐 (1727)
– 5녀 레지나 요한 바흐 (1728 ~ 1733)
– 6녀 크리스티아나 베네딕타 루이스 바흐 (1729 ~ 1730)
– 7녀 크리스티아나 도로테아 바흐 (1731 ~ 1732)
어린 시절에 죽은 이 4명의 자녀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 9남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1732 ~ 1795)
그는 6월 21일 태어났다. 바흐의 삼촌과 바흐의 큰형도 모두 요한 크리스토프라고 불렀다. 덜 혼란스러운 것은, 그가 전문적으로 하프시코드를 연주했던 로어 작센의 한 마을의 이름을 따서 ‘뷔케부르크 바흐’라고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이전의 많은 바흐 형제들처럼, 그는 이탈리아 음악의 유행에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을 쓴 고전 작곡가였다. 그는 런던을 방문하여 몇 편의 작품을 출판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의 음악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장남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바흐(1759년–1845년)는 J.S. 바흐의 외손자로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윌리엄 2세의 음악 감독이었다.
– 10남 요한 아우구스트 아브라함 바흐 (1733)
어린 요한 아우구스트는 11월 5일 세례 후 하루 후에 사망했다.
– 11남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1735 ~ 1782)
‘영국 바흐’로 알려진 J.C. 바흐는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샬롯 여왕의 봉사로 런던에 정착하여 별명이 ‘런던 바흐’이다. 그는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가 되었고, 모차르트의 협주곡에 영향을 주었다. 문서 참고.
– 8녀 요한나 카롤리나 바흐 (1737 ~ 1781)
– 9녀 레지나 수잔나 바흐 (1742 ~ 1809)
바흐의 19번째와 20번째 아이들, 두 딸 모두 결혼하지는 않았다. 요한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레지나는 베토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심지어 베토벤에게 기부할 교향곡 3번의 시사회 수익금까지 요구했다. 그녀의 유명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수집품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난하게 죽었다.
* 두 아내
– 전처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Maria Barbara Bach, 1684 ~ 1720)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6촌 관계이며 바흐보다 1살 위이다. 게렌 (Gehren)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조실부모하고 아른스타트의 친척 집에서 성장하였다.
마리아가 바흐를 만난 것은 19살때인 1703년으로 당시 바흐는 이 해 8월에 막 아른스타트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와졌으며, 마리아는 바흐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앞서 생애편에서 아른스타트 교회에 취직한 바흐가 금녀의 구역이었던 성가대석에 여성을 데려가서 욕을 먹은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 문제의 여성이 바로 이 마리아 바르바라이다.
아른스타트에서 사사건건 교회측과 싸우면서 직업에 적응을 못했던 바흐는 4년 뒤인 1707년에 근무 조건이 훨씬 좋은 뮐하우젠으로 이직하면서 마리아를 같이 데려갔으며 뮐하우젠에 정착한 직후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상당히 행복했으며 쌍둥이를 포함 7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4명만 유년기를 넘겨 생존하였다.
마리아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성으로, 결혼생활 내내 그 다혈질의 바흐와도 별로 부딪치지 않았을 정도로 유순하고 생활을 잘 꾸려나갔던 진정한 내조자였다. 바이마르를 거쳐 1718년 쾨텐으로 옮긴 바흐 부부는 이제 행복을 즐길 일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행복한 결혼생활은 쾨텐에 온지 2년만인 1720년에 갑작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1720년 5월 바흐는 자신의 고용주인 레오폴트공이 칼스바드 (Karlsbad)에 있는 온천에 휴가차 여행을 갈 때 동행했으며 2달 후에 쾨텐으로 복귀하였는데, 바흐는 집에 도착할 때쯤 아내 마리아가 급사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황급하게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장례식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그녀가 36살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마리아는 평소에 지병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남편이 업무차 여행을 떠날 때까지도 특별히 이상한 징후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문부호가 붙어 있다. 대체로 바흐 연구자들은 마리아가 전염병이나 식중독과 같은 급성 질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간 아내와 행복하게 지냈으며 아내 덕분에 집안의 대소사를 잊고 음악 업무에만 신경썼던 바흐로서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사후 엉망이 되어 버린 집안일을 정리하고 아직 한참 어렸던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바흐는 17개월 후에 새로운 아내를 얻는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되는 내용 참조.
한편으로 몇몇 바흐 연구가는 그 유명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d단조의 5악장 ‘샤콘느’가 바로 이 마리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작곡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아직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 후처 안나 막달레나 바흐
안나 막달레나 바흐( Anna Magdalena Bach, 1701 ~ 1760)의 본명은 안나 막달레나 빌케 (Anna Magdalena Wilcke)로 아버지는 금관악기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오르가니스트의 딸이었다. 어렸을 때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언젠가부터 성악교육을 받고 가수가 되었으며, 1721년 초에 쾨텐 궁정에 취직하면서 바흐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아내를 잃고 상심하고 있던 바흐는 막달레나와 금세 가까와졌으며 16살차이의 두 사람은 1721년 12월 3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막달레나 바흐는 바흐의 첫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못지 않게 내조에 충실하였으며 결혼 후에도 어느 시기까지는 가수로 계속 활동하였다. 외적으로는 이런저런 풍파에 시달렸던 바흐지만 가정생활만큼은 행복했던 덕분에 바흐와 막달레나 바흐는 왕성한 생산력을 자랑하여 무려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다만 이 중 6명 (3남 3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으며 6명의 자녀 중에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와 요한 크리스찬 바흐가 중요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생활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안나 막달레나 바흐는 남편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그녀는 남편의 창작력의 원천이자 충실한 필사가였다. 바흐는 그녀를 위해 여러 작품, 특히 성악작품을 많이 썼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음악노트 (Notenbüchlein für Anna Magdalena Bach) 1, 2권이다. 또한 막달레나 바흐가 남편의 악보를 부지런히 필사해둔 덕분에 그의 많은 음악들이 현재까지도 실전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행복했던 그녀의 삶은 1750년 남편이 죽은 후부터 급전직하했다. 그녀의 의붓자식들과 친자식들 사이에서는 유산상속을 비롯한 이런저런 이유로 분쟁이 일어나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장성한 의붓자식들은 그녀를 일절 도우려 하지 않았으며 친자식들은 아직 어려서 홀로서기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생계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홀로 어린 두 딸 캐롤리나 (Johanna Carolina)와 수잔나 (Regina Susanna)를 맡아 키워야 했기 때문에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으며, 죽기 얼마전에는 라이프치히 시 당국의 자선행정에 의존해서 생활해야 했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가 환갑도 넘기지 못하고 죽은 데에는 이런 생활고가 큰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마틴 야비스 (Martin Jarvis)라는 음악학자가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를 비롯한 몇몇 작품의 실제 작곡가가 바흐가 아니라 안나 막달레나 바흐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주장은 해당 작품들이 바흐의 자필악보나 작곡기록이 없이 그녀가 필사한 사본만 남아 있는 점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야비스의 주장에 동의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참고로 장 마리 스트로브 · 다니엘 위예 공동 연출의 영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내레이션을 기반으로 바흐의 음악적 세계와 철학을 탐구하고 있는 실험적인 영화이다. 스트로브와 위에는 그 난해한 영화작법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영화는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편이라 클래식 팬들 사이에서 꽤 자주 언급된다. 참고로 당시 40대였던 쳄발리스트 구스타프 레온하르트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로 출연한다.
○ 주요 작품 목록
미사곡 (예배곡)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나단조 미사
무반주 첼로 모음곡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BWV992
토카타와 푸가
전주곡과 푸가
바이올린협주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곡집
골드베르크 변주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푸가 기법
프랑스 모음곡
음악의 헌정 (BWV 1079)
– 라이프치히에서의 예배순서 : 바흐의 요약, 1714
1) 전주곡 연주
2) 모테트 (motetta)
3) 키리에로된 전주곡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합주음악 (concert-ed music)으로 연주된다
4) 제단 앞에서의 인토네이션 (영창)
5) 사도 서간문 낭독
6) 탄원 (the Litany)기도 노래
7) 코랄에 의한 전주곡(과 코랄연주)
8) 복음서 낭독
9) 본작품 (칸타타)의 전주곡 (과 칸타타 연주)
10) 사도신경 노래 (루터의 신경 찬송가)
11) 강론
12) 강론 후 평상시대로 찬미가 몇 절 노래
13) (성찬식) 제정말씀
14) 작품의 전주곡(과 그 연주) – (칸타타의 2번째 부분인 듯 싶음) 그 다음에는 전주와 코랄을 노래해는 것이 영성체가 끝날 때까지 교대로 계속된다.
○ 평가
신성 로마 제국 태생의 바로크 시대 작곡가 바흐는 모차르트, 베토벤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음악적 업적을 이룩한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서양 음악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베토벤은 바흐를 가리켜 “그는 Bach (실개천)가 아니라 Meer (바다)라고 불려야 한다 (Nicht Bach, sondern Meer sollte er heißen).”라는 표현을 남기기도 하였다.
– 오르가니스트로서의 평가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그의 발은 페달 위를 날아다녔고, 힘찬 소리가 천둥처럼 교회안에 쩌렁쩌렁 울려펴졌다. – 콘스탄틴 벨러만(Constantin Bellermann), 바흐의 1732년 카셀에서의 연주를 듣고
라이프치히의 바흐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오르간 연주로 헨델을 쉽게 능가할 수 없다.― 요한 마테존, 『완전한 악장Der Vollkommene Capellmeister(1739)』 中
그러나 특히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유래된 오르간 연주의 예술은 당시 프로베르거, 파헬벨, 라인켄,북스테후데, 브룬스 등에 의해 상당히 진보된 단계에 있었다. 마침내 칭송받아 마땅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이것을 근래 가장 완벽한 단계에 이르게 하였다. 그가 사망한 지금에 와서는 이것이 다시 퇴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요한 요아힘 크반츠, 『가로플루트 연주법Versuch einer Anweisung die Flöte traversiere zu spiele(1752)』 中
그는 오르간 연주의 예술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오르간의 구조 역시 샅샅이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오르간의 배열을 그리거나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1754년 카를 필립 엠마누엘과 요한 프리드리히 아그리콜라가 쓴 추도문 中
바흐는 정확성을 철저히 유지하면서 빠른 악구를 페달로 연주하였다. 레지스트레이션의 변화를 너무도 부드럽게 이어갔기 때문에 청중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에 현혹되었다.- 다니엘 프리드리히 슈바르트
오르간의 레지스트레이션에 관해 그분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르가니스트들은 아버지가 오르간 앞에 앉아서 연주하기전에 나름대로 스톱들을 빼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리곤 했습니다. 그들 생각에서 아버지가 구상하는 것처럼 효과가 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간담이 서늘해지는 효과가 서서히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체계적인 지식은 아버지와 함께 영영 사라졌습니다. – 카를 필리프 엠마누엘 바흐,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에게 1774년 보낸 편지 中
– 후대의 평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들은 바로크 시대의 최고를 상징한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음악에서 가장 숭고한 창조적 천재였다.― Classic fm
그리고 물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성과 대위법의 대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음악의 호메로스’였다. ― T. C. W. 블래닝 (역사학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학 교수)
“바흐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며 끝이다.” ― 막스 레거
“바흐는 우리의 경애하는 음악의 주님이다. 모든 작곡가들은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클로드 드뷔시
“화성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철저한 지식에서 그(바흐)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르푸르 (음악 비평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이름은 지난 세기(18세기) 전반기의 모든 독일 작곡가들의 이름보다 최고로 숭고하게 빛난다. 그는 뉴턴의 정신으로 지금까지 조화에 대해 생각해 왔고 그 사례로 제시되어 온 모든 것을 포용했고, 그 깊이를 너무나 완전하고 충실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유효한 진실한 화성의 입법자로 정당하게 여겨져야만 했다.”―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다니엘 슈바르트 (시인)
“화성의 창시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모든 시대와 모든 국가의 가장 위대한 화성학자.”― 요한 프리드리히 레이차트 (작곡가)
“그의 음악은 영혼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만약 누군가가 ‘음,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정말 그들이 말해야 하는 것은 ‘바흐 외에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는 누구인가?’ 입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바흐는 당신이 음악을 좋아한다면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과 약간 비슷합니다. 거기엔 에베레스트 산이 있고, 그리고 다른 모든 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흐는 음악의 만유인력입니다.”― 막스 리히터
“바흐는 음악의 예수다.”― 예후디 메뉴인
“바흐의 음악은 우주의 탄생이 완전한 실패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주장이다.”― 에밀 시오랑
“노년의 바흐 속에서 옛날의 샘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바흐의 전 예술이 도달한 정점이여 완성의 최고봉으로 간주되고 있다. 대체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후계자들이 바흐의, 라이프치히에서의 최초의 10년간의 작품 속에서 혹은, 쾨텐시대의 기악 작품이나 또는 아마도 그보다 더 초기의 노작들에서 바흐의 창조 활동의 정점을 인정하기를 더 좋아할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년의 바흐 속에서 옛날의 샘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250년 전만 해도 이 샘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알리는 구조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으로서 시내를 이루고 있었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바흐를 집중해서 계속 들은 뒤에 베토벤의 음악을 듣게 된다면, 베토벤의 음악은 일종의 경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
“나는 바흐보다 더 위대한 천재가 지구 위를 걸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명의 위대한 작곡가 중 모차르트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말하고, 베토벤은 베토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한다. 그리고 바흐는 우리에게 우주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더글러스 애덤스
“한 가지 점에서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바흐는 아마 가장 위대했을 것이다.” ― 그라모폰 Is Bach Best?
“바흐는 ‘음악의 최고 권위자이자 법치자’로 불렸다. 그는 미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문학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같은 역사상 최고의 창조적 천재 중 한 명이다.”― 그라모폰
“아무도 그가 한 일을 할 수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현대 음악과 심포닉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푸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작곡하고, 발전시키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만든 모든 작품은 거의 완벽하다. … 많은 작곡가들이 한두 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비율은 어마어마하다; 80 퍼센트 이상. 이 위대함은 화음의 질, 아름다움, 두 가지를 합친 것이다. 네가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가 이 행성에서 최고라고 말할 것이다.”― 자크 루시에 (피아니스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우리에게 남긴 작품들은 다른 민족이 결코 누릴 수 없는 귀중한 국가 유산이다.”―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 (음악학자)
“바흐의 음악에 있는 것은 다른 감각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연주자나 청취자로서 우리가 들어가는 또 다른 세상이다.”―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에게 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창작의 바로 그 자체였다.”― 레너드 번스타인
“만약 내가 여생을 무인도에서 보내야 한다면,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어떤 작곡가의 음악을 듣거나 연주해야 한다면, 그 작곡가는 거의 틀림없이 바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다른 어떤 음악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나를 매우 깊고 일관성 있게 감동시키고, 다소 부정확한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의 모든 기술과 탁월함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것, 즉 그것은 인간애적이다.”― 글렌 굴드
“만일 베토벤이 인간 중의 거인이라면, 바흐는 바로 하느님의 기적이다.”―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
“그의 소리는 사라진것이 아니라 언어로는 표현할수없는 신의 명성에 오른것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그는 작은 시냇물(Bach)이 아니라, 크고 광활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화성의 시조”―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바흐는 불멸의 화성의 신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바흐 안에서 음악의 필수적 세포들이 하나가 된다. 신 안에서 세계가 그렇듯. 그 어떤 다성음악 (polyphony)도 이보다 위대하지 않았다.”― 구스타프 말러
“바흐는 음악의 최고 천재다 … 그는 모든 숭고한 사상의 핵심에 도달했고,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그것을 해냈다.”― 파블로 카잘스
“지난 80년간 나는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시작했다. 그것은 기계적인 일이 아니라 내 일상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다. 나는 피아노에 가서 바흐의 두 서곡과 악곡을 연주한다. 그것은 일종의 축복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유일한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한 부분이 되는 기쁨을 누리는 세상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한 믿을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음악은 나에게 결코 같지 않다. 매일 그것은 새롭고, 환상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바흐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기적이다.”― 파블로 카잘스
“그게 습관이라는 건 인정해. 그 (바흐)는 나에게 그런 기쁨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기쁨의 어떤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져다 주려고 한다. 그리고 한 번만 읽을 수 없는 책도 있다. 저 책들은 내 프로그램의 일부분이다. 나는 음악가가 성질이 좋은 클라비에의 2권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하며, 가능하다면 많은 칸타타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들을 내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려고 노력한다. 누군가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다면 좀 이상해 보일 것이다.”― 나디아 불랑제 (작곡가)
“바흐의 음악은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위대한 구조의 생각을 표현한다.”― 톰 필립스 (예술가)
(바흐의 음악을 듣고) “나는 마치 영원한 화합이 스스로 소통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을 나 자신에게 표현했다. 마치 세상이 창조되기 바로 직전에 하느님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처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바흐는 마치 로도스 섬의 거인과 같다. 모든 음악가들이 그의 아래를 지나야 한다. 모차르트는 가장 아름답고 로시니는 가장 천재적이다. 하지만 바흐는 가장 포괄적이다. 그는 말해야 할 모든 것을 말했다. 만약 바흐 이래로 쓰여진 모든 음악이 사라진다고 해도 바흐의 음악을 토대로 다시 재건할 수 있다.”― 샤를 구노 (작곡가)
“바흐는 모든 음악가들이 지나가고 계속 지나갈 거인이다. 모차르트가 가장 아름답고 로시니가 가장 뛰어나지만 바흐가 가장 종합적이다. 그는 할 말을 다 했다.’”― 샤를 구노 (작곡가)
“이제 아무도 신을 믿지 않지만 모두가 바흐를 믿는다.”― 마우리치오 카겔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그의 시대에는 작곡가보다 오르간 연주자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의 신성한 음악, 오르간과 합창곡, 그리고 다른 악기 음악은 엄청난 엄격함을 감추는 열정과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바흐의 대위법에 대한 사용은 훌륭하고 혁신적이었으며, 종종 그의 작곡 스타일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종교적, 숫자적인 상징들을 포함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놀라운 음악가들로 구성된 특별한 코드들의 심오한 퍼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생각한다.”― AllMusic
“음악의 최고중재자이자 입법자이며, 위상의 위대함에서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 미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견줄 수 있는 거장. (the supreme arbiter and lawgiver of music, a master comparable in greatness of stature with Aristotle in philosophy and Leonardo da Vinci in art).”― 시어도어 베이커 (음악학자), 《베이커 음악 인명사전》의 ‘바흐’ 항목 도입부 中
“18세기 전반의 독일 음악 역사는 이를테면 극단적인 역설 속에 있다. 이 시대의 독일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라는 전음악사상 최대의 천재 한 사람을 낳았다. 그를 뛰어넘을 자는 없으며 그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의 재능도 아주 드물게 밖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D. G. 휴즈, 《유럽 음악의 역사》 中
“종교는 내면적인 영적인 세계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 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함께 있습니다. 제 말은, 왜 안되죠?”― 잭 케보키언 (병리학자)
“바흐는 땅 위의 모든 인종을 연결하는 끈”― 에이토르 빌라로부스 (작곡가)
“음악은 그 최대한의 완전함을 바흐안에서 획득하였는데, 베토벤도 하이든도 그리고 가장완전함에 접근한 모차르트 조차도 끝내 바흐와 같은 완전함에는 도달할수없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바흐는 내가 기독교인이 되도록 거의 설득한다.”― 로저 프라이 (화가)
“신이 신이듯 바흐는 바흐다.”― 엑토르 베를리오즈
“신이 하나 있다 – 그의 이름은 바흐. 그리고 멘델스존은 그의 예언자다.”― 엑토르 베를리오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독교 음악… 만약 삶이 나에게서 희망과 믿음을 가져갔다면, 이 합창곡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다.”― 펠릭스 멘델스존
“나는 음악의 역사적 진화에 대해 전혀 몰랐고 모든 현대 음악이 바흐의 덕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어떤 음악가든, 심지어 가장 재능 있는 음악가라도, 맨 처음은 바흐이며 그 음악가는 2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파울 힌데미트
“많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그렇듯, 음악의 구성과 건축의 구성에서 유사함을 본다. 특히 바흐의 수학적 공식은 나에게 흥미가 있다; 포인트와 대위점, 주제에 관한 변주곡과 이 모든 수학적 게임과 탐험이 진행되고 있다; 웅장한 테마가 마지막에 반복되는 구조, 조각들의 순환적 특성이다. 건축가로서 우리는 조화로운 전체 안에서 포인트와 대위점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이클 윌포드 (건축가)
“만약 한 음악가가 인간의 결점 없는 작곡에 가장 가까운 음악가의 이름을 지으라는 요청을 받았다면, 나는 제바스티안 바흐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런 코플런드
“종교가 그 창시자에게 은혜를 입었듯 음악은 바흐에게 은혜를 입었다.”― 로베르트 슈만
“어떻게 비브라토 없이 바흐가 그렇게 많은 아들을 낳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파울 힌데미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프란츠 슈베르트
“바흐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속한다.”― 조지 버나드 쇼
“바흐는 암호의 도움으로 가장 멋진 별들을 찾는 천문학자 같다.”― 프레데리크 쇼팽
“제바스티안 바흐와 모차르트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위대한 표현주의 작곡가가 결코 표현에 형식을 희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급행열차가 치솟을 수 있는 한, 그들의 음악적 형식은 최고로 훌륭하고 만능으로 남아 있다.”― 카미유 생상
“바흐를 공부하라. 거기서 모든 것을 찾을 것이다.― 요하네스 브람스
“음악에 대한 사랑이 반드시 모든 시대의 작곡가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바흐에 대한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드미트리 카발렙스키 (소련의 대표적인 작곡가)
“바흐는 종착역이다. 그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오직 그에게 이른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작곡가들의 태양”― 아우구스투스 프레데릭 크리스토퍼 콜만
“모든시대의 가장 놀랄만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며 음악사상 가장 놀랄만한 기적.”― 리하르트 바그너
“음악의 호메로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Lass mich horen, lass mich fuhlen
Was der Klang zum Herzen spricht;
In des Lebens nun so kuhlen
Tagen spende Warme, Licht.”
“듣게 해주고 느끼게 해주오.
소리가 마음에 속삭이는 것을
생활의 차디찬 나날 속에서
따스함과 빛을 내리시기를”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평균율곡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 바흐에 대한 그의 경외심을 읽을 수 있다.
“바흐는 우주를 바라본다. 그를 경험한 후에, 사람들은 결국 삶에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헬무트 발햐 (오르가니스트)
모든 인간의 감정에 대해 동감을 잘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객관적으로 감정들을 그려낸다.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만 간섭하지는 않는 작곡가다. 인간의 조건과 환경에 대해 과학적이라 할 정도로 연구를 많이 했고 상상력을 동원해 표현했다. 때로는 심각하면서도 톡톡 튀고 즐거운 것이 바흐의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바흐의 음악이 단지 클래식 음악 또는 바로크 시대 작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요마
“지구에서 딱 하나 내놓을 수 있는 음악가가 누구냐 하면 바흐라고 생각합니다.” ― 정경화
“바흐는 그가 죽은 지 거의 300년이 지난 지금도 클래식 음악의 최고 표준이다. …”― BBC
“바흐는 매우 안심할 수 있다. 당신이 흥분하고 있을 때, 베토벤이 아닌 바흐로 당신을 편안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 그는 세상일이 다 잘되고 다 잘될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는 침착함을 가지고 있다. 바흐의 핵심은 영적 차원이다. 그는 우리들 대부분보다 더 경건한 노선을 걷고 있었다. 나에게 바흐는 선견자, 현인, 길을 따라가는 봉화다.”― 낸시 아르겐타 (소프라노)
“내게 바흐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작곡가,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대위점을 창조한 천재다.”― 스티브 라이히
“바흐의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의 음악이 얼마나 철저하게 수학적인 정밀도 면에서 구조화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 내면의 건축의 아름다움은 일종의 우주적 질서, 즉 신의 손길을 드러낸다. 대척점과 조화의 믿을 수 없는 시너지와 수평과 수직이 일관성 있는 전체로 연결되는 방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한편, 이러한 기술적 측면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도 없이, 그의 음악의 순수한 우주적 결과는 가장 신비로운 방법으로 청취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에르키스벤 튀르 (에스토니아 작곡가)
“바흐의 음악은 위대한 감정과 불같은 기질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적인 예술로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작곡의 정상이다. 과거 음악과 자기 시대의 창작물을 종합한 것은 물론 미래에 대한 대담한 비전이기도 하다.”― 진은숙
“바흐에는 찰나에의 집중이 넘치고 있다. 저 위대한 헨델의 빛나는 작품보다도 바흐의 조용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부동의 작곡적 사색과 그 격조 높은 세계에 견주어볼 때는 이상하리만큼 자의적인 작품으로 느껴지기 일쑤이다. 바흐에는 찰나의 집중이 넘치고 있다. 원근의 감각이 동시에 생생하게 눈뜨고 시간과 공상이 우리에게 밀착되어 분방하는 바흐의 음악은 생리적인 확실성과 자연적인 힘을 고루 갖춘 실례이기도 하다. 바흐의 음악은 감성적인 자극을 삼가고, 우리들에게 표면적으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일조차 별로 없다. 그곳에는 강력함과 부드러움, 긴박함과 완화, 벅차게 분출하는 생명력과 심원한 정적인 그 아무것도 모방할 수 없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매일 샤콘느를 연습하십시오. 하지만 50세가 될 때까지 연주하지 마십시오.”― 안드레스 세고비아
“그토록 마르지 않는 영감이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경탄하게 된다. 바흐의 작품들 가운데 ‘행사용 작품들’이나 ‘주문에 의한 작품들’과 그 자신이 마음이 끌려 쓴 작품들을 구분해 내기란 쉽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칸타타들은 ‘마태 수난곡’ 같은 가장 유명한 작품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성악곡의 범주에 넣을 만 하다. 바흐는 타성에 젖어 작곡을 하기도 했고, 같은 제재를 반복해서 다루기도 했지만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또한 우리와 함께 그의 칸타타 작품들을 차례로 연주했거나 녹음해보았던 사람들은 거의 100여 곡이 넘는 칸타타를 들으며 그토록 마르지 않는 독창성과 영감이 한 인간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 바흐 이전의 서양음악이 빗물이라면, 그 빗물이 모여서 거대한 강물을 이루는 시초가 바흐라는 작고 깊은 샘물이다. … 그렇기에 서양음악을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제일 먼저 바흐를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 샘의 깊이를 단번에 알 수는 없다. 모차르트를 듣다 돌아와 다시 듣고, 쇼팽을 듣다 돌아와 다시 듣고, 평생 바흐를 들으며 그 속의 수많은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 맛을 음미해야 한다. 바흐는 음악사에 길이 남을 거장들에게조차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야 할 집이면서, 끝마치지 못한 숙제처럼 늘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존재이다.― 이철재,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 – 클래식 음악, 천천히 깊이 듣는 즐거움》의 챕터 1 도입부 中
“30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영감을 주고, 묘기를 부리며, 우리를 4차원의 존재로 몰아넣는 직업 윤리를 가진, 술 마시고, 격투하는 록스타가 있다.”― 제임스 로데스 (피아니스트)
“내 꼬치꼬치 캐묻는 코로 나는 모든 작곡가에 손을 댔는데, 그들이 세운 집들은 바흐가 토대에서 사용한 정확한 비율로 안정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임스 휴네커 (음악 비평가)
“바흐의 음악은 생각나게 하는 음악이다. 그것은 너를 혼란스럽게 한다. 귀 기울일수록 귀담아듣고 귀 기울일수록 귀담아듣고 귀담아 들을수록 그 속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음악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연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다른 차원의 바흐를 높이 평가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친밀한 음악이 공연장에서 매우 잘 작동하고 모든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미묘한 음악들이 그러한 대중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가 당신을 감동시키고 싶다면, 당신을 울리기 위해, 그는 음악적으로(극적으로가 아니라) 이 일을 한다. 그는 말러처럼 자신이 얼마나 슬픈 존재인지 말하기 보다는 표현성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장치를 사용한다. 바흐의 음악은 음악에 관한 것이다 – 그는 그의 자료에 대해 질문을 한다. 종종 색색의 베이스라인을 보면, 다른 바로크 작곡가에 비해 훨씬 덜 관습적이어서, 그리고 … 기념비적인 구조물들, C단조 Passacaglia 같은 것의 화산 리듬. 아삭아삭한 불협화음은 음악을 거대한 음파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마태 수난곡은? 서양 고전 음악 전체에서 더 강력하고, 더 고통스럽게 움직이는 한 작품이 있을까? 마이클 티펫이 나에게 한 번 말한 것처럼, 우리는 바흐 같은 사람에 비하면 모두 피그미족 같은 사람이다.― 스티브 마티랜드(영국 작곡가)
“창의성은 단지 다르다는 것 이상입니다. 누구나 이상한 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쉽습니다. 어려운 것은 바흐처럼 간단해지는 것입니다. 간단하고,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창의력입니다.”― 찰스 밍거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바흐는 최고의 작곡가예요. 너무나 완벽해요. 모차르트보다도 완벽하죠. 음악 자체가 매우 단순해 보이는데, 깊이 들어가면 아주 복잡해요. 그가 쓴 대위법(둘 이상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작곡 기법)은 완벽하죠. 그런 완벽함 속에서도 연주자의 자유 또한 완벽하게 보장된다는 점이 놀라워요.”― 지용
“인생에서 느끼는 모든 것을 믿을 수는 없지만 음악에는 신(神)이 있습니다. 바흐의 음악은 특히 그렇죠. 자신보다 위대한 존재가 있다는 느낌을 주거든요.”― 머리 페라이어 (피아니스트)
“음악은 우리의 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우리 자신에게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하는 노력입니다. 우리는 바흐의 말을 경청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경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이스 토마스 (의사)
“저는 바흐에게 투표할 것입니다. 그의 음악은 우주에서도 흐를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자랑할 것입니다.”― 루이스 토마스 (의사), 외계 문명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야 할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
“제가 바흐의 음악이 이해가 되었을때, 저는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습니다. 바흐는 제게 제 삶을 음악에 바치도록 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를 그의 세상에 소개한 사람은 바로 그 선생님입니다.”― 니나 시몬
“J.S. 바흐는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 혁신가다. 그는 시대에 비해 매우 진보했다. 그의 음악에는 영적인 깊이가 있다. 여러분은 그것을 들을 수 있고 그것은 명상과 같다.”― 브라이언 윌슨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