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9년 11월 2일, 프랑스의 화가 ‘초기 정물화가’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 (Jean-Baptiste-Siméon Chardin, 1699 ~ 1779) 출생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 (Jean-Baptiste-Siméon Chardin, 1699년 11월 2일 ~ 1779년 12월 6일)은 18세기 프랑스의 화가이다.
샤르댕은 1699년 파리에서 목수인 아버지 장과 어머니 잔 프랑스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 시메옹이며, 간간히 장-바티스트로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 그는 일찍부터 그림그리기에 관심과 재주을 보여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미술학원 상-뤽 아카데미 (Saint-Luc Académie)에 보낸다. 시메옹은 여기서 색채를 섞고 칠하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술을 익히게 되며, 이 화법은 후에 샤르댕의 작품에서 역력히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미술학원에서 장인 자격증을 취득한 후, 샤르댕은 아직 화가로서의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여러 군데 사설학원의 실습과정에 등록하여 화법을 개선하는 데 노력한다.
1728년 젊은 화가들의 전시회에 샤르댕은 여러 작품을 출품하여 화단의 주목을 받게되며, 이를 계기로 같은 해 9월 25일 프랑스 아카데미 (미술분과)에 자신의 작품을 선을 보여 곧바로 분과회원으로 가입된다. 회원가입에서 샤르댕은 동물과 과실의 기교화가라는 별명을 얻게 되지만, 그의 작품은 실제로 이 지칭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
샤르댕은 18세기 프랑스 미술의 세련미와 매력, 우아함을 두루 갖춘 양식을 개발한 미술가였지만 기법과 주제에서는 당대의 화가들과 달랐었는데, 그의 기법은 전통적인 아카데미 교육에 영향을 받지 않은 독학 예술가의 그것이었으며 그의 주제는 주로 정물과 가정생활을 다룬 것이었다. 그는 일상 세계를 발견하여 지칠 줄 모르고 무척 단순하게 그것을 묘사했지만, 그 단순함에는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이 숨어 있었다. 겉보기에 그는 요란한 허식이나 일화, 불필요한 기술적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범한 현실에 생기를 불어넣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샤르댕은 진실한 표현을 통해 절제와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는 건강하고 꾸밈 없는 시적 감흥을 얻었다.
-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 (Jean-Baptiste-Siméon Chardin)
.출생: 1699년 11월 2일, 프랑스 파리 쎈느 가
.사망: 1779년 12월 6일, 프랑스 파리
.예술 사조: 로코코, 바로크, 아카데믹 미술, 사실주의
.작품 시리즈: The Attributes of Civilian and Military Music
.배우자: 마거리트 사인타르 (1731 ~ 1735년)
.자녀: 피에르 장 밥티스트 샤르댕
○ 생애 및 활동
장-시메옹 샤르댕 (Jean-Siméon Chardin, 1699 ~ 1779)은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독창적인 그림을 그렸던 화가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대개 루이 15세 재위 기간 (1715 ~ 1774)과 겹치는데, 이때 프랑스 미술계의 주류는 로코코 (Rococo)라고 불리는, 낙천적인 유머가 담긴 우아하고 장식적인 양식의 미술이었다. 귀족들의 반짝이는 실크 드레스와 섬세한 레이스 장식, 신화 속의 관능적인 누드가 대다수 화가들의 화면을 채우고 있던 이 때 샤르댕은 소박한 부엌 살림을 주제로 한 정물화와, 절제된 부르주아 가정의 일상을 담은 장르화에만 집중했다.
가구 장인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난 샤르댕도 처음에는 역사화 수업을 받았다. 그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친 피에르-자크 카즈 (Pierre-Jacques Cazes), 노엘-니콜라 쿠아펠 (Noël-Nicolas Coypel) 모두 역사화가였고, 샤르댕은 와토를 닮고 싶어했다.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당시 미술계에서 그림은 그 주제에 따라 서열이 정해져 있었고, 이에 따라 화가의 위상과 수입도 차이가 났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던 것은 신과 성자, 영웅의 서사를 펼쳐 보이는 ‘역사화’였고, 그 아래가 왕과 귀족의 위세를 기록한 ‘초상화’, 그 다음이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그린 ‘장르화’였다. 사람 다음가는 위치에 있는 모델은 ‘동물’이었고, 그 아래는 ‘풍경화’, 위계의 밑바닥에는 죽어 있는 사물을 그린 ‘정물화’가 있었다.
샤르댕은 도제 수업을 마친 1724년경부터 정물에 집중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장 인정 받지 못하는 장르인 정물화로 그가 ‘개종’에 가까운 파격적인 방향 전환을 한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의 세대에 파리 화단에는 아카데미의 교육을 받고 배출된 재능 있는 화가들이 많았고, 몇몇은 일찍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들과 비교할 때 샤르댕의 그림은 평범한 수준이었을 것이라 추측은 되고 있다. 즉 로코코 회화 속에서는 인물의 표정, 동작, 옷자락과 대기 등 모든 것이 끊임 없는 ‘움직임’ 속에 있었는데, 샤르댕은 움직이는 것을 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화가는 모든 것을 자기 머리 속에서 찾아 구상을 해야 한다’는 아카데미적 역사화의 대의 역시 그의 기질과 맞지 않았다. 결국 그는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이젤 앞에 놓아두고, 머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정물화라는 정반대의 길을 통해 자기 자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 정물화로의 개종
샤르댕은 1728년에 [가오리 : The Ray]와 [뷔페 : The Buffet]를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 (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de Sculpture)에 제출하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아카데미는 그를 ‘동물과 과일에 재능 있는 화가’라고 기록했다. 두 작품 모두 그의 다른 정물화에 비해 크고 복잡하여, 정물화가로 첫발을 내딛는 샤르댕의 야심을 보여주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아카데미가 소장하고 있다가 대혁명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갔다. 특히 [가오리]는 대중에게 공개된 이 오랜 기간 동안 미술계와 문학계의 많은 인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세잔과 마티스가 이를 베껴 그렸고, 마네와 샤임 수틴도 이 작품을 인용했다. 샤르댕에 대해 특별한 호감을 표했던 드니 디드로와 마르셀 프루스트 등도 이 작품을 특별히 주목한 글을 남겼다.
그림 중앙에 매달린 가오리는 내장이 쏟아져 내릴 듯한 징그러운 모습뿐 아니라, 사람의 눈과 입을 닮은 윗부분이 섬뜩한 느낌을 주며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그 아래 선반 오른쪽에는 주방 용품인 거품 걷어내는 국자, 유약 입힌 도기 주전자, 냄비, 칼 등이 있고 왼쪽에는 음식 재료가 될 굴, 잉어, 파 등이 있다. 그림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모델인 고양이의 바짝 긴장한 모습은 가오리와 함께 이 정물화에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빛이 균일하지 않게 들어오는 갈색조의 벽, 화면과 평행하게 돌출된 돌 선반은 샤르댕이 그의 정물의 무대로 자주 선택한 것이다. 그 위에 요리와 식사의 재료와 도구를 늘어놓고, 부드럽고 섬세한 조명 속에 대상의 질감을 실감나게 살린 것 역시 그의 정물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 구성은 [단식 기간의 식사 The Fast-Day Meal], [주석을 댄 구리 냄비, 후추통, 부추, 달걀 세개와 찜냄비 Tinned Copper Pot, Pepper Box, Leek, Three Eggs and a Casserole] 등과 같은 원숙기 수작들에 비해 번잡하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준다.
- 사물의 감정을 그리다
이 작품들을 비롯한 그의 부엌 정물화는 너무도 소박하고 단순해 보인다. 그 그림 안에는 한눈에 봐서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매일의 요리와 식사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 대부분 작은 화면에 적은 숫자로 그려져 있다.
정물화가 탄생하고 그 안에 세분화된 주제별 전문가가 활약했던 17세기 네덜란드의 작품과 비교하면 그의 정물화가 가진 성격이 더 명확해진다.
그의 정물화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같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장관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네덜란드 작품들과 달리 도상학적으로 분석이 되지도 않아 생명의 무상함 (vanitas), 필멸성 (memento mori), 오감, 사계절 등에 대한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볼 수도 없다.
모를 것도 없고 특별한 뜻도 없는 그의 정물화가 신비로운 것은, 평소에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았던 평범한 것들이, 기품과 위엄을 갖춘 아름다운 대상으로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이루어 낸 구성과 색채, 형태의 정밀한 조화의 결과이다. 그는 대상에 대한 기존의 지식, 다른 작가가 그 대상을 그린 방식을 잊고, 작품을 제작할 때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그리려 했다고 한다.
대상의 정확한 색과 질감, 빛과 그림자의 성질을 파악하고 이를 표현하기 위한 장시간에 걸친 성실한 노력의 결과, 자연에 충실하면서도 (truthful) 격조 있는 아름다움을 가진 (tasteful)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마티스는 샤르댕이 ‘사물의 감정을 그릴 줄 아는 화가’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의 정물화는 관람자들로 하여금 그림 앞에서 숨을 죽이고, 그려진 물건들의 감정을 헤아리고 느껴보는 몽상에 잠기게 하는 힘이 있다.
- 밀도 있고 풍요로운 화면 질감의 비밀
샤르댕이 부엌 정물 외에 많이 그린 것은, 잡아놓은 동물들을 주제로 한 사냥 정물화 (Game Still Life)다.
이 주제 역시 17세기 네덜란드에 기원을 두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우드리 (Oudry)가 이 분야의 전문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샤르댕이 그린 [벽에 매달린 청둥오리와 세비야 오렌지 : A Mallard Drake Hanging on a Wall and a Seville Orange]에서 볼 수 있는 한쪽 발을 묶어 벽에 매달아 놓은 새의 자세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과 우드리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형식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과 비교하면 다른 사냥 정물화들은 지나치게 매끄럽고 객관화되어 차가운 느낌을 준다. 샤르댕은 새로운 주제나 형식을 창안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그려 새로운 종류의 그림을 만들어낸 것이다.
샤르댕은 대상의 숫자를 줄여 화면을 단순화하면서 이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 순수한 진실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화면에는 구성과 색채, 빛과 어둠의 묘사를 통해 리듬감과 균형감이 담기게 했다.
그는 기존의 지식이나 다른 화가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동물의 털이나 새의 깃털을 하나하나 그리지 않고, 물감을 거듭해서 쌓고 붓질에 붓질을 더해 전체적인 덩어리의 사실감을 만들어냈다.
어떤 화가의 그림과도 다른 샤르댕 그림의 질감은 그가 독학으로 개발한 것이다. 여러 물감층이 쌓이고 그 한겹한겹의 색채가 스며 나와서 만들어지는 밀도 있고 풍요로운 질감 (rich impasto)은, ‘수증기가 그림 위에 떠다니거나, 그림에 빛이 뿌려져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이것은 당시의 관람자들에게 마술과 같이 보였다.
샤르댕은 그 마술의 비법을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디드로의 말에 따르면,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본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그림을 그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샤르댕은 분명 빠른 붓질 몇 번으로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천재 화가는 아니었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샤르댕은 이를 극복하고자 성실하고 정직하게 노력했고, 여러 번에 걸쳐 쉽지 않게 움직인 그의 붓은 이런 노력의 흔적이었다. 그의 약점이 개성을 만든 것이다.
- 진지하고 정숙한 가정의 일상
1733년부터 샤르댕은 인물이 포함된 그림, 즉 장르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출신이 아닌데다 낮은 서열의 그림인 정물화만을 그리는 것으로는 예술가로서의 위치뿐 아니라 경제적인 안정도 보장받기 어려웠던 것이 새로운 시도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739년 살롱에 출품한 [시장에서 돌아옴 : The Return from Market]처럼 하인이나 하녀가 있는 부엌의 내부를 그린 작품들은 그의 부엌 정물화의 자연스런 연장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서도 하녀의 앞에 있는 포도주병과 접시들, 그녀 옆의 도기 그릇, 화면 왼쪽 문 너머로 보이는 구리 물통은 그가 정물화에서 자주 그렸던 것들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음식 재료를 사들고 부엌에 들어와 물건을 내려놓는 중이다. 이런 일은 그림으로 그려지기에는 너무도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사로 보인다. 샤르댕은 그가 정물에서 컵이나 파에 정숙한 위엄을 부여했던 것처럼, 이런 흔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에도 장중한 힘과 아름다움을 담았다.
그림 자체는 작지만 화면을 당당히 장악하고 있는 인물은 주목의 가치가 있는 규모를 느끼게 한다. 주인공이 입은 옷의 흰 빛깔은 가장 밝은 빛을 받아 빛나고, 흰색과 함께 샤르댕이 즐겨 쓴 바랜 듯한 옅은 파란색은 그녀의 스카프, 앞치마, 왼쪽 후경 문가에 서 있는 여성의 머리 리본, 그녀 위로 보이는 삼각형 하늘에 사용되어 아름다운 색채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샤르댕의 작품은 똑같거나 비슷한 것이 여러 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모두 화가의 손에 의해 이뤄진 경우도 있고, 다른 사람이 모방한 경우도 있다. 이 작품의 경우는 화가 자신이 똑같은 그림을 4점 만들었고, 현재 3점이 베를린, 오타와, 파리에 남아 있다. (베를린과 오타와에 있는 작품은 1738년으로 서명되어 있고, 루브르 작품은 173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살롱에 출품했던 것은 오타와의 캐나다 국립 미술관 버전이다.) 이렇게 여러 점을 직접 그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장르화가 시장에서 인기를 얻은 것은 사실이다. 스웨덴의 왕녀, 리히텐슈타인의 왕자 등 유럽 각지의 부유한 귀족이 그의 장르화 고객이 되었다.
샤르댕의 장르화는 동판화로도 제작되어 유화를 살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팔려나갔다. 레피시에 (Bernard Lépicié)와 같은 일급 판화가가 이에 참여했으나, 그보다 수준이 낮은 판화가가 불법적으로 만들어 유통시킨 작품도 많았다.
이런 판화들에는 도덕적, 교훈적 설명이 덧붙기도 했는데, 그림과 상관 없는 엉뚱한 글들도 많았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그뢰즈 (Jean-BaptisteGreuze) 등이 그린 교훈적 장르화들이 유행했는데, 판화가들은 샤르댕의 그림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샤르댕의 정물화가 알레고리적 의미를 갖지 않는 것처럼, 그의 장르화는 이야기, 드라마, 교훈이 최소화되어 있거나 아예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장르화 중 일화적이고 교훈적인 의미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보이는 작품은 [식사 기도 : Saying Grace]이다. 이 작품은 샤르댕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그림이기도 하다. 식탁 둘레에 모인 어머니와 두 딸이 주인공이다. 어린 딸은 식사 기도를 하는 중이고, 큰 딸은 음식을 바라보며 기도가 끝나길 기다리고, 어머니는 작은 아이를 주의 깊게 보며 상을 차리고 있다. 식탁보와 인물들의 흰 의상을 빛내는 햇빛이 이 사소한 일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다.
1740년 살롱에 출품되었던 이 작품을 화가는 루이 15세에게 헌정했다. 살롱 전시 때에 별 반응이 없었고, 왕실 소장품이 된 후에도 거의 잊혀졌던 이 그림은, 19세기에 샤르댕이 재발견되면서 각별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즉 타락하고 방탕한 귀족과 대비되는 부르주아 계급의 근면과 절제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해석되고, 이탈리아나 네덜란드와 구별되는 프랑스 회화 자체의 상징으로까지 추앙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의 정물화, 특히 덜 일화적이고 덜 감상적이며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그림도 작가가 1744년에 한 점을 더 만들었고 그것이 현재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있다. 에르미타주 판에는 전경 오른쪽 바닥에 달걀 담긴 냄비가 추가되어 있다).
- 아름다운 몰입의 순간
샤르댕은 남자보다는 여자, 그보다는 아이를 더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 속 어른들은 거의 가정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하고 있고, 아이들은 거의 모두 놀고 있다.
샤르댕은 아이의 놀이 역시 어른의 일처럼 진지하고 엄숙하게 다루고 있다. 그의 그림 속 아이들은 비누 방울을 불거나, 카드를 쌓아 올려 집을 만들거나, [소년과 팽이 : Child with a Top]에서처럼 팽이를 돌리고 있다. 이런 놀이는 짧고 금방 지나가 버리는 어린 시절처럼 덧없는 일이다. 아이는 곧 자라나고, 비누방울은 터지고, 카드로 만든 집은 무너지고, 팽이는 넘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그림들을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상징, 그런 허망한 일에 젊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히 있으나, 그림에서 더 강력하고 매혹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이런 짧은 생명을 가진 것들의 아름다움이다.
[소년과 팽이]에서 책과 펜을 옆으로 치워놓고 돌아가는 팽이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아이는, 다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보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그의 장르화의 인물은 크게 웃거나 떠들지 않는다. 보는 사람의 눈을 의식해 연극을 닮은 과장된 동작을 하지도 않는다. 모두 진지하고 조용하게 자기 생각에 잠겨,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샤르댕의 정교하고 아름답게 구축된 물감은, 이 순수하고 정직하고 고요하고 질서 있는 세계의 평화로운 조화 속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여, 관람자가 그림의 주인공과 함께 명상을 하게 만든다.
샤르댕은 1731년에 결혼해서 같은 해에 아들 장-피에르 (Jean-Pierre)를 얻었다. 아내는 1735년에 죽었고,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역사화가가 되었다.
그 아들은 1754년에 아카데미의 로마상을 수상하여 장학금을 받고 이탈리아로 갔다. 그는 1757년에 친모의 유산 문제로 샤르댕과 다툼을 벌이고, 1762년에는 제노바 해안에서 영국 해적에게 납치되기도 했다가, 1772년에 베네치아의 운하에 빠져 죽었는데 자살로 추정된다. 장-피에르의 작품은 현재 전해지는 것이 없다.
샤르댕은 1744년에 부유한 미망인과 재혼을 했다. 두 번의 결혼에서 딸이 하나씩 태어났으나 모두 어려서 죽었다.
1755년에 샤르댕은 아카데미의 재무 담당으로 선출되어, 특유의 정직과 성실로 이 일을 1774년까지 수행했다. 그는 아주 충실한 아카데미 회원이었다. 아카데미의 교육 방법에는 비판적이었으나 기본적으로 그는 제도를 신뢰했고 기관이 회원에게 주는 위치와 기회에도 만족했다.
- 다시 정물화, 명암과 공기의 마술
1751년부터 샤르댕은 다시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에 신고전주의와 관련된 새 흐름이 생겨나 그의 장르화가 비판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 이를 포기하게 한 이유 중 하나로 추측되고 있다. 안 그래도 오랜 시간 동안 힘들게 작업하는 샤르댕에게 장르화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여 힘에 부쳤을 수도 있다. 재혼과 그림 판매 등으로 생긴 경제적인 여유 또한 이런 전환에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1750년대 이후에 그려진 정물화에는 이전 정물화보다 값비싼 살림살이들이 현저하게 많이 등장한다.
초기부터 샤르댕은 자신이 쓰고 있는 물건들을 그림의 모델로 삼았다. 그가 그린 그릇들은 그림이 그려진 50여년의 시간 동안의 유행을 반영한다. 포도주병 같은 경우는 배가 불룩한 모양이었다가 점차 원통형에 가까워지는 것을 그림을 보고 알 수 있을 정도다.
[식사 기도]에 등장하는 흰색 접시와 같은 주석 유약이 입혀진 연질 자기는 프랑스 샹티이 (Chantilly)에서 만든 것이고, 가끔 등장하는 중국 자기는 청나라에서 수출용으로 만든 것이다.
[브리오슈 : The Brioche] 왼쪽에 보이는 수프 그릇은 독일의 마이센 (Meissen) 자기이다. 이밖에도 일본의 이마리 (Imari) 자기 패턴을 모방한 프랑스 자기 컵 등이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이렇게 아무 뜻이 없이 그려진 듯한 그의 그릇들이 18세기 유럽의 취향 변화, 유행, 산업의 발달을 보여주며, 사라져 버린 생활 양식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려진 대상의 가격이나 품질이 높아진 것 외에, 후기 정물화는 보다 세련된 붓질과 섬세한 명암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그는 특유의 임파스토와 인상적인 명암법 때문에 렘브란트와 자주 비교되곤 했는데, 실제로 두 화가 작품의 화면 질감이나 명암법은 차이가 많다. 최근에는 그의 명암법이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베로네세와 연관된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브리오슈]에는 이국적 과일과 진귀한 물건들이 등장한다. 앞서 말한 마이센 수프 그릇 (tureen)뿐 아니라 금도금한 장식이 있는 보헤미아 스타일의 프랑스 로랭 (Lorraine)산 유리 술병 (liquer decanter), 흰 꽃망울이 매달린 오렌지 가지, 디저트로 먹는 브리오슈라는 빵 등이 서로 다른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
[은 술잔 : The Silver Goblet] 에는 재질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함께 다양한 빛에 대한 화가의 관심과 이의 효과적인 처리를 볼 수 있다. 그림에는 직접 들어오는 빛, 반사된 빛, 다른 물질을 투과한 빛 등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물건들을 둘러싼 빈 공간을 채운 공기와 수증기도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되고 있다.
- 파스텔 초상화, 많이 본 눈
1770년대 들어 샤르댕의 눈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납이 포함된 안료를 사용했던 18세기 유화가 눈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모두 그가 그림을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파스텔화에 도전하여 1771년 살롱부터 파스텔 초상화를 출품하기 시작했다.
18세기 프랑스 미술계에는 모리스-켕탱 드 라 투르 (Maurice-Quentin de La Tour) 등 훌륭한 파스텔 화가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모두 초상화를 그렸다. 샤르댕이 파스텔로 초상화를 그린 데는, 같은 주제로 이들과 능력을 겨뤄보고자 했던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드로는 샤르댕의 파스텔 초상화가 그의 유화처럼 ‘대담하고 확신에 차고 마술적’인 걸작이라고 칭송했다. 파스텔 자화상에서 샤르댕은 까다롭고 특이한, 약간 웃기는 할머니 같아 보이는 나이트캡과 리본, 햇빛 가리개, 안경을 착용한 모습이다. 프루스트는 이 자화상의 ‘안경 너머 흐린 눈은 많이 보고, 많이 웃고, 많이 사랑해 본 눈’이라고 했다. 화가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안다. 그의 옷은 낡았고 피부는 늙었다.
공쿠르 형제는 [샤르댕 부인의 초상] 얼굴 피부가 ‘겨울을 지낸 과일’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년의 이러한 특징을 화가는 모방할 수 없는 기술로, 대담하고 자유롭게 그려내 색채주의자의 역작을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이 두 초상에서 색채 다발로 표현된 다양한 빛의 묘사는 아름답고, 모델이 보여주는 소박한 솔직함은 감동적이다.
샤르댕은 1779년에 만 여든의 나이로 루브르의 거처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존경과 인기를 누렸으나 사망 직후 신고전주의가 득세하는 분위기에서는 거의 잊혀진 작가가 되었다.
그러다 1840년대에 사실주의 비평가 샹플뢰리, 테오필 토레 등에 의해 그의 명성이 부활되었다. 토레는 그를 그 시대를 지배한 로코코라는 가식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을 따르지 않은 사실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로 평가했다.
1850년대 이후 루브르가 그의 작품들을 많이 구입하면서 그의 명성은 공고해졌고, 1860년대에는 공쿠르 형제가 그의 작품에 대한 학술적 논문을 출판했다. 19세기에 정물화를 그린 쿠르베, 마네, 모네, 세잔의 밑바탕에는 샤르댕의 작품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자연 관찰에 기반한 미술을 좋아하는 사실주의자들뿐 아니라 형식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호소력이 있었다.
샤르댕은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작품에는 18세기 미술이 가진 많은 것이 없었다. 도덕적 교훈주의, 관능적인 유혹, 로코코의 낭만적인 환상, 웃음과 소리, 내러티브와 이념, 상징과 알레고리,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는 스펙타클 등이 샤르댕 그림에는 없다. 대신 그는 순진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박하고 진지하게 눈에 보이는 것에 충실했다. 이것은 화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술을 둘러싼 제도에 대한 파괴를 시작한 것이었고, 그의 시대를 벗어나 근대의 문을 연 행위였다.
1979년에 화가의 서거 2백주년을 맞아 파리, 보스톤, 클리블랜드를 순회하면 열린 전시에서 그의 전기적 사항들이 많이 정리되었다.
탄생 3백주년을 맞는 1999년에 준비되어 2000년까지 파리, 뒤셀도르프, 런던, 뉴욕에서 열린 전시에도 새로운 연구와 발견이 반영되었다. (글 : 네이버 캐스트 김진희)
○ 작품경향과 영향
세잔이 말년에 인상주의 화풍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중점적으로 정물화를 (약 200여 점) 그린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세잔은 아직 인상주의 화가 마네와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영향 밑에서 세잔 고유의 정물화 세계를 발견하였지만, 역사적으로 세잔의 정물화는 샤르댕의 정물화 없이는 생겨날 수 없었다.
1860년에 에콜 프랑스 (L’Ecole française)에 총 41점의 샤르댕의 정물화와 인물화가 전시됨으로써 처음으로 샤르댕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여기에서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화가들 프랑스와 보뱅, 필리프 루소, 앙트완 볼롱 등이 적지 않은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3년 공꾸르 형제가 예술잡지 가제트에 샤르댕에 관해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샤르댕은 19세기 말에 프랑스 화단에서 재발견 및 평가되었으며,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샤르댕의 작품 구입에 결정적인 동기를 주었다.
○ 작품
그의 입선작 <붉은 가오리>는 주제는 빈약하나, 강렬한 색채와 미묘한 구성이 그 위대성을 나타낸 작품이다.
그 후 그는 성실과 정적에 가득 찬 프랑스 사람들의 가정 생활을 그렸다.
필치는 면밀하고 무게가 있으며, 화면은 기름지고 풍부하여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풍긴다.
색채도 교묘히 사용하여 명암의 색조를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작품에는 <아침 기도>, <가르다의 성> 등이 있다.
Dead Rabbit and Hunting Gear (ca. 1727), oil on canvas., 81 x 65 cm., Louvre
The Ray (1727), oil on canvas, 114.5 x 146 cm., Louvre
Glass Flask and Fruit (ca. 1728), oil on canvas, 55.7 x 46 cm.,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The Attributes of Exploration (1731), oil on canvas, 141 x 219 cm., Musée Jacquemart-André
Sealing the Letter (1733), oil on canvas, 146 x 147 cm., Schloss Charlottenburg
Soap Bubbles (ca.1733-1734), oil on canvas, 93 x 74.6 cm., National Gallery of Art
The Drawing Lesson (ca. 1734), oil on canvas, 41 × 47 cm., Tokyo Fuji Art Museum
The Draftsman (1737), oil on canvas, 80 x 65 cm., Louvre
Woman Cleaning Turnips (ca. 1738), oil on canvas, 46.2 x 37 cm., Alte Pinakothek
The Return from the Market (1738-39), oil on canvas, 47 x 38 cm., Louvre
The Governess (1739), oil on canvas, 47 x 38 cm., National Gallery of Canada
Portrait of Auguste Gabriel Godefroy (1741), oil on canvas, 64.5 x 76.5 cm., São Paulo Museum of Art
Saying Grace (1744), oil on canvas, 50 x 38 cm., Hermitage Museum
The Attentive Nurse (1747), oil on canvas, 46.2 x 37 cm., National Gallery of Art
The Good Education (ca. 1753), oil on canvas, 43 x 47.3 cm., Museum of Fine Arts, Houston
The Preparations of a Lunch (1756), oil on canvas, 38 × 46 cm., Musée des Beaux-Arts de Carcassonne
A Basket of Wild Strawberries (ca, 1760), oil on canvas, 38 x 46 cm., private collection
La Brioche (1763), oil on canvas, 47 x 56 cm., Louvre
Basket of Plums (1765), oil on canvas, 32.4 x 41.9 cm., Chrysler Museum of Art
Still Life with Attributes of the Arts (1766), oil on canvas, 112 x 140.5 cm., Hermitage Museum
Basket of Peaches, with Walnuts, Knife and Glass of Wine (1768), oil on canvas, 32 x 39 cm., Louvre
Still Life with Fish and Vegetables (1769), oil on canvas, 68.6 x 58.4 cm., J. Paul Getty Museum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