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년 1월 24일, 독일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 / 프리드리히 대왕 (Friedrich II, 1712 ~ 1786) 출생
프리드리히 2세 (독: Friedrich II, 1712년 1월 24일 ~ 1786년 8월 17일)는 독일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이다 (재위 : 1740년 5월 31일 ~ 1786년 8월 17일). 종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치고 재판과정에서 고문을 근절한 계몽군주였다.
국가를 통치하고 인재를 기용하는 것과 군대 조직과 군대의 지휘, 정복전쟁 지휘를 직접 담당하는 등의 역할을 모두 빈틈없이 해결했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합리적인 국가경영을 발휘해 프로이센을 당시 유럽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플루트 연주 등 예술적 재능과 관심까지 겸비하고 있었기에 계몽전제군주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또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독일 제국 내의 프로이센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오스트리아와 주변 강국에 맞선 외교전략과 전쟁을 통해 프로이센의 영토를 확장하고 유럽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만든 특출한 군사 전략가였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또한 군사 병력을 위해 국민징병제를 실시해 프로이센 남자들만 군입대를 시켜 군사훈련을 강화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갈등이 극심했던 독일내 왕국, 공국들과는 다른, 모든 종교에 관용적인 정책을 폈고 보통교육을 확대했으며 성문헌법 제정작업에도 참여했다. 정치분야에서는 스스로를 국가의 첫 번째 종이라고 자처하면서 전제정치에 인간적인 자비로움을 접목시키려고 시도해 개화된 독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샤를마뉴, 나폴레옹과 함께 유럽의 위대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 (Friedrich der Große, Friedrich der Grosse, 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 (honor of Frederick) 등으로 불리게 된다.
–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별호: 대왕 (der Große, 데어 그로세)
.출생: 1712년 1월 24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786년 8월 17일,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매장지: 포츠담 상수시 궁전
.가문: 호엔촐레른
.부모: 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모) 조피 도로테아 폰 하노버 왕녀
.배우자: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베페른
.종교: 칼뱅교
* 프로이센 국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재위: 1740년 5월 31일 ~ 1786년 8월 17일
.전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후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 군사 경력
.복무: 프로이센 왕국
.복무기간: 1730년 11월-1786년 8월 17일
.참전: 7년전쟁,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국왕, 프리드리히 2세 (재위 1740 ~ 1786)는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 (Friedrich der Große)으로도 불린다. 영문 표기는 Frederick the Great, 라틴어로는 Fredericus Rex이다.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이다. 계몽 군주라는 단어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치에 있어서는 ‘반 (反) 마키아벨리론’을 저술하여 군림하는 군주가 아닌 봉사하는 군주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국가와 신민에 대한 프리드리히의 봉사라는 의지를 실현하여 합리적인 국가 운영을 통해 프로이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이러한 국력 안정을 바탕으로 선왕이 육성한 강력한 군대를 활용해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였고 또한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프리드리히가 즉위할 당시 독일의 변방 국가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의 치세를 거치면서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지닌 유럽 대표 강대국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현재까지도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칭송 받고 있다.
○ 생애 및 활동
프리드리히의 생애를 요약하자면 ‘배경, 실력 등을 모두를 갖춘 18세기 유럽의 계몽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유년기와 청년기를 견뎌내자 장년기에 이르러 결정적인 상황에서 프로이센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 어린 시절
프로이센 왕국의 두번째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그의 왕비 조피 도로테아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다만 형이 되는 장남과 차남은 영유아기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일찍 사망해, 삼남인 프리드리히가 왕세자가 된다. 소년 시절 어머니의 배려로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아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문화에 심취하여 독일 문화를 경멸하게 되었다. 동시에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 누나에게 꽃 같은 건 싫고 북치고 놀겠다고 해서 부왕을 흐뭇하게 했던 활달한 아이였다. 다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군사학을 배우면서도 문학과 음악 등에도 관심을 두었기에 무인됨만을 강조한 부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성장하는 동안 부왕의 피해망상과 정신착란으로 인해 폭력과 학대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잦아지고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하지만 그는 결코 호엔촐레른 집안과 프로이센 왕국의 전통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왕위 계승자로서 소년시절부터 힘든 군사훈련을 묵묵히 받았으며, 타고난 재능으로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이후 영국의 공주였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는 프로이센과 영국의 동맹 강화를 위해, 프리드리히 2세와 영국의 아멜리아 공주간의 혼약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 2세가 영국으로부터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는 이유로 괘씸하게 여겨서, 영국에게 베르크와 윌리히 공작령에 대해 누가 봐도 무리한 승계권을 요구하며 혼담을 거부한다. 다만 처음부터 반대한 건 아니고 영국-프로이센이 급격히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에서 그 결혼은 안된다며 결사 반대한데다, 그대신 영국이 꺼려하던 베르크 공국의 승계권을 적극 지지하겠다고 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넘어간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런 상황에서 똑같이 영국 왕실과 혼담을 주고 받던 누이 빌헬미네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이에 또 자극받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가족과 떨어져 사냥용 궁전에서 살라며 출궁시켜버린다.
-한스 헤르만 폰 카테와의 만남
그런데 거기서 프리드리히 2세는 한스 헤르만 폰 카테를 친구이상의 관계로 만난다. 폰 카테 스캔들은 프리드리히 2세의 인생에 있어 크나큰 사건이었다. 이 스캔들을 통해 프리드리히 2세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 다 알게 되었고, 이는 프리드리히가 성공적인 군주가 되고나서도 여전했다. 프리드리히 2세 주변의 예술가들이나 주치의들, 심지어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살기까지 했던 볼테르는 자신의 저서에 이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18세가 되던 해, 폰 카테와 다른 귀족 장교 1명과 함께 어머니의 친정인 영국 궁정으로 탈주하려다 붙잡혀 감금당했다. 친구 한 명은 영국으로 탈출하고, 폰 카테는 붙잡혔는데,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는 재판이 불가능했지만 함께 체포된 폰 카테에게는 ‘탈영’을 죄목으로 2년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이미 둘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왕의 권한으로 이 판결을 번복하고 폰 카테를 참수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 2세도 왕위 계승권을 비롯한 모든 신분을 박탈한 뒤 사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말류로 프리드리히 2세는 요새에 감금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하자마자 내린 첫 포고령은 고문의 폐지와 법관의 독립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중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까지 이 일에 개입해서 ‘왕족에 대한 재판은 제국 의회만이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폭주를 막았기에 프리드리히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때 자신을 살려준 황제 카를 6세가 바로 프리드리히 자신과 숙적으로 평생 동안 싸웠던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였다.
– 베를린으로 귀환과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 결혼
프리드리히 2세는 몇년 후 누이 빌헬미네의 결혼식을 위해 베를린에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기 전까지 폰 카테가 처형당한 퀴스트린 요새에서 유배되다시피 살아야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아들의 결혼 상대를 고려하는 도중에,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청혼한다. 결혼하게 되면 왕위계승권도 포기하고 종교도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제안했는데 이는 당시에 큰 스캔들이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카를 6세는 프리드리히의 청혼을 매우 마음에 들어하면서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프로이센에서는 왕세자가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로 도망가겠다고 선언한 모양이라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결사반대해서 이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고 대신 사부아 공자 외젠의 제안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신교 계열 외사촌이자 영국 왕실 하노버 가문의 방계 집안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Braunschweig – Wolfenbüttel) 가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와 결혼하였다. 훗날 프리드리히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이 가문과 혼인하면서 겹겹사돈을 맺었다.
이 결혼은 오스트리아와의 우호관계를 위해 진행된 거였다. 그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장인은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였으며 그의 처남들 역시 오스트리아에서 군인으로 복무 중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군주 가문의 자제라 하더라도 모국이 이름 없는 소국일 경우 큰 나라의 궁정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처남들이 휘하 장군으로 큰 활약을 했으나 전쟁 후의 불화로 인해 프로이센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던지라 엘리자베트 왕비를 사랑하지 않아 평생토록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였다. 프리드리히는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의무에 따라 결혼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이에는 사랑도 우정도 있을 수 없다. 차라리 자살하고 싶다’고 썼다. 결혼 직후부터 동침하지 않고 별거했으며 왕위 즉위 후에는 아예 아내를 베를린의 별궁에 거주케 하며 잘 만나지도 않았다. 7년 전쟁 이후 몇 년 만에 만났을 때에는 ‘살이 좀 찐 것 같다’는 말만 전했다고 하며, 이러한 냉랭함으로 인해 둘 사이에 자녀가 태어나지 않아 결국 조카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렇지만 아내 엘리자베트의 생일만은 꼭 참석했다고 한다. 그나마 결혼의 대가로 부왕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건강이 좋지 않아 누워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라인스베르크 별궁에서 지내며 독서와 음악을 즐기면서 그동안의 울분을 달랬다. 나중에 아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이때의 시절을 가장 좋았을 때라고 회고했다.
– 근면하고 현명한 군주
길고 우울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살아야 했던 왕세자였지만, 프리드리히는 정치철학과 합리적인 사고에 있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정치에 관한 저술은 아마추어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프랑스의 볼테르와 서신 왕래를 하며 저술한 ‘반마키아벨리론’에서 프리드리히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데, 자신이 쓴 책의 내용처럼 프리드리히 2세는 합리적인 사고와 “국가에 봉사하는 태도”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국왕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또한 부지런히 일하였으며, 관료 조직의 규모를 축소시키되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것은 당시까지도 군림하는 군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와 같은 주변 유럽 국가의 군주들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모습이었다. 또한 과학의 발달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 노력했으며, 이처럼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행보를 보임에 따라 여전히 지속되던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을 피해 유럽 각지의 저명한 학자와 유능한 인재들이 프로이센의 날개 아래로 모여들어 프리드리히가 역설한 강력한 국가의 체계를 뒷받침할 수 있는 탄탄한 지식 기반을 이루었다.
게다가,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비록 아들과 부하관리들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아버지이자 왕이었지만, 강한 군사력을 육성하고 아울러, 근면함을 강조했던 국가운영을 통해 많은 유산과 8만에 이르는 군사력을 남겨주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수도인 베를린을 화려하게 건설하는 한편, 국방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 덕에 프리드리히 2세 즉위 직후 8만 명 정도였던 프로이센의 군대는 총 19만여 명에 이를 만큼 거대하게 성장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럽 정복을 꿈꾸는 타 국가에 대한 예방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 18세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과 7년전쟁에서 유럽을 뒤흔든 명장
사춘기 시절 감수성이 넘치는 소년이었던 프리드리히는 왕위에 즉위하자 냉철하고 과감한 결단력과 행동력을 보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즉위하자마자 같은 시기에 오스트리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제로 즉위하자 이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 ~ 1748)을 주도하여 일으켰다. 7년에 걸친 전쟁의 결과로 공업이 발달한 부유한 슐레지엔 지역을 오스트리아로부터 획득했다. 이 전쟁을 통해 독일의 작은 연방국이었던 프로이센은 단숨에 유럽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프리드리히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겸비한 젊은 명군주로 전 유럽 시민들에게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로이센은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작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대승에 고무된 프리드리히가 호엔프리트베르크 행진곡 (Der Hohenfriedberger Marsch)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이 군가는 사람들이 18세기 프로이센군이라면 바로 떠올리는 유명한 곡 중 하나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포츠담에 ‘상수시 궁전’으로 불리는 별궁을 세우고 학자, 문인과 함께 토론을 즐겼으며 작가 볼테르를 불러 상주하도록 했던 때도 있었다. 볼테르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개인적 호감을 보이던 프리드리히 2세는 볼테르를 상수시 궁전으로 초대해 지내게 했으나, 곧 볼테르가 같이 살기에 굉장히 피곤한 사람임을 깨달았고, 결국 볼테르가 프로이센 학술원장과 다툼이 있고 난 뒤에야 출궁을 허락하였다. 둘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며 좋은 친구로 남기로 하고, 50년 지기의 친구가 되었다. 상수시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같은 거대한 궁전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으며, 프리드리히는 이 곳에서 시종 몇 명과 함께 검소하게 지냈다. 또한 베를린 시내에 국민들을 위한 오페라 하우스를 지어 국민들도 품격 높은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오페라 하우스는 왕과 귀족을 위한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또한 프리드리히 자신은 불가지론자로 여생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성 헤드비히 성당을 지어 종교에 대한 관용을 보이기도 했다.
.7년 전쟁
그러나 프로이센의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프로이센에 패배한 오스트리아에 실망을 느낀 영국은 든든한 동맹을 찾는 프로이센과 서로 이해가 일치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이해가 일치하는 구도가 형성되어 결국 프로이센과 영국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게 되는 이른바 동맹의 역전이 벌어졌다 (이 시기 이전까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다투던 전통의 강대국이자 라이벌이었다). 이 동맹에 프리드리히를 무척 싫어한 옐리자베타 여제의 러시아 제국, 한 때 프로이센의 편을 들었던 스웨덴도 가담한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모였다 하여 삼부인 동맹이라고도 한다. 특히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획득을 위한 다방면의 물질적 · 군사적 기반이 필요했기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결국, 1756년 영국령 미노르카 섬에서 일어난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 (미노르카 해전)를 시작으로 7년 전쟁이 발발하고, 북아메리카와 인도 등지에서는 프랑스&스페인 대 영국,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 작센, 러시아, 스웨덴 대 프로이센, 하노버, 헤센, 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충돌했다. 오스트리아를 초반에 굴복시키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진군한 프로이센군은 로보지츠, 라이헨베르크, 프라하 등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연파하며 보헤미아로 진입했으나 콜린 전투에서 패배하여 오스트리아를 무릎 꿇리지 못했고, 이 해 여름 동안 전병력의 1/3을 잃으면서 위기에 몰리게 된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인 1757년, 로스바흐에서는 42,000명의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22,000명의 병력으로, 로이텐에서는 8만이 넘는 오스트리아군을 36,000명의 병력으로 철저히 박살내는 신기에 가까운 군사적 능력을 선보였다. 이 격전의 와중에도 프로이센군이 입은 피해는 상대의 절반 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쪽의 러시아, 서쪽의 프랑스, 북쪽의 스웨덴이 각각 동시다발적으로 진격해오고, 설상가상으로 오스트리아가 남쪽에서 몰려오자 조른도르프 전투부터 삐긋거리기 시작하더니 호크키르히 전투, 카이 전투에서 연패했고, 이 연패에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쿠네르스도르프 전투로 51,000명의 프로이센군이 6만 명 가까운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무참히 패배했다. 프리드리히 본인도 이 전투에서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고, 포로로 잡힐 뻔도 하다가 기병대 장교가 가까스로 구출해 탈출했다.
이 와중에 동맹국인 영국이 내각 교체로 인해 프로이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사태가 겹치면서 말 그대로 무참히 당했다. 결국 전 국토가 유린당하면서 수도 베를린도 함락당하고 그 와중에 리그니츠와 토르가우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분전하였으나 압도적인 국력 차로 찍어누르는 군사 천재인 프리드리히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프리드리히 자신은 쫓기게 되어 자살할 생각까지 하는 등, 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어려운 순간이었으나,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급서한 이후 1762년에 즉위한 독일 출신의 표트르 3세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것이다. 즉위하기 전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을 지지해왔던 표트르 3세는 제위에 오르자 전쟁 이전의 영토를 기준으로 한 화의를 맺자고 제의했고, 이로써 프리드리히는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여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다음 해에 이르러 7년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승리를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으로 칭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식민지 전쟁을 위해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유럽에서 일찌감치 손을 떼는 등 유럽 전선의 판세 자체를 뒤엎었다. 그러나 식민지 쟁탈전에서는 오히려 패배의 상징이 되어 퀘벡 지역을 포함한 많은 해외 영토를 상실,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 다만 승리한 영국의 부담도 만만치 않아, 갑자기 높아진 조세 부담에 대한 북미 식민지 주민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해 보스턴 차 사건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1775년에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 전쟁들 이후
이후 폴란드 영토 분할에 참여하고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 참가하는 등 프로이센을 유럽 북부의 최강자로 자리매김시켰다. 이처럼 화려한 전적은 단순히 군사력의 승리로만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학술, 교육, 복지 등을 크게 발전시켜 프로이센을 단순한 군사국가가 아닌 진정한 중유럽의 강국으로 끌어올린 결과이기도 했으며 계몽군주답게 미국 독립전쟁 때 자신의 장교들을 파견, 대륙군을 크게 강화하는데도 한 몫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이 대표적이다.
1772년에는 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게서 서프로이센을 뜯어내며 왕국의 숙원이던 브란덴부르크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잇는 과업을 달성했으며 ‘프로이센 왕국 국왕’으로서의 칭호도 프로이센에서의 왕 (König in Preußen)에서 프로이센의’ 왕 (König von Preußen)으로 바꾸었다. 대왕이라는 칭호도 자칭이 아닌 국민들이 헌사한 것이다.
1786년, 노년의 몸을 이끌고 직접 군대를 검열하던 중 폭우를 맞고 발병한 폐렴으로 인해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가 사망하자 갓 독립한 미국은 조기를 올리고 예포를 쐈으며,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는 어머니의 적이었음에도 “이제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라는 말로 심정을 대신했다. 이후 유럽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지도력을 본받는 이들이 매우 많이 양산되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프랑스의 나폴레옹 등이다. 심지어 먼 훗날 히틀러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그리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프리드리히 대왕을 본받았다.
○ 업적 및 비판
군사적 소질 외에 통치술, 용인술과 라틴어, 문학, 시, 음악 등의 예술에도 두루 관심을 보인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국가를 통치하고 군대 조직 및 정복전쟁 지휘를 직접 담당하는 등 1인 3역을 훌륭히 수행하여 나폴레옹과 함께 역사적으로 위대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또한 종교나 인종을 불문한 인재 채용이 높이 평가된다.
모든 종교에 관용적인 정책을 폈고 보통교육을 확대한 점이 그의 치적으로 기억된다. 또한 그는 프로이센 왕국 중심의 독일 재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로도 평가된다.
프리드리히는 독일에서 최고의 군주로 칭송받는 위인이지만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비판점은 독선적인 국정 운영과 7년 전쟁에서의 처신에 집중되어 있다.
일단, 프리드리히의 통치는 당대의 군주치고도 상당히 독선적이었다. 이는 당대 프로이센이 워낙에 중앙집권적인 군국주의 국가였던 데다가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부터 전제적인 정치 구조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의 독단성은 말년에 더욱 심각해졌다. 이는 그가 7년 전쟁 이후 유럽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군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7년 전쟁에서의 그의 업적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평가도 있다.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승리는 프리드리히의 통치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갑작스러운 시운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당대 프로이센군이 유럽에서 손꼽히는 수준의 강군이었고, 프리드리히 자신도 유럽 최고의 지휘관이었음은 사실이다. 이는 7년 전쟁 초반에 프로이센군이 보여준 압도적인 전과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이 결코 오스트리아-러시아-프랑스 연합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반 승세에도 불구하고 물량이 부족한 프로이센은 전쟁 중기부터 계속해서 밀리기 시작했다. 이내 러시아의 차르가 바뀌기 전까지 프로이센은 사실상 멸망 직전에 몰려있었다. 프로이센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의 황제가 바뀐 이후 러시아와 프랑스가 전선에서 이탈한 이후였다. 이는 순전히 프리드리히의 처신과는 무관한 역사적인 시운이었다.
○ 기타
그의 정책 중 전통과 구습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태도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형성된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에 대한 반발심리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그러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를 닮아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이었던 성격적 측면도 지적되고 있다.
– 인간에 대한 불신
그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은 불행했다. 철두철미한 실용주의에다 독선적인 성격의 군국주의자인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들의 예술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리드리히는 어려서부터 군사훈련과 루터파 교리가 주종을 이루는 스파르타식 교육, 훈련 이외에는 다른 학문이나 취미생활은 엄격히 통제당했다. 그는 아버지의 이러한 취미, 학문에 대한 관심을 억압하는 것에 불만이었다.
그는 라틴어 · 시 · 철학 · 음악 등의 분야에 취미를 갖고 있었고, 볼테르 등과도 연락하였으며 플룻연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와 비발디 음악에도 두루 정통했다. 청소년기 무렵의 그가 라틴어 · 시 · 철학 · 음악 등 정서적인 분야에 취미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반발심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전통과 구습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그의 반항적 행동은 아버지를 실망시켜 더욱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었고 결국 부자간의 거리는 멀어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애초에 품었던 사랑이나 신뢰 대신에 증오만 쌓여갔으며, 아들 또한 끝없는 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반항은 오래 지속되었다. 그럴수록 아버지의 노여움은 병적으로 커져갔다.
프리드리히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주변 신하들, 영국과 독일 내 하노버 왕실의 외척들로부터도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노버 왕가는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독일의 하노버 공국의 대공위도 갖고 있었기에 그는 수시로 외가쪽 외척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친척, 외척들과도 별로 상종하지 않았다.
– 사상적 측면
그는 군주의 덕목으로 자비·정의·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군주의 윤리로 설정하였다. 또한 ‘군주에게는 개인적인 원수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과, ‘군주는 국가의 제일의 종이다.’라는 사상을 피력했다. ‘군주는 국가 최고의 종’이라는 신념은 명언으로 회자화 되기도 하였다.
“통치자는 국가의 첫 번째 종복 (premier domestique)이다. 그가 대우를 잘 받아야 자신이 맡은 직무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통치자는 국가의 번영을 위해 효율적으로 일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_ 유언장에 프리드리히 본인이 직접 저술한 대목. 한국에서는 흔히 “과인은 국가에서 첫 번째 심부름꾼이다.”라는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 저술
주요저서로 ‘반 (反) 마키아벨리론’ (Anti machiavelli)이 있으며, ‘호엔프리트베르크 행진곡’ (Der Hohenfriedberger Marsch)을 작곡하기도 했다.
* Works by Frederick the Great
– Selected works in English
The History of My Own Times. Posthumous Works of Frederic II. King of Prussia. 1. Translated by Holcroft, Thomas. London: G.G.J & J. Robinson. 1789 [1746].
The History of the Seven Years War, Part I. Posthumous Works of Frederic II. King of Prussia. 2. Translated by Holcroft, Thomas. London: G.G.J & J. Robinson. 1789 [1788].
The History of the Seven Years War, Part 2. Posthumous Works of Frederic II. King of Prussia. 3. Translated by Holcroft, Thomas. London: G.G.J & J. Robinson. 1789 [1788].
Memoirs from the Peace of Hubertsburg to the Partition of Poland. Posthumous Works of Frederic II. King of Prussia. 4. Translated by Holcroft, Thomas. London: G.G.J & J. Robinson. 1789 [1788].
Military Instructions from the King of Prussia to His Generals. Translated by Foster, T. London: J.Cruttwell. 1818 [1747].
Memoirs of the House of Brandenburg to Which are Added Four Dissertations. London: J. Nourse. 1758 [1750].
– Collections
Preuss, J. D. E, ed. (1846–1857). Oeuvres de Frédéric Le Grand [Works of Frederick the Great] (in French). (31 vols.)
Droysen, Johann Gustav, ed. (1879–1939). Politische Correspondenz Friedrich’s des Großen [Political Correspondence of Frederick the Great] (in German). (46 vols.)
– Editions of music
Spitta, Philipp, ed. (1889). Musikalische Werke: Friedrichs des Grossen [Musical works: Frederick the Great] (in German). i–iii. Leipzig: Breitkopf & Härtel. O.
Lensewski, Gustav, ed. (1925). Friedrich der Grosse: Kompositionen [Friedrich the Great: Compositions] (in German). Berlin.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