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2년 4월 5일, 프랑스의 로코코 화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Honoré Fragonard, 1732 ~ 1806) 출생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Honoré Fragonard, 1732년 4월 5일 ~ 1806년 8월 22일 파리)는 18세기 프랑스 화가이자 판화 제작자이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Honoré Fragonard, 1732 ~ 1806)는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마지막 대가이다. 대혁명의 미술 양식이 될 신고전주의가 프랑스 화단에서 힘을 얻어가던 시기인 1760년대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나 ‘가장 로코코적인 화가’로 여겨지고 있는 그의 화폭에는, 혁명으로 몰락하기 직전 프랑스 귀족 사회의 문화와 취향, 감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시기에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 (Les liaisons dangereuses)가 잘 보여주듯이 그의 시대는 귀족의 시대, 여성의 시대이자 ‘특수하게 양식화된 연애’인 갈랑트리 (galanterie)의 시대였다.
로코코는 서양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 양식인데, 프라고나르는 ‘장르 갈랑트’ (genre galante)라고 불린 특유의 연애 풍속화를 통해서, ‘우아하고 즐거운 놀이로서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주저 없이 대담하게, 신화의 외피를 씌우지 않고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섬세하게 빛나는 색채와 빠르고 가벼운 붓자국이 함께 유동하는 그의 화폭 안에서는 ‘배우’같은 인물들이, ‘무대’같은 자연과 실내를 배경으로, ‘연극’같은 인생을, 그 짧고 아름답고 덧없는 ‘순간’을, 즐기고 있다.
프라고나르의 인생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다.
그는 국가나 교회 등 공적인 기관을 위한 작업을 거의 하지 않은데다, 작품에 완성한 연도를 적은 경우가 드물어, 작품의 진위와 제작 시기 등 기본적인 정보조차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는 기독교, 신화, 목가, 초상, 실내 정경, 풍경, 동물, 책의 삽화 등 다양한 주제를 엄청나게 많은 수의 회화, 드로잉, 판화 등의 매체로 다루었는데, 그 양식과 기법의 변화 폭이 매우 넓다. 연구를 어렵게 하는 것은 그의 화풍이 여느 화가들처럼 일관된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발군의 테크닉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에서 활약한 수많은 선배화가들 양식을 폭넓게 소화하고 변형하면서,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만화경과도 같이 다채롭게 변화하는 작품 세계를 이루어냈다.

–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Honoré Fragonard)
.본명: Jean-Honoré Nicolas Fragonard
.출생: 1732년 4월 5일, 프랑스 프로방스 그라스
.사망: 1806년 8월 22일,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수상: 로마상 (1752년)
.전시 장소: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J. 폴 게티 미술관, 더보기
.예술 사조: 로코코, 르네상스
.알려진 분야: 회화, 소묘, 에칭
.자녀: 알렉상드르 에바리스트 프라고나르
역사화, 장르 회화와 시골 풍경을 주로 그린 화가였던 프라고나르는 특히 자신의 유명한 회화 ‘빗장’에서 묘사된 것처럼 외설적인 장르화와 연애의 풍경을 화폭에 주로 담았다.
프랑스 남부해안도시 그라스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0살경 가족들과 파리로 이주하였던 프라고나르는 일찍이 장 시메옹 샤르댕의 공방에서 예술가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14살 때 부셰의 공방에 도제로 들어간다. 1752년 회화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Carle Van Loo에 의해 설립된 왕립학교의 학생이 되고 이후 프랑스 아카데미의 학생이 된다.
프라고나르의 후기 로코코 양식은 주목할 만한 유려함, 풍부함, 그리고 쾌락주의로 두드러진다. 앙시앵 레짐 마지막 시대의 다작의 작가들 중 한 명으로서 프라고나르는 550점 이상의 그림을 (소묘나 에칭은 포함하지 않고) 그렸고, 이 그림들 중 5점만이 날짜가 기록되어있으며 품어있는 육체 관계의 분위기와 숨겨진 에로티시즘을 전달하는 ‘풍속화’ 회화도 있다.

○ 생애 및 활동
장오노레 프라고나르는 장갑 제조업자의 보조이던 프랑수아 프라고나르와 프랑수아즈 프티의 아들이다. 남동생 조제프가 10개월만에 죽자 그는 외동 아들로 남게 되었다. 가족이 파리로 이주하게 되자 6살에 고향 마을을 떠났다. 프라고나르가 6살이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 파리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프라고나르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 자연과 인물이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발산하는 에너지
프라고나르는 1732년에 프랑스 남부의 그라스 (Grasse)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상업과 장갑 제작업에 종사했는데 형편이 어려워져, 그가 6살이 되는 1738년에 가족이 파리로 이주했다.
그도 13세쯤부터 공증인 사무실에 사환으로 나가 생계를 돕기 시작했는데, 일보다 그림에 더 재능을 보여 당대 전성기를 누리던 화가 부셰 (François Boucher)를 찾아가게 된다.
부셰는 기초를 배울 선생님으로 샤르댕 (Jean-Siméon Chardin)을 소개했다.
잠시 샤르댕의 화실에서 배우다 부셰에게 간 것이 17세가 되는 1749년이었고, 거기서 스승에게 수업을 받고 그의 일을 보조했다.
그러다 20세가 되는 1752년에 왕립 아카데미 최고의 미술 경연대회인 로마상 (Prix de Rome)에 응모해 수상했다.
수상자는 로마에 있는 아카데미 드 프랑스 (Académi de France)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는 로마에 가기 전에 수상자들을 위한 왕립 학교 (L’Ecole Royale des Elèves Protégés)에서 1756년까지 수업을 받았고 동시에 교회, 개인의 주문을 받아 종교화, 목가 주제의 장식화 등을 제작했다.
24세가 되는 1756년에 로마에 도착해 아카데미 드 프랑스의 수업을 받고, 장학생의 의무 중 하나였던 이탈리아의 걸작 모사 작업을 하는 동시에,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풍경 사생 작업을 많이 했다.
이 여행에는 화가 위베르 로베르 (Hubert Robert)와 그의 후원자인 생농 수도원장 (Abbé de Saint-Non) 혹은 생농으로 불린 장-클로드 리샤르 (Jean-Claude Richards)가 동행했는데 그는 이후 프라고나르의 주요 후원자가 된다.
이탈리아에서 5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온 직후의 화가는, 유학 시절의 스케치들을 기반으로 한 풍경화를 그리는 동시에, 개인 후원자들을 위해, 밑그림이나 예비 작업 없이 캔버스에 직접 유화를 시작해 완성하는 스케치풍의 그림 (pittura alla prima)을 몇 점 그렸다.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인 ‘목욕하는 여인들 Women Bathing’에는 이후에도 나타날 그의 회화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림의 주제는 시내의 나무 그늘에서 과일을 따거나 주우며 물놀이를 하는 소녀들이다.
스승 부셰와 달리 프라고나르는 누드의 구실로 신화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나, 완전히 현실적인 인물을 그렸다고도 할 수 없다.
그의 인물은 이 그림 속 소녀들처럼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그림 속 공간을 자유롭게 떠 다닌다.
화가는 이들을 둘러싼 나무와 풀들을 합리적 공간 안에 배치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뭇잎과 구름을 통과해 들어온 부드러운 황금색 햇빛이 고르게 퍼진 화면에서 인체와 식물, 구름 등은 모두 하나의 유기체가 된 듯 살아 움직이면서, 루벤스를 연상시키는 낙천적이고 에로틱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 바로크적인 격정의 멜로드라마
로마 유학의 성과를 보여주고 왕립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얻기 위해 그는 1765년 살롱에 심혈을 기울인 대작 역사화 ‘코레수스와 칼리로에’ (Coresus and Callirhoë)를 출품했다.
흔치 않은 이 주제는 파우사니아스 (Pausanias)의 ‘그리스 안내’ (Description of Greece)에서 온 것이다. 칼리로에라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무시당한 시인 (혹은 사제) 코레수스가 바쿠스 신에게 보복을 부탁하자, 신은 마을 전체에 광기를 불러왔고, 이에 대한 해결책은 칼리로에의 목숨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제물로 바쳐지려는 순간, 코레수스가 나서 대신 죽음을 맞는다. 화가가 묘사한 것이 이 마지막 순간이다. 화면 중앙에 혼절한 칼리로에와 등을 맞대고 선 시인이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르는 모습이 보인다.
그림은 연극의 대단원을 보는 것 같다, 주인공의 절망적인 사랑의 감정은 그의 자세와 표정에서 극적으로 과장되어 있다.
두 기둥 사이 붉은 천이 깔린 제단은 이 격정의 멜로드라마가 펼쳐지는 연극 무대처럼 보이고, 피어 오르는 청회색 연기에 감싸여 거의 단색조를 띤 인물들에 비추어지는 조명은 이 바로크적인 스펙타클을 장려하게 만드는 효과를 내고 있다.
살롱에 전시된 이 작품은 구성력, 인물의 표현력, 색채 구사 능력 등에서 찬사를 받았고, 프라고나르는 프랑스 역사화의 운명을 재건할 인물로 추앙되었다. 작품은 마리니 후작 (Marquis de Marigny)이 루이 15세를 위해 구입했다.
하루 아침에 명성을 얻었지만 프라고나르는 왕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아카데미의 교장이 되는 것과 같은 예상 수순을 밟지 않았다.
1767년 이후에는 살롱에도 작품을 내지 않고, 개인 후원자를 위해 에로틱한 주제를 다룬 소규모 회화를 주로 제작했다.
그의 살롱 데뷔작에 열광했던 디드로 등은 그가 일부 소장가들의 경박한 취향을 부추기는 데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의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코레수스와 칼리로에’를 그리면서 화가는 아카데미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강요된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수 있다.
천성에 거슬러가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작업을 했으나, 이러한 장엄한 주제가 공허하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코레수스와 칼리로에’ 대금 지불이 마무리되는 데 8년이나 걸린 데서 알 수 있듯이, 명예가 돈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는데, 프라고나르한테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 상상의 인물들, 행복의 스냅샷
아카데미를 벗어난 화가의 자유는 새로운 유형의 인물화를 만들어냈다.
‘상상의 인물들’ (Figures de Fantasie)이라고 불리는 이 인물화들은 비슷한 크기와 양식의 남녀 반신상인데, 현재 1768~72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그림 14점이 남아 있다.
모델은 모두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데, 이 옷 때문에 ‘스페인 의상 (Spanish costumes)을 입은 초상’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실제 이 옷은 스페인과는 관계 없고, 앙리 4세와 루이 13세 때 (즉 마리 드 메디치를 그린 루벤스의 시대) 프랑스 의상에 가깝다.
‘상상의 인물 : 생농 수도원장’ (Imaginary Figure : Abbé de Saint-Non)과 ‘음악 : 라 브르테슈’ (Music : La Bretèche)은 이 유형에 속하는 인물화이다.
두 모델은 형제 사이로 모두 프라고나르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이처럼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진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모두 모델을 두고 그린 초상임이 분명한데, 이들은 자신의 정체를 부각시키기보다 시인, 음악가, 화가, 배우, 가수, 전사와 같은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들이 몇 점씩 짝을 이루어 걸렸었는지 개별적으로 감상되었는지,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는지 다른 작업도 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그려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그림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물결치며 흐르는 듯한 대담하고 활력 있는 필선이다.
화가 자신이 ‘한 시간 안에 완성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와 같은 속도감이 느껴진다.
여기서 유화의 붓은 드로잉의 펜과 별 차이가 없고, 페인팅과 드로잉, 스케치와 완성작은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다양한 인물의 특징과 성격, 분위기를 탁월하게 잡아낸 기술이 돋보이는 이런 화법은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 (Frans Hals)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 그뿐 아니라 티치아노 초상화의 구도와 자세, 젊은 시절 렘브란트 초상화의 쾌활한 분위기의 영향도 보인다.
그 모든 것들이 프라고나르의 손을 거쳐, 그가 사랑하고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연기를 통해,
눈부시게 화려한 행복의 스냅샷을 만들어낸 것이다.
- 사랑의 단계, 그림 같은 정원에서의 목동 놀이
프라고나르의 대표작이자 18세기 후반 프랑스 귀족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은 1771~2년에 제작된 4점의 ‘사랑의 단계’ (Progress of Love) 연작이다.
1769년에 루이 15세의 후궁이 되어 루브시엔 성 (Château de Louveciennes)을 하사받은 뒤 바리 부인 (Madame du Barry)이, 성의 정원에 연회를 위한 건물인 파빌리온 (pavilion)을 신축하면서 그 중 한 방을 장식하기 위해 주문했기 때문에 ‘루브시엔 패널 (Louveciennes Panels)’이라고도 불린다.
연작은 ‘구애’, ‘밀회’, ‘화관 쓰는 연인’, ‘연애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흩어지고 파괴된 그의 많은 작품들과 달리 이 네 작품과 후에 추가한 작품들까지 연작 모두가 온전하게 뉴욕의 프릭 컬렉션에 모여 있다.
이 연작 중 하나인 ‘밀회 : 성채 습격’ (The Rendezvous : Storming the Citadel)에는 울타리가 쳐진 정원에서 비밀스런 만남을 가지려 하는 남녀가 등장한다.
먼저 도착한 여자는 오른손에 든 편지를 읽다가, 화면 왼쪽의 인기척을 느끼고 왼손을 뻗어, 사다리를 타고 정원에 들어오려는 남자를 제지하고 있다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어 들어오는 장면 때문에 이 그림에 ‘성채 습격’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화면 중앙의 비너스 조각도 화살통을 달라고 조르는 큐피드를 제지해, 아직은 사랑의 때가 아님을 알리고 있다.
정원의 나무는 인물과 조각을 돋보이게 하면서 사랑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고, 전경에 무심히 놓인 듯한 입구가 보이는 물병과 통나무도 각각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는 등, 화면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며 긴장된 사랑의 흥취를 전달하고 있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된 곳은 ‘영국식 정원’, ‘풍경 정원 (landscape garden)’ 혹은 ‘픽처레스크 정원 (picturesque garden)’이라고 불리던 것으로, 18세기 중후반에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전원 취미’의 일부였다.
영국에서 시작된 이런 정원은 말 그대로 그림을 본떠서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모델은 17세기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 (Claude Lorraine)이 그린 목가적 풍경화 곧 고대의 황금 시대를 그린 이상적 풍경화였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볼 수 있듯 프랑스식 정원이 기하학이고 대칭적인 모양으로 정리되었던 것과 달리, 픽처레스크 정원은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게’ 꾸며졌다.
이 그림에서 잎이 무성한 나무와 앙상한 나뭇가지가 함께 등장하는 것처럼, 수목은 자연의 비옥함과 다양성을 느낄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배열되었다.
이런 정원으로 파리라는 도시에 전원 풍경을 창조한 귀족들은 이곳에서 목가적인 사랑 놀음을 즐겼다.
루이 14세 시대까지의 엄격하고 딱딱한 궁정식 예절에 싫증을 느낀 귀족들이 자연 속에서, 자연을 모방한 정원 안에서, 비단 옷을 입은 채, 농가의 순진한 처녀와 시골의 소박한 목동을 연기하는 색다른 재미에 빠져든 것이다.
프라고나르가 ‘사랑의 단계’에서 그린 사랑이 바로 이런 귀족들의 ‘목동 놀이’였다.
이러한 놀이의 전통은 트리아농 궁 (Petit Trianon) 에서 세브르산 도자기에 우유를 짜며 전원 생활을 흉내 낸 마리-앙트와네트에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18세기 후반 프랑스 귀족 문화의 중요한 단면이었다.
연작은 18세기 장식 미술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스케일과 회화적 완성도를 보이고 있으나, 주문자인 뒤 바리 부인은 작품을 예정된 자리에 걸지 않고 화가에게 돌려보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여러 추측이 있는데, 그 중에는 그림이 뒤 바리 부인의 애정 행각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거나, ‘밀회’에 등장하는 남자가 루이 15세를 닮아 왕이 스캔들이 생길까 걱정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림의 양식이 문제였다는 설명도 있다.
완성된 건물이 신고전주의풍이라 이렇게 사치스럽고 호사스런 그림과 어울리지 않았고, 이때 이미 로코코가 신고전주의에 비해 구식으로 보여, 항상 유행의 첨단에 있고 싶어하는 뒤 바리 부인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다비드의 스승인 비앙 (Joseph-Marie Vien)의 신고전주의풍 그림이었다는 사실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그랬다면 주문자가 사전에 프라고나르의 화풍을 몰랐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가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인 듯, 작품 완성 직후인 1773년에 화가는 다시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떠났다.

- 신고전주의적 격정의 순간
활동 초기에 그라스 대성당 제단화를 그린 것을 제외하고 프라고나르가 교회나 종교 기관의 주문을 받아 그린 종교화는 없다.
1776년에 개인 후원자인 베리 후작 (Marquis Louis – Gabriel de Véri)의 주문으로 ‘목동들의 경배’라는 종교화를 그린 적이 있는데, 그 작품과 짝으로 걸어둘 작품을 주문 받고 완성한 것이 ‘빗장 The Bolt’이라는 에로틱한 그림이다. 화면의 왼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침대가 있는 실내에 두 남녀가 보인다.
여자는 의자를 넘어뜨리고 급히 방 밖으로 나가려 했던 듯하나, 남자는 그녀를 가로막고 문에 빗장을 걸었다. 조명은 남자의 손 끝에 있는 이 빗장을 가장 밝게 비추고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던 그림 중 하나로 판화로 만들어져 유포되었고 모작도 많이 나왔다.
이전에 비해 단순해진 화면 구성 요소와 명확해진 윤곽선 등은 신고전주의적 역사화를 연상시키나, 그림의 주제는 신고전주의가 즐겨 다룬 영웅적 도덕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욕망의 힘 즉 (이전 작품에 비해 좀더 진지해 보일 뿐) 여전히 같은 사랑 놀음이다.
주인공의 욕망은 두 사람의 표정이나 몸짓뿐 아니라 화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침대를 통해서도 보여지고 있다.
여성의 가슴을 닮은 베개, (화면에 등장하는 여자의 치마와 같은 천으로 그려진) 여성의 허벅지와 무릎을 닮은 침대 모서리, 남성과 여성의 성기 모양으로 주름이 잡힌 붉은 커튼 등의 시각 요소는 화면 전체를 사랑의 격한 흥분으로 채우고 있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중심을 벗어난 대담한 구도와 조명,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조 등은 많은 후배 화가들이 모방해서 그는 새로운 흐름을 선도하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잠시나마 루브시엔의 수모를 잊을 수 있었다.
- 연극 같은 삶의 빛나는 한 때
말년에 화가는 실내를 장식할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 ‘생-클루의 축제 : La Fête à Saint-Cloud’는 이중 가장 크고 인상적인 작품이다.
파리 근교 생-클루의 공원에 로코코 시대의 선남선녀들이 모였다. 화면 좌우에 거리 연극과 인형극 무대가 보이지만, 그 무대에 선 이들보다 더 배우같아 보이는 것은 이 픽처레스크한 자연 풍경 속을 거니는 인물들이다.
인간은 항상, 가장 사적인 순간에도, 자기 이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게 되지만, 로코코 시대 프랑스 왕족들은 출생부터 사망까지, 식사부터 용변까지, 삶의 모든 순간에 항상 관객을 두었던 연극 같은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시기 귀족들의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는 늦은 여름의 늦은 오후다. 햇빛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들이 그늘 없는 행복을 누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자연 속에 펼쳐진 사랑과 행복의 유토피아를 그리는 전통은 16세기 베네치아의 바커스 축제, 17세기 루벤스의 사랑의 정원, 18세기 초 와토의 키테라 섬을 거쳐 프라고나르의 생-클루에서 한 장을 마감하고, 19세기에는 마네의 튈르리,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 등 다른 맥락의 사교 모임, 유흥의 장소가 등장하게 된다.
1780년대에 그는 가정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1769년에 마리-안느 제라르 (Marie-Anne Gérard) 와 결혼한 그는 딸과 아들을 하나씩 두었는데 아들 알렉상드르 (Alexandre Evariste Fragonard) 는 그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화가가 되었다.
1778년에는 14살의 처제 마르그리트 제라르 (Marguerite Gérard)에게도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녀와 공동으로 여성과 아이가 등장하는 가정 주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 시기에 라 퐁텐의 ‘우화’,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등 책을 위한 삽화 작업도 했다.
1789년 대혁명이 일어난 후 그는 가족과 함께 고향 그라스로 갔다가 1792년에 파리로 와서 박물관으로 바뀐 루브르와 베르사유에 관련된 행정적인 일을 1800년까지 했다.
나폴레옹의 전성기이던 1806년에 그는 화가로서는 거의 잊혀진 상태로 사망했다.
로코코 미술은 제대로 평가받기보다 경박한 에로티시즘과 도피주의의 산물로 과도하게 비난 받아 온 세월이 길다.
프라고나르의 경우는 작품의 진위와 연대, 소재 파악 등의 기본적인 연구도 부족한 상태다.
19세기 중반 이후에야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비평가와 작가들이 생겨났고, 작품의 쉬운 주제와 매력적인 형식은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의 작품들은 로스차일드 (Rothschild)나 프릭 (Frick) 등 거부 집안에서 사들여, 부자들이 좋아하는 그림으로 이름이 나기도 했다.

○ 주요 작품들
책 읽는 소녀 / 1773 ~ 1776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65 x 82 cm /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그네 (L’escapolette) 로코코 / 18세기경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56 x 46 cm / 랑비네 미술관
제우스와 칼리스토 (Jupiter et Callisto) 로코코 / 18세기경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78 x 178 cm / 양제 미술관
르노와 아르미드 (Renaud et Armide) 로코코 / 18세기경 / 유화 / 루브르 박물관
연애편지 / 1770년경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67 x 83.2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침대에 누워 작은 개와 노는 소녀 / 1765 ~ 1772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70 x 89 cm / 뮌헨 알테 피나코텍
사랑의 맹세 (사랑의 아픔) 로코코 / 18세기경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36 x 45 cm / 오를레앙 미술관
티볼리의 작은 폭포들 (Les Cascatelles de Tivoli) 로코코 / 18세기경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72.5 x 60.5 cm / 루브르 박물관
Self-Portrait Facing Left, 1780s, Black chalk, Louvre, Paris
The Progress of Love: The Meeting, 1773, Oil on canvas, 318 x 244 cm, Frick Collection, New York
The Progress of Love: The Pursuit, 1773, Oil on canvas, 318 x 216 cm, Frick Collection, New York
The Progress of Love: The Lover Crowned, 1771-73, Oil on canvas, 318 cm x 243 cm, Frick Collection, New York
The Progress of Love – The Confession of Love, 1771, Oil on canvas, 318 x 215 cm, Frick Collection, New York
Jeroboam Offering Sacrifice for the Idol, 1752,
Oil on canvas, 115 x 145 cm, Beaux-Arts, Paris
The Musical Contest c. 1754, Oil on canvas, 62 x 74 cm, Wallace Collection, London
The Cradle, 1761-65, Oil on canvas, 46 x 55 cm, Picardie, Amiens
The Swing, 1767, Oil on canvas, 81 x 64 cm, Wallace Collection, London
Abbé de Saint-Non (Fanciful Figure), 1769, Oil on canvas, 80 x 65 cm, Louvre, Paris
Adoration of the Shepherds c. 1775, Oil on canvas, 73 x 93 cm, Louvre, Paris
A Young Girl Reading c. 1770, Oil on canvas, 81 x 65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A Young Scholar, 1775-78, Oil on canvas, 45 x 38 cm, Wallace Collection, London
The Swing, 1775-80, Oil on canvas, 216 x 186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A Boy as Pierrot, 1776-80, Oil on canvas, 60 x 50 cm, Wallace Collection, London
The Love Letter, 1770s, Oil on canvas, 83,2 X 67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The Fountain of Love, 1785, Oil on canvas, 64 x 51 cm, Wallace Collection, London

○ 섬세하고 감각적인 로코코 회화의 대가 – 프라고나르의 ‘그네’ (1766년, 유화, 81×64㎝, 런던 월러스 컬렉션) _ 글 : 김언정 (고양문화재단 미술관 책임큐레이터)
풍성한 초록의 전원 속에서 복숭아빛 옷자락을 날리며 그네를 타는 여인의 아름답고 경쾌한 모습은 우리의 시선을 끈다. 이 작품 ‘그네’ (The Swing)는 로코코 시기가 끝날 무렵 프랑스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가 그린 것이다.
우선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수풀 조경이 화려한 정원에는 푸토와 큐피트의 조각상이 있고 저 멀리 건축물이 보이는 것으로 짐작컨대 어느 귀족의 대저택에 딸린 전원식 가든이 그림의 배경으로 여겨진다. 햇살 가득한 어느 날 커다란 나무에 매달린 그네 위에는 철없어 보이는 젊고 예쁜 여인이 그네를 타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들추어진 치맛자락 아래에는 귀족복장의 젊은 남자가 꽃 덤불 속에 몸을 숨기고 누워 그녀를 바라보는데, 어여쁜 여자의 얼굴과 함께 치마 속도 들여다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분명 그림을 주문한 당시의 은행가 줄리앙 백작이 이 여인의 비밀애인으로 묘사된 청년일 것이다. 남자를 위해 일부러 치맛자락을 들춘 발칙한 애인으로 인해 남자는 다소 놀란 눈치다. 그의 애로틱하고 유희적인 놀람과 즐거움은 커진 눈, 벌어진 입, 모자를 들어 올린 손으로도 잘 표현되고 있다. 또 하나의 재밌는 광경은 나무기둥 뒤에서 여자의 그네를 흔들어주며 즐거워하는 나이든 남자의 모습이다. 이 남자는 언뜻 하인처럼 여겨지지만 여자의 남편으로 70세의 나이에 접어든 필립 공작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조각으로 묘사된 사랑의 신 큐피트는 이 사랑이 비밀스러운 것임을 암시하듯 손가락으로 입단속을 지시하고 있다. 이쯤이면 대략 그림의 내용이 이해된다. 숲의 쾌활함을 극대화한 빛의 조화로운 변주와 여인의 나풀거리는 레이스, 그리고 여자가 다리를 들어 올리느라 한쪽 신발이 벗겨져 허공을 날고 있는 모습은 이 비밀스러운 연애를 가볍고 유쾌하게 보이도록 돕는다.
‘가장 로코코적인 화가’로 불리우는 프라고나르는 프랑스에서 로코코양식이 저물고 신고전주의가 대두하던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그라스 (Grasse)에서 상업과 장갑제조업을 하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가세가 기울자 그의 가족은 파리로 이주했고, 당대 유명했던 부셰 (François Boucher)와 샤르댕 (Jean-Baptiste-Siméon Chardin)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된다. 프라고나르는 이내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로마상 (Grand Prix de Rome)을 수상하고 5년간 이탈리아에 유학한다. 귀국 후에는 다른 아카데미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신화적 내용의 역사화를 그려 주목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프라고나르는 이후 아카데미풍의 역사화가 주는 명예로움을 던져버리고 자유분방하며 쾌활하고 관능적인 주제를 선택한다. 17세기 이래 프랑스의 저명한 미술비평은 ‘역사화’를 품위있는 것으로 다루었고, 대부분의 점잖고 진지한 화가들은 역사화의 우월성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 프라고나르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 칸트도 그의 저서 『판단력 비판』에서 예술이 한낱 향략만을 목표하면 이념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정신을 우둔하게 만들고, 대상을 차츰 역겹게 만들며, 마음으로 하여금 이성의 판단에서 자기의 반목적적인 기분을 의식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불만족하게 하고, 언짢아하게 만든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대안은 도덕이 반드시 예술과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라고나르는 품격있는 프랑스 왕립아카데미 회원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그는 아카데미의 무거운 공기와 역사적인 주제의 장황함이 자신의 천성과 맞지 않다고 여긴듯하다. 어쩌면 경제적인 현실의 요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가 않다. 프라고나르는 거의 국가와 교회 등 공적인 기관과는 작업하지 않았으며, 작품의 연도를 분명하게 표기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또한 놀랍도록 다양한 양식과 기법으로 여러 주제의 그림을 다량 소화해 냈다. 그런 탓에 오늘날 그의 작품에 대해 진위를 판단하는 문제는 쉽지가 않다. 이처럼 프라고나르는 탁월한 실력과 로맨틱하고 친근한 주제를 다룬 탓에 당대에는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그는 이어진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잊혀진 작가가 되었고 곤궁한 말년을 보냈다. 로코코미술 역시 제대로 평가 받기보다 경박한 에로티시즘과 도피주의의 산물로 과도하게 비난 받아온 세월이 길다. 겨우 현대에 이르러서야 프라고나르 회화의 솔직함과 대중에게 친숙한 주제의 그림들이 재평가 받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은 아직 ‘대중’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았다. 왕족을 포함한 귀족들이 예술을 향유했다. 파리라는 도시에 전원풍경을 창조한 귀족들은 이곳에서 목가적인 사랑놀음을 즐겼다. 18세기의 종교개혁은 교회 내의 형상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교회에서 그림과 조각들을 몰아내었기 때문에 미술가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했던 측면도 있었다. 화가들은 돈 많은 귀족들에게 의존하여 그들의 성과 대저택을 장식하거나 초상화를 그렸던 것이다. 프라고나르는 18세기 후반 프랑스 귀족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을 그린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프라고나르가 이처럼 자유분방하고 관능적인 사랑놀음의 주제를 즐겨 다룬 이유는 귀족의 저택을 장식했던 역사화가 오히려 귀족을 역사의 주역으로 다루어 그들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기에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는 오히려 사랑놀음에 빠진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실제적인 측면에 집중함으로써 그들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수평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프라고나르는 솔직한 즐거움을 추구했던 화가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딱딱한 관념과 형식의 틀을 벗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중적 시선이나 대중과의 소통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대의 감성에 부합하는 화가로 새롭게 와닿는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