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4년 6월 17일, 프랑스의 루이 14세시대 유명한 장군 빌라르 /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믈룅 자작, 빌라르 후작 겸 공작, 마르티크 공 (Claude Louis Hector de Villars, Prince de Martigues, Marquis and Duc de Villars and Vicomte de Melun, 1653 ~ 1734) 별세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믈룅 자작, 빌라르 후작 겸 공작, 마르티크 공 (Claude Louis Hector de Villars, Prince de Martigues, Marquis and Duc de Villars and Vicomte de Melun, 1653년 5월 8일 ~ 1734년 6월 17일)은 프랑스 루이 14세시대 때의 마지막 위대한 장군이며, 프랑스의 군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사령관 중 한 명이고, 오직 단 6명의 원수만이 승진한 프랑스 대원수 (Marshal General of France) 중 한 명이다.
–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Claude Louis Hector de Villars)
.출생: 1653년 5월 8일, 프랑스 물랭
.사망: 1734년 6월 17일, 이탈리아 토리노
*프랑스 군복무
.최종계급: 프랑스 대원수
.주요 참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프리틀링겐 전투, 회흐슈테트 전투, 드냉 전투
.기타 이력: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1714), 섭정위원회 일원 (1715-18)
.서훈: 프랑스 원수 (1702), 빌라르 공작 (1705), 프랑스 귀족 (1709)
○ 생애 및 활동
- 초기생애
빌라르는 물랭 (Moulins; 현재 프랑스 알리에르 지방)의 귀족이지만 가난하고 눈에 띄지 않는 가문-그의 아버지는 외교관 피에르 드 빌라드 (Pierre de Villars)-에서 태어났다.
1671년 그는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군단에 배치되었다. 그의 나이 20살 때 프랑스-네덜란드 전쟁기간 중 벌어진 1673년 마스티리흐트 공성전 (Siege of Maastricht)과 그 다음해에 벌어진 피의 세네페 전투 (Battle of Seneffe)에서 두각을 나타내 1년 뒤 기병연대 연대장 (mestre de camp; 대령)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빌라르의 다음 승진은 튀렌, 대 콩데 (The Great Condé)와 뤽상부르 휘하에서 눈부신 활약과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그 이유는 빌라르가 당시 강력한 세력을 가진 루부아 (Louvois)와 대립했기 때문이었고, 빌라르가 마침내 육군 소장 (maréchal de camp)이 된 것은 1687년이었다.
네덜란드 전쟁의 휴식기간 사이에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League of Augsburg)이 결성되었고, 빌라르는 바이에른의 궁전에 비공식 사절로 고용되어 자신의 군사적 재능의 조언과 외교관으로써의 재주를 발휘해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동료로써 오랫동안 함께 했다.
빌라르는 1690년 프랑스로 돌아와 플랑드르에 있던 군대의 기병대 지휘권을 맡았으나, 얼마안가 대동맹 전쟁이 끝나자 빈의 대사로써 가게 되었다.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년 ~ 1714년)에서 유럽의 주요 열강들은 힘을 합쳐 프랑스가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려는 것을 막아 유럽의 힘의 균형을 바꾸어 놓았다. 관련된 분쟁으로 헝가리의 라코치 독립 전쟁, 프랑스 남부의 세벤 전쟁, 북아메리카의 앤 여왕 전쟁, 인도 식민지의 소규모 분쟁 등이 있다. 이 전쟁에서 빌라르 공작, 스튜어트 왕가의 지지자 베릭 공작, 말버러 공작, 사부아 공자 외젠 등 뛰어난 장군들의 군사적 지도력이 두드러졌다.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 (재위 1665 ~ 1700)가 사망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인 그의 모든 영토를 ―스페인의 공주이자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 (재위 1643~1715)의 아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테레즈의 요구에 따라―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 (Philip, duc d’Anjou)에게 물려주면서, 부르봉 왕가의 필리프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 (재위 1700 ~ 24, 1724 ~ 46)가 되었다. 전쟁은 스페인 왕위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레오폴트 1세 (재위 1658 ~ 1705)가 스페인 왕위의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서서히 시작되었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그의 영토확장을 위한 공세를 강화했을 때 다른 유럽 국가 (영국을 주도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공화국) 역시 프랑스의 영토 확장을 제어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측에 참여하였다. 다른 국가들도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거나, 지금 소유하고 있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항하는 연합군에 참여하였다. 전쟁은 유럽만이 아니라 영국 식민지 주민들이 프랑스 식민지 주민 (corsairs)과 스페인령인 남미 북안 (Spanish Main)에 거점을 둔 사략선, 해적선과 싸운 앤 여왕전쟁으로 알려진 전투들이 북아메리카에서도 벌어졌다. 이들 전쟁의 결과로 인하여 400,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 (1713)과 라슈타트 조약 (1714)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들로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왕좌를 지켰으나, 프랑스의 왕위는 계승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두 왕국이 합쳐질 위험은 사라졌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이 소유한 영토의 대부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중부 유럽에 대한 프랑스의 헤게모니는 종결되었으며, 힘의 균형에 대한 생각은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언급된 이후부터 국제적인 질서의 일부가 되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다른 중요한 전투와 함께 주로 스페인과 중서부 유럽 (특히 저지대 국가)에서 벌어졌다. 외젠 공작과 말버러 공작은 스스로를 저지대의 군사령관으로 생각했다.
- 섭정
섭정시대 빌라르는 눈에띄는 행동과 술책으로 뒤부아 추기경 (Cardinal Dubois)의 주요 적대자였으나, 몽모라시의 기억속에서는 오직 반란을 막아 프랑스 총사령관 (constable of France)이 된 것밖에는 없었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4년)에서 빌라르는 야전에서 마지막 생애를 보내게 되었는데, 예전 튀렌이 받은 것처럼 “국왕의 군대의 대원수” (marshal-general of the king’s armies)이란 타이틀을 받았다. 그러나 빌라르는 이미 80세가 넘은 나이였고, 이젠 전쟁보다는 외교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뒤이어 전역을 벌이기 전 모든 힘과 들떠있던 그의 원기와 에너지는 1734년 6월 17일 투린에서 죽었다.
- 유산
빌라르의 회고록을 본 볼테르는 그를 fanfaron plein d’honneur라고 불렀다. 그는 정말 자화자찬하고 또한 몹시 명예와 부를 탐내었다. 그러나 그는 명예로운 사나이로 숭고한 용기와 정신, 육체, 군인으로써 누구보다도 앞섰기에 18세기 당대와 후대에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인물은 모리스 드 삭스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Frederick II of Prussia)뿐이었다.
그의 회고록은 1734년 일부가 출판되었고, 그 후 신뢰할 수 없는 번역으로 몇번이나 다시 출판되었다. 1884-92년에 보그 후작 (Marquis de Vogüé)이 처음으로 완벽하게 편집된 것을 출판했다. 클로드 C.스튀르질의 〈빌라르 원수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Marshal Villars and 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이 1965년에 유일하게 영어판으로 출간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