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5년 10월 30일, 미국 초대 부통령 •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John Adams, 1735 ~ 1826) 출생
존 애덤스 (John Adams, 1735년 10월 30일 ~ 1826년 7월 4일)는 영국 식민지와 미국 초기의 정치인이었다.
– 존 애덤스 (John Adams)
.출생: 1735년 10월 30일, 대영 제국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브레인트리
.사망: 1826년 7월 4일 (90세),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
.학력: 하버드 대학교
.정당: 연방주의자당
.배우자: 애비게일 애덤스
.자녀: 존 퀸시 애덤스 외 5명
.종교: 유니테리언 (구 회중 교회)
*미국의 제2대 대통령
.임기: 1797년 3월 4일 ~ 1801년 3월 3일
.전임: 조지 워싱턴(제1대) / 후임: 토머스 제퍼슨(제3대)
*미국의 초대 부통령
.임기: 1789년 4월 21일 ~ 1797년 3월 4일
.전임: 초대 / 후임: 토머스 제퍼슨 (제3대)
미국의 제2대 (1797 ~ 1801) 대통령과 초대 (1789 ~ 1797년) 부통령이다.
미국 건국의 주역 중 한사람이자 토머스 제퍼슨의 정적이었으며, 같은 이름의 그의 아들 존 퀸시 애덤스는 6대 미국 대통령을 지내 미국 최초의 부자 (父子) 대통령이었다.
백악관에 처음으로 입주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애
존 애덤스는 1735년 10월 30일에 아버지 존 애덤스 (John Adams Sr.)와 어머니 수잔나 애덤스 (Susanna Boylston)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조지 워싱턴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브레인트리 (Braintree)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브레인트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를 마치고 1758년 23세의 나이에 이미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1765년 인지세법 반대투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고, 5년 뒤엔 놀랍게도 보스턴 학살에 연관된 영국군 장교를 변호하기도 했다.
- 미국 독립선언서 작성 참여
존 애덤스는 토머스 제퍼슨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다.
1780년, 그는 그의 출신주인 매사추세츠주의 헌법초안을 만들었다.
미국 독립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파리에서 영국과 독립협상을 벌이게 되었을 때 그는 벤저민 프랭클린, 존 제이와 함께 협상대표로 참가하여 1783년 미국 독립을 영국으로부터 승인 받은 인물이었다.
- 초대 미국 부통령
그 뒤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득표수 2위를 기록한 뒤 미합중국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 취임했다.
- 대통령 임기
.제퍼슨과의 갈등
1797년 두 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두 번째로 득표수가 많은 후보를 부통령으로 임명하는 당시의 제도에 의해, 그의 친구이자 정적인 토머스 제퍼슨 (나중에 후임 대통령이 된다)을 부통령으로 맞게 됐고, 제퍼슨은 그의 임기 4년 동안 그를 도와주기보다 오히려 끝까지 그의 정책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제퍼슨은 철저한 반연방주의 세력의 중심지도자였고, 애덤스는 열렬한 연방주의자로 정치이념이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서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국, 프랑스와의 갈등이었다.
미국은 이제 건국한 허약한 국가에 지나지 않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경쟁하는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미국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만들기 위해 논쟁하고 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
특히 영국은 미국의 배를 나포해가고 미국 선원들을 영국군으로 강제 징용해가는 등 미국으로선 관전만 하고 있는 것으로는 불가피해졌다.
그래서 애덤스는 영국과 전쟁상태인 프랑스에 비밀특사 3명을 보냈는데 이것이 이른바 XYZ사건으로 밀사파견 사건이었다. 3명의 밀사들이 그들의 입장을 말하자,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은 거액의 뇌물을 요구했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은 분노했다.
알렉산더 해밀턴 등 친영 반불 (프랑스)의 연방주의자 세력은 프랑스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요구했고 결국 애덤스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선전포고도 없이 프랑스와 전쟁상태에 돌입했다 (1798 ~ 1800).
그와 동시에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크게 높아져 프랑스 등 외국에 협조적인 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외국인법에 애덤스는 서명했다. 이 법은 선동을 방지하고 간첩, 배신행위를 막는다는 구실로 제정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들의 입과 귀를 막는 비민주적인 법이었다. 자연 친불 반영의 제퍼슨등의 반연방주의자 세력들의 반발은 거세어졌고 연방주의자들과의 싸움도 더욱 거세어졌다.
하지만 별다른 명분도 실리도 없이 분풀이 같은 전쟁을 벌이던 애덤스는 결국 프랑스와 휴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그의 동지들이었던 연방주의자세력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하고 제퍼슨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줬다.
- 은퇴 이후
그 이후, 그는 그의 고향인 브레인트리로 돌아왔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간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오랜 동지이자 정적이기도 했던 제퍼슨과 마지막엔 화해를 하게 되었다.
만년에는 우울증을 앓기도 했으며 1826년 7월 4일 미국이 독립한 지 50년이 되는 해, 독립기념일에 존 애덤스는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90세였다.
○ 명언
인간의 생각을 해방시켜라.
인간의 생각은 해방되어야 한다. 인간의 생각은 해방될 것이다. 미신과 교의는 인간의 생각을 가두어 놓을 수 없다. — 존 애덤스
○ 저서
미합중에 정부의 헌법에 대한 보호 ‘A Defense of the Constitution of Government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1788)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