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8년 5월 24일,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 ~ 1791)의 올더스게이트 데이
영국 성공회 성직자 웨슬리 (John Wesley, 1703년 6월 28일 ~ 1791년 3월 2일)의 아메리카 서배너에서의 선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사실상 끝났음을 직감하고 1737년 12월 2일 도망치듯이 조지아를 떠났다. 결국 1년 9개월에 걸친 조지아 선교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웨슬리는 또 다시 풍랑을 만나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이때의 심경을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인디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메리카로 갔다. 그러나 오! 나는 누가 구원할 것인가? 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에서 나를 건져줄 자는 누구인가? 나는 맑은 여름 종교를 갖고 있다. 나는 위험이 없을 때에는 나 자신을 믿는다. 그러나 죽음의 위험이 가까이 올 때에는 나의 마음은 공포에 빠진다.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할 것인가?”

○ 올더스게이트 회심
- 모라비안 페터 뵐러 목사와의 만남
웨슬리는 1738년 2월 1일 우울한 모습으로 영국 딜(Deal) 항구에 도착했다. 3일 후 웨슬리는 런던으로 가 오글소프와 조지아 이사들을 만나 사유서를 제출하고 선교사 임명장을 반환하였다. 갈 곳도 없던 웨슬리는 동생 찰스의 친구인 제임스 허턴 (James Hutton)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허턴은 웨스트민스터 학교 근처에서 책방과 하숙집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웨슬리는 그곳에서 막 독일에서 온 모라비아 목사 피터 뵐러 (Peter Boehler)를 만났다. 피터 뵐러는 웨슬리보다 9년 늦은 171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예나 (Jena) 대학교를 졸업했고, 친첸도르프 (Zinzendorf) 백작 밑에서 신앙 지도를 받은 후 헤른후트(Hernhut) 형제단에 가입했다. 영국과 아메리카에서는 선교사로 활동했다. 웨슬리는 뵐러와 급속도로 친해졌으며, 뵐러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뵐러가 하는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 믿음에 의지하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내 형제여, 내 형제여, 당신은 당신의 철학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Mi frater, mi frater, excoquenda est ista tua philosophia).” 라고 말했다. 웨슬리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3월 5일 웨슬리는 병 중에 있던 동생 찰스를 보기 위해 옥스퍼드에 갔고 거기서 뵐러를 다시 만났다. 뵐러와의 대화 중에 웨슬리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 (saving faith)’이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뵐러는 대화를 거듭하며 웨슬리에게 성서로 돌아갈 것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의 ‘오직 믿음’의 교리 (이신칭의)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이 믿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냐고 묻자 뵐러는 회개하고 그 믿음 얻기를 구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느 한 순간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였다. 뵐러와의 대화 끝에 자신이 갖지도 못한 신앙에 대해 설교를 그만해야 하지 않나 번민하는 웨슬리에게 뵐러는 “믿음을 얻을 때까지 믿음에 대하여 설교하시오. 그리고 그 믿음을 얻게 되면 그 얻은 믿음을 가지고 설교하시오.”라고 말해주었다. 다음날인 3월 6일부터 웨슬리는 뵐러의 권고에 따라 믿음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다.

- 신약성서를 연구하다
3월 말에 피터 뵐러는 웨슬리에게 경건주의적 전통의 방식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의 본성을 설명해 주었다.
믿음의 본성은 거룩함 (죄로부터의 자유)과 행복 (용서받았다는 자각에서 오는 평화와 기쁨)으로 열매 맺는 것이며 거룩함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즉 뵐러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을, 칭의-법적인 변화와 연결시킬 뿐 아니라 중생-참여적 변화와도 연결시킨 것이다. 웨슬리는 뵐러의 말이 맞는지 살피기 위해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연구하였다.
그 결과 웨슬리는 4월 말에 뵐러를 다시 만났을 때는 뵐러가 설명한 믿음의 본성에 대해 동의할 수 있었으며, 여러 간증을 듣고 “즉각적인 회심”에 대해서도 동의하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이제 나의 논쟁은 끝났다. 주여!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울부짖었다.
- 성공회 교회와의 갈등
5월 1일 웨슬리는 뵐러의 충고에 따라 다른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과 함께 “우리의 작은 신도회”를 설립하였고, 이것은 후에 “페터레인 (Fetter Lane) 신도회로 발전했다. 5월 4일에는 뵐러가 아메리카로 떠났고, 웨슬리는 뵐러의 권고대로 계속 자신의 부족한 믿음에 대해 설교하였고, 영국 성공회의 전례와 다른 자유로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영국 성공회 사제들이 웨슬리의 이러한 행보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웨슬리가 광신주의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 찰스 웨슬리
존 웨슬리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 동생 찰스 웨슬리도 병석에서나마 같은 확신을 얻기 갈망하고 있었다. 찰스도 뵐러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어야 한다고 깊게 소망하였다. 찰스는 5월 말 루터의 “갈라이다서 주석”을 읽기 시작하면서 당혹감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우리의 교회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와 같이 이렇게 중요한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누가 믿을 것인가? 특별히 우리의 강령과 설교가 폐기되지 않고 중심 가르침이 없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를 새로운 교리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찰스는 머물고 있던 집의 주인인 존 브레이 (John Bray)가 무식한 막노동자였음에도 예수 그리스도만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며, 그 가족도 신앙 안에서 감사와 평화,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5월 21일 오전 9시, 찰스는 존 웨슬리와 친구들의 방문을 받고 기도와 찬양을 하였다. 9시 30분쯤 되어서 홀로 남아 더욱 더 간절히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 잠결에 찰스는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고 조용하지만 아주 분명한 음성을 들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믿으라. 그리하면 네 모든 병이 나음을 얻으리라.” 찰스는 이 음성이 브레이의 누이 무스그레이브 (Musgrave) 부인이 말한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찰스를 간호하고 신앙적인 권고를 해온 터너 (Turner) 부인의 목소리였다. 찰스는 무스그레이브를 불러달라고 터너 부인에게 이야기했고, 터너 부인이 내려간 사이 “이상한 마음의 떨림”을 경험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병도 나았다. 다음날 동생이 중생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소식을 듣고 웨슬리는 찰스를 방문하였고, 찰스는 형도 같은 은혜를 체험하도록 간절히 기도해주었다.

- 저녁기도, 루터의 로마서 주석
1738년 5월 24일, 이른 아침 존 웨슬리는 성서를 묵상하는 중에 성서 구절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후서 1:4)” 이 날 오후 웨슬리는 세인트 폴 교회에서 있었던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찬양대는 푸셀의 “오!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께 나아갑니다 (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를 불렀다. 이 곡은 마음의 고뇌와 거룩한 열망에 휩싸여 있던 웨슬리의 영적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웨슬리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 거리 (Aldersgate Street)의 네틀턴 코트(Nettleton Court)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교도의 기도회에 가기 위해 저녁 기도회에서 빠져 나와 성서를 펴니 “네게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도다”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기도회 장소에 도착한 웨슬리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성령으로 외적인 선한 사역을 기뻐한다면, 불신앙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대로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듯이 죄를 짓게 하고 육체를 낳으며, 외적인 악한 사역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6장 8-9절에 “그분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 불신앙은 모든 죄의 뿌리요, 수액이며, 최고의 기도이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8시 45분, 마지막 구절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웨슬리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존 웨슬리가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날 저녁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깉이 일기에 썼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I felt my heart strang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는 곧 마음에서 경험한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간증하였고 밤 10시쯤 되어서는 신도회 회원들과 함께 동생 찰스에게로 가 이 기쁨을 나눴다.

- 감리교회에서의 활동과 별세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성공회의 제제와 직무파면으로 성공회 소속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존 웨슬리는 그 자신이 이룬 영국내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감리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영국내에서 활동하고, 기독교 윤리적으로 무기력하던 영국성공회 내부에서 복음주의적 변혁의 힘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감리회의 대표이며 대표 성직자인 동시에 직무를 박탈 당했어도 파면된 영국성공회 성직자의 자격은 남았다.
존 웨슬리 자신도 스스로를 성공회 사제라고 생각하였다.
1791년 3월 2일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 어록
“이성적인 사람은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 감각을 통해 세상을 포괄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자연을 통해서 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 자연인은 자연을 보고 관찰하고 인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식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가르침을 통해서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하는 새로운 실제를 지각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초자연적인 확실한 증거, 곧 믿음으로 알 수 있다.”
“자기 신앙으로 똘똘 뭉친 것은 거짓 체험이다. 진짜 체험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내가 변화되는 체험,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변하는 것이며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되뇌이는 것은 거짓이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하나님을 체험하면 그는 즉시 변화되고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성령이 함께하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