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9년 1월 5일, 프랑스 혁명기 방데 반란 지도자 자크 카텔리노 (Jacques Cathelineau, 1759 ~ 1793) 출생
자크 카텔리노 (프: Jacques Cathelineau, 1759년 1월 5일 ~ 1793년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기에 발생한 방데 반란의 지도자이다.
– 자크 카텔리노 (Jacques Cathelineau)
.출생: 1759년 1월 5일
.사망: 1793년 7월 14일, 프랑스 낭트
.별명: 르 생 드 앙주 (Le saint de l’Anjou)
*프랑스 혁명기 방데 반란 지도
.기간: 1793년
.주요활동: 방데 반란 (투아르 전투, 퐁트누아-르-콩테 전투, 소뮈르 전투, 낭트 전투)
….. 제노사이드를 국가의 통합적 계획에 의한 집단의 전면적 혹은 부분적 학살이라고 정의할 경우, 방데 학살은 제노사이드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제노사이드의 범위를 이렇게 확대하면 사실상 모든 학살이 제노사이드에 속하게 되어 제노사이드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제노사이드는 ‘다른 종족의 전면적인 파괴를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학살’로 한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스인에 의한 프랑스인의 제노사이드”라는 말은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다. 방데 학살이 제노사이드인가를 판별하는 논쟁은, 레날 세셰르와 장 클레망 마르탱의 논쟁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방데 전쟁에서 엄청난 폭력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폭력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프랑스혁명은 아무런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다. 구체제의 폭력보다 더 가혹하고 야만적인 폭력이 ‘자유-평등-형제애’를 외친 혁명가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랑스 혁명은, 한나 아렌트가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을 비교하며 평가했듯이, 실패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_ 김응종 「방데전쟁의 폭력성-학살인가 제노사이드인가?」 군사 (軍史) 제97호(2015.12), 421~422쪽
○ 생애 및 활동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무렵 30세의 자크 카텔리노는 앙주 (프랑스 중서부의 옛 지명)에서 밀수품 등을 파는 행상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공화 정부가 루이 15세를 처형한 데 이어 성직자들을 탄압하고 세금을 늘리자 이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1793년 프랑스 서부 방데 지방에 반란이 일어나자 농민의 요청으로 반란에 가담하게 된다.
그 자신은 군대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그 웅변과 타고난 리더십으로 인심을 장악하게 된다.
배운 것이 없어, 천방지축으로 빗나가기 쉬운 농민들을 잘 통솔하여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왕당파와 십자군의 결성을 호소하면서, 농민을 조직하여 공화국 군의 초소를 차례로 습격하여 성과를 거둔다.
비정규전에서 종종 적을 물리치고 마을에서 농민을 모집하여 세력을 확대한다.
1793년 5월 가톨릭 왕군을 편성할 때는 농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로 부상하면서 다른 귀족들로부터 총사령관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6월 29일, 《낭트 공략전》 중을 지휘하다 총탄을 맞고 낙마하여 2주 후에 부상으로 전사하게 된다.
이후 반란군의 사기는 저하 파멸로 향했다.
그의 전사로 반란군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소규모로 곳곳에서 저항이 이어졌다.
반란군은 종교적 관용 정책으로 누그러졌고 1801년 나폴레옹에 의해 완전 진압되었다.
30만~40만 명이 처참하게 희생된 이 전쟁에 대해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다.
- 이후
그의 아들 자크조제프 드 카텔리노 (Jacques – Joseph de Cathelineau)는 프랑스 왕정복고 시기에 기사로 서임되었다.
또한 그의 손자인 앙리 드 카텔리노 (Henri de Cathelineau)는 프랑스 장교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종군했다.
○ 방데 전쟁
1793년부터 1796년까지 프랑스 제1공화국에 저항해 일어난 농민 봉기로 그 결과 봉기군의 대학살로 이어진다.
농민 봉기의 시발점이자 중심지가 방데였기 때문에 방데 전쟁, 방데 반란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과거 프랑스 혁명에 일방적으로 우호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는 방데 반란이라 불리며, 반혁명, 반동적 반란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으나, 근래에 이르러 프랑스 혁명시기에 저질러진 여러 과오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현재는 방데 전쟁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봉기는 루아르앵페리외르 (Loire-Inférieure), 멘에루아르(Maine-et-Loire), 되세브르 (Deux-Sévres), 방데 (Vendée) 이렇게 프랑스 서부에 존재하는 4개 주 (Départements)에 걸쳐 일어났다.
자코뱅이 주도하던 프랑스 혁명 정부의 범죄 중 하나다.
방데 전쟁에서의 학살은 단순히 반란군만이 아니라 민간인과 어린이, 아기 등 자국의 비무장 양민에 대해, 공화파 시민일지라도 학살하라고 정부에서 명령했고 시행되었다.
프랑스 서부에 있는 방데 지역의 농민들에 의해 1793년 시작되어 나폴레옹이 1801년 공식적으로 끝내기까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30 ~ 40만에 이르는 사망자를 냈다.
브리트니, 메인, 앙주, 노르망디에서 발생한 슈아누리 반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들의 반란은 때로는 ‘서부 전쟁’ (Guerres de l’ Ouest)으로 총칭된다.
혁명 중 가장 처참한 살육이 이뤄졌으며, 최근에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프랑스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