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5년 11월 14일, 미국 발명가로 첫 증기선을 개발하고 잠수함 노틸러스를 설계한 로버트 풀턴 (Robert Fulton, 1765 ~ 1815) 출생
로버트 풀턴 (Robert Fulton, 1765년 11월 14일 ~ 1815년 2월 25일)은 미국의 공학자이자 발명가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첫 증기선을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 로버트 풀턴 (Robert Fulton)
.출생: 1765년 11월 14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Robert Fulton Birthplace
.사망: 1815년 2월 24일, 미국 뉴욕 뉴욕
.국적: 미국
.부모: 로버트 풀턴 시니어, 메리 스미스
.형제자매: 아브라함 풀턴, 메리 풀턴, 엘리자베스 풀턴, 이사벨라 풀턴
.자녀: 줄리아 풀턴, 메리 풀턴, 코넬리아 풀턴, 로버트 풀턴
1807년 8월 17일 풀턴은 허드슨 강에서 최초의 증기선 클레몬트 호 (Clermont) 시운전에 성공한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증기 군함도 설계했다.
1800년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아 역사상 최초의 실용적 잠수함인 노틸러스를 설계했다.
○ 생애 및 활동
미국의 공학자이며 발명가인 로버트 풀턴 (Robert Fulton)은 1765년 11월 14일,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부모인 Robert Fulton과 Mary Smith Fulton은 아일랜드 이민자였다.
Fulton 가족은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Pennsylvania의 Little Britain에 있는 농장에서 살았다.
그는 Isabella, Elizabeth, Mary의 세 자매와 남동생 Abraham이 있었다.
1771년에 농장을 되찾아 팔았고 가족은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로 이사했다.
로버트 풀턴은 집에서 이미 읽고 쓰는 법을 배웠지만 여덟 살 때 랭커스터에 있는 퀘이커 교도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몇 년 후 그는 필라델피아 보석상에서 일했는데 로켓에 미니어처 초상화를 그리는 그의 능력은 그가 화가로서의 경력을 쌓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보석세공 일을 배우기도 했으며 한동안 화가로 활동한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방적기와 증기 기관을 보고 기계 발명에 관심을 가졌다.
- 로버트 풀턴의 증기선 이야기
23세에 새로운 배움의 희망을 품고 영국으로 건너간다. 화가로 밥벌이를 하며 기계 발명에 관심을 가진다.
영국 최초로 내륙 운하를 건설한 브리지워터 공작, 스터냅 백작을 알게 되어 운하와 선박 개량을 연구한다.
1796년에 발간된 책은 <운하 항해의 개선에 관한 논고> 이다.
1797년 프랑스 정부는 풀턴의 책자에 관심을 보이며 그를 초청한다. 그는 파리에 머물면서 각종 기술 자문을 하고 잠수함 제작도 건의한다.
1800년 나폴레옹의 지원을 받아 노틸러스 (그리스어로 항해자)로 불리는 원시적 형태의 최초의 잠수함을 설계하여 만든다.
그 후 프랑스의 계약 관련 부당한 대우와 재정손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때 영국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넘어간다.
영국 정부에 화공선과 어뢰를 만들 것을 제안하지만, 만든 어뢰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영국에서도 큰 성과 없이 1806년 미국으로 귀국하고야 만다.
1807년 세계 최초의 상업용 증기선 클러먼트호를 진수시킨다. 이 당시는 돛단배 (범선)가 대부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풀턴의 증기선 시도가 불가능하다며 비웃었다.
앞서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클러먼트호를 허드슨강의 뉴욕과 올버니 간을 정기 항행시킨다. 돛단배에서 증기선으로 바뀌는 혁명의 순간이었다.
- 잠수함 노틸러스 설계
풀턴은 기본적으로 무기 발명가였다. 그는 증기선 못지 않게, 기뢰와 잠수함 등 무기류의 발명에 열중했다. 기뢰와 잠수함은 사실 순수한 풀턴의 창작품은 아니다. 미국 독립 전쟁 때 실전에 투입되었던 터틀 (Turtle) 호가 있었다. 터틀 호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1776년 뉴욕 항에 정박한 영국 전함 이글 (HMS Eagle)호를 격침하려 했던 사건으로 유명하다. 터틀 호는 계란처럼 생긴 1인승 잠수함으로서, 손으로 돌리는 스크루로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이 잠수함은 적함의 밑에 몰래 잠수해들어간 뒤, 역시 손으로 돌리는 송곳을 이용하여 배 바닥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기뢰를 부착한 뒤 이탈, 그 기뢰가 시계에 의해 폭발하여 적함을 격침하는 방식이었다.
풀턴은 1797년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실용적 군용 잠수함을 설계하여 그것을 프랑스 총재 정부에 제안했다. 그 이름이 바로 노틸러스 (Nautilus, 그리스어로 항해자라는 뜻) 호였는데, 나중에 쥘 베르느의 소설 ‘해저 2만리’에 나오는 잠수함을 포함하여, 여러 잠수함이 이 이름을 쓰게 된다. 사실 이 노틸러스의 설계는 터틀 호의 기본 설계에서 따온 것이 분명했다. 바로 2년 전에 1795년에 터틀 호의 설계자였던 부쉬넬 (David Bushnell)의 설계가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1797년 12월 제출한 제안서를 통해, 이 신무기를 ‘훌륭한 엔지니어’라고 알려진 보나파르트 장군과 협의하고 싶다는 희망을 명시했다.
그 제안서에서, 그는 이 발명의 목표가 영국 해군 격멸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으며, 또한 제법 제대로 된 ‘죽음의 상인’, 즉 국제적 무기 상인으로서의 소양을 잘 드러내 보였다. 즉, 이 잠수함의 건조 및 테스트 비용 마련을 위해 이미 노틸러스 사라는 회사를 따로 만들었으니 프랑스 정부는 증명이 안된 이 신무기에 개발 비용을 따로 들일 필요가 없다는 솔깃한 제안과 함께, 이 신무기로 인한 전과와 자신이 받게 될 금전적 보상을 명확히 연결하여 제시했던 것이다. 가령 적함을 격침하는 경우, 해당 군함이 장비한 포 1문당 400 파운드를, 그것도 격침 후 6개월 안에, 반드시 지폐가 아닌 경화(specie, 즉 금화나 은화)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가령 74문짜리 전열함 1척을 격침하면 29,600 파운드, 즉 현재 가격으로 88억원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또 노틸러스 호가 적함을 나포하게 되면, 그 선박과 화물은 모두 노틸러스 사의 자산이 되도록 해달라고 했다. 특히 국제법적인 문제에도 신경을 써서, 노틸러스 호의 은밀한 전투 방식이 영국에서 비정규전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만약 노틸러스 호의 승무원이 영국군에게 생포될 경우 정규 포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태에 대해서도 안전 장치를 두었다. 즉, 포로가 된 노틸러스 호의 승무원이 영국군으로부터 폭력이나 사형의 위협에 직면할 경우, 그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군 포로에게 해당 위협의 4배에 해당하는 보복 행위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요즘도 그렇듯이, 국제 무기 거래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제안서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일단 격침 보상액이 너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영국 해군의 경우 격침에 대해서는 head money라고 해서 적 수병의 머리수에 대해 약간 보상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보상이 없었다. 포상금은 오로지 적함을 나포하는 경우, 그것도 약간만 수리하면 영국 해군이 쓸 만한 상태로 나포하는 경우에 대해서만 나포 포상금을 주었다. 당시 74문짜리 전열함 1척을 새로 만드는데 약 5만 파운드가 들었고, 적의 전열함을 나포하면 상태에 따라 약 2만에서 3만 파운드 정도만을 지불했던 것을 생각하면, 풀턴이 요구한 격침 포상금은 확실히 과다한 측면이 있었다. 프랑스 해군성에서는 처음에는 그 절반 가격만 지불하겠다고 제시했다가, 정작 총재 정부에서는 전체 제안을 거절해버렸다. 이런 전투 방식은 신사답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풀턴은 3차례의 제안서 끝에야 제작 및 테스트 허가를 받아 1800년에 노틸러스 호의 건조에 들어갔다. 노틸러스 호는 똑바로 선 계란형이었던 터틀 호와는 달리, 제법 현대적 잠수함처럼 길쭉한 원통형 모습을 하고 있었고, 역시 손으로 돌리는 스크루를 이용해 추진하게 되어있었다. 물 위에서는 마치 부채살 모양의 돛을 펴서 항진할 수도 있었다. 노틸러스 호는 무쇠로 만든 골격에 구리판을 입혀 만든, 그러니까 금속제 잠수함으로서, 길이는 6.5m에 폭은 2m가 채 안되는, 3인승 잠수함이었다. 특별히 눈여겨 볼 부분은 선체 좌우에 수평 안정타가 있었다는 것이다. 풀턴은 이 수평 안정타의 각도를 조절하여 잠항 또는 부상시의 선체 각도를 조절하도록 설계를 했다. 이 부분은 현대적인 잠수함이 모두 채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확실히 풀턴의 설계가 과거 부쉬넬이 만든 터틀 호와는 차원이 달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기뢰 (역시 torpedo라고 불렸다)의 부착 및 폭파 방식도 터틀 호의 애매모호한 방식과는 달랐다. 잠수함 외부에 긴 밧줄이 달린 기뢰를 달고 다니되, 이 밧줄은 바늘귀같은 구멍이 달린 못의 그 구멍을 통과해서 꿰인 상태로 잠수함에 달려 있었다. 잠수함이 적함 밑에 도착하면, 잠수함 상부의 돔 (dome)에서 그 밧줄이 꿰인 구멍달린 못을 적함의 목제 선체에 박아넣고, 기뢰를 탈착시킨 뒤, 스크루를 돌려 적함에서 떨어져 나갔다. 즉, 잠수함은 기뢰가 끝에 달린 긴 밧줄을 끌고 가는 형국이었는데, 그 밧줄은 적함에 꽂힌 못의 구멍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잠수함이 적함에서 충분히 멀어지면, 기뢰가 적함에 결국 부딪히게 되어 있었다. 이 충격에 의해 기뢰 내부에 설치된 일종의 플린트락 머스켓의 발화 장치같은 점화 장치가 작동되어, 그 기뢰 속에 든 화약이 폭발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구조의 노틸러스 호는 테스트에서 매우 좋은 결과를 냈다. 프랑스의 군항 르 아브르 (Le Havre)의 내항에서 테스트해본 결과, 3명의 승무원과 촛불 한개를 태우고도 1.5m 깊이에서 1시간을 잠항하면서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고, 스크루로 176m를 항진하는데 4분이 걸렸다. 또 기뢰 테스트도 성공적이어서, 프랑스 해군이 제공한 작은 12m 짜리 보트 하나를 폭파하는데도 성공했다. 이러한 테스트는 프랑스 지방 관리가 직접 목격하고 증언했으며, 풀턴이 줄을 댔던 당대의 과학자들이자 나폴레옹의 측근이었던 라플라스 (예, 라플라스 방정식의 그 라플라스) 및 몽쥬 (이집트에 따라갔던 바로 그 몽쥬)를 통해 나폴레옹에게도 보고가 되어 나폴레옹을 만나 협상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프랑스 측의 냉대에 깊은 상처와 함께 재산상의 손실만을 입은 풀턴은 영국의 초청으로 영국 행을 택한다. 특히 한푼의 비용도 지불하지 않았던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 정부는 영국으로 여행하는 비용조로 800 파운드를 선지불했기 때문에, 풀턴으로서는 무척 끌렸을 것이다.
영국의 피트 수상은 나폴레옹과는 달리 현실 감각이 다소 떨어졌는지, 이런 공격 방식을 채택하기로 하고 풀턴과 계약을 맺는다.
특히 풀턴은 프랑스에서 만들던 노틸러스 호의 설계도를 영국에서 더욱 향상시켜, 이 잠수함으로 프랑스의 주요 군항들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 또한 1805년의 트라팔가 해전으로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즉, 트라팔가 해전으로 바다를 완전히 제패한 영국 해군에게 잠수함 같은 물건은 필요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풀턴은 영국에서도 별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하고 1806년 미국으로 되돌아간다.
○ 발명품
1797년 이래 파리에서 증기선 제작에 손을 댔으며, 1803년, 파리 센 강에서 시험한 결과 성공을 거두어, 당시 신대륙이던 미국에서 풀턴의 증기선은 교통 기관의 발전을 이루었다.
증기선 외에 발명품으로 대리석 자르는 톱, 운하 파는 기계, 아마포 짜는 직기 등이 있다.
○ 저서
Torpedo war, and submarine explosions published 1810.
A Treatise on the Improvement of Canal Navigation, 1796. From the University of Georgia Libraries in DjVu & layered PDF formats.
A Treatise on the Improvement of Canal Navigation 1796. From Rare Book Room.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