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7년 12월 28일, 태국 (톤부리 왕국)의 탁신왕 (King Taksin) / 딱신 대왕 (Somdet Phrachao Taksin Maharaj, 1743 ~ 1782) 즉위
딱신 대왕 (Somdet Phrachao Taksin Maharaj) 혹은 정소왕 (중: 鄭昭, 1743년 4월 17일 ~ 1782년 4월 7일)은 톤부리 왕조의 유일한 국왕이다. 1767년 아유타야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로서, 주변국의 전쟁 위험으로부터 시암을 통일시킨 위대한 지도자로서 태국 국민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받는 국왕이다. 이전의 수도였던 아유타야가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딱신은 톤부리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그의 통치는 수많은 전쟁이 특징이었는데, 버마의 침공을 물리쳤고, 라오스의 왕조였던 란나 왕국을 병합하였으며, 캄보디아도 병합하였다.
그의 사후 그의 왕국은 차크리 왕조의 건국으로 이어졌으며, 붓다 요드파 출라오께 왕에 의해 랏따나꼬신 왕국이 뒤를 이었다. 그의 업적에 비추어 후일 태국 사람들은 그를 대왕으로 호칭하였다.
– 탁신 / 딱신 (Taksin)
.별호: 신 (สิน)
.출생: 1734년 4월 17일, 아유타야 왕국 아유타야
.사망: 1782년 4월 6일 (47세), 톤부리 왕국 톤부리
.부모: 정용, 태터매스
.배우자: 밧바리자, 바리자팩디스리수다랙
.종교: 불교
*톤부리 국왕
재위: 1767년 12월 28일 ~ 1782년 4월 6일
대관식: 1768년 12월 28일
전임: 보로마라차 3세 / 후임: 라마 1세
*짠타부리 왕
재위: 1767년 6월 15일 ~ 1767년 12월 28일
시암 (태국의 과거 이름) 역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오늘날 태국인들의 국가적 영웅으로 통한다. 수많은 전쟁을 통해 뛰어난 지도력을 보인 그는 톤부리 왕국을 세우고 번영의 시대를 열었지만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말년의 탁신은 자신의 피를 하얀색으로 바꿀 수 있고 부처가 될 것이라고 믿는 등 광기에 휩싸인다. 이로 인해 혼란이 빚어지고 반란이 일어나자 차크리 장군이 변방에서 달려와 반란을 진압한다. 그 직후 탁신 왕은 1782년 오늘, 친구이자 신하인 차크리에게 참수당한다.
그의 사후 200년 뒤인 1981년 태국 정부는 그에게 ‘위대한 자’ 칭호를 부여했다.
○ 생애 및 활동
1734년 4월 17일, 아유타야 왕국 아유타야에서 태어난 탁신은 아버지가 중국 광둥 (廣東) 출신의 중국인이었고, 어머니는 태국인이인 혼혈아였다. 어려서 3년간 불교수행을 했으며, 유력자의 양자로 들어가 군인으로 성장했다. 이름은 신 (Sin)인데 태국어로 보물이라는 의미이고, 탁 (Tak) 지방을 통치하던 인물이었다고 해서 탁신이라 불리웠다.
탁신은 아유타야 왕국의 조정에서 녹을 먹던 1767년, 각지에서 태국인들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중 한사람이 탁신이었다.
미얀마의 침략으로 왕국이 멸망하자 친구인 차오 프라야 차크리의 도움으로 톤부리에서 세력을 일으킨다.
1767년 4월 7일 버마왕국이 침공해 사이암의 수도 아유타야 (Ayutthaya)를 점령했다. 400년의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의 침략으로 종말을 고했다. 지금도 아유타야에는 수많은 탑들이 뜯긴채 침략자의 약탈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버마의 침략으로 아유타야 왕조의 마지막 임금 보로모라자 5세가 숨지자, 태국은 6개로 분열되었다. 동부 해안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탁신은 각지의 저항세력을 통합해 버마군을 격퇴했다.
탁신은 1767년 12월 28일, 지금 방콕의 한 지역인 톤부리 (Thonburi)를 수도로 삼아 왕위에 올랐다. 곧이어 다섯 개 지방 세력을 제압해 나갔다.
탁신은 6개 지방으로 나눠진 세력들을 차례로 물리쳐 재통일을 이룬 후 1768년 톤부리 왕국의 왕이 된다.
미천한 탁신이 어느날 갑자기 세력을 확대하는데는 당시 사이암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중국인 (화교)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의 재임 기간은 전쟁으로 일관했다. 버마군을 물리친 이후, 캄보디아와 전쟁을 벌여 병합했고, 이어 라오스의 란나 왕국을 멸망시키고 병합했다.
탁신은 미얀마의 침략을 격퇴하고 비엔티엔 (라오스)과 캄보디아의 일부까지 영토를 넓히면서 중국, 영국 등과 교역하는 등 경제 부흥에 힘썼다. 그는 문학과 건축 등 문화도 사랑하고 발전시킨 왕이었다.
하지만 재위 말기에 그는 광기에 빠져버렸다. 역사가들은 그가 과도한 긴장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재위 14년째가 되던 1781년 그의 정신이상 증세가 자주 나타났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불교 개혁에도 관심을 가져 태국 역사상 승단 정화를 위해 애쓴 군주였다. 하지만 말년에 불교 수양에 침잠하면서 자신이 해탈 단계에 들어선 불교 성인임을 자처했다. 그는 자신의 피가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하는 미래의 부처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을 성인으로 숭배하지 않는 수도승에게 승직을 박탈하고, 매질을 하고, 노동교화형에 처했다.
잇단 전쟁으로 경제적 피로감도 커졌다. 기근이 확대되고, 약탈과 범죄가 확산되었다. 신하들의 부패도 심각했다. 탁신 왕은 부패한 대신을 고문하고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러는 가운데 신하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마침내 프라야 산 (Phraya San)이라는 군벌이 정변을 감행했다. 쿠데타군은 수도 톤부리를 장악하고, 탁신대왕의 항복을 받았다. 쿠데타군은 탁신왕에게 정통불교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쿠데타가 발생하자, 태국 각지에서 살인과 약탈이 확산되고 치안이 무너졌다. 캄보디아 전선에 나가있던 차오 프라야 차크리 (Chao Phraya Chakri) 장군이 회군해 수도로 입성했다.
차크리 장군은 탁신왕으르 퇴위시키고, 죽여버렸다. 탁신왕은 체포되어 몽둥이로 맞아죽었다고 전해진다.
탁신 대왕의 톤부리 왕조는 1대로 그친다. 차크리 장군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라마 1세 (Rama I)가 된다. 이 왕조를 차크리 왕조라고 하는데, 지금 태국 왕실의 뿌리다. 현재 태국 국왕 마하 와치랄롱꼰 (Maha Vajiralongkorn)은 차크리 왕조의 10대 국왕이다.
○ 평가
중국인 혼혈로서의 정체성, 하류 계급에서 왕위에 오른 열등감과 불안감, 종교적 열정이 탁신 대왕으로 하여금 미치도록 했을 것이다. 신라말 궁예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미치지 않았다는 학설도 있다. 지금의 왕조가 명분을 만들기 위해 증세를 과장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승지의 기록이다.
하지만 태국인들에겐 탁신이 외적을 물리치고 분열된 나라를 통일시키고, 영토를 넓혔다는 점에서 대왕으로 숭배하고 있다.
그의 사후 200년 뒤인 1981년 태국 정부는 그에게 ‘위대한 자’ 칭호를 부여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