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0년 3월 20일,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rich Hölderlin, 1770 ~ 1843) 출생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rich Hölderlin, 1770년 3월 20일 ~ 1843년 7월 6일) 은 독일의 시인이다. 넥카 강변의 라우펜에서 출생하였으며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rich Hölderlin)
.출생: 1770년 3월 20일, Lauffen am Neckar
.사망: 1843년 6월 7일, 튀빙겐
.직업: 시인, 사서, 작가, 번역가, 소설가, 철학자, 리브레토 작가
.언어: 독일어, 프랑스어
.국적: 독일
.학력: 튀빙겐 에버하르트 카를 대학교, 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
.사조: 낭만주의, 독일 관념론
.부모: Johanna Christiana Gock (모)
.형제: Heinrike Breunlin
재학 당시 철학자 헤겔 · 셸링 등과 사귀었다. 고대 그리스를 동경하여 낭만적 · 종교적인 이상주의를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소설 ‘히페리온’, 미완성 비극 ‘엠페도클레스’, 시 ‘하이델베르크’, ‘라인강’, ‘다도해’, ‘빵과 포도주’ 등이 있다.

○ 생애 및 활동
1770년 슈바벤 지방 네카 강변의 작은 마을 라우펜에서 수도원을 담당했던 관리 하인리히 횔덜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뉘르팅겐 시의 시장과 재혼하며 뉘르팅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1779년 의붓동생 둘과 새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어머니는 절망과 비탄에 몸부림쳤고, 그걸 지켜보던 어린 횔덜린은 “나의 어머니가 그 짐을 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라고 신께 기도한다.
다행히도 두 명의 남편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만큼의 유산을 남겼으며 이 덕분에 부족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이때부터 자주 비감에 젖는 자신의 성격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훗날 밝힌다.
1788년, 수도원 학교를 졸업하고 개신교 기숙사 장학생으로 튀빙겐 신학교에 진학한다.
그가 성직자가 되길 원하던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헤겔, 셸링 등과 교류하며 칸트의 비판철학과 고대 그리스 고전에 심취한다.
이 무렵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을 지켜보며 혁명의 이상에 고취되기도 했지만 급진파인 자코뱅파의 공포 정치에는 반대했다.
석사학위를 따낸 후 성직자의 길을 걷는 대신 독일 각지를 떠돌며 작품 활동에 매진다.
1793년, 프리드리히 실러를 소개를 받아 실러는 횔덜린에게 가정교사직을 소개시켜주고 자신의 간행물에 그의 작품들을 실어주는 등 여러 방면으로 지원해준다.
이외에도 괴테, 피히테, 노발리스와 같은 대문호들과 만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유일한 소설인 휘페리온을 쓰기 시작한다.

1795년, 횔덜린은 프랑크프루트의 부유한 은행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는데 안주인 주제테 공타르와 사랑에 빠진다. 주제테는 온화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인물이었으며 그녀 역시 횔덜린의 심성에 끌려 그와 교제를 나눈다.
횔덜린은 그녀를 디오티마라 부르고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는 등 깊은 애정을 표현한다. 허나 그들의 밀회는 발각되었고 횔덜린은 가정교사직에서 쫒겨나게 된다. 가난과 이별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면서 정신착란의 징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의 창작욕은 불타올라 수많은 작품을 써나간다.
1800년에서 1802년까지 2년간의 짧은 시기에 신이 축복이라도 내린듯 그의 대표작들이 쏟아졌으며, 이시기를 횔덜린 문학의 절정기라 부른다.
1802년, 주제테가 병으로 사망하였고 그는 심각한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상태가 호전되는듯 싶다가도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었다.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는 와중에서도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주제테의 죽음을 잊기위해 일에 미친듯이 몰두했다. 송시들을 쓰고 그리스 비극들을 완역하고 출판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이 무렵 친구 이자크 폰 싱클레어가 그에게 도서관 사서직을 마련해주며 생계를 이어간다.
1805년, 싱클레어가 반체제활동을 했다는 무고를 당하며 구속되었고 횔덜린 역시 공모자로 조사받았으나 정신착란 증세로 튀빙겐의 정신병원에 강제 이송된다. 이때의 이송 광경을 보고 방백의 부인 카로리네는 자신의 딸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불쌍한 횔덜린이 오늘 아침 그의 가족에게 돌려보내려고 이송되었단다. 그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그를 책임진 사람들이 그를 안으로 밀어 넣었어. 횔덜린은 소리 내어 외치고 무장된 사람들이 그를 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맞서 싸웠고, 엄청나게 긴 그의 손톱으로 그 사람을 할퀴어서 그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단다.”

8개월만에 퇴원이 결정났지만 횔덜린은 더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 때 그의 소설 휘페리온을 감명깊게 읽은 목수 에른스트 치머가 “그렇게 아름답고 찬란한 영혼이 파멸해야 한다는 것을 몹시 애석해”하였다.
병원장은 횔덜린을 맡아주기를 부탁했고 치머는 이에 후견인을 자처하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치머 집안의 친절한 보살핌 덕에 횔덜린은 의사로부터 3년을 못 넘길 것이라는 진단과는 달리 36년이라는 세월을 더 보낸다.
1843년 6월 7일 밤 11시 횔덜린은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6월 10일 튀빙겐 공동묘지에서 거행되었다.
백여명의 신학교 학생들이 장례 행렬을 따랐다.
그의 의붓동생 카를이 묘비를 세웠다.
그 묘비에는 그의 시 《운명》의 마지막 연 첫 4행이 새겨져 있다.
“폭풍 중 가장 성스러운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 벽 무너져 내리기를,
또한 내 영혼 한층 찬란하게
그리고 한층 자유롭게 미지의 세계로 물결쳐 가기를!”
○ 어록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지구상에 지옥이 만들어졌던 것은 항상 인간이 자신들의 천국을 만들려고 할 때였다.”
“삶 속에서 예술을 배우고 예술 속에서 삶을 배운다.”

○ 작품
작품으로는 소설 ‘히페리온’, 미완성 비극 ‘엠페도클레스’, 시 ‘하이델베르크’, ‘라인강’, ‘다도해’, ‘빵과 포도주’ 등이 있다.
- 주요 작품
휘페리온 – 그리스의 은자 Hyperion; oder, Der Eremit in Griechenland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Der Tod des Empedokles
빵과 포도주 Brod und Wein
- Bibliography
Internationale Hölderlin-Bibliographie (IHB). Hrsg. vom Hölderlin-Archiv der Württembergischen Landesbibliothek Stuttgart. 1804–1983. Bearb. Von Maria Kohler. Stuttgart 1985.
Internationale Hölderlin-Bibliographie (IHB). Hrsg. vom Hölderlin-Archiv der Württembergischen Landesbibliothek Stuttgart. Bearb. Von Werner Paul Sohnle und Marianne Schütz, online 1984 ff (after 1 January 2001: IHB online).
1804 – 1983 (Erste Ausgabe). Bearbeitet von Maria Kohler. – 1985. – XVI, 766 S.
1984 – 1988 . – 2 Teilbände – 1991. – XLII, 664 S.
1989 – 1990 . – 2 Teilbände – 1992 . – XLII, 602 S.
1991 – 1992 . – 2 Teilbände – 1994 . – XLII, 683 S.
1993 – 1994 . – 2 Teilbände – 1996 . – XXXIV, 910 S.
1995 – 1996 . – 2 Teilbände – 1998. – XXXIV, 904 S.
Sonderband
Musikalien und Tonträger zu Hölderlin 1806 – 1999 / bearb. von Werner Paul Sohnle, Marianne Schütz und Ernst Mögel. – 2000. – XXVIII, 596 S.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