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1년 6월 9일, 영국의 발명가로 ‘철도의 아버지’ (Father of Railways) 조지 스티븐슨 (George Stephenson, 1781 ~ 1848) 출생
조지 스티븐슨 (George Stephenson, 1781년 6월 9일 ~ 1848년 8월 12일)은 영국의 발명가로 소위 ‘철도의 아버지’ (Father of Railways)로 불린다.

조지 스티븐슨은 후대의 증기 기관차와 철도 운송 시스템의 원형을 만들고, 표준궤를 제시한 사람이다. 철도의 역사에서 이 사람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될 정도로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크다.
뉴캐슬 부근의 와이램이라는 탄광촌에서 태어나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아버지와 함께 탄광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열심히 기계를 연구하여 1814년 처음으로 석탄 운반용 기관차를 탄광에서부터 항구까지 달리게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1825년 스톡턴-달링턴 간에 철도를 부설, 세계 최초의 여객 철도용 기관차 ‘로커모션 호’가 발명자인 그에 의하여 움직였다. 그 후 본격적으로 리버풀-맨체스터 간의 철도를 개설하여 지방민의 반대와 사고, 곤란한 공사를 무릅쓰고 1829년 개통하였다. 같은 해인 1829년에 최초의 실용적인 기관차 로켓호를 개발했다. 그로부터 증기 철도의 가치가 인정되어 그의 명성이 굳어졌다. 그 후에도 여러 곳의 철도 부설 기사로서 활약하여 1830년 ~ 1840년 사이에 만들어진 주요한 철도는 그의 기술적인 지도를 받았다. 처음으로 증기 기관차를 발명한 그는 ‘철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그가 발명한 증기 기관차는 영국의 산업 혁명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세계의 교통 수단에 새로운 혁명을 가져왔다.

○ 생애 및 활동
– 유년기와 청년 시절
조지 스티븐슨 (George Stephenson, 1781년 6월 9일 ~ 1848년 8월 12일)은 1781년 6월 9일,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의 윌란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로버트는 공장에서 증기기관에 석탄을 때는 화부로 일하고 있었다. 1802년 부인인 프랜시스와 결혼하고 1803년에 아들 로버트 (1803~1859/아버지에 이어 증기 기관차 개량 및 연구에 힘썼다)가 태어나자 웨스트무어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1806년 부인이 둘째 딸을 낳은 후 죽자 잠시 웨스트무어를 떠났으나, 이어 아버지까지 탄광 사고로 시력을 잃는 불운이 겹쳤다. 다시 웨스트무어로 돌아온 조지 스티븐슨은 1811년부터 탄광의 증기기관 엔지니어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증기기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 무렵 부터였다.
– 안전 램프의 발명
당시 탄광의 조명은 램프를 쓰고 있었는데, 이 램프는 분진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큰 것이었다. 탄광 사고로 아버지가 실명하자 스티븐슨은 보다 안전한 램프에 관심을 가졌고, 결국 1815년에 만들어냈다. 원리는 심지 주위에 촘촘한 철망을 씌워서 램프 외부의 인화성 입자에 불꽃이 닿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같은 연도에 왕립발명가회 소속의 험프리 데이비(1778~1829)경 이 같은 원리의 안전 램프를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스티븐슨은 험프리 데이비 경에게 아이디어를 표절했다고 고소당했다. 다만 데이비는 조금 늦은 1816년 1월에 이를 발표하는 통에 스티븐슨도 표절이라면 왜 당신이 늦었냐고 따져들었다. 결국 법정까지 간 이 분쟁은 1833년, 스티븐슨이 표절한 것이 아닌 우연히 동 시기에 같은 원리의 램프가 발명되었음을 인정하고, 스티븐슨도 안전 램프의 발명자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림으로서 종결되었다. 데이비 경은 이 판결 결과가 나오기 전에 죽었는데 이걸 예측했는지 죽은 뒤 자기 무덤에다 스티븐슨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기록해 놓았다.

– 증기 기관차와 연철 레일의 개발
사실 증기기관차를 처음 발명한 것은 1804년 리처드 트레비딕이었다. 다만 그의 시대엔 기존의 마차를 위한 선로가 증기기관차를 버티지 못하여 상용화되지 못하였다. 한편 스티븐슨이 처음으로 증기 기관차를 만든 것은 1814년이었다. 처음으로 만든 증기 기관차는 블뤼허(Blücher)호라는 이름을 붙였고, 킬링워스 마차철도에서 처음 시범을 보였다. 이 시범운행에서 블리처 호는 6.4km/h의 속도로 30톤의 석탄을 실은 화차를 끌고 언덕을 올라갔다. 이후 이 블리처 호는 16대까지 제작되어 킬링워스와 그 주변의 탄광에서 마차 대신 석탄을 운송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문제점이 발생했는데, 이 당시의 선로는 목재나 주철을 사용했기 때문에 기관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점착력을 높이기 위해 동륜을 6륜으로 늘린 증기 기관차를 시험하다가 레일을 깨먹기도 했다. 조지 스티븐슨은 연철 레일을 개발하여 기관차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개량했다.

– 스톡턴–달링턴 철도
1821년, 철도 운송의 가능성을 엿본 스티븐슨은 본격적으로 증기 기관차 전용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한다.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그것으로, 원래 이 철도는 말이 석탄 화차를 끄는 전형적인 마차철도였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이 철도의 계획을 바꿔 증기 기관차가 화차를 끌어나르는 철도로 바꿔 버린다.
이 철도를 위해 스티븐슨은 새로운 증기 기관차를 만들었는데, 로코모션 1호가 그것이다.
로코모션 제1호 (Locomotion No.1)는 조지 스티븐슨이 1825년에 제작하여 최초로 실용화된 증기 기관차이다, 스툭턴과 달링턴 사이의 철도에서 90톤의 석탄열차를 끌고 시속 18km로 달리는 기록을 냈다. 로코모션 제1호는 처음에는 엑티브호라고 불렀고, 1869년까지 운행했다. 현재는 철도 발상지인 달링턴에 보관되어 있다.
1825년 9월 27일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개업하고 새로 만든 이 기관차가 투입되자, 석탄과 밀가루 80톤을 싣고 39km/h의 속도로 달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 철도를 부설할 때 스티븐슨은 자신이 만든 연철 레일을 깔고, 기존의 주철 레일보다 안전하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그리고 이 철도에서 스티븐슨이 결정한 선로 폭, 즉 4피트 8과 1/2인치(1435mm) 궤간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고, 국제철도연맹에 의해 표준궤(Standard Gauge)로 지정된다.
이 철도는 여객수송도 했지만, 여객 수송은 여전히 마차를 이용하고 있었다. 또한 경사가 심한 일부 구간은 로프로 화차를 끌어올리는 등 전 구간에서 증기 기관차가 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두 번째로 부설한 철도는 여객수송도 증기 기관차로 처리하고, 모든 구간에 증기 기관차가 달리게 된다.

– 리버풀–맨체스터 철도
두 번째로 부설한 철도는 리버풀-맨체스터간 노선이었다. 리버풀은 항구도시였고 맨체스터는 그 당시 잘나가던 공업도시였다. 당연히 수많은 물품이 이 두 도시간을 오갔고, 당시 이 수요는 산키 운하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하는 물류가 오가는 데 너무 느렸다.
스티븐슨은 이 두 도시 사이에 철도를 깔려고 조사했는데, 중간에 차트 모스라는 이름의 늪이 존재하고 있었다. 철도 노반 부설에는 최악의 환경. 그러나 스티븐슨은 많은 돈과 노력을 들어 흙을 메워 노반을 다지고, 1829년 철도를 깔았다. 이 철도의 총 연장은 97km였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얽힌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기업가들이 스티븐슨의 기관차를 쓰는데 반대하고 나섰고, 스티븐슨은 기관차의 성능으로 승부를 보기로 하고 그 유명한 레인힐 기관차 경주 대회(Rainhill Trails)를 열었다.
레인힐 기관차 경주 대회에 예선을 거쳐 최종 엔트리에 들어간 기관차는 총 5대였다. 대회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사이클롭드 (Cycloped) 호는 증기 기관차는 아니었고, 벨트 위에 말이 올라가서 달리는 것으로 동력을 얻는 조잡한 것이었다. 대회 규정에 참가 기관차를 증기기관으로만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 그러나 말이 폭주하는 바람에 기관이 망가지면서 완주에 실패했다.
노블티(Novelty) 호는 제대로 된 증기 기관차다. 첫날 운행시 이 기관차는 시속 45km/h로 완주하며 이 대회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그러나 둘째날 운행시 기관에 이상이 생겨 완주하지 못했고, 셋째날은 기관이 수리되지 않아 결국 완주에 실패했다. 훗날 이 기관차는 개량 후 성 헬렌 철도에서 몇년 간 사용되었다. 현재 이 기관차는 레플리카가 제작되어 맨체스터의 박물관에 운행 가능 상태로 전시되어 있다.
퍼서비어런스(Perseverance) 호도 증기 기관차이긴 했는데, 불운했다. 대회를 위해 레인힐로 운송되던 도중 사고로 파손되었고, 5일 동안 수리를 거쳐 대회에 출전했다. 이 때문에 대회 끝인 이틀만 출전했는데, 속도는 16km/h였고 완주에도 실패했다. 그래도 이 기관차는 참가상으로 25파운드를 받았다.
산 파레일(Sans Pareil) 호도 제대로 된 증기 기관차다. 2실린더를 채용한 기관차였다. 그러나 140kg을 싣고 주행을 시도했을 때 실린더에 금이 가면서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래도 구조는 제대로 된 증기 기관차였기 때문에 개량을 거쳐 2년 후 개통된 볼턴-레이흐 철도에서 채택되어 활약했다. 이 기관차도 맨체스터의 박물관에 레플리카가 있다.
로켓(Rocket)호는 조지 스티븐슨이 그의 아들 로버트와 같이 만든 기관차다. 증기가 지나는 관을 25개나 사용하여 열이 닿는 단면적을 늘린 기관차였다. 당연히 다른 모든 기관차를 누르고, 13톤의 화물을 끌고 최고 속도 48km/h, 표정 속도 19km/h를 기록하며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이 기관차에서 사용한 관을 많이 사용하여 증기가 지나는 단면적을 늘리는 기술은 이후 등장한 모든 증기 기관차의 기본 구조가 되었다.애니메이션 토마스와 친구들의 7번째 극장판 ‘잃어버린 왕관’의 캐릭터인 스티븐의 모티브가 바로 로켓호이다! 굴뚝 위치나 색깔 등 다소 차이가 있다.
대회 결과 스티븐슨의 기관차가 성능이 월등히 좋은 것이 인정되었고, 기업가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의 기관차로는 로켓호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1830년 9월 15일 개통식을 가지고, 기관차를 이용한 승객 및 화물 수송이 시작되었다. 결국 이 철도는 세계 최초의 근대적인 철도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 말년 및 업적
이후 그는 여러 군데의 철도를 건설하고 운영하다가 1848년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이 사람이 없었으면 현대의 철도는 어떻게 발전했을지 모를 정도로 기여한 바가 많다. 괜히 “철도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증기 기관차의 원형을 제시하고, 근대적인 철도 운송 시스템의 원형은 이 사람이 다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부설하고 운영한 리버풀-맨체스터 철도는 철도 운송 산업의 혁명을 불러일으켰고, 10년 만에 영국 전 국토에 3200km 길이의 철도가 부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철도는 영국, 유럽, 북미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고, 조지 스티븐슨은 혁신적인 운송 수단의 주요 안내자로 계속해서 도로 건설, 교량 설계 , 기관차 및 차량 제조 문제를 해결하였다.
스티븐슨은 건설 중인 많은 개별 선로들이 결국에는 서로 연결될 것이라 생각하여 동일한 표준궤간(1,435 mm)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현재 세계 철도는 광궤(Wide Gauge), 표준궤(Standard Gauge), 협궤(Narrow Gauge)의 세 종류의 궤간중 스티븐슨 게이지(Stephenson’s Gauge), 즉 표준궤간이 가장 많이 보급돼 전체 철로의 68%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은 98%, 유럽에서는 70%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
18살까지 문맹이었던 조지 스티븐슨은 1847년 세계 최초의 기계학회(Institution of Mechanical Engineers)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848년 그가 흉막염으로 67살의 나이에 사망하였을 때, 기관차는 조잡하고 불완전한 기계에서 오늘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기본적인 형태의 엔진으로 변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