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11월 24일, 미국의 제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Zachary Taylor, 1784 ~ 1850) 출생
재커리 테일러 (Zachary Taylor, 1784년 11월 24일 ~ 1850년 7월 9일)는 미국의 군인이자, 12번째 대통령 (1849 ~ 1850)이다.
– 재커리 테일러 (Zachary Taylor)
.출생: 1784년 11월 24일, 미국 버지니아주 바버스빌
.사망: 1850년 7월 9일 (65세), 미국 워싱턴 D.C.
.정당: 휘그당
.배우자: 마가렛 스미스 테일러
.자녀: 앤 매컬 테일러, 사라 녹스 테일러, 옥타비아 판닐 테일러, 메리 스미스 테일러, 메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블리스 테일러, 리처드 테일러
.종교: 개신교 (성공회)
*미국의 제12대 대통령
.임기: 1849년 3월 4일~1850년 7월 9일
.부통령: 밀러드 필모어
.전임: 제임스 K. 포크(제11대) / 후임: 밀러드 필모어(제13대)
미영전쟁에서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함께 인디애나를 원주민들의 공격에서 지켜냈고 막바지인 1814년에는 존슨 요새를 점령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던 명장이다.
대통령이 된 후 얼마 가지 않아 체리를 과식해서 사망한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버지니아주 바버스빌 근처에서 6남 3녀 중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 리처드와 사라 테일러는 버지니아주 지역 농원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 리처드는 미국 독립 혁명에서 사관으로 복무하였으며, 1783년 켄터키주 루이빌 근처에 있는 6,000 에이커의 대지를 받았다.
켄터키 경계 지방에는 학교들이 없었지만, 재커리는 가정 교사들 아래에서 공부하였으며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상식들을 얻었다.
그는 인디언 전쟁 도중에 자라왔으며, 아버지로부터 독립 전쟁의 이야기를 들었다.
- 군 경력
1808년 육군에 입대하여 중위로 임명되었으며, 1810년 대위로 진급하였다.
그는 의무감이 있고 용기있는 군인으로 1812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그 후로는 주로 인디언을 토벌하고 진압하는데만 큰 공을 많이 세웠다.
별명은 ‘Old Rough and Ready’로, 거칠고 노련한 준비된 지휘관이라는 뜻이다.
미국-멕시코 전쟁이 터지자 기습공격을 해서 1847년 3월 베라크루스에 상륙, 그해 9월 14일 스콧과 함께 멕시코 시티를 점령해서 1848년 2월 강화조약을 맺고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그저 군인이었으나, 이 전쟁의 공적을 평가받아서 휘그당 (오늘날 공화당의 전신) 후보로 지명되어 당선, 이듬해 취임했다.
- 대통령 재임
테일러는 1849년 3월 5일 취임식을 가졌다. 그는 보통 3월 4일에 사무직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일요일에 취임식을 가지는 데 거절당하였다.
어떤 역사가들에 의하면 상원의 대통령 임시로 데이비드 R. 애치슨이 3월 4일에 대통령직이 비어있던 이유로 권한 대행을 맡았다고 한다.
테일러는 자신이 장치적 경험이 부족한 것을 알던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조언에 의지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에 대항하여 행동하는 데 아무도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니카라과 운하
포크 대통령 행정부 동안에 태평양 연안에 놓인 영토의 획득이 중앙아메리카에 걸친 수로의 꿈을 소생시켰다. 미국의 비지니스맨들은 니카라과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권리들을 손에 넣었다. 영국도 운하르 건설하는 데 흥미를 가졌다.
1850년 미국과 영국은 클레이턴-벌워 조약을 체결하여 아무 운하의 중립성을 보증하였다.
.지방적인 불화
캘리포니아가 자유주로서 합중국에 가입하는 데 준비하면서 1849년 새 영토들에 노예 문제의 확장에 논쟁이 최고 기록에 도달하였다.
테일러는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초음에 영토로 만드는 것보다 즉시 주로서 인정하는 데 의회에 역설하였다. 이 매너에서 그는 영토들에서 노예 제도에 논쟁들을 피하는 데 희망하였다.
그러나 남부인들은 화를 내면서 새로운 주들이 합중국으로 인정되기 전에 다른 노예 문제들의 조정을 요구하였다. 다음 6개월 동안에 의회는 그 위대한 토론들 중의 하나를 가졌다.
남부인들은 탈퇴를 위협하였고, 북부인들은 합중국으을 인정하는 데 명령에서 전쟁을 약속하였다. 만은 노예들에 빚을 져었어도 테일러는 북부의 편에 들었다. 그는 합중국을 지키는 데 무력을 쓰는 보증을 하였다.
켄터키 주의 상원 헨리 클레이를 포함한 다수의 의원들은 타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테일러는 아무 타협을 경멸하였고 캘리포니아가 합중국으로 편입되는 주장을 하였다.
타협의 지지자들은 결국 이겼으나 필모어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회는 그러고나서 1850년 타협으로서 적용되는 데 많은 법들을 채택하였다.
- 사망
노예 제도의 논쟁들이 정착하기 전에 테일러는 위경련을 앓아 1850년 7월 9일에 66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루이빌 근처에 있는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마가렛 여사도 1852년 8월 14일에 사망하여 남편 옆에 묻혔다.
갑작스런 죽음을 두고 암살설이 돌기도 했으나, 1991년 유해발굴 결과 암살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부통령 밀러드 필모어가 제13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 일화
평생 군인으로 지낸 것 때문이었는지 죽는 순간에도 제법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I have always done my duty, I am ready to die. My only regret is for the friends I leave behind me.”
“나는 항상 내 의무에 충실했으며,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게 걱정이 하나 있다면 내가 떠난 후 남을 친구들이다.”
인상이 무섭게 생겼다는 평을 듣지만 대인배적인 성격에 잘 웃기도 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전쟁 등으로 명성을 높여서 얻은 별명은 “Old Rough and Ready (거칠고 노련한 준비된 지휘관).”
후일 아메리카 연합국 대통령이 된 제퍼슨 데이비스의 장인이었다.
한 번은 미합중국 해군 사령관인 데이비드 코너 제독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코너 제독은 테일러와는 달리 복장에 대해 상당히 엄격한 군인이었다. 그래서 테일러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 모처럼 군복을 입고 코너 제독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막상 코너 제독을 만나자 테일러는 깜짝 놀랐는데 그 이유는 코너가 테일러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가벼운 사복 차림으로 테일러를 만나러 왔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한참을 보고 있다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서로에게 사과를 했다고 한다.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당시 의사당에 있던 그의 흉상에 핏자국이 묻었다. 다른 흉상에도 핏자국이나 총탄 등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그가 유일하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