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 1월 4일, 독일의 철학자로 펠릭스 멘델스존의 조부 모제스 멘델스존 / 모세스 멘델스존 (Moses Mendelssohn, 1729 ~ 1786) 별세
모제스 멘델스존 / 모세스 멘델스존 (Moses Mendelssohn, 1729년 9월 6일, 독일 데사우로슬라우 데사우 ~ 1786년 1월 4일, 독일 베를린)은 18세기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그의 아들 아브라함은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아버지로, 펠릭스 멘델스존과 파니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이다.
– 모제스 멘델스존 / 모세스 멘델스존 (Moses Mendelssohn)
.출생: 1729년 9월 6일, 독일 데사우로슬라우 데사우
.사망: 1786년 1월 4일, 독일 베를린
.부모: 레이첼 사라 월
.배우자: 프로메 멘델스존 (1762 ~ 1786)
.자녀: 아브라함 멘델스존 바르톨디, 도로시아 폰 슐레겔, 요제프 멘델스존, 헨리에테 멘델스존 등
.손주: 펠릭스 멘델스존, 파니 멘델스존, 레베카 멘델스존, 파울 멘델스존, 필립 바이트 등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ㆍ비평가로 독일 계몽시대의 철학자이다.
라이프니츠-볼프학파의 한 사람. 독일 동부 데사우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의 존재와 영혼불멸을 증명하는 데 힘을 쏟았고, 이런 문제야말로 철학의 궁극적 과제라고 규정하였다.
베를린아카데미가 1763년에 형이상학적 진리의 판명성에 관한 논문을 모집했는데 그가 I. 칸트를 누르고 최고점을 획득했다.
도덕철학 확립에 힘썼고 신앙자유를 주장하는 등 계몽시대의 대표자다운 활동상을 과시했으나, 볼프보다도 통속적이라는 평가가 있다.
유명한 음악가인 J.L.F. 멘델스존은 그의 손자이다.
○ 생애 및 활동
모제스 멘델스존 / 모세스 멘델스존 (Moses Mendelssohn)은 1729년 9월 6일, 독일 데사우로슬라우 데사우에서 출생했다. 가난한 율법학자 메나헴 멘델 데사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모세 데사우라는 이름으로 통했지만, 글을 발표할 때에는 히브리어로 벤 멘델 (‘멘델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나온 멘델스존이라는 이름을 썼다. 히브리어 대신 독일어 멘델스존을 선택한 것은 그가 다른 유대인에게 요구했듯이 독일 문화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파사우 출신의 유명한 탈무드 학자인 다비드 프랭켈 (David Fränkel)의 제자가 되었다.
1743년 베를린으로 가서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와 독일의 사상가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 크리스티안 폰 볼프의 사상을 공부했다.
멘델스존은 비단공장의 회계원으로 일하면서 고전어, 문학 그리고 다양한 영역의 문헌을 연구하였다.
멘델스존은 독일어로 된 오순절과 성경의 다른 부분을 번역하였다. 그 번역은 유대인들이 그 언어를 더 빨리 배울 수 있도록 고안된 독일어로 되어 있었다. 그 시기의 독일 유대인들은 대부분 이디시어를 썼고 많은 이들이 히브리어 (경전의 원어)로 글을 읽고 있었다.
1750년 멘델스존은 비단 제조업자 이사크 베른하르트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베른하르트는 1754년 멘델스존을 사업에 끌어들였다. 같은 해 독일의 일류 극작가 곳홀트 에프라임 레싱을 만났다. <유대인들> (1749)이라는 희곡에서 고결한 유대인 상을 그린 레싱은 멘델스존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인물로 보게 되었다. 그 뒤 레싱은 <현자 나탄> (1779)이라는 희곡의 주인공을 묘사할 때, ‘독일의 소크라테스’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지혜로운 멘델스존을 모델로 삼았다. 라이프니츠를 찬양한 멘델스존의 첫 번째 저서 <철학적 담화> (1755)는 레싱의 도움에 힘입어 출간되었으며, 같은 해 감정의 정신적 의미를 강조한 <감정에 대한 편지>도 출판되었다.
멘델스존은 베를린 유대인들에게 돈을 받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7년전쟁 (1756 ~ 63) 동안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만든 것을 축하하는 아부 편지를 썼지만, 음악과 예술의 후원자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멘델스존이 자기의 시 (詩)를 비판한 데 화가 나서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멘델스존이 1763년 프로이센 학술 아카데미가 주최한 문학 경연에서 상을 받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태도를 바꾸어 유대인들이 관례적으로 당해온 법적 무자격 상태에서 멘델스존을 면제해주었다. 멘델스존이 상을 받은 논문은 형이상학 명제의 논증 가능성을 수학 명제의 논증 가능성과 비교한 것으로 그의 본명으로 나온 첫 번째 글이었다 (1764). 가장 유명한 저서 <파이돈: 영혼 불멸에 관하여> (1767)는 그 당시 유행하던 유물론에 맞서 영혼의 불멸을 옹호한 글로서, 이 책의 제목은 플라톤의 <파이돈>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준다.
1771년 멘델스존은 스위스의 신학자 J. C. 라바터와 그리스도교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인 결과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라바터는 2년 전 동료인 스위스 신학자 샤를 보네의 저서를 직접 번역하여 멘델스존에게 보내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보네의 논증을 반박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라고 도전했다. 멘델스존은 종교논쟁을 싫어했지만, 자신의 유대교를 재확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극도로 날카로워진 신경은 1774년 <시편>을 번역하기 시작한 뒤에야 풀렸다. 이어서 그는 유대인의 종교전통과 독일문화의 연결을 돕기 위한 계획을 세워 <구약성서>의 첫 5권인 ‘모세오경’의 역서를 독일어로 쓰고 히브리어로 인쇄했다 (1780 ~ 83). 이 무렵 그는 파문 (破門) 교리를 둘러싼 새로운 논쟁에 휘말렸다. 이 갈등은 그의 친구이자 그리스도교도인 빌헬름 폰 돔이 알자스의 유대인을 위해 탄원서를 써주기로 동의한 데서 비롯했다.
멘델스존은 또한 1778년 베를린에서 유대인 소년들을 위한 최초의 현대 공립학교의 설립 배후에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멘델스존은 또한 유대인들의 권리와 수용을 증진시킴으로써 전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1781년 빌헬름 폰 돕 (Christian Wilhelm von Dohm)에게 그의 저서 ‘유대인의 조건의 시민적 개선’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행동에 의해 야기된 관심은 멘델스존의 <예루살렘> (1783)에 드러난다. 이 저서는 양심의 자유에 대한 탄원이다.
알자스 유대인은 원래 멘델스존이 그들의 해방을 위해 직접 개입하기를 바랐다. 돔은 <유대인의 시민권 향상에 관하여> (1781)에서 유대인의 해방을 탄원하면서도, 교인을 파문할 수 있는 유대 교회의 권리를 정부가 지지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말을 덧붙였다. 그 결과 돔의 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멘델스존은 이 반발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마나세 벤 이스라엘이 쓴 <유대인을 위한 변호>의 독일어 번역판 서문 (1782)에서 파문을 비판했다.
멘델스존에게 그의 이론은 유대교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19세기 1부에서는 유대교의 독단과 전통에 대한 비판은 나이든 유대인의 생활 방식에 대한 확고한 유착과 관련이 있었다. 이성은 믿음, 역사적 의식은 삶에 적용되었다. 유대교의 현대 개혁은 이 개념과 어느 정도 결별했다.
익명의 작가가 모세 율법의 핵심을 파괴했다고 그를 고발하자, 멘델스존은 <예루살렘 : 종교권력과 유대교에 관하여> (1783)라는 책으로 응수했다. 이 책에서 정부는 국민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서만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뿐, 교회와 정부는 사상을 침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논쟁은 레싱이 스피노자의 범신론 (汎神論)을 지지했다는 주장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이 논쟁에서 멘델스존은 레싱을 옹호했지만 마지막 저서 <아침> (1785)에서는 라이프니츠의 일신론 (一神論)을 지지했다. 7권으로 된 그의 전집은 1843 ~ 45년 출판되었다.
- 독일의 플라톤
모세 멘델스존은 폐쇄적인 유대교 교리와 전통에 얽매여서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보고, 유대인 사회를 서구 사회에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유대교 신앙과 계몽주의 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그는 유대인이 바깥 사회와 어떻게 하면 잘 융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모세 멘델스존은 신동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몸이 허약해 척추장애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어린 멘델스존은 서구 사회의 학문을 익혀 두 세계의 가교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몰래 라틴어뿐 아니라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스어를 배우고 수학, 과학, 철학 등을 익혔다. 베를린 아카데미가 1763년에 ‘형이상학적 진리의 판명성’에 관한 논문을 모집했는데 그가 칸트를 누르고 최고점을 땄다. 이 일로 그는 일약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사가 되어 ‘보호 유대인’의 특권이 주어졌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모든 제한 사항에서 해방되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 뒤 1767년 멘델스존은 플라톤의 유명한 ‘대화’를 모델로 삼아 ‘파이돈’을 저술했다. 이 책은 당시 유행하던 유물론에 맞서 영혼의 불멸을 옹호한 글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유럽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으로 멘델스존은 ‘독일의 플라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경제사에서 멘델스존에게 주목하는 것은, 그가 학자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유대인답게 스스로 노력하여 가난의 고리를 끊고 굴지의 금융 가문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는 베를린에서 고학하며 공부하다 21세 때인 1750년 ‘보호 유대인’ 자격을 가진 부유한 비단 공장 주인 아이작 베른하르트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 뒤 모세 멘델스존은 자녀 교육뿐 아니라 1754년부터는 비단 공장의 회계를 도와주다 능력을 인정받아 나중에는 동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2세인 1761년에는 독자적으로 회사를 경영했다. 그 뒤에도 그는 경영과 학문의 길을 병행하며 금융가로 우뚝 서 사업과 학문 양쪽 분야에서 모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후에도 멘델스존 가문은 큰 금융 가문으로 성장하면서도 꾸준히 학자와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그러면서도 독일의 3대 금융 가문의 하나로 커서 근대 독일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 일화 : 소설보다 더 극적인 청혼
”저를 꼽추로 만드시고 신부에겐 아름다움을… 신에게 애원했답니다”
모세 멘델스존에게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푸근한 인성과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척추장애인이었다. 멘델스존이 함부르크의 부유한 유대 상인인 구겐하임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어느 날 구겐하임이 그를 초대했다. 구겐하임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은 멘델스존이 쓴 작품에 심취해 그를 직접 만나보기를 고대했었다. 그러나 멘델스존을 직접 만난 딸은 그의 흉측한 외모에 충격받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끝날 시간이 다가오자 멘델스존은 부끄러워하며 물었다. “당신은 결혼할 배우자를 하늘이 정해 준다는 말을 믿나요?” 딸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차갑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러는 당신도 그 말을 믿나요?” 멘델스존이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신은 그에게 장차 그의 신부가 될 여자를 정해 주지요. 그런데 그녀가 척추장애인이 될 운명이었습니다. 나는 놀라서 신에게 필사적으로 소리쳤습니다. ‘안 됩니다. 신이시여! 소녀가 혹 등을 갖게 되면, 그 소녀는 슬픔과 불행을 감내하기 힘듭니다. 차라리 저를 척추장애인으로 만드시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제가 척추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훗날 그녀는 모세 멘델스존의 아내가 되었다. 소설 같은 ‘한여름 밤의 꿈’이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 별세
모제스 멘델스존 / 모세스 멘델스존 (Moses Mendelssohn)은 1786년 1월 4일, 독일 베를린에서 별세했다.
○ 저서
주요저서로 <철학적 담화> (1755) <감각에 관하여> (1755) <파이돈-영혼의 불멸에 관하여> (1767) <예루살렘 : 종교권력과 유대교에 관하여> (1783) <아침> (1785) 등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