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 1월 28일, 방데 반란 지도자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 (Henri de la Rochejacquelein, 1772 ~ 1794) 별세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 (프: Henri de la Rochejacquelein, 1772년 8월 30일 ~ 1794년 1월 28일)는 프랑스 혁명기의 왕당파 군인으로 방데 반란의 지도자이다.
–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 (Henri de la Rochejacquelein)
.출생: 1772년 8월 30일, 프랑스 몰레옹
.사망: 1794년 1월 28일, 프랑스 Nuaillé
.부모: Henri du Vergier de La Rochejaquelein, Constance de Caumont d’Ade
.형제자매: 루이스 드 라 로슈자클랭
.활동: 프랑스 혁명기 방데 반란의 지도자
방데 반란 (Rébellion Vendéenne, 1793년 ~ 1796년)은 프랑스 혁명기에 발생한 성직자기본법에 반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력과 왕당파의 반란으로 일명 “방데 전쟁” (Guerre de Vendée)으로 불린다.
이들 반란세력은 스스로를 가톨릭 왕당군대 (The Catholic and Royal Army)라 불렀다.
○ 생애 및 활동
프랑스 서부 방데 지역 두 세브르 주 샤또 드 라 뒤르벨리에르 마을에서 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의 총신 앙리 루이 오귀스탱 드 라 로슈자클랭 후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의 살고 있는 성인 라 뒤르브리에르 성에서 자랐고, 13세 때, 유년 학교를 마친 후 아버지의 지휘 아래에 있는 왕립 폴란드 기병연대에 소위로 배속된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후, 아버지와 형과 달리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 머물며 국왕의 신변을 경호하고 있었지만 튈르리 궁전 습격 사건으로 왕궁 수비대와 함께 군중들과의 전투에 패배한 후 고향으로 도주한다.
지명 수배를 받고 숨어 지내는 생활을 계속하며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혁명에 불만을 폭발시킨 농민의 부탁을 받고, 1793년 4월 13일, 환호성 속에서 주민들을 이끌고 방데 반란에 참가하며, 다음의 유명한 대사로 아군을 고무하였다.
“내가 전진할 때는 나를 따라라! 내가 후퇴하는 일이 있다면, 나를 죽여라! 내가 죽으면, 원수를 갚아라!”
그리고 서전의 우세를 잃고 패주를 계속하다가 10월 3대 총사령관에 취임했지만, 12월 전투에서 패배한다.
반란군이 괴멸 상태가 된 가운데, 간신히 탈출하여 살아남아 게릴라전을 계속했지만,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 (Henri de la Rochejacquelein)은 1794년 1월 28일, 21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한다.
그가 죽은 뒤 얼마동안은 전략 상의 이유로 그의 죽음을 숨겼다.
○ 방데 반란 (Rébellion Vendéenne, 1793 ~ 1796)
방데 반란 (Rébellion Vendéenne, 1793년 ~ 1796년)은 프랑스 혁명기에 발생한 성직자기본법에 반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력과 왕당파의 반란으로 일명 “방데 전쟁” (Guerre de Vendée)으로 불린다. 이들 반란세력은 스스로를 가톨릭 왕당군대 (The Catholic and Royal Army)라 불렀다.
왕당파는 백색군, 혁명파는 청색군으로 구분되었다. 프랑스 서부에 있는 방데 지역의 농민들에 의해 1793년 시작되어 나폴레옹이 1801년 공식적으로 끝내기까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30 ~ 40만에 이르는 사망자를 냈다. 브르타뉴, 메인, 앙주, 노르망디에서 발생한 슈아누리 반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들의 반란은 때로는 ‘서부 전쟁’ (Guerres de l’ Ouest)으로 총칭된다.
혁명 중 가장 처참한 살육이 이뤄졌으며, 최근에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프랑스에서도 이야기하는 것8은 금기시되고 있다.
원래 방데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서부는 가톨릭 신앙이 독실한 지역이었다. 1789년 발발한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호의적으로 영주 권한과 십일조의 폐지를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 후에 자행된 가톨릭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탄압, 국왕 처형, 증세, 불공평한 30만 모병으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가톨릭 성직자에 선동되어 30만 명 동원령에 따라 의용병을 결정 추첨이 예정되어 있던 1793년 3월 11일, 멘에루아르주 숄레 사람들이 궐기하자 각지의 농민도 봉기하여 불과 10여일만에 프랑스 서부의 2/3 이상의 지역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지도자들은 각각 군인이기도 한 지방 귀족을 끌여들어, 각지의 반란군과 합류하면서 정부군을 물리치고, 방데 지역을 지배 하에 두었다. 3월 19일 국민 공회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폭도 전원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한다”는 엄격한 조치를 취했지만, 국경에 국민 위병대를 파견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족한 병력으로 반란을 진압할 수는 없었다. 반란군은 점차 세를 불렸고, 정부가 국경의 군대를 배치해도 의도한 만큼의 성과는 거둘 수 없었다.
반란군은 스스로를 “가톨릭 황군”으로 자칭하였고, 행상인 출신의 자크 카텔리노가 최고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연전연승하며 세력권을 넓히고 있던 브르타뉴의 올빼미 당과 합류하기 위해 6월 낭트 시를 공략했다. 그러나 낭트 시민은 정부군과 협력하여 철저하게 항전했기 때문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최고 사령관 카텔리노가 전사했다. 따라서 이 반란은 더 확산되지 않았지만 국내 상업과 군사 행동이 차질을 빚어 지롱드파에 비난이 집중됐다.
그런 가운데 8월 국민 공회는 혁명 정부군에 방데 파괴 명령을 내린다. 지침은 “전쟁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그 명령을 받은 정부군은 숲, 밭, 집, 교회를 초토화시키고, 지역민을 무차별 살해했다. 한편, 반란군은 퇴각 후 카토리노 죽음의 영향을 받아 이탈자가 속출하고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영국 해협을 목표로 전진했으나 그란빌 앞쪽에서 저지를 받아 패퇴를 계속했고, 식량부족과 전염병이 돌아 사기도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도망쳐 온 주민을 비롯한 10만여 명이나 늘어났다. 그들은 결국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루아르 강을 넘어 북상했으나 사보네 타운 전투에서 괴멸되었다. 포로가 된 사람은 낭트에 연행되어 루아르 강에 떠있는 폐선에 태워져 침몰당했다.
이후에도 정부는 “지옥 부대”라고 이름 붙여진 연대를 파견하여 비슷한 전략을 계속 펼쳤기 때문에 방데 지방에서는 반란은 소규모 게릴라전 양상으로 바뀌어 계속되었다. 1794년 반란 진압을 위해 파견된 루이 라자르 오슈가 군 지휘관으로 부임하면서 포로로 잡힌 농민 병사와 면담을 통해 농민이 반란에 참가한 것은 종교적 자유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관용 정책을 취하면 그들은 왕당파와 반란에서 이탈하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정책 변화가 주효하여 1795년 2월까지 방데 반란군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6월 15일, 영국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와 부대가 기부론에 상륙했지만, 격퇴되었고 대부분이 포로가 되어 방데 반란군은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다. 집요하게 게릴라전을 계속하던 마지막 생존 지도자 샤레트도 검거되어 총살되었다. 오슈는 1796년에 방데 지역의 평정을 선언했다. 1801년에는 나폴레옹이 교황과 화해하면서 방데 지역에 대해 많은 부흥 정책을 내놓았고, 이 반란은 완전히 종결됐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