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 12월 29일, 영국의 정치인 윌리엄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 1809 ~ 1898) 출생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 1809년 12월 29일 ~ 1898년 5월 19일)은 영국의 전 총리이다.
자유주의, 평화주의 노선을 내세운 19세기 중후반을 대표하는 영국 총리 중 한명이었다.
– 윌리엄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
.출생: 1809년 12월 29일, 영국 리버풀 로드니 스트리트
.사망: 1898년 5월 19일, 영국 하워든
.설립 조직: 글렌알몬드 대학, National Liberal Club, Family Action
.조부모: 앤드류 로버트슨, Thomas Gladstones, 헬렌 닐슨, 앤 맥켄지
.부모: 존 글래드스턴 준남작, 앤 맥켄지 로버트슨
.배우자: 캐서린 글린 (m. 1839년)
.자녀: 윌리엄 헨리 글래드스턴, 헬렌 글래드스턴, 헨리 글래드스턴 남작, 허버트 글래드스턴 자작 등 8명
.손주: 찰스 글래드스톤, 윌 글래드스톤, 앨버트 글래드스톤, 스티븐 데이니올 글래드스톤 등
.담당 공직: 영국의 총리 (1892 ~ 1894년), 영국 하원장관 (1892 ~ 1894년) 등
.종교: 고교회파 성공회
종교는 성공회이며, 고교회파 (High Church) 즉, 전례, 성사 등의 교회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주의 노선을 걸었다.
별명은 ‘위대한 노인’ (Grand Old Man)이다.
○ 생애 및 활동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은 1809년 12월 29일, 리버풀에서 출생하여 이튼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를 졸업하였는데, 재학 시절에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라는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아버지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1833년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정적이었던 디즈레일리가 6번 낙선되고서야 정계진출 성공한 것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 보수당 경력
1833년 보수당 하원의원이 되었다.
필 내각 때에 관세 개혁을 하여 자유무역의 길을 열었다.
또한 1852년 애버딘 연립 내각의 재무상이 된 후, 1853년에 획기적인 예산안을 성립하여 재정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하였다.
재무대신 시절에는 “정신이 온전한 모든 성인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라고 발언한 적이 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급진적인 주장이라서 총리 파머스턴 경은 격노하여 선동적인 언행이라고 비난했고 심지어는 빅토리아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 아편전쟁 반대
1840년 중국과의 전쟁 (아편전쟁)을 할 것인지를 놓고 하원에서 논의할 때에 전쟁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중국정부에서 영국상인들로부터 사회를 병들게 하는 마약인 아편을 압수하여 소각하는, 지극히 당연한 행정명령을 시행하자, 아편무역으로써 무역적자를 풀려고 한 영국에서는 중국과의 전쟁을 하려고 했다.
하원 회의장에서 중국과의 전쟁에 반대한 글래드스턴 의원의 연설은 다음과 같다.
“저는 아편도 경제도 잘 모릅니다. 그 나라 법을 따르지 않는 외국인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정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린 전쟁은 없었다고 기록할 것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글래드스턴은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스럽게 만들 전쟁은 없을 거라며 영국인들의 양심을 호소했다.
비록 전쟁 자체를 막진 못했지만, 그의 연설을 계기로 아무런 이의 없이 진행될 뻔 했던 영국의 전쟁 선포가 의회 표결에서 불과 몇 표차로 간신히 결정될 정도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글래드스턴에게 상당한 정치적 명성을 가져왔고, 이후 그가 실시하는 비 (非) 제국주의 / 도덕주의적 외교 정책을 예고하게 되었다.
글래드스턴 의원의 연설은 전쟁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용기를 내도록 하여, 1840년 4월 파병안 투표결과는 전쟁 찬성의견과 반대의견이 비슷하였다 (찬성 271 : 반대 262).
- 자유당 경력
1867년 자유당의 당수가 되고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와 상대하여 전형적인 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여러 번 재무장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이후 존 러셀 내각에서 노동자 계급 중 상당수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개혁을 추진하지만 당 내 보수파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적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가 글래드스턴의 개혁안보다 오히려 더 급진적인 투표권 확대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것이 큰 반발을 불러오는 바람에 1868년 선거에서 승리, 글래드스턴이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영국 총리 시절이던 1870년 12월 1일에서 1871년 12월 31일까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대리청정을 수행한 그는 1868년 ~ 1894년까지 4번이나 자유당 내각을 만들었다.
1868년부터 1874년까지 이어진 그의 1차 내각 시기 글래드스턴이 보여준 주요 자유주의적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아일랜드 내 종교의 자유 허용(1869)
.아일랜드 내 토지법을 실시하여 아일랜드인의 다수였던 소작농 권리를 보호(1870)
.의무교육 실시(1870)
.비밀투표 실시(1872)
이 시기는 영국 내 자유주의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광풍이 유럽을 휩쓸고 있었고, 영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영국은 3대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의 주도하에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고, 식민지와 제국주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관심했던 글래드스턴 내각에게 민중은 실망했고 디즈레일리가 이 점을 집요히 공격하면서 민심을 사로잡는다. 결국 1874년 총선에서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이 다시 글래드스턴의 자유당을 누르고 2차 디즈레일리 내각이 성립하게 된다.
자유당 내각에서는 교육 제도를 고쳐 영국사람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18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글래드스턴은 자유당의 당수직에서도 내려오고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876년 불가리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글래드스턴은 오스만 제국의 잔학행위에 분노하여 영국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호소하는 팸플릿을 쓴다.
1894년 정계에서 은퇴하여 하워든에서 연구와 연설로 여생을 보내고, 백작 작위를 수여하려고 할 때 이를 사양하여 대평민 (The Great commoner) 으로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내정면에 있어서는 자유주의 입장에서 노동자 계급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많은 사회개혁을 단행하였다.
보수당의 디즈레일리도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 및 공중보건에 노력했는데, 이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써 혁명을 막고자 함이었다.
- 은퇴와 사망
글래드스턴은 1894년 정계에서 은퇴하여 하워든에서 연구와 연설로 여생을 보내고, 백작 작위를 수여하려고 할 때 이를 사양하여 대평민 (The Great commoner) 으로서 일생을 마쳤다.
글래드스턴의 사상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영국의 총리를 지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등에게 계승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자유주의와 도덕 정치라는 개념 자체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호소력 있는 사상이지만 이것을 영국의 제도권 정치로 본격적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