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년 7월 19일, 프로이센 왕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Luise Herzogin zu Mecklenburg-Strelitz, 1776 ~ 1810) 타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Luise Herzogin zu Mecklenburg-Strelitz, 1776년 3월 10일 ~ 1810년 7월 19일)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아내이다.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와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가 출신의 프레데리케 사이에서 넷째딸로 태어났다.
1793년 프로이센의 왕위계승자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결혼했으며, 같은 해에 그녀의 여동생 프레데리케도 시동생 프로이센의 루트비히와 결혼했다.
루이제는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크게 패해 영토를 점령당했을 때,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으로 전후처리를 하기 위해 노력했고 애국심의 상징으로서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Luise zu Mecklenburg-Strelitz)
.이름: 루이제 아우구스테 빌헬미네 아말리 (Luise Auguste Wilhelmine Amalie)
.출생: 1776년 3월 10일, 신성 로마 제국 하노버 선제후국 하노버
.사망: 1810년 7월 19일 (34세), 프로이센 왕국 호엔치리츠 성
.부모: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형제: 샤를로테 게오르기네,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게오르크 카를, 테레즈, 프리드리히 게오르크, 프리데리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카를, 아우구스테 알베르티네, 카를
.배우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1793년 결혼)
.자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 샤를로테, 프레데리케, 카를, 알렉산드리네, 페르디난트, 루이제, 알브레히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의 넷째 딸로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왕비.
○ 생애 및 활동
1776년 3월 10일 하노버에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와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공녀의 여섯째 아이이자 넷째 딸로 태어났다.
179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결혼해 9명의[2]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루이제 왕비는 당차고 엄청난 미녀로 유명해서 프로이센 왕국의 백성들과 신하들 사이에서 남편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미모뿐만 아니라 키도 160대 후반의 장신이기까지 해서 168cm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과 비슷했다. 아름답고 친절한데다 남편을 훌륭하게 내조한 루이제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여성상이었다.
가정에서 문란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가정적이고 부부 사이도 좋아서 루이제는 당대 왕비들 중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남편이 즉위한 후, 루이제는 원로 장관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많은 국정 사안을 루이제와 논의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아버지의 외교 정책에 따라 프랑스 제1공화국과의 분쟁 초기에 중립을 선호했다. 루이제는 이 견해를 지지하며, 만약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의 연합국 편을 든다면, 군사적 지원을 위해 후자의 힘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프로이센이 강대국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약했기 때문에, 그러한 동맹의 결과로부터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프랑스의 침략은 왕이 결국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하게 만들었지만, 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그는 프랑스와 연합국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는 루이즈 왕비와 그의 장관들의 많은 다른 의견들을 상담했고, 결국 최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루이제 왕비의 명성 때문에 웃지못할 일화도 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패한 뒤 평화협상으로 영토의 절반 이상과 과중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매력넘치는 유능한 루이제 왕비를 협상단 대표로 보냈다. 나폴레옹도 루이제의 우아함과 결단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요구사항은 관철시켜서 별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보호하려는 루이제 왕비의 노력은 많은 찬사를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도중에도 프로이센의 왕비로서 국가를 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활동했고, 힘들어하는 남편을 열심히 내조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 동프로이센의 메멜까지 피신하는 등, 고생한 여파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부검 결과 폐 중 하나가 파괴되었고 심장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1814년 8월 3일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죽은 아내의 이름을 따서 ‘루이제 훈장’을 제정했다.
루이제 훈장은 1918년까지 독일 최고의 여성 훈장이었다. 1920년대에 보수적인 독일 여성들이 퀸 루이제 리그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부터 60년 뒤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 제국 사이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여기서 차남 빌헬름 1세가 다스리는 프로이센 왕국이 승리하여 보나파르트 왕조의 프랑스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제대로 복수해줬다. 빌헬름 1세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어머니의 석관 옆에 무릎을 꿇으며 결의를 다졌고,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승리하고 이듬해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1871년 3월 17일에 빌헬름 1세는 다시 베를린에 있는 어머니의 묘를 찾았다.
○ 평가
루이제 왕비는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신화적 여성이였다.
루이제 왕비는 역사, 독일어 및 종교뿐만 아니라 수학과 지리에서도 학습, 읽기 및 교화 자료로 거의 모든 곳에서 언급되었다. 애국적인 기념식은 루이제 왕비와의 유대감을 롤모델로 삼아 더욱 깊어졌다.
점차적으로 루이제 왕비의 숭배의 모성적 측면은 프로이센 왕국의 발전과 독일 제국의 건국 과정에서 그녀의 아들들이 한 역할에 상응하여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이러한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 이후 루이제의 생애와 업적은 없어서는 안 될 제국의 건국신화로 체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제정이 폐지되고 들어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인기는 많았지만 국가에서 숭배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래도 독일 국민당과 왕비 루이제 연맹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정치단체에서 역할 모델로 사용되었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딱히 주목받지 못했다. 여성의 모성애적 이미지보다 남성의 강인함을 더 강조한 나치의 이데올로기적 개념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또다시 독일이 패한 이후 1947년 연합국은 프로이센을 완전히 해체했다. 1970년대 독일에서는 프로이센에 대해 부정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현대에도 독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왕비 중 하나다.
○ 가족관계
- 부모: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 형제: 샤를로테 게오르기네,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게오르크 카를, 테레즈, 프리드리히 게오르크, 프리데리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카를, 아우구스테 알베르티네, 카를
- 배우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1793년 결혼)
- 자녀 (이름, 생일 – 사망, 기타)
무명의 딸, 1794년 10월 1일 ~ 1794년 10월 1일, 태어나자마자 사망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1795년 10월 15일 ~ 1861년 1월 2일(65세) 왕위 계승. 자녀 없음.
빌헬름 1세, 1797년 3월 22일 ~ 1888년 3월 9일(90세) 왕위 계승. 슬하 1남 1녀.
샤를로테, 1798년 7월 13일 ~ 1860년 11월 1일(62세)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의 황후, 4남 4녀
프리데리케, 1799년 10월 14일 ~ 1800년 3월 30일, 요절
카를, 1801년 6월 29일 ~ 1883년 1월 21일(81세)
알렉산드리네, 1803년 2월 23일 ~ 1892년 4월 21일(89세)
페르디난트, 1804년 12월 13일 ~ 1806년 4월 1일
루이제, 1808년 2월 1일 ~ 1870년 12월 6일(62세)
알브레히트, 1809년 10월 4일 ~ 1872년 10월 14일(6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