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년 5월 22일, 독일의 작곡가로 ‘악극의 거장’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 출생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 5월 22일 ~ 1883년 2월 13일)는 독일의 작곡가, 극작가, 음악 비평가, 저술가, 극 연출가, 그리고 지휘자이다. 음악극으로써 19세기 유럽의 음악에 비중있는 영향을 끼쳤다.

–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출생: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치히
.사망: 1883년 2월 13일, 이탈리아 베니스 카 벤드라민 칼레르지
.국적: 작센 왕국
.오페라 대본 작가: 니벨룽의 반지, 발퀴레, 발퀴레의 기승,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배우자: 코시마 와그너 (1870~1883), 미나 플래너 (1836~1866)
“이전과 이후 어느 작곡가도 바그너 만큼 자신의 예술과정으로 그렇게 깊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기획자, 철학자, 시인, 지휘자, 그리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이자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인물인 바그너는 그가 천재라는 것을 알았다.” ― 그라모폰
독일의 작곡가. 음악사의 영향력있는 위대한 음악가 중의 한 명이자 오페라 역사상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영향력은 현대 음악 뿐만 아닌 미술, 철학, 문학, 정치, 시각 예술과 극장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특유의 정교하고 화려하며 스케일이 큰 음악으로 많은 지지자들이 있으며, 또한 그의 논란들에 의해 반대자들도 있다. 한마디로 19세기부터 현재까지 활발하게 논쟁이 벌어지는 명실상부한 클래식 음악계의 뜨거운 감자다.

○ 전기
– 어린 시절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에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리하르트의 출생 후 여섯 달 만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고, 1814년 8월에 그의 어머니는 배우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을 했다.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젊은 리하르트 바그너는 극작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그는 곧 음악을 공부하기로 방향을 돌렸다. 그것을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1831년 입학했다. 초기, 그의 음악에 영향을 준 인물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1832년 19세때 첫 교향곡인 교향곡 C장조를 작곡했으며 1833년에 나이 스물의 바그너는 그의 첫 완성된 오페라인 요정을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명백히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반 세기 넘게 상연되지 않았으며, 초연은 그의 죽음 직후인 1883년에 뮌헨에서 있었다. 그 동안에 바그너는 마그데부르크와 쾨니히스베르크의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서 약식 계약을 맺었으며, 그 동안에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에 기초한 연애금지를 썼다. 이 두 번째 오페라는 1836년에 마그데부르크에서 상연되었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1836년 11월 24일에 바그너는 “미나”라고 불리는 여배우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플라너 (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er)와 결혼했다. 그들은 리가로 이사해서 바그너는 거기에서 지역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몇 주 후에, 미나는 군인과 야반도주했고, 그 군인은 나중에 단 돈 한 푼도 안 남기고 그녀를 떠나 버렸다. 바그너는 미나를 다시 맞아들였지만, 1839년까지 부부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빚쟁이들을 피해 리가를 떴다 (빚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바그너를 따라다녔다). 그들의 도주 행각 동안에, 그들은 영국으로 가는 항로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이 경험이 그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영감을 제공했다. 바그너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냈으며, 거기에서 리하르트는 기사를 쓰고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편곡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다.

– 드레스덴
바그너는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리엔치’를 1840년에 썼다. 뜻밖에 독일의 작센의 드레스덴 왕립 극장이 이 오페라를 공연하기로 했다. 1842년에 부부는 드레스덴으로 이사했으며, 리엔지는 상당히 성공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다음 여섯 해를 보냈으며, 결국 30세에 작센 왕립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그의 첫 두 중기 오페라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를 쓰고 상연했다.
바그너의 드레스덴 체류는 바그너의 좌익 정치의 가담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국가주의 운동은 독일 내 영방국가들에서 힘을 얻고 있었으며, 자유와 약한 주들의 한 나라로 통일에 대한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운동에서 매우 열성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극단 좌익 잡지인 Volksblätter를 편집하던 그의 동료 아우구스트 뢰켈 (August Röckel)과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 (Mikhail Bakunin) 등을 포함한 손님들을 받아들였다.
작센 정부에 대한 널리 퍼진 불만은 1849년 4월에 작센의 왕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2세가 국회를 해산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했던 새 헌법을 거부하면서 결국 끓어넘쳤다. 5월 혁명이 발발했고, 바그너는 거기에서 사소한 도움을 주었다. 혁명은 초기에 작센과 프로이센 연합 병력에 의해 재빨리 진압되었고, 혁명 주도자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바그너는 처음에는 파리로, 또 취리히로 도망해야 했다. 뢰켈 (Röckel)과 바쿠닌 (Bakunin)은 도망치는 데에 실패했고 오랜 기간의 수감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 망명, 쇼펜하우어, 마틸데 베젠동크
바그너는 다음 열두 해를 망명 생활로 보내야 했다. 그는 드레스덴 봉기 이전에 로엔그린을 완성했고, 그의 스승 프란츠 리스트에게 그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이 상영되도록 간절한 편지를 썼다. 리스트는 1850년 8월에 바이마르에서 초연을 지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극심한 개인적 궁핍에 시달렸고 독일 음악계에서 고립되었으며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가 쓰고 있던 음악 단편은 나중에 거대한 작품인 ‘니벨룽의 반지’로 성장할 것이었는데, 공연될 가망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의 아내 Minna는 그가 ‘리엔치’ 이후에 써 나간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우울증만 깊어져 갔다. 바그너는 단독 (피부병의 일종)을 앓았고, 작곡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취리히에서의 처음 몇 해 동안 일련의 주목할 만한 수필이 나왔는데, “미래의 예술-작품 (1849)”에서 그는 음악, 노래, 춤, 시, 시각 예술, 무대 기술 등이 종합된 개념인 “총체예술 (종합예술작품, Gesamtkunstwerk)”로 오페라의 비전을 설명했다. “음악 속의 유대주의 (1850)”는 유대인 작곡가를 반대하여 겨냥한 반유대주의 작품이다. 그리고 “오페라와 드라마 (1851)”는 그가 반지 사이클에서 사용하고 있던 미학 개념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계속되는 몇 년 동안 바그너는 두 개의 독립적인 영감의 원천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들이 그의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창작으로 그를 이끌었다. 첫 원천은 1854년에 그의 시인 친구였던 게오르그 헤베그 (Georg Herwegh)가 그에게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소개한 것이다. 바그너는 나중에 이를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얘기하였다. 그의 개인 환경은 분명히 그가,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이 비관적인 관점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의 운이 더 나아진 후에도 남은 생애 동안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았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음악은 예술 가운데에서 최고의 지위를 점하며, 이는 음악이 물질계와 연관되지 않은 유일한 예술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다. 바그너는 이 주장을 환영했으며, 그가 그의 “오페라와 드라마”에서 이와 직접 상반되는, 오페라의 음악이 드라마의 원인에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강하게 공명을 이루었음에 틀림없다. 바그너 학자들은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바그너로 하여금 그의 반지 사이클의 뒤쪽 절반을 포함하는 후기 오페라에서 음악이 더 강한 명령을 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는 주장을 했다. 많은 측면의 쇼펜하우어적 사상은 바그너의 이어지는 대본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마이스터징거에 나오는 구두장이 시인 한스 작스는 일반적으로 바그너가 자신을 가장 많이 반영하는 인물로 간주되는데,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적인 창조의 전형이다.
바그너의 두번째 영감의 원천은, 비단 상인 오토 폰 베젠동크의 아내 시인 마틸데 베젠동크였다. 바그너는 베젠동크 부부를 취리히에서 1852년에 처음 만났다. 오토는 바그너 음악의 팬이었는데, 바그너의 뜻에 따라 자신의 땅에 작은 집을 세워 주었다. 1857년까지 바그너는 마틸데에게 푹 빠져버렸다. 마틸데는 그의 애정에 일부 답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는 그녀의 결혼을 위험에 빠뜨릴 의도는 없었으며, 그녀의 남편에게 그녀와 바그너의 만남을 계속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정 행각은 바그너가 링 사이클을 잠시 제쳐놓고 (이후 12년 동안 재개되지 않았다), 기사 트리스탄과 (이미 결혼한) 귀부인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에 기초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작업을 시작하게 했다.
불편한 애정 행각은 1858년에 Minna가 바그너로부터 마틸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게 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어진 대면 후에, 바그너는 혼자서 취리히를 떠나 베니스로 향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다시 파리로 이동해 Metternich의 공주의 노력 덕분에 상연되는 탄호이저의 개정판 상연을 보게 되었다. 새 탄호이저의 1861년 초연은 대실패로 끝났는데, 이는 Jockey Club 소속의 귀족들에 의한 방해 때문이었다. 이후의 공연은 취소되었고, 바그너는 서둘러 도시를 떠났다.
1861년에 바그너에 대한 정치적인 추방이 해제되었고, 작곡가는 프로이센의 비브리히에 머무르면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작업을 시작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 오페라가 그의 작품 가운데에 가장 밝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의 두번째 아내인 코지마는 나중에 “미래 세대가 이 독특한 작품 안에서 상쾌함을 찾는다면, 그들은 눈물 속에서 미소가 떠오르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썼다). 1862년에 바그너는 결국 Minna와 이혼했지만, 그는 (또는, 적어도 그의 채권자는) 그녀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186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 국왕 루트비히 2세의 후원
바그너의 행운은 1864년에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2세가 나이 19세로 즉위하자 극적인 계기를 맞았다. 젊은 왕은 어린 시절부터 바그너의 오페라의 열렬한 숭배자였기에 작곡가를 뮌헨으로 데려왔다. 그는 바그너의 상당한 빚을 해결해 주었고, 그의 새 오페라가 상연될 계획을 세웠다. 리허설에서의 각고의 어려움 끝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뮌헨 왕립 극장에서 1865년 6월 10일에 큰 성공을 거두며 초연되었다.
그 때 바그너는 또 다른 애정 행각을 벌이게 되는데, 이번에는 바그너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트리스탄 초연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인 코지마 폰 뷜로와 함께였다. 코지마는 프란츠 리스트와 유명한 백작 부인인 마리 다구 Marie d’Agoult (필명 다니엘 스턴) 사이의 사생아로, 바그너보다 24살 연하였다. 리스트는 바그너와 친분이 있었지만, 그의 딸이 바그너를 보러 다니는 것을 금했다. 1865년 4월에, 그녀는 바그너의 사생아를 낳았고, 이름을 이졸데라고 지었다. 그들의 부주의한 애정 행각은 뮌헨에 추문으로 떠돌았고, 설상가상으로 바그너는 왕에 대한 영향력을 의심하던 뮌헨의 왕궁 일원 사이에서 선호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다. 1865년 12월에, 루트비히는 결국 작곡가가 뮌헨을 떠나도록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히 왕위를 버리고 그의 영웅을 따라 망명할 생각도 했었지만, 바그너가 재빨리 그를 말렸다.
루트비히는 바그너를 스위스의 루체른 호 인근의 빌라 Triebschen에 보냈다. 마이스터징거는 Triebschen에서 1867년 완성되었고, 다음 해 6월 21일에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10월에, 코지마는 결국 한스 폰 뷜로를 설득해 그녀와 이혼하게 했다. 리하르트와 코지마는 1870년 8월 25일에 결혼했다. (바그너는 그의 새 장인에게 몇 년간 보러 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바그너는 코지마의 생일 선물로 지크프리트 목가를 선사했다. 코지마와의 결혼은 바그너의 생애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또 한 명의 딸인 에바와 아들인 지크프리트가 태어났다.
Triebschen에서 1869년에 바그너는 처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만났고, 곧 굳은 친구가 되었다. 바그너의 사상은 니체에게 주요한 영향을 주었고, 그때 니체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니체의 첫 책인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1872)는 바그너에게 헌정되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니체가 점점 바그너의 다양한 측면의 생각, 가령 그의 평화주의와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에 환상이 깨지면서 결국 멀어졌다. “바그너의 경우” (Der Fall Wagner, 1888)와 “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ner, 1889)에서, 그는 바그너를 퇴폐하고 타락한 것으로 비난했고, 심지어 그 자신의 이른 시절의 미숙한 시야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했다.
– 바이로이트
바그너는 그의 새 가정에 안착하여, 그의 에너지를 반지 사이클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바그너는 반지 전곡 사이클이 이 작품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새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후원자인 루트비히2세가 전곡의 완성될 때까지 참을 수 없어 그의 명령에 따라 사이클 중 이미 완성된 첫 두 작품인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은 뮌헨의 “특별 시사회”에서 초연되었다.
1871년에, 그는 작은 마을인 바이로이트를 그의 새 오페라 극장의 위치로 결정했다. 바그너 일가는 그 다음 해에 이주하였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초석이 놓였다. 공사를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바그너 협회”가 각 도시에 결성되었고, 바그너 자신도 독일 전역에 콘서트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루트비히2세가 또 다른 거액의 보조금을 1874년에 지원한 후에야 충분한 자금이 모였다. 그 후년에, 바그너 일가는 바이로이트에 리하르트가 반프리트 (독일어로 “미혹과 광기로부터의 평화와 자유”)라고 이름붙인 빌라를 그들의 영구적인 집으로 삼아 이주를 마쳤다.
축제극장은 결국 1876년 8월에 ‘반지’ 사이클의 초연과 함께 문을 열었고, 그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 바이로이트 축제의 개최지로 남았다.

– 말년
1877년에 바그너는 그의 최후의 오페라인 파르지팔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작곡에는 4년이 걸렸으며, 그 동안에 그는 또한 일련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수필을 썼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1882년 1월에 완성했는데 이 작품을 오페라라 하지 않고 신성한 무대용 축전극이라 하였다. 그 해 여름 파르지팔을 초연하기 위해 두 번째로 바이로이트 축제가 열렸다. 바그너는 이 때에 심하게 아팠으며, 점점 심한 협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바그너는 평소 협심증이 있었는데 이 때는 상태가 심해졌다. 파르지팔은 총 16회 상연되었는데, 마지막 공연날인 8월 29일에는 지휘자 헤르만 레비가 아팠기 때문에 3막이 연주되는 도중에 바그너 본인이 비밀리에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지휘자 헤르만 레비로부터 지휘봉을 받아서 작품의 종결부에 이르기까지 공연을 지휘했다.
이 축제 이후에, 바그너 가족은 베니스로 요양을 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났다. 1883년 2월 13일, 리하르트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베니스 대운하 위의 Palazzo Vendramin에서 향년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로 되돌아와 반프리트의 정원에 묻혔다.

○ 반유대주의와 나치의 전용 (專用)
20세기 동안, 바그너에 대한 공공의 이해에는 그의 반유대주의가 점점 더 중심에 서게 되었는데, 이는 대부분 작곡가의 죽음 뒤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1930년대에 그의 음악을 나치 당이 전용한 것이다.
바그너는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유대인, 특히 유대인 작곡가가 독일의 해로운 외래 요소라고 비난했다. 그의 반유대인 수필 중 처음이자 가장 찬반 논란이 큰 것은 1850년에 “K. Freigedank” (“자유로운 생각”)이라는 필명으로 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서 출판한 “음악 속의 유대주의” (“Das Judenthum in der Musik”)이었다. 수필은 유대인 작곡가, 가령 바그너의 동시대인이자 경쟁자였던 펠릭스 멘델스존이나 지아코모 마이어베어와 같은 유대인 작곡가들이 “대중적인 비선호”되는지 설명하는 내용이다. 바그너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질적인 외모와 행동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으며, 따라서 “… 우리는 항상 본능적으로 그들과의 실질적인 접촉에 불쾌감을 느낀다” 고 썼다. 그는 유대인 음악가들은 얕고 인공적인 음악만 쓸 줄 알며, 이는 그들이 “민족의 참 정신”과의 연결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필의 결론에서, 그는 유대인에 대해 “너희들이 너희들의 저주라는 짐으로부터 정화될 방법은 단 하나다: 아하수에로 (방랑하는 유대인, 전설의 인물)의 정화 – 복종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것이 실제적인 물리적 소멸을 의미하기 위해 취해진 것이지만, 수필의 문맥상 그것은 유대주의의 박멸을 가리킨다. 근본적으로, 바그너는 유대 문화의 포기와 유대인을 독일 문화계로 흡수시키기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었다. 이 글의 첫 출판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바그너는 그 자신의 이름을 걸고 소책자로 1869년에 재출판하여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공연 시에 여러 대중적 항의를 야기시켰다. 바그너는 비슷한 시각을 여러 다른 글, 가령 “독일인이란 무엇인가?” (1878) 등에서 반복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로버트 구트만 같은 학자들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가 그의 글에 국한되지 않고 오페라 또한 숨겨진 반유대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가령, 반지의 미메 (Mime)나 마이스터징어의 직스투스 베크메서 (Sixtus Beckmessere)와 같은 인물은, 비록 유대인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반유대적인 전형적인 인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논란이 많다. 그런 식으로 가정된 “숨은 메시지”는 종종 복잡하게 얽혀 있고, 편견 어린 과대해석의 결과일 수도 있다. 바그너는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엄청난 양의 자신의 모든 측면 (자기 자신의 오페라, 자신의 유대인에 대한 관점, 기타 태양 아래에 있는 실질적인 모든 다른 주제까지)을 분석하는 글을 써 왔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가정된 반유대인 메시지는 전혀 언급된 바가 없다.
바그너 자신의 종교에 대한 관점은 독특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했지만, 그는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이스라엘의 신은 예수의 아버지인 그 신과 다르고, 십계명은 기독교의 교훈에 있는 자비와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또한 불교에 매료되었고, 여러 해 동안 불교 오페라인 “승리자” (Die Sieger)를 구상했고, 이것은 붓다의 마지막 여행을 비유한 Sârdûla Karnavadanaan에 기초할 계획이었다. “승리자”의 면면은 결국 파르지팔에 흡수되어, 기독교의 바그너화된 기묘한 판을 그려낸다. 가령 성찬식에서의 화체설 (포도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도 된다는 설)은 미묘하게 재해석되어, 뭔가 기독교적인 것보다는 이교도의 이식에 더 가깝에 되었다. 그의 매우 공공연한 반유대주의적인 시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유대인 친구와 동료의 광범위한 망을 갖고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파르지팔의 초연을 지휘하도록 고른 유대인 지휘자 헤르만 레비였다. 바그너는 처음에, 아마도 오페라의 종교적인 내용 때문에 그러했겠지만, 파르지팔을 지휘하기 전에 레비가 세례를 받기를 원했지만, 나중에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레비는 바그너와의 가까운 우정을 계속 이어갔으며, 작곡가의 장례식에서 운구를 부탁 받았다.
바그너의 죽음 무렵에, 유럽의 국가주의자 운동은 1848년의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인류 평등주의를 상실하고 있었고, 군사주의와 공격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으며, 이에는 비스마르크의 정권 교체 및 1871년 독일의 통일이 적지 않은 부분 영향을 주었다. 1883년 바그너의 죽음 후에, 바이로이트는 신화와 오페라에 끌린 우파 독일 국가주의자의 초점이 되어갔고, 이들은 바이로이트 모임으로 불렸다. 이 모임은 코지마 공인을 받았는데, 그녀의 반유대주의는 리하르트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고 더 악의에 찬 것이었다. 이 모임의 한 사람은 Houston Stewart Chamberlain으로, 나치라면 읽어야 했던 수많은 철학적 저술의 저자였다. Chamberlain은 바그너의 딸인 에바와 결혼했다. 코지마와 지크프리트 바그너가 1830년에 사망한 후, 축제의 운영권은 지크프리트의 미망인이었던, 영국 태생의 비니프레트에게 넘어갔는데, 그녀는 아돌프 히틀러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의 숭배자였고, 바그너의 음악과 독일인 국가 (1871년 이전에는 형식적인 정체성이 없었던 국가)에 대한 히틀러 자신의 영웅적인 신화를 융합할 길을 물색했다. 예를 들어, 나치의 뉘른베르크 집회는 매번 마이스터징거 서곡 연주로 문을 였었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원본 악보 다수를, 빌란트 바그너가 이러한 소중한 문서를 잘 보존해 달라고 탄원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의 베를린 벙커에 보관했다; 그 악보들은 전쟁의 최후의 순간에 히틀러와 함께 사라졌다.
몇몇 학자들은 바그너의 시각, 특히 그의 반유대주의가 나치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해 왔지만, 이런 주장은 찬반 논란이 많다. 바그너의 작품은 나치 식의 영웅주의와 별로 상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반지 사이클의 표면상의 “영웅”인 지크프리트는 얕고 별로 호소력 없는 시골뜨기일 뿐이다; 바그너의 공감은 분명히 염세적이고 여성같은 보탄에게 있었다. 바그너의 개인 철학의 많은 측면 분명히 나치에게 별로 호소력이 없었을 터인데, 가령 그의 평화주의와 유대인과의 동화와 같은 것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괴벨스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9년에 파르지팔을 상영 금지했는데, 이는 오페라 전체에 평화주의적 목소리가 넘쳤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 대해 후세의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가진 관점을 가지고 비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숭배는 되돌려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 바그너는 (1889년 4월 20일에) 히틀러가 태어나기 6년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정치 철학자 레오 슈트라우스는 히틀러가 좋아한 것은 무조건 싫어해야 한다는 느낌 (혹은 정반대의 상황)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쓴 바가 있다. … 그는 이런 것을 Reductio ad Hitlerum (히틀러가 관련되었다는 것으로 돌리면 그건 무조건 틀린 게 된다는 뜻, Reductio ad absurdum (귀류법)의 패러디) 라고 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라면 히틀러가 채식주의를 실천했다고 (그는 채식주의를 아리아인의 순수성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것을 경멸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작품은 이스라엘에서 사실상 연주 금지되어 왔으며, 그리고 극히 적은 수의 공연이 행해지기는 했으나 엄청난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바그너의 곡은 사실 공영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흔히 방송되고 있지만, 공공 공연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시도는 반대 시위, 특히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들에 의해 저지되어 오고 있다. 예를 들어 다니엘 바렌보임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한 소절을 2001년 이스라엘 축제의 앙코르로 연주한 뒤에, 의회의 위원회는 지휘자를 쫓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처음에는 계획되어 있었던 발퀴레 공연을 포기해야 했다. 다른 경우에, 주빈 메타는 관중석의 항의성 퇴장과 야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를 연주했다. 바그너와 그의 음악이 일으키는 반응의 복잡함을 반영하는 수많은 역설 중 하나는, 현대 시오니즘의 창시자인 Theodore Herzl이 바그너의 작품에 대한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것이다.

○ 바그너의 영향과 유산
그는 음악사에 있어서뿐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 천재이다. 음악사에서는 초기 낭만파의 뒤를 이어 낭만파 음악을 대성한 최고봉이며, 문학사에서는 신낭만파의 희곡 영역에 있어서의 거봉이었다. 또한 니체에게도 영향을 준 그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주의, 종교적인 신비주의, 탐미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으로 19세기 말 낭만주의 부흥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바그너의 유럽 예술과 문화에 기여한 바는 부인할 수 없으며 기념비적이다. 그의 생전과 사후 여러 해 동안, 바그너는 그의 다수의 팬들 사이에서 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그들 사이에서 거의 신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음악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특히 중요한 새 지평을 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작곡가들은 바그너 편에 서거나 바그너에 반대하는 편 중 하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안톤 브루크너와 휴고 볼프는 그에게 특히 많은 빚을 졌으며,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팍, 에르네스트 쇼송, 쥘 마스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한스 피츠너 등등의 수많은 음악가들 또한 그러하였다. 구스타프 말러는 “오직 베토벤과 바그너만이 있었다”고 말했다. 클로드 드뷔시와 아르놀트 쉔베르크의 이십 세기 화성 혁명은 트리스탄으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처음으로 어떤 종류의 드라마적인 공연 동안에 불빛을 희미하게 해야 한다고 처음 요구했던 사람이 바그너였으며, 처음으로 관현악단 피트 (바이로이트에서는 관중석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사용했던 것도 그였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이 청중들의 상상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극장”을 꿈꿨다. 오디오 기기의 발달로 이 꿈은 현실이 되었다.
바그너의 문학과 철학, 미술에 대한 영향 또한 분명하다. 영향력 있는 저작물인 비극의 탄생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를 숭배했는데, 그의 음악에서 유럽 정신이 다시 젊어지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파르지팔’ 이후에 바그너와 결별했다. 그는 ‘파르지팔’를 기독교 신앙심에 영합하는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20세기에, W. H. 오든은 한때 바그너를 “아마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천재”로 불렀으며,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도 바그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소설에서 바그너를 논했다. 바그너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며, 그의 오페라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작가 존 로널드 로웰 톨킨은 바그너와 그의 음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톨킨 자신이 옥스포드의 고대영어 교수이었기에 북구 신화와 사가에는 정통했었고, 따라서 북구 신화를 차용한 바그너의 작품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C.S. 루이스가 열렬한 바그네리안이었으며, 20세기 초의 유럽 문화계의 풍토를 보아도 바그너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었다. 게다가 톨킨은 C.S. 루이스와 함께 종종 바그너 공연을 보러 갔었으며, 한때는 C.S. 루이스와 함께 ‘니벨룽의 반지’의 2부 발퀴레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그는 바그너를 즐겨 들었고 또 열심히 연구를 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느, 그리고 샤를르 보들레르는 그를 숭배했다. 사랑과 죽음 (즉 에로스와 탄토스)의 관계에 대한 것 등 그의 음악 속의 많은 발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 분석을 예고했다. 추상미술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는 바그너 신봉자이기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된다. 또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마음 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바그너의 영향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때, 독일 음악계는 바그너 지지자와 요하네스 브람스 지지자의 두 파로 나뉘었다. 브람스 지지파는 강력한 비평가인 에두아르트 한슬릭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전통 형태를 최고로 인정하고 바그너식 혁신에 반대하는 보수파를 이끌었다. 클로드 드뷔시는 바그너를 심하게 비판했던 사람이지만 (“그 오래된 중독자”), 바그너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작곡자 중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드뷔시는 바그너의 영향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받았기 때문에 바그너와 결별할 필요가 있었던 많은 작곡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강한 반응을 계속 일으켰다. 그의 후기작에서, 그는 바그너 작품의 그것처럼 긴 시간과 깊은 맥박을 만들어내어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자들이 바그너의 시간 개념에 완전히 익숙해지기를 요구하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 냈다. 로시니 (“바그너는 굉장한 순간과 진절머리나는 15분을 가지고 있다”)를 포함해 많은 저항이 있었지만, 그 자신의 “Guillaume Tell”이 네 시간 이상의, 어떤 바그너 작품 하나보다도 긴 시간을 요구했다. 바그너의 이상은, 지크프리트의 “금발의 괴물” 영웅주의로부터, 그의 열성적인 쇼펜하우어 오독과 더불어 죽음과 신격화에 대한 매혹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심하게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오페라는 계속 강한 추종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바그너는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그에게 자극받은 이차 문학의 양이 많은 역사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그는 계속적으로 많은 찬반 논란과 존경을 동시에 받고 있다. 그 원인이 그의 음악의 뿌리에 있는 능가할 자 없는 숭고함, 힘, 장엄함, 그리고 때때로 위험한 초월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다.
종합적인 음악 표현과 유도동기의 사용은 20세기의 영화음악에 강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바그너는 또한 극도로 찬반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서, 이는 그의 음악과 드라마에 대한 혁신으로 인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반유대인적 시각에도 기인한다.

○ 음악
– 전체 경향
바그너는 새로운 교향악적인 오페라 (또는 “음악극”)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작품에 새로운 화성, 연속적인 대위법적 텍스처,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 그리고 유도동기 (라이트모티프, Leitmotif; 특정한 인물이나 상황에 연관된 음악 동기)을 사용하였다. 바그너의 반음계적 음악 언어는 유럽의 고전음악에 중대한 변화를 끼쳤으며, 이는 극단적인 반음계법과 무조성을 지향한다. 그의 음악극들은 “총체예술 (Gesamtkunstwerk)”이라는 미학적 개념에 기반을 두었으며 ‘니벨룽의 반지’ (1876)의 4부작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 음악극
바그너의 오페라와 음악극은 그의 대표적 예술적 유산이며 시기별로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바그너의 초기 단계는 나이 열 아홉에 그의 첫 오페라 도전 혼례 (Die Hochzeit)로 시작되었는데, 작곡의 초기 단계에서 1832년에 포기했다. 바그너의 완성된 초기 단계 오페라는 세 개로, 요정 (Die Feen), 연애금제 (Das Liebesverbot – 쉽게 말해서 연애 금지), 그리고 리엔치이다. 이 작품들의 작곡 양식은 전형적인 것으로 음악사에서 바그너의 위치를 매김해 준 혁신적인 발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의 생의 나중에, 바그너는 이 비성숙한 작품들은 그의 예술 작품의 일부로 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작품들은 거의 연주되지 않지만, 리엔치 서곡은 콘서트용 작품이 되었다.
바그너의 중기 단계의 작품은 굉장히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드라마 작가이자 작곡가로서의 힘이 깊어가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nde Holländer), 그 뒤를 이어서 ‘탄호이저’ (Tannhäuser)와 ‘로엔그린’ (Lohengrin)을 포함한다. 이 작품들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연주되고 있다.
바그너의 후기 단계의 오페라 작품들은 총체예술을 본격적으로 실현시킨 음악으로서 음악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은 그의 가장 위대한 단편 음악극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장인 가수)(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는 바그너의 유일한 희극이며 (그의 잊혀진 초기작인 연애금제를 제외하면) 현재 공연되는 오페라 가운데 가장 긴 것들 중 하나이다. 니벨룽의 반지는 흔히 반지 사이클이라고 회자되며,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기초한 네 개의 오페라 모음이다. 연주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16시간 가량으로, 반지 사이클은 이제까지 작곡된 음악 작품 중 가장 야심찬 것으로 불린고 있다. 바그너의 최후의 오페라, 파르지팔 (Parsifal)은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를 위해 특별히 작곡되었으며 악보에 “무대신성제전극” (“Bühnenweihfestspiel”)이라고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성배에 대한 기독교 전설에 기초해 쓰여진 명상적인 작품이다.
그의 오페라와 음악 이론에 대한 수필에 걸쳐, 바그너는 오페라라는 매체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는 그가 “악극”이라고 부른, 음악과 드라마의 요소를 모두 함께 융합한 새로운 오페라 형태에 대한 옹호자였다. 대본 작성 작업을 직접 하지 않은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 달리, 바그너는 그의 오페라를 위한 대본을 직접 썼으며 자신은 그것을 “시”라고 지칭했다. 그의 작품의 줄거리 대부분은 북유럽 신화와 전설에 기초해 있다. 거기에 더해,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가수의 그것과 동등한 작품 양식을 개발해 냈다. 오페라의 드라마에 대한 오케스트라의 역할에는, 특정한 인물, 장소, 줄거리 요소를 알려 주는 음악 주제인 유도동기의 연주가 포함된다; 유도동기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진화해 나가는 양상이 드라마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바그너의 음악적인 양식은 종종 서양 고전음악의 낭만파 시기의 축약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감정적 표현에 대한 탐구 때문이다. 그는 화성과 음악 형식에 있어서 새로운 생각을 소개했으며, 여기에는 극단적인 반음계법이 포함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그는 전통적인 조성 체계의 한계를 탐구하여 조와 화음을 각각 인물과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20세기의 무조성으로의 길을 가리켰다. 몇몇 음악 사학자는 현대 서양 고전음악의 시작을, 소위 트리스탄 화음이라고 불리는 트리스탄의 첫 음표들로 보고 있다.
.초기 단계
(1832) 혼례 (Die Hochzeit, 완성 전에 포기)
(1833) 요정 (Die Feen)
(1836) 연애금지 (Das Liebesverbot)
(1837) 리엔치, 마지막 호민관 (Rienzi, der Letzte der Tribunen)
.중기 단계
(1843)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
(1845) 탄호이저 (Tannhäuser)
(1848) 로엔그린 (Lohengrin)
.후기 단계
(1859)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1867)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장인 가,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는 다음 네 개의 악극으로 구성됨: (1854)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1856) 발퀴레(Die Walküre), (1871) 지크프리트(Siegfried) [이전에 젊은 지크프리트(Jung-Siegfried, Der junge Siegfried)로 제목을 붙였음], (1874)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 원래는 지크프리트의 죽음(Siegfrieds Tod)으로 제목을 붙였음]
(1882) 파르지팔(Parsifal)
– 이외의 음악
오페라를 떠나서는, 바그너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음악을 작곡했다. 여기에는 2개의 교향곡 (나이 19세와 21세에 씀)과 몇 개의 서곡, 합창곡 및 피아노곡, 그리고 글룩의 아울리데의 이피게니의 관현악 재편곡 등이 포함된다. 이들 중에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코지마의 생일을 위해 작곡된 실내악 작품인 지크프리트 목가이다. 목가는 반지 사이클에서 여러 모티프를 끌어오지만, 반지의 일부는 아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베젠동크 가곡으로, 이전에는 여성 성악을 위한 다섯 개의 노래로 알려졌으며, 바그너가 트리스탄을 작곡하는 동안에 마틸데 베젠동크를 위해 작곡되었다.
파르지팔을 끝낸 후, 바그너는 분명히 교향곡 작곡으로 방향을 전환하려 의도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작곡되지 않았다.
바그너의 중기와 후기 오페라에서 서곡과 관현악 소절은 콘서트 작품으로 흔히 연주된다, 이들의 대부분에 대해, 바그너는 이 발췌부에 대해 짧은 소절을 덧붙여서 곡이 갑자기 끝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에 파르지팔 전주곡과 지크프리트의 장송 음악이 해당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트리스탄 전주곡의 콘서트용 판은 인기가 없고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주곡의 원래 형태가 콘서트 연주를 위해서도 보통 더 나은 것으로 간주된다.
영어권 국가에서 신부의 입장 시에 연주되는 가장 대중적인 결혼 행진곡 중 하나 (흔히 “여기 신부가 온다” (“Here Comes the Bride”)라고 알려져 있다)는 그 가락을 로엔그린의 “혼례 합창곡”에서 따 온다. 오페라에서 이 곡은 신부와 신랑이 축하 행사장을 떠나 결혼식장으로 들어갈 때에 불린다. 로엔그린과 엘자의 재앙과도 같은 결혼은, 합창곡이 불리는 20분 후에 회복할 수 없이 파경으로 도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이런 이상한 사용을 막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교향곡
교향곡 다장조 (1832년)
.관현악곡
지크프리트 목가파우스트 서곡
.가곡
베젠동크 가곡 WWV. 91
.합창곡
사도들의 애찬

○ 작곡 특징
그의 악극의 특징은 우선 지도동기, 혹은 유도동기 등으로 번역되는 라이트모티프의 사용에 있다. 라이트모티프는 극의 중요한 주제로서 극 안에서 계속 변형되어 제시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극의 전개를 암시하고 극 안의 통일성을 공고히 하는 효과가 있다. 이 라이트모티프의 사용은 바그너의 후계자들에게도 이어졌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가인 자코모 푸치니도 라이트모티프를 자신의 방식대로 소화해 사용할 정도였다.
또한 스스로 무한선율이라고 명명한 것으로, 이전의 오페라가 아리아나 레치타티보에서 선율이 중단된 것과는 달리 선율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방식을 구사했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바그너의 악극이 기존의 오페라나 당대의 이탈리아 오페라들과는 다른 방식이다. 무한선율에서는 가사를 듣기 쉽게 하기 위해 레치타티보 풍으로 부르게 하기도 한다.
또한 바그너의 악극은 극단적인 반음계적 화성으로 당대에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에서는 전통적인 조성체계가 흔들리는 이른바 “트리스탄 화음”이 등장한다. 상당히 자유롭게 조가 바뀌는데 결국 이것은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의해 무조음악을 여는 시초가 되었다고 봐도 좋을것이다.
그리고, 고전시대 이후로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금관악기의 반음계 처리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금관악기를 주 선율 역할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사람의 이러한 관현악법의 영향을 받은 말러, 브루크너 등이 이어지면서 금관악기 활용법에 있어서 가히 대격변을 일으켰다.
그의 오페라 작품은, 색감에서 화려하고 분위기에서 극적이다. 음향은 청각을 압도하고 악곡은 듣는 이를 사로잡는다. 다시 말해 풍성한 현악기의 음색에 실린 목관악기의 음조가 유려하며 도취적인 선율과 맞물리는 금관악기의 화음이 장중하다. 그러니까 반음계의 사용에 따른 선율의 반복, 한 악절 안에 여러 차례 조성이 바뀌는 모호한 화성 체계, 그리고 무엇보다 화성이 자유로우니 관현악의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음악이 대체로 어렵게 느껴지고 시끄럽게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그너는 멜로디의 개념을 바꾼 작곡가였다. 그는 주제를 변형시켜 펼쳐가는 방법 대신 주제를 쌓아가면서 악구를 늘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걸 지탱한 것은 두 개 이상의 선율을 포개어 진행하는 대위법인데, 그는 그것으로 여러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기법으로 응용하기도 했고 음악 자체를 극화하는 기법으로 변용하기도 했다. 또 하나는 반음계를 폭 넓게 사용한 점이다. 그것은 하나의 악구가 끝났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에 곡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든다. 이른바 무한 선율이 가능한 이유이다. 또한 그는 등장인물, 배경, 사물, 상황 등을 나타내는 모티브 선율 (주제동기)을 사용하여 악극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장치로 삼았다. 그것은 귀에 솔깃하도록 꾸며진 탓에 장대하고 복잡한 악극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는 복잡한 악곡구조를 단일하게 구성하는 종합능력에도 뛰어나며, 관현악을 한데 아우르는 통합 (Unison) 능력에도 뛰어났다. 그의 음악에서 장중하고 임장감을 받는 외에 색채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이다. 그 점에서 그는 스펙터클한 규모가 특징인 대작주의 예술가이다. 그는 보다 많은 음계를 재료로 해서 악곡을 구성한 작곡가였다. 그래서 내용에서 풍부하고 구성에서 다채롭다. 그런 만큼 그의 음악은 온갖 분위기가 녹아있으며 여러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또한 사색에 빠지게도 한다. 그는 여러 악기가 맞물려서 내는 소리의 어울림을 한껏 밀고 나갔다. 때로는 화성과 조성이 어긋나는 것에도 개의하지 않음으로써 조성을 무시한 음악에 암시를 주었다. 그를 가리켜 현대음악의 선구자로 부르는 데는 여기에 연유한다. 한편 그는 문학을 음악 이상으로 중시하였다. 그의 작품은 가사가 매우 중요한 극음악이면서도 관현악의 비중이 성악과 대등한 악극인 탓이다. 따라서 양식 면에서 이전의 오페라와 다르다.
– 라이트모티프 (Leitmotiv)
유도동기 (주도동기, 지시동기, 라이트모티브)는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주제악상을 가리킨다. 유도동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그너가 오케스트라에 부여한 임무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바그너에 의할때, 그의 음악극에서 성악은 사물의 외면을, 오케스트라는 그 본질을 표현한다. 오케스트라의 이러한 역할은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의 역할과 동일하며, 또한 쇼펜하우어가 말한 ‘음악은 의지 자체의 모사’라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칼의 동기’, ‘지그프리트의 동기’라는 식으로 사물, 사건, 인물들에 부여된 악상세포인 동기들은 그들 서로 간의 자유로운 변형과 조합을 통하여 드라마의 내적 본질을 표현하며 이는 바그너가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드라마를 이해하는데 있어 ‘정서적, 심리적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들어, 테너와 소프라노인 두 남녀 성악가가 열정적인 사랑의 언어를 노래할 때 (사물의 외면) 오케스트라 (내적 본질)가 ‘사랑의 저주 동기’를 연주한다면 이는 둘간의 사랑이 ‘저주받은 사랑’이란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니벨룽의 반지’의 경우, 무려 100여개가 넘는 동기들이 나오는데 이들 동기들은 음조, 오케스트라 편성, 하모니, 리듬의 변화를 바탕으로 무한히 변형․발전하면서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상호교감한다.
유도동기는 리하르트 바그너에 의해 확립되었다. 예를 들면, 그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칼의 동기’ ‘운명의 동기’ 등이 장면의 변화에 따라서 갖가지 변형으로 나타난다. 라이트모티프라는 말은 바그너의 친구 H.볼초겐이 그의 논문 ‘신들의 황혼에서의 동기’ (1887)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여 유명해진 용어인데, 바그너의 후계자들에게 그 기법과 함께 계승되었다. 이 바그너의 작곡 기법은 모든 헐리우드 영화 음악의 근간이 되었고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 맥스 슈타이너, 버나드 허먼, 알프레드 뉴먼 같은 초창기의 저명한 작곡가들이 바그너의 음악극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영화 음악의 스타일에 대한 표본을 제시했고 존 윌리엄스, 한스 짐머, 하워드 쇼어같은 작곡가들이 표본을 제시한 것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바그너의 이러한 유도동기는 시에 있어서는 모더니즘과 소설에 있어서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의 토대가 되었다.
‘바그너 악극의 논리적 구조’
성악 = 개인적인 소리, 자아의 표출, 드라마의 외면
오케스트라 = 세계의 소리, 본질성, 드라마의 내면
=> 양자대등, 폴리포니적 구성
– 무한선율
무한선율은 그의 총체예술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로 기존 오페라들의 폐해, 즉 번호 오페라 (Number Opera)에서처럼 극과 음악이 분리된 번호들로 나뉘어져 연속성이 단절되는 것을 막기위한 선율적 장치이다.
고전주의 음악의 구문법은 춤 음악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그 투명한 전개를 특징으로 하나, 그 구문법의 단위는 아주 단순하고 짧다. 따라서 이러한 전래의 구문법에 따를 경우, 짧은 시간에 의미를 완결짓는 음악과 비교적 긴 시간을 요구하는 연극적 의미와의 불일치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음악은 연극과 결합하려 하기보다는 시와결합하려 했다. 시의 전개는 음악만큼이나 압축적인 까닭이다. 따라서 오페라의 아리아는 연극대본처럼 꾸며지지 않고 서정시처럼 꾸며진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러한 기존의 방식을 연극이 음악의 시종이 되는 방식이라 하여 따르지 않고 음악이 연극의 속도를 맞추어가는 방식을 주장하였다. 이제 음악은 연극과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바로 속시원하게 종지가 나타나 음악의 구문법이 정리되지 않고 휴지와 종지를 회피하여 감정의 고조에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선율법이 그것이다. 이를 무한선율이라 한다.
‘무한선율’ 개념의 기초를 이루는 본질적인 조건은 음악작품 전체를 통해서 각각의 순간은 다른 순간의 의미와 동등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선율은 바그너의 말처럼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흘러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개개의 음악적 사건들과 형태들은 무의미하게 메워져서 아무런 내적 관계도 없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서는 안되며 서로가 관계를 갖고 서로 상대의 것으로부터 유기적으로 발전되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바그너는 이러한 무한선율 기법을 통해 드라마의 내적 행위가 급작스러운 위기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펼쳐진다고 주장한다.
– 트리스탄 화음
음악사가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 첫부분의 주음과 주화음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모호함 때문에, 이를 기존의 온음계 화성체계를 거부하는 최초의 시도 – 그리하여 현대음악으로의 첫걸음을 내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바그너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조성을 깨고 극단적인 반음계주의를 지향함으로써 수백년동안 지속되어 온 기능화성으로부터 탈피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바그너의 이러한 화성의 혁신은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쇤베르크에 의해 현대로 계승되었다.
– 두운 (Stabreim)
바그너는 근대적 일상언어로는 신화적 세계를 그려내지 못한다고 보아 특별한 예술언어를 찾아내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 두운 (Stabreim)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에 따르면, 두운은 심오한 표현들로 가득찬 새롭고, 간결하고, 힘찬 예술언어를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 바그너에 의하면, 당대의 일상언어는 이해를 목적으로 오로지 오성에만 제시될 수 있도록 우리의 감정을 지배한 관습으로 인해 생겨난 결실이므로 더 이상 감정을 상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강화된 행동의 순간들은 그 습관적인 표현방식들을 넘어서도록 균형있게 고양된 언어에 의해서만 적합하게 구체화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두운에 의해 조정된 운문이다.
그의 저서 ‘오페라와 드라마’에서 바그너는 시와 음악의 역사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을 통해 두운법칙을 합리화하려 시도하였다. 바그너가 고대 독일의 시형식을 적용한 것은 단순히 분위기적인 이유 때문에 드라마의 주제에 맞추어 시의 발성을 적응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드라마의 주제를 신화에서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 두운법칙을 통하여 가사 속에서 ‘순수하게 인간적인 것’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바그너는 태고의 것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추구하였으며, 역사적 요인들이 시와 음악을 서로 분리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음악과 시의 원초적인 통합을 추구하였다.
바그너 오페라의 가창양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는 말하기와 노래부르기의 중간 형태인 ‘아리오소’ 양식을 언급한다. 이것은 이태리의 ‘번호 오페라’ (Number Opera)’ 속에서 볼 수 있듯이 레치타티브와 아리아가 확연히 구별되는 양식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 이유는 바그너가 음악극을 창출하는데 있어 두가지의 기본문제들을 ① 말하기 (speech)와 노래의 통일, ② 드라마와 음악의 통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기와 노래를 통합하는데 있어서 바그너는 한편으로는 운율없이 있는 그대로의 산문과 다른 한편으로는 운율이 있는 시 사이의 중간 영역을 추구하였다. 그는 해결책으로 ‘니벨룽의 반지’ (이 시는 음악이 작곡되기 이전에 이미 씌여졌다)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듯 고대 북유럽의 시의 기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고대 북유럽의 시에서는 두운 (Stabreim)이 사용되는데 이것은 공통되는 자음들의 첫글자 소리로 운을 이룸으로써 논리 정연함은 물론 의미상의 대조와 반테제를 허용할 수 있다. 예컨대 “Die Liebe bringt Lust und Leid” (사랑은 기쁨과 고통을 가져왔다)라는 문장에서 기쁨(Lust)과 고통(Leid)이라는 두 가지 대비적 의미의 단어들은 테제와 반테제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대조나 반테제는 음악, 특히 화성적 전조를 통하여 강조될 수 있다. 따라서 시의 가사와 음악에서 주어진 유사성을 통하여 말하기는 음성적 언어 (tone language)로 강화될 수 있으며, 이 음성적 언어는 극적 연기, 독백, 대화 등을 위한 주요 매체가 되었다.
‘두운의 예’
‘라인의 황금’ 1장
Nur wer der Minne
Macht versagt,
nur wer der Liebe
Lust verjagt,
nur der er-zielt sich den Zauber
zum Reif zu zwingen das Gold.
– 바그너 오케스트레이션
바그너는 이전의 작곡가들과는 달리 자신이 원하는 이상향의 오케스트라를 창안하려 했다. 자신이 원하는 악기가 세상에 없는 것이라면 새로이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식이었다. 특히 그의 대작 ‘니벨룽의 반지’에서 바그너는 기존의 관현악 규모를 완전히 뛰어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예) ‘발퀴레’ 관현악 편성
현악기 : 현 5부
제1․2 바이올린 각 16, 비올라 12, 첼로 12, 더블베이스 8
목관 : 플루트 3, 피콜로 1
오보 3, 잉글리쉬 호른 1
클라리넷 3, 베이스 클라리넷 1
바순 3, 콘트라바순 1
금관 : 호른 8
트럼펫 3, 베이스 트럼펫 1
테너-베이스 트럼본 3, 더블베이스 트럼본 1
테너 튜바 2, 베이스 튜바 2, 콘트라베이스 튜바(일명 ‘바그너 튜바’) 1
타악기 : 팀파니 4
트라이앵글, 테너 드럼, 글로켄슈필, 심벌즈
(그리고 하프 6)
바그너의 오페라 및 악극의 악기편성은 극단적인 파격이 나타나진 않지만, 관악기의 수가 크게 보강되면서 양적인 면에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큰 팽창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현악기가 주된 역할을 해오던 방식으로부터 탈피하여 관악기의 역할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니벨룽의 반지’에는 무려 8대의 호른이 등장하며 바그너 튜바 및 콘트라베이스 튜바 등 금관악기가 눈에 띄게 증가한다. 바그너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베를리오즈의 경우처럼 디비지 (Divisi : 입체적이고 풍부한 음향효과를 거두기 위해 하나의 파트를 다시 여러 파트로 분할하여 각기 다른 음을 연주하도록 지정하는 관현악법의 하나) 기법을 통해 복잡하고 분산된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이중, 삼중으로 확장된 각 파트의 덩어리진 소리로부터 풍요로운 음색과 넓은 범위에 걸친 다이내믹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영국의 음악학자 토비는 바그너 음악에 나타난 각 파트의 음색을 가리켜 개별적인 각각의 성부가 아니라 두터운 ‘띠’ (band)와 같은 소리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바그너는 베를리오즈의 경우에서처럼 성부들을 잘게 분산시켜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음향을 얻어내기보다는 하나의 성부를 두텁게 만들어서 보다 폭넓은 다이내믹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바그너는 한 성부를 여러 갈래로 분산시키는 대신 여러 성부가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여 서로 조화되는 대위법적인 텍스처를 즐겨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오케스트라를 더욱더 현란한 색채로 물들이고 있다.

○ 종합예술이론 (Gesamtkunstwerk / Total work of art)
낭만주의 미학이론의 최정점이자, 가장 강력한 성과물인 바그너의 이른바 ‘종합예술작품’ 이론은 그 자신의 예술작품 뿐 아니라, 뒤따르는 세대들의 창작활동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일상화된 극장예술의 관습을 거부하고 비극적 에너지의 시원을 탐구하여 모든 예술이 통합된 강력한 드라마를 창조해냈다.
– 그리스 비극
바그너에 의하면 그리스 문화의 위대함은 비극에 존재하는데, 고대 그리스 비극은 하나의 종교적 체험으로서 ‘지고의 예술형식’이었다. 그에게 이 예술은 진지한 공동체적 표현으로서 하나의 통일된 예술작품을 형성하며 공동체의 모든 본성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세계 지배 말기 가톨릭의 지배 하의 시대상황은 자조적이고 존재를 혐오하며 공동체를 증오하도록 가르쳤다. 그리하여 예술은 공동체적 삶의 진정한 표현일 수 없었으며, 그것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란 오로지 기독교정신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그너는 기독교가 유럽의 예술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고, 그것을 유럽의 예술적 가치들이 쇠퇴한 원인이라고 분석하기에 이른다.
바그너는 그리스인들이 ‘극히 훌륭한 인간적 삶의 결과인 자발적인 예술의 모든 풍부한 요소들에다 언어라는 끈을 연결시켜서, 그것들을 모두 한데 모아 지고의 예술형태인 드라마를 탄생시켰던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바그너는 비극들에 예시되어 있는 바와 같은 드라마의 필요조건들을 그리스인들로부터 물려받아서 현대의 상황에 의거하여 재창조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은 드라마가 인간의 삶으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해 나와야만 한다는 자신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스의 비극은 예술작품화된 종교의식이었다. 그리스 종교의 핵심은 바로 인간, 실제있는 그대로의 본능적인 인간이었으며, 이러한 종교의 핵심을 털어놓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었다.예술은 종교의 마지막 은폐적 의상을 벗기고 종교의 핵심인 실제의 육체적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청중의 정신에 의해 고무된 한에서만이 번성하였으며, 청중이라는 인간적 형제애가 깨졌을때 인간의 예술작품 또한 소멸하였던 것이다. 바그너가 의미한 이러한 보편적 의미에서의 인간은 ‘청중’이라는 공동의 집단적 요구를 느끼는 모든 이들을 통칭한다.
바그너가 그리스인으로부터 물려받아 재창조할 드라마의 필수조건으로 들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 주제가 공동의 경험의 일부라는 의미에서 일반 대중에 의해 ‘리얼하다’고 인식되어야 한다.
② 그 경험은 시인에 의해 농축되어야 하며 모든 지엽적인 문제들은 삭제되어야 한다.
③ 그것은 지성에 의해 찾아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청중의 감정에 직접적으로 (직관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며 바그너가 찾아낸 것이 바로 신화였다. 이것은 민족과 종족을 초월하고 있으므로 과거를 이해하는데 보다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집중적이고 시적인 형태로 인간생활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여러가지 철학적 문제를 구현하고 있다고 바그너는 생각했다. 이와 같이 바그너는 신화가 인간의 삶의 표현이며 역사는 신화에서 나타날 수 있는데 역사는 보편적 인간을 나타낸다고 보아, 신화가 인간의 모든 내부 동기들을 표현하기 때문에 보편화될 수 있다고 보고 여기에 더 몰두하게 되었다.
– 예술적 도덕성
바그너 미학의 핵심은 엄격한 ‘예술적 도덕성’에 있다. 이것은 19세기 중반의 극장예술에 대한 바그너의 비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에 의할때 16세기 말, 그리스 비극의 재구성이라는 이상을 내걸고 이탈리아에서 탄생된 오페라는 이후 가수와 무분별한 청중을 위한 극장음악으로 타락해버렸다.
‘예술가와 대중’ (Der Künstler und die) Öffentlichkeit (1841), 대중과 대중성 (1878) 등의 글에서 바그너는 당시 대중들을 조롱에 가까운 어조로 힐난한다.
‘왕자가 푸짐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은행가가 고된 재정경영을 끝낸 후, 그리고 노동자가 수고로운 하루를 마친 후, 극장으로 가서 휴식과 기분전환과 즐거움을 찾을 때, 과연 예술가가 무엇으로 그들을 접대할 것이냐는 태도는 일응 정당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예술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예의바른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극장이 공중예술의 주요 형식으로서,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는 강력한 매개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그너에 있어서 마이어베어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대중을 겨냥한 화려한 파리의 그랜드 오페라는 밤의 여흥을 조달하는 단순한 오락에 불과했다. 극장이란 그 시대 민중의 정신을 반영하는 문화의 극치로서, 타락한 일반대중의 취미에 영합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 무대공연정신이 보다 고상한 예술이해에 의한 지시에 통제되도록 함으로써 대중의 취미를 개선하는 데 힘써야 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바그너가 보기에는 당시의 극장예술, 특히 오페라는 쾌락만을 고무시킴으로써 대중을 타락시키고, 고상한 것을 통속화하며, 마침내는 전 대중을 아주 무질서한 속물들로 타락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예술은 상품적 가치로 전락되었으며 예술가는 그러한 것들을 제공함으로써 자기자신과 대중을 기만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오페라들은 각각 순수음악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음악 외적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작품들 중에서는 목적과 수단이 완전히 일치하는 예술은 창조될 수가 없었다. 이런 작품에서는 전체적인 구성을 무시한 채 가수들의 특별한 기교만을 내보이려 한다는 데에 또한 바그너의 비난이 가해진다. 가수들은 자기 주변의 노래와 연기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전체적 구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순전히 비르투오소적인 연주에 탐닉함으로써, 또한 청중은 그것에만 주목함으로써 불필요한 종속물의 수준으로 타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학적 관점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바그너의 지극히 현대적인 생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바그너는 청중들은 ‘예술작품의 종’들이며, 따라서 청중이 되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종교적 회중’ (Kultgemeinde)이 되기를 호소한다. 종교적으로서의 예술개념은 헤겔에서 바그너로 오는 동안 그 의미가 변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종교가 예술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바그너에 있어서 예술은 종교의 자리를 침범하고 있었다.
– 결론
서양의 예술사에서 낭만주의라는 시기에 있어서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은 형식과 구조라는 전통적 원리와 균형을 이루며 그로부터 새로운 예술적 실체를 창조해냈다. 그러한 예술적 원동력이 기존 예술 원리에 대한 반동적인 힘들이었다는 사실은 낭만주의의 근본적인 배경이다.
예술, 정치, 사회, 종교에 대한 낡은 이념들의 붕괴는 인간을 그 자신의 수단에 의지하게 하였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더욱 창조적이 되었다. 이러한 조건은 새로운 예술적 충동을 낳게 하였다. 바그너라는 낭만주의 최고의 예술가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기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음악적, 문학적, 연극적 기술에 숙련된 사람으로서 새로운 예술 통일의 예를 확립하였다. 바그너가 추구한 것은 총체예술작품으로서의 ‘음악극’이었다. 이러한 그의 예술관은 쇼펜하우어의 미학, 셰익스피어의 비극, 베토벤의 음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바그너는 예술을 인간으로부터 직접 유래한 것(ⓐ)과, 자연적 요소로부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구분했다.
(ⓐ) 무용(동작), 음악, 시 ․․․ 인간은 주체이자 동인 (動因)
(ⓑ) 건축, 조각, 회화 ․․․ 자연에 대한 예술적 묘사
바그너는 이러한 예술들이 개별적으로는 빈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드라마에서의 이상적 예술적 모델이 시간이 지나면서 소실된 이래, 각각의 예술은 개별적으로 이기적인 발전을 해 왔으나 이 예술들의 역사는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예술 개개의 국면들에 대한 하나의 연속적인 묘사로서, 자신들의 결핍을 메꾸기 위한 여러 속임수들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바그너는 오페라에서 있었던 종합의 시도를 실패라고 보았는데, 그 실패의 원인을 제 예술 상호간이 서로 빼앗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 ‘이기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바그너는 베토벤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위의 (ⓐ)의 세 예술 (무용, 음악, 시)들이 결합한 미래의 예술작품을 위한 최초의 가능성있는 도구들로 여겼다. 베토벤은 음악에 언어를 첨가함으로써 (그의 제 9 교향곡) 음악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였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음악으로는 그 이상의 단계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보다 높은 단계의 예술작품은 보편적인 드라마로서, 바그너는 베토벤이 이 예술의 부활을 위한 열쇠를 만들어주었다고 보았다. 또한 바그너는 셰익스피어에게서 시와 드라마 (앞문장의 ‘드라마’와는 그 의미가 다름에 주의)의 완성된 형태를 발견하였다고 생각했다. 이제 바그너에게는 이들 두 절반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일이 미래의 예술작품에 남겨진, 그리고 자신에게 남겨진 과업이었다.
① 기존모델 : 오페라 = 대본 (드라마,극) + 음악
* 이 경우 극 (대본)은 철저히 음악에 봉사
② 종합예술작품 : 보편적인 드라마 = 대본 + 음악 + [ 건축, 조각, 회화 + 무용 등 제예술 ]
* 보편적인 드라마 (이상화된 드라마)는 모든 예술이 종합되어 최고도로 강렬한 정서표현을 산출하는 새롭고도 궁극적인 예술형식

○ 문학가로서의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는 작곡가와 이론가로서의 중요성을 넘어서 동시에 극작가, 무대감독, 서정시인, 소설가, 수필가와 가극 대본작가이기도 하다. 토마스 만은 그의 ‘니벨룽의 반지’ 강연 (1937년)에서 “바그너의 시인성을 의심한다는 것은 나에게 언제나 모순되게 생각되었다.”고 토로했다.
“지그프리트에 대한 보탄의 관계, 그의 파괴자에 대한 신의 그 아버지다운 조소적이며 냉연한 애정, 영원한 젊은이를 위해 낡은 권력의 보좌에서 사랑으로 퇴위하는 것보다 시적으로 더 아름답고 더 심오한 것이 있을까? 여기에서 음악가가 발견하는 그 경이에 찬 소리를 그는 시인에게 힘입고 있다.” ― 토마스 만
바그너에 있어서 음악과 문학은 서로 긴밀한 관계 속에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바그너의 경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바그너는 그의 음악을 ‘그것이 중요한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깊이 받아들이도록 온세상을 설득시키기 위해 문학을 필요로 했다. 그는 평생토록 그 ‘이념’의 주석자였다.”
바그너는 낭만적인 태고의 언어, 즉 오성에 의해 아직 굴절되지 않은 감각적인 감정언어에 의존하여 두운법을 부활시켰다. 언어와의 결합은 문학에서 그것이 가지는 미적 자율성, 독자적인 표현의 가치를 빼앗았지만 ‘요정’ (Die Feen, 1833)에서 ‘파르지팔’ (Parsifal, 1877 ~ 1882) 까지의 바그너의 가극들은 그때마다 뛰어난 정신사적 증언으로서 간주된다.
바그너는 문학, 음악, 극예술과 조형미술의 복합적인, 모든 감각들을 포함시키는 규합으로서의, 고대에 이미 발현되어 있었던 총체예술품을 그의 음악극 속에 이루어 놓았다.이것은 한민족의 공동체 체험으로서의 국민종교의 봉헌극 사상과 결합되어 일치의 효과를 목표로 한다. 이점에 있어서 바그너는 낭만적 사고의 최후의 정점이며 성취자이다. 중세의 소재들, 민중문학, 민족신화에 대한 그의 선호가 그 사실을 입증하듯 음악 및 문학 창작 활동에 있어서 바그너는 낭만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또한 포이에르바하의 사상,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동시대의 심리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바그너는 신과 신앙을 잃어버린 자연 과학의 시대를 예술 속에서 극복하고자 애썼다. 유도동기 (Leitmotiv)를 사용하여 거장다운 기술을 발휘한 그의 음악극들은 감각적 향락을 즐겨하는 세속에의 헌신과 신비-염세적인 구원에의 동경의 대비로 구성되어 있다.
언급된 바처럼, 음악가인 동시에 시인인 바그너의 작품은 따라서 가극 애호가들에게 뿐만 아니라 문학애호가들에게도 각별히 중요하다. 바그너는 음악에서 뿐아니라 그의 가극들의 대본작가로서도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였다. 그의 가극 대본들은 그저 대본서들이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서, 뛰어난 비극작가가 그 속에서 다양한 문학적 전통들을 수용하여 극을 만들어내고, 극중 인물들을 통해 항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가극 계획안들로 간주된다.
괴테 시대가 끝난 이후로는 독일의 극작가나 소설가중 거의 어느 누구도 세계문학 속으로의 입구를 발견치 못했던 반면, 작곡가이며 시인이기도 한 바그너는 20세기를 넘어설 때까지의 다른 어떤 독일작가들의 것과도 그 강도에 있어서 비교될 수 없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특히 19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 속에 그가 행사한 역할은 중세에 대한 베르길리우스의 중요성, 독일의 18세기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중요성에 비교되었다. 그의 작품이 독일의 19세기가 세계문학에 가져 온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음악가이며 시인인 바그너는 그러나 순수한 의미의 시인, 또 순수한 의미의 음악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비범해야 한다는 것이요. 나에게 있어서는 시인과 음악가와의 연합에 엑센트가 주어져야 하오. 음악가만으로서는 나는 별 의미를 갖기 못할 것이요.” 단순히 음악가만으로서는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기악곡의 대가들에 비해 하위에 선다는 생각을 자주 품고 있던 바그너는 음악과 문학의 결합에 있어서는 다른 이들이 그를 결코 능가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 연합은 ‘가극대본 (Libretto)의 음악화 (Vertonung)’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극문학 속에서의 ‘음악의 지배’를 또는 더 이상 음악 독자적으로가 아니라 시적 암호들, 상징들로서 이해될 수 있는 유도동기들을 언어와 유사하게 의미론화시킴으로써 음악을 ‘문학화’하는 것을 뜻한다. 바그너에 따르면, 모든 필수적인 표현요소들을 정신에 완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하모니의 함께 울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하모니를 함께 울리게”하는 것은 음악가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서, “표현되어있지 않은, 그러나 시행들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 하모니를 가진” 시인의 멜로디는 그 드러나지 않은 하모니를 가장 잘 인식할 수 있게 표현해줄 음악가의 도움을 거쳐서 그것의 완전한 표현에 도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시인의 멜로디의 다만 암시된 의도”를 음악가가 그 멜로디에 하모니를 덧붙이면서 비로소 “실현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음악’극이 “인간성향의 완전한 표현형태”라고 보았다.
또 그는 실제로 이런 식의 음악적․시적 표현수단들의 결합을 통해 독보적인 보다 고차원의 문학을 만들어냈다. 세계무대는 신화적 상상력에 덕입어 연극사에 있어서 시적으로 가장 위대한 것들에 속하는 인물들, 상황들과 정세들을 갖게 되었다.
○ 저술
바그너는 극도로 다작의 저술가로, 수백 편의 책, 시, 기사를 썼을 뿐 아니라 엄청난 양의 서신 왕래도 이루어졌다. 그의 저작은 정치, 철학, 그리고 그 자신의 오페라에 대한 상세한 분석 (종종 분석끼리 서로 상충되는 경우도 있다)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중요한 수필에는 오페라 이론에 대한 “오페라와 드라마” (“Oper und Drama”, 1851), 그리고 유대인 작곡가에 반하는 논쟁인 “음악 속의 유대주의” (“Das Judenthum in der Musik”, 1850)이 있다. 그는 또한 자서전인 ‘나의 삶’ (1880)을 썼다.
그는 그의 오페라의 공연을 위해 특별히 건축된 오페라 하우스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개발된 여러 극장 관련 관습에 대한 혁신에 관련이 있다. 이러한 혁신에는 공연 동안에 객석을 어둡게 하기, 그리고 관현악단을 관객의 시야 밖의 피트 (객석과 무대에 비해 낮게 위치한 관현악단 전용 공간)에 위치시킨 것 등이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해마다 열리는 리하르트 바그너 축제의 개최지로, 수천 명의 오페라 팬을 매 여름마다 바이로이트로 끌고 있다.
– 집필
바그너는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어 수많은 글을 썼다. 논문도 쓰고 에세이도 썼으며 시도 쓰고 오페라의 대본와 노래의 가사도 썼다. 게다가 아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도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그렇게 쓴 글들을 정리하면 수백편이 넘는다. 바그너의 글들은 분야가 폭이 넓다. 정치에 대한 글도 있으며 철학적인 글도 있다. 또한 자기 오페라를 세부적으로 분석한 글도 있다. 에세이들은 나중에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대표적인 에세이집은 오페라의 이론에 대한 ‘오페라와 드라마’ (Oper und Drama: 1851), 유태계 작곡가들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표명한 ‘음악에 있어서 유태인’ (Das Judenthum in der Musik: 1850) 등이 있다. ‘음악에 있어서 유태인’은 특별히 자코모 마이에르베르를 겨냥한 비판적인 내용이다. 바그너는 또한 자서전인 ‘나의 삶’ (Mein Leben: 1880)을 썼다. 다만 자서전의 평은 좋지않다. 바그너가 왜곡해서 쓴 부분들도 많고 틀린 정보들도 많기 때문이다.

○ 영향력
“바그너는 모든 예술을 처음으로 하나의 위대한 미적 종합으로 합한 고로 위대한 유일의 예술의 창시자다.” ― 프리드리히 니체
바그너는 세계의 예술과 문화의 발전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했다. 바그너가 끼친 영향은 오페라나 음악 분야에서 그친게 아니다. 바그너는 현대 사상과 문화에 아주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주었고 그 때문에 음악과 예술은 물론이고 철학, 역사, 정치, 심리학을 연구하는 인물들도 바그너에 대해 평하기 바빴다. 덕분에 근대사를 연구하거나 현대 예술과 사상에 관심이 많으면 바그너라는 단어를 만나게 된다. 가디언지는 바그너를 “위대한 작곡가들 중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함께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다”라고 평했다. 바그너의 영향력이 그 만큼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예술 분야에 혁신을 일으킨 음악가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사회 경제 분야에 혁신을 일으킨 칼 마르크스, 생물학 분야에 혁신을 일으킨 찰스 다윈과 더불어 19세기 유럽의 충격과 논쟁을 불러온 인물이다. 한편 그는 세계 문화사에서 누구보다 이채로운 인물로 괴물 같은 천재 (Monstrous genius)이며, 신비로운 인물 (Mysterious persona)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따라서 그를 제외하고 서양 음악을 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실제로 바그너는 서양 음악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그가 창조한 악극은 설화에서 소재를 빌린 탓에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새로운 기법으로 가득한 관현악은 음악의 표현력을 무한대로 넓혔다. 또 그는 생전에 자기 작품만을 상연하기 위한 전용극장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가진 유일한 음악가이면서 후손 (Wagner clan)들에 의해 자신의 유지가 지금도 계승되고 있는 인물이다.
바그너는 한 손에는 작곡술을, 다른 손에 극작술을 쥐고 독창적인 악극의 세계를 누빈 종합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는 시, 단편소설, 수필 등 장르를 넘나드는 문필가였으며 자신의 생각을 평론과 논문으로 써낸 사상가였고, 작곡가이면서 지휘자, 오페라 연출가였다. 그처럼 문학과 음악을 아우른 이에 베를리오즈와 슈만이 있었다. 또 여러 장르에 걸치는 음악을 다작한 외에 초인적인 피아노 연주로 당대를 풍미한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하지만 전자는 바그너에 비해 능력 범위가 넓지 않았고, 후자는 작곡가로서 대다수 곡들이 피아노곡에 편중된 한계로 바그너를 넘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평자들은 바그너를 가리켜 ‘백만금의 인물 (Man of Million)’, ‘천년의 인간 (Man of Millenium)’ 또는 ‘희대의 슈퍼스타’, ‘바이로이트의 마법사’ 등으로 불렀다. 바그너는 당대의 유럽 음악계를 평정하였으며 그 파급력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의 언동은 위세가 있었고 그의 인기는 독보적일 만큼 대단했다. 또 그가 브람스의 아성인 비엔나에 머물 때면 환영하는 시민들의 열기로 바그너의 반대편에 선 자들의 입지를 좁혔다.
당시 바그너와 비견되는 작곡가는 베르디가 유일했다. 많은 작곡가들이 바그너에 대적하거나 극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두 그의 영역 안에 들었을 뿐이다. 그 보기로 영국과 동구권 작곡가들의 오페라는 바그너의 것에 비교할 수 없으며,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비범하지만 후계자의 지위에 머물렀다. 그 점에서 바그너는 현대 오페라에 길을 튼 음악가이다. 아울러 거의 모든 유럽의 작곡가들이 그의 창작 스타일을 추종한 데서 바그너는 현대 음악의 선구자이다.
바그너는 마르틴 루터, 니체와 더불어 가장 독일적인 인물로 불린다. 모두 자기 확신에 강하고 열정과 카리스마에 넘첬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바그너는 비망록에 “나는 모든 독일인 중에서 가장 독일인이다”고 적었다. 바그너는 이처럼 유별난 개성을 지닌 면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 되며, 음악에서 이룬 성취 면에서 깊은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는 세계 문화사에 그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인물로도 서열을 다툰다. 예로부터 인물을 대상으로 글을 쓰려면 두 가지 난관에 부딪친다고 한다. 하나는 자료의 많고 적음에 따른 것으로 자료는 많을수록 좋다. 그런데 바그너는 그 문헌이 무척 방대하여 되레 갈피를 잡기 힘든 편이다. 참고로 바그너는 예수와 나폴레옹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바그너에 관한 서책과 문헌이 그를 능가하는 인물이 없다. 바그너는 1883년 사망 당시 그에 관한 서책과 논문이 만 편에 달했다고 하며, 1932년 바그너 관련 문헌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1883년 이후 그 세 배에 이르는 수가 축적되었다고 한다. 바그너의 자료는 음악, 문학, 역사, 철학, 정치 등 여러 방면에 걸쳐있다. 게다가 1차 자료도 풍부하다. 즉 그 자신이 저술한 자서전, 에세이, 오페라 대본, 서신들, 자신과 아내 코지마가 쓴 방대한 양의 일기와 비망록이 그것인데. 난해한 오페라 내용에 더해 모순된 주장과 좋지 않았던 인격으로 논란을 불러온 사실 등이 그에 관한 연구를 한층 기름지게 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그 점에서 그는 자신의 저서와 음악, 인물에 관련된 연구, 자신의 작품 공연 등으로 가히 ‘바그너 산업’이라 불러도 좋을 엄청난 자산을 낳는 인물이다. 대체로 인물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데 난관의 하나는 그에 대한 객관성 확보이다. 특히 바그너는 자신의 주장과 행적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은 데다, 같은 정도로 찬사와 비난을 받은 인물인 탓에 객관성을 지켜내기가 힘들다. 이 같은 사실은 바그너에 대해 글을 쓰려는 욕구를 돋우는 한편 역으로 그에 대해 쓰기를 주저하는 큰 요인일 것이다. 그것도 그의 전기를 쓰려면 극히 난감할 터인데, 그 방면에서는 영국의 음악학자 어네스트 뉴먼의 저서로 1947년에 완간된 ‘리하르트 바그너의 생애’ (The Life of Richard Wagner, 도합 네 권으로 총 2700쪽에 달함)가 결정판이다. 그럼에도 바그너 전기는 지금도 출간되고 있다. 사실, 사계의 방면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은 후대에 끼친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시대와 관점을 달리하여 평가하거나 해석할 여지가 많다. 이는 그들의 전기와 작품론이 후대인에 의해 거듭 새롭게 쓰이는 근거가 된다. 특히 그 대상이 바그너라면 더욱 그러할진대, 그와 관련한 서책과 논문이 줄을 잇는 연유이다.
바그너의 작품들, 특히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새로운 음악적 스타일을 개척했다. 바그너 이후, 많은 작곡가들이 바그너의 노선에 동조하고 그의 스타일에 침전되었음은 부인하지 못할 사항이다. 물론 어떤 작곡가들은 의도적으로 바그너의 스타일에 반기를 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몇몇 음악 역사학자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현대 클래식 음악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안톤 브루크너, 휴고 볼프는 바그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작곡가들이라고 할수 있다.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파르크, 에르네스트 쇼송, 쥘르 마스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한스 피츠너 등도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다. 이렇듯 수많은 작곡가들이 직접, 간접으로 바그너의 영향을 받자 구스타프 말러는 ‘이 세상에는 베토벤과 바그너만 있을 뿐이다’라고까지 말했다. 드뷔시와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의한 20세기 하모니의 혁명은 그 원류를 찾는다면 ‘트리스탄’에서 찾을수 있다. 이탈리아의 사실주의 오페라 형태인 베리스모도 바그너적인 음악형태를 재건해 보자는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쇤베르크는 “바그너는 우리에게 ‘풍부한 화성’, ‘짧은 동기’, ‘대규모의 구조를 만드는 기술과 더 나아가서는 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법’, 이 세 가지를 남기었다.”라고 평했다. 바그너는 지휘의 원칙과 실천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에세이 “지휘에 관한 것”은 지휘를 발전시킨 헥터 베를리오스의 기술은 지휘가 단순히 음악 작품을 오케스트레이션하지 않고 다시 해석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의 지휘에서 이러한 접근방법을 예시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해석적 접근법을 통해 바그너가 새로운 세대의 지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바그너의 ‘음악 드라마’, 즉 ‘악극’에 대한 이론은 다른 예술의 장르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기도 했다. 시도 동기 (Leitmotif) 같은 바그너의 작곡 기법은 거의 모든 헐리우드 영화 음악의 근간이 되었다. 예를 들면 ‘스타 워즈’ (Star Wars)에 사용된 존 윌리엄스의 음악은 바그너의 악극 스타일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한스 짐머 역시 바그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인터뷰했다. 영화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며 영화 ‘킹콩’,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음악을 작곡한 맥스 스타이너는 본인이 영화음악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바그너가 아이디어를 만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만약 바그너가 이 세기에 살았다면 아마도 최고의 영화음악 작곡가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전설적인 프로듀서인 필 스펙터 (Phil Spector)의 ‘소리의 벽’ (wall of sound) 역시 바그너의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락 음악의 장르에 속한 헤비 메탈 음악은 바그너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볼수 있다. 독일의 메탈 밴드 람슈타인의 음악도 바그너의 음악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그런 이유에서 요아힘 비트의 가장 유명한 앨범의 이름은 ‘바이로이트’이다. 영화 ‘니벨룽의 반지’는 역사적인 사항을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바그너의 오페라를 더 많이 참고한 것이다. 이 영화는 다른 여러 나라에서 각각 다른 제목으로 상영되어 인기를 끌었는데 미국에서는 ‘어둠의 왕국: 용의 왕’ (Dark Kingdom: The Dragon King)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미국의 헤비메탈 밴드 매노워는 바그너를 “헤비메탈의 아버지”라고 평했다.
바그너는 문학과 철학에도 두드러진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70년대 초반에 바그너의 인너 서클에 속하여 있었다. 니체는 그의 첫 출판물인 ‘음악의 정신’ 중에서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The Birth of Tragedy)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유럽 문화의 디오니서스적인 부활’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니체였는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이후 그는 바그너와 결별했다. 니체는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들이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신앙에 영합하는 것이며 나아가 선동적인 새로운 독일 제국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영국 출신의 미국 시인인 와이스탄 휴 오든은 바그너를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라고 불렀다. 토마스 만이나 마르셀 프루스트도 바그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의 소설에서 바그너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제임스 조이스는 바그너를 싫어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바그너의 작품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의 ‘황무지’ (The Waste Land)는 바그너가 주제로 등장할 정도이다. ‘황무지’에는 ‘트리스탄’의 구절들이 나오며 ‘링 사이클’과 ‘파르지팔’과 관련된 내용도 나온다. 샤를르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스테판 말라메 (Stephane Mallarme), 폴 베를랭 (Paul Verlaine)과 같은 사람들은 아예 바그너를 숭배했다. 바그너의 여러 아이디어, 예를 들면 ‘트리스탄’에서 사랑과 죽음의 관계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나중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연구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바그너에 대한 반응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독일의 음악계는 한때 두 부류로 분류된 일이 있었다. 바그너 지지자들과 브람스 지지자들이었다. 브람스 지지층은 유명한 평론가인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Eduard Hanslick)의 후원을 받았으며 전통적인 형태의 음악을 옹호하였다. 이들은 바그너의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전선을 이끌었다. 심지어 프랑스의 드뷔시도 바그너를 ‘늙어빠진 독살자’ (old poisoner)라면서 비난했다. 바그너의 새로운 작곡법에 대한 반감을 가진 작곡가들이 많았다. 로시니와 같은 사람들도 바그너에게 비판적이었다. 차이콥스키도 그중의 하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만일 그대로 놓아 두었다가는 바그너의 영향이 너무 커져서 전통적인 음악계에 커다란 위협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가 염려했던대로 바그너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져서 현대 클래식음악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정 음악인들에게는 열렬 팬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바그너의 팬덤은 열렬이라는 말을 떠나서 실로 광신적이라고 할만큼 현재에도 대단한 팬들이 많이 있다. 바그너가 끼친 영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이다.

○ 바그너 그 이후
1883년 사망 당시 바그너는 유럽 전체에서 유명했고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작곡가였다. 바그너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간에 누구나 바그너에 대해서 뭔가 한마디씩 할 말이 있었고, 또 그에 대한 반론도 펼쳤다. 바그너는 유럽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뭔가 의미있었고 화젯거리였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바그너는 독일적인 것의 결정체요 민족 문화의 구심이었다. 이들보다 더 극단적인 이들은 바그너를 자기네 편이라고 믿었고 바그너야말로 유대인, 미국식 물질주의, 프랑스의 퇴폐주의, 가톨릭의 독재에 대항하는 게르만족의 방파제라고 주장했다. 다만, 바그너가 극우파들만의 소유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틀렸다. 바그너의 음악은 좌익에서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들은 바그너가 한때 혁명에 가담했고 그의 음악에는 혁명정신이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진보적인 프랑스의 바그너 애호가들의 다수가 이런 관점에서 바그너를 보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미국에서도 바그너의 인기가 독일 이민사회에서 시작되어 급속도로 넓고 깊게 확산된다. 미국인들은 당시 유럽인들에 비해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바그너의 음악이 주는 새로움 때문에 사회 여러 계층에서 수많은 팬을 만든다. 특히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열렬한 바그네리안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기가 상승했는데 교육을 받은 중산층 좌파들에게 어필했다.
당시 보수적인 비평가들이 바그너에게 적대적이었다면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그의 음악을 찬양했다. 많은 작곡가들의 바그너의 음악을 ‘미래의 음악’이라고 생각했고 ‘새로운 사운드’를 이어가려고 조바심냈다. 이런 숭배 분위기 속에서 바그너의 추종자들은 리처드 바그너가 제시한 철학적인 이상, 다른 미적인 생각들, 그리고 그의 음악을 애착하고 바그너의 음악을 따르는것이 마치 성스러운 전투에라도 나간다 생각했고 이런 현상을 바그너주의 (Wagnerimus)라고 한다. 19세기 말 바그너 사후부터 이 현상은 절정에 이른다.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바그너 음악의 일종의 반발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옛시대의 무거운 스타일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의상이나 실내장식도 가볍게 바뀐다. 이전 시대부터 바그너에 반대한 사람 중에 하나인 니체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며 ‘빛과 공기’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활기 넘치는 ‘카르멘’이야말로 미래의 음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그너에 인기는 여전히 대단했다. 무겁고 길고 강렬한 바그너의 작품들을 보통 사람들도 참을성 있게 즐기며 자신들은 바그네리안 (Wagnerian)이라고 했다. 작곡가들은 바그너를 연구했고 교훈을 얻어 표현했다. 대표적인 예로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같은 작곡가들이 등장했고 스트라빈스키는 평생동안 ‘바그너와 다른 것’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세대도 나타난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 알반 베르크는 무조음악과 12음계를 만들었다. 음악학자들은 이것이 모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파르지팔’에 그 기원이 있다고 설명한다.
1906년에는 코지마가 아들 지그프리트에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운영을 맡기고 은퇴한다. 지그프리트는 1930년 어머니 코지마가 사망 한 몇달 후에 사망했는데 그때까지 성공적으로.페스티벌을 이끌었다. 1914년부터 1924년까지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페스티벌을 열지 못한다. 1차 대전이 끝난 뒤 바이마르 시대의 불안한 상황에서 바이로이트는 다시 열릴 수 있는 희망이 사라졌다. 그때 지그프리트의 아내 비니프레트는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고 친해진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워지고 히틀러는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받았다. 히틀러가 가장 좋아한 작곡가가 바그너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청년시절부터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숭모하는 열광적인 추종자였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독일 국가를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는 영웅적인 신화와 결합코자 했다. 그리고 비니프레트는 남편이 죽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운영을 맡았다. 비니프레트는 히틀러의 지원을 원했고 히틀러는 1933년 수상이 된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비니프레트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히틀러의 나치당의 관계는 복잡했다. 비니프레트와 히틀러의 개인적인 친분 덕분에 바이로이트는 당시 다른 극장을 직접 통제하던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이로이트에는 나치 깃발이 걸리지 않았고 공연 전에 나치당가를 부르지도 않았다. 유대인이나 나치가 정한 불온 인물들도 얼마동안은 연주를 하도록 내버려뒀다. 그러나 바이로이트가 제3제국에 영합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망명길에 오르면서 바이로이트를 ‘히틀러의 궁정 극장’이라고 부르면 비판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세계관에 자신이 숭배하던 바그너를 이용했고 또 문화전쟁에서도 이용한다. 히틀러는 “누구든 국가사회주의 (나치즘)을 이해하려면 먼저 바그너를 이해해야 한다!”, “독일은 바그너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같은 말을 하며 바그너를 찬양했다.
이런 이유로 바그너는 독일 국외에서 나치즘과 관련된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후 나치독일을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토마스 만, 조지 버나드 쇼, 아르놀트 쇤베르크, 쿠어트 바일, 테오도어 아도르노 같은 지식인들이 바그너에 대한 찬반토론을 미국에 전했으며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퍼러, 라우리츠 멜키오르, 롯테 레만같은 음악가들은 바그너 음악을 연주하며 다시 바그너 음악을 부흥시키며 새롭게 세상에 전한다. 현재에도 바그너는 지식인들과 사상가들에게 좋은 떡밥이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대표적인 책으로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쓰고 슬라보예 지젝이 의견을 더한 바그너는 위험한가이다.
전쟁 후 비니프레트는 연합군의 조사를 받는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게 당연했지만 유대인 예술가와 동성애자 예술가들이 처형되지 않도록 도와준 증거가 나오며 연합군은 비니프레트를 그냥 풀어주며 은퇴하여 조용히 살 것을 권한다. 그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운영권은 두 아들 빌란트 바그너와 볼프강 바그너에게 넘어갔고 1951년부터 새로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시작된다. 전후 바이로이트에서 빌란트 바그너가 한 일은 팬들과 극장 예술가들에게 전설이 된다. 빌란트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복권시키려고 제3제국이 바그너에게 씌운 사상과 냄새를 없애기위해 작품들을 완전히 분해하고 하나씩 검토하여 재구성한다. 미니멀리즘의 무대가 나타났고 조명과 분위기를 통하여 민족주의 색채를 걸러냈고 범세계적이고 우주적인 드라마를 만든다. 1966년에 빌란트가 폐암을 사망하자 동생인 볼프강 바그너가 운영을 맡았다. 볼프강은 외부 연출가를 불러 바이로이트를 새롭게 만들고 전후 ‘바그너 페스티벌’을 부활시켜 신바이로이트 시대를 개척한 인물이란 평을 받는다.
2008년 볼프강이 은퇴를 하고 후계자로 바그너의 직계 증손녀 카타리나 바그너를 지목한다. 이것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가문 중 포스트 볼프강 세대로서 바이로이트 총감독직 계승권을 가진 후손은 모두 열두 명. 그중에서도 볼프강이 쉰이 넘어 낳은 카타리나는 서열상 제일 끝에 서 있었다. 그런 카타리나가 분쟁의 씨앗이 된 이유는 바이로이트의 공식 계승자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사망한 형 빌란트의 자식들은 물론 전처 엘렌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딸마저도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시킨 볼프강은 2002년, 두 번째 아내 구트룬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에게 바이로이트를 물려주겠노라고 공식 천명했다. 후계자로 거론되던 다른 후손들의 반발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엑상 프로방스 페스티벌’ 예술감독까지 역임했던 볼프강의 장녀 에바와 뮌헨에서 드라마트루기로 활동중인 빌란트의 딸 니케의 반격은 꽤 위력적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다진 언니와 사촌에 비해 어린 카타리나의 배경은 반면 상대적으로 왜소했다. 1978년 태어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극학을 전공한 카타리나는 아버지 볼프강과 하리 쿠퍼 옆에서 조연출로 활동하며 도제교육을 받았다. 2002년 후계자로 지명될 당시에는 이제 막 자신의 이름을 내건 데뷔 작을 선보이기 직전의, 스물네 살짜리 소녀에 불과했다. 12명의 차세대 바그너 중에서도 가장 곱게 자란,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은 멀리서 보고 듣기에 그저 ‘부모 잘 만난 덕에 만사가 잘 풀린 케이스’로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바이로이트 축제 재단이사회는 2008년 바그너의 손자인 볼프강 바그너 전 총감독의 배다른 두 딸인 카타리나와 에바 바그너파스크비어를 공동 총감독으로 지명했다. 이로써 총감독 자리를 둘러싸고 7년을 끌어 온 바그너 가문의 내분이 일단락됐다. 형식은 공동이지만 사실상 볼프강 전 총감독이 원했던 젊은 카타리나가 자리를 계승하는 것으로 독일 언론은 보고 있다. 카타리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자신이 연출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시내 공공장소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생중계함으로써 입장권을 얻기 위해 보통 8∼10년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바이로이트 축제의 배타성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공동 총감독이었던 에바가 물러나고 카타리나 단독으로 총감독이 된다.
바그너는 여전히 그의 논란들 덕분에 계속해서 토론이 끊이지 않고 있는 클래식 음악가이며 그에 대한 찬반 토론은 계속해서 펼쳐질 것이다. 그의 음악은 여전히 많은 인기와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그의 음악 축제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더불어 유럽 양대 음악 페스티벌로 꼽히고 있다. 반유대주의나 여성 편력 등 부정적인 면모도 있다. 영국의 지휘자 토머스 비첨은 바그너 악극 공연을 비난한 신문사 사장에게 “그럼 당신 신문사에 걸려있는 홀바인 (독일의 화가)의 그림을 태워버리시오. 그럼 나도 바그너 악극을 연주 안하리다.”라고 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과연 음악은 음악으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르게 봐야 하는지는 지금도 논란중인 문제이다. 어찌됐든 그의 음악이 전 세계 문화에 엄청난 영향력과 파급력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