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년 5월 26일, 기요틴 (단두대)을 만든 프랑스의 의사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Joseph-Ignace Guillotin, 1738 ~ 1814) 사망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프: Joseph-Ignace Guillotin, 1738년 5월 28일 ~ 1814년 5월 26일)은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의 사용을 주창한 프랑스의 의사이다.

–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Joseph-Ignace Guillotin)
.출생: 1738년 5월 28일, 프랑스 생트
.사망: 1814년 5월 26일, 프랑스 파리
.배우자: Louise Saugrain (1787 ~ 1814년)
.학력: 파리 대학교 (1768 ~ 1770년), Sciences Po Paris, Campus de Reims
그는 한때 예수회 회원이었고 사형제 폐지론자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에 국민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사형집행인과 사형수 모두 고통이 덜하도록 모든 사형수를 기계로 처형하는 인도주의 법률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 뒤 그 기계는 단두대 (斷頭臺, Guillotine)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사형 폐지가 안 될 것을 전제로 “모두에게 공평하고 고통이 덜한 처형 방법이 필요하다”며 이 기계의 사용을 제안했다.
기요탱은 자신도 기요틴에 목이 잘려 죽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기요탱은 실제로는 76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프랑스혁명과 단두대 (기요틴)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 혁명으로 유명하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인 러시아 혁명가 달리 인명 피해가 적었고 자유, 평등, 우애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잘 구현하였다고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이면 (裏面)을 보면 이성적이고 인도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혁명의 주도 세력은 목적을 위해 허위 선전과 중상모략을 서슴지 않는 자들로 자신들의 원한과 증오를 마음껏 표출했다. 그 결과가 무수한 인명이 그 유명한 단두대에서 사라져간 것이었다.
단두대 (斷頭臺, 프: guillotine, 독: Fallbeil)은 프랑스 혁명 당시 사용한 사형 기구이다. 이 기구는 1792년 정식 사형 도구가 되었다.

– 기요틴의 개발 및 도입
1791년에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국민의회에서 계급에 상관없이 참수형에 처할 죄수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왕의 주치의이자 외과학회의 사무국장이던 안토닌 루이 박사와 파리 의료기기부의 해부학 교수인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를 필두로 이 건에 관한 위원회가 형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이탈리아의 “만나이아” (혹은 만나자)와 스코틀랜드의 “메이든”, 그리고 “헬리팩스 기벳” 등의 참수기구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전처럼 무딘 도끼나 교수형으로 사형수의 형을 집행하는 것은 인도적이지 않고, 형집행자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에, 기구로 형을 집행하자는 주제의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기요탱은 이 기구로 사형수들이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실제로 이 기구의 설계에 기요탱 박사의 공헌은 미미하고, 안토인 루이 박사가 기요탱 박사가 제안한 생각을 발전시켜, 설계한 뒤 이 기구 (단두대)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 사형기구가 루이종, 또는 루이세트로 불렸으나, 언론에서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로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의 이름을 따서 이름붙여졌다. 그 결과 기요탱 박사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단두대의 구조는 길게 세워진 2개의 기둥 사이로 비스듬하고 묵직한 무쇠칼날이 꼭대기에 밧줄로 매달려져 있다. 사형수는 틀의 아랫부분에 목이 칼날 바로 밑부분에 위치하도록 고정되며,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끊으면 칼이 떨어져 목을 자르는 것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도 여기서 죽었으며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당통 역시 이 기구로 인하여 죽었고, 과학자 라부아지에도 여기에서 죽었다. 단두대로 많은 사람을 죽인 로베스피에르는 역설적으로 이 기구에 의해 죽었다. 단두대를 고안한 기요탱 박사도 단두대에서 죽었다고 전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1814년 5월 26일에 자연사하였다.
프랑스에서 단두대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때는 1977년 9월 10일이었으며,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프랑스 사회당이 집권여당이 된 1981년에는 사형제를 폐지했다.
1930년에 아돌프 히틀러는 기요틴을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데 사용하였으며 그 수만 2만명을 넘는다. (이는 프랑스에서의 기요틴으로 인한 죽은 자들의 수 보다 많은 수치이다.) 베트남 전쟁 시절 남베트남 간수들에 의해 공산 포로들이 단두대로 처형당했다. 그 밖에도 벨기에나 스웨덴, 룩셈부르크도 단두대를 사용한 바 있다.

– 단두대 논란
단두대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부터, 기요탱 박사의 주장처럼 이 사형도구가 죄수의 고통을 최소화시켜주는 것이 맞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과거의 사형 방법과 비교하면 고통이 덜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적었으나, ‘인도주의적’ 차원으로 논의할 경우 사형수의 고통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단두대의 신속함이 죄수의 고통을 더 지속시킨다는 주장도 있었다. 기요틴 처형방법은 두개골에 충격을 별로 주지 않기 때문에, 교수형이나 다른 과격한 사형 방법과는 달리 죄수의 의식이 오랫동안 유지된다는 것이다.
단두대 처형에 대해 대중들은 절단된 머리가 눈을 깜빡였다든지, 말을 했다든지, 눈동자를 움직였다든지, 입을 움직였다고 이야기해 왔다. 여러 국가의 해부학자들과 과학자들은 1956년 전까지 잘린 사람 머리에 대한 명료한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불가피하게 결과물들은 이야깃거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죄수의 이름을 부르니 대답했다든지, 바늘로 찌르자 고통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는 등의 진술은 의식이 수반된 행위가 아닌, 근육이 무작위적으로 움직였거나 자동 반사 행동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대뇌 혈액이 대량으로 유출될 경우 수 초 내로 인간의 두뇌는 의식을 잃을 수 있다.
– 단두대에 처형당한 유명인들
프랑스혁명 지휘부의 명에 의해 발명된 단두대는 프랑스혁명 지휘부 주요인물들이 처형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었다.
단두대에서 사라진 유명인들을 보면 뒤바리 부인, 루이 16세, 마르셀 프티오, 마리 앙투아네트,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빌리 파울 헤롤트, 샤를로트 코르데, 생 쥐스트, 앙리 데지레 랑드뤼, 앙투안 라부아지에,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루이 16세의 여동생), 올랭프 드 구즈, 자크 피에르 브리소, 자크 르네 에베르, 조르주 당통, 카미유 데물랭, 푸키에 텡빌,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 프랑수아 조세프 웨스텔만, 프리츠 하르만, 피터 쿠르텐, 하얀 장미 단원들 등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