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10월 15일,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 (Napoléon Bonaparte, 1769 ~ 1821)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수감 생활 시작
나폴레옹 1세 (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코르시카 소귀족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 당시 이탈리아와 이집트 등지에서 전례 없는 승리들을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정치적 지지 세력을 규합한 그는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 나아가 종신통령에 취임하였고 1804년 12월 2일에는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의 통치는 대내적인 개혁과 대외적인 정복으로 이어져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1812년에 실시한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 이후 1814년에 몰락하였다.
1815년 잠깐 다시 정권을 장악하지만 워털루 전투 패배 후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서 1821년에 사망하였다.
– 나폴레옹 1세 (Napoléon I)
.출생: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공화국 아작시오
.사망: 1821년 5월 5일 (51세),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롱우드
.가문: 보나파르트 가
.부모: 카를로 보나파르트 / 레티차 보나파르트
.배우자: 조제핀 드 보아르네, 마리루이즈 도트리슈
.자녀: 나폴레옹 2세
.종교: 로마 가톨릭
*지위: 프랑스인의 황제
.재위: 1804년 5월 18일-1814년 4월 6일
.대관식: 1804년 12월 2일
.전임: 본인 (제1공화국 제1통령)
.후임: 루이 18세 (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 혁명기 혁명 정부 (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 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로제타석은 세 면으로 나뉘었고, 윗면은 고대 그리스어, 둘째 면은 이집트의 평민어였던 데모닉 그리고 마지막은 이집트의 고대어 하이에로글리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돌은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의 실패 후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에 의해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은 이 비문을 해석하길 적극 권장했으나 살아서 이 돌의 해석을 보지 못하고, 후에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완벽히 해석된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간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했다.
7월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하고 프랑스 지중해 함대 주력이 전멸한다.
이 승리로 영국 해군이 해당지역의 재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이때 프랑스 해군 전열함들이 전멸 당하고 두척만 생존한다. 이로 말미암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아프리카에 고립되고 만다. 나폴레옹은 본국과 연락이 끊기자,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혼자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하고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당시 오백인회와 원로원은 이 문제로 말미암아 거의 매일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정국을 지켜보고서 동생인 오백인회 의장 루시앵과 시에예스, 탈레랑의 도움으로 1799년 11월 9일 의사당에서 자신의 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백인회는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중간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미 그가 장악한 군대와 30여 명의 테르미도르파 의원들의 지지로 그는 오백인회를 해산시켜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통령 정부가 3명의 통령으로 이루어졌으나, 제2통령과 제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모아졌다. 제2통령은 법무, 제3통령은 재정을 책임지는 반면, 제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등을 책임졌으므로 그 권한은 다른 통령에 비하여 더욱 막강하였다.
5년 뒤에 프랑스 원로원이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을 주도하였다.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이 전쟁에 휘말렸으며, 많은 승리 뒤에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적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의 각국들을 분할하고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한편 자신의 측근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케 하여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시켜나갔다.
하지만 스페인의 무장시민들의 끈질긴 쿠데타와 1812년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나폴레옹의 삶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의 대육군은 스페인과 러시아에서의 실패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손실을 보았으며 이후 재건된 프랑스 군대는 규모는 여전히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육군이었으나 내실에서는 결코 전성기 때 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의해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그 동맹이 파리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을 정권에서 내려오게 하고 엘바섬으로 유배 보냈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았을 때 그는 엘바섬에서 도망쳐 나오고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1815년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완전히 상실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영국 왕실에 의해 구속된 채로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보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위암으로 결론이 났으나, 그의 사인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일부 학계 측에서는 비소 (만신재) 중독설도 제기되었다.
나폴레옹의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 (Saint Helena) 섬
세인트헬레나 (Saint Helena)는 앙골라 서쪽 해안으로부터 2,800km 떨어진 남대서양 가운데에 있다. 영국의 해외 영토인 세인트헬레나 어센션 트리스탄다쿠냐 속하며, 수도는 제임스타운이다. 나폴레옹이 이 섬으로 유배온 것으로 유명하다.
세인트헬레나 섬은 1502년 5월 21일, 포르투갈의 항해가 조안 다 노바가 발견해 5월 21일은 ‘세인트헬레나 데이’이다.

– 세인트헬레나 (Saint Helena)
.표어: Loyal and Unshakeable (나의 세인트헬레나 섬)
.수도: 제임스타운
.정치체제: 영국 자치령
.역사: 영국 자치령 – 1659년부터
.공용어: 영어
.인구: 2016년 조사 4,534명
.통화: 파운드
○ 역사
– 발견
세인트헬레나 섬은 1502년 5월 21일, 포르투갈의 항해가 조안 다 노바가 발견하였다. 섬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였던 기독교의 성녀 세인트 헬레나의 이름에서 비롯한 것이다. 처음 무인도일 때, 포르투갈인들은 항해에 필요한 풍부한 재목과 신선한 물을 구할 수 있었던 점에서 착안하여 섬에 생활 물품과 과일 및 야채를 반입하였다. 또한 예배당과 두 채의 가옥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들 포르투갈인들이 섬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세인트헬레나 섬은 유럽과 아메리카를 오가는 선박의 보급기지로 이용되었다.
기록 상의 첫 정착자는 포르투갈인 페르난도 로페즈이다. 1584년 5월 27일에는 덴쇼 소년사절단이 일본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도중 잠시 쉬어간 적이 있다. 세인트 헬레나에 내항한 최초의 영국인은 토마스 카벤디쉬이다.
네덜란드는 1633년에 이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네덜란드가 섬을 점거하거나 요새를 지은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았다. 1651년 네덜란드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 주변에 식민지를 만들기 시작한 무렵까지 섬은 버려진 상태였다.

– 영국 동인도회사령
1657년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이 섬의 행정권을 인정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이 섬의 요새화와 식민지화를 결정하고 1659년에 초대 총독 존 다톤이 부임하였다. 이로써 세인트 헬레나는 버뮤다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식민지가 되었다. 1660년 왕정 복고 이후 동인도회사는 국왕의 인정서를 얻어 섬의 요새화와 식민지화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동인도회사에 의해 1658년 건설된 요새가 현재의 수도인 제임스 타운이 되는데, 이 이름은 당시의 요크 공, 후일 제임스 2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주민의 절반은 아프리카 흑인노예였다.
1676년부터 에드먼드 핼리가 이 곳에 천문대를 설치하고 천체 관측의 거점으로 삼았다. 1810년 이후에는 동인도 회사의 광동 무역 기항지로 쓰이게 된다.
– 나폴레옹과 세인트 헬레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엘바 섬을 탈출한 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자, 빈 회의는 그의 신변 처리를 영국에 일임하였다. 영국은 나폴레옹의 망명 수용을 거부하고 보호를 명목으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 가두기로 하였다. 나폴레옹은 1815년 10월 세인트 헬레나에 도착, 1821년 5월에 사망할 때까지 섬 중앙의 롱우드 하우스에서 살았다. 영국은 허드슨 로 총독에게 나폴레옹의 감시를 지시했다. 이를 “유배”라고 표현하나, 이는 재판이나 조약에 근거하지 않은 불법 구금이었으며, 허드슨 로는 나폴레옹에게 온갖 가혹행위를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나폴레옹이 병으로 몸져눕자 나폴레옹의 주치의를 영국 본토에 강제로 내보냈다.
나폴레옹이 유폐된 시기에 이 섬은 동인도 회사령으나, 영국 정부의 개입이 커진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을 경계하여 섬에 부대가 주둔하였고, 해군 함선이 섬의 주변을 경계하였다. 또한 근처의 섬이었던 어센션 섬과 트리스탄다쿠냐 제도에도 영국군이 파견되었다.
1817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섬에는 821명의 백인 주민들이 있었고, 820명의 군인과 618명의 중국인 노동자, 500명의 흑인 자유민, 1540명의 노예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폴레옹의 사후 수 천명의 체류자들은 섬을 떠났고, 동인도회사가 섬의 통치를 계속하였다. 나폴레옹이 유배 중에, 섬에서 나는 커피를 호평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 파리에서는 세인트 헬레나산 커피의 명성이 높아졌다.
세인트 헬레나 섬이 속령상 특이한 부분이 있다면 다른 모든 곳은 전부 영국령이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사망했던 그 자리만 프랑스령이다.
– 왕령 식민지
1833년에 공포된 ‘인도법’에 따라 세인트 헬레나는 1834년 4월 22일 왕령 직할섬이 되었다. 1870년대 중반까지, 대서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항해의 요충지로 번성하였으나 수에즈 운하 (1869년)가 개통하면서 교통량이 격감하게 된다. 제2차 보어 전쟁 시기인 1899년과 1902년 사이에는 수 천 명의 보어인 포로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