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년 1월 17일,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 가 그란콜롬비아 (Gran Colombia, 1819 ~ 1831; 콜롬비아·에콰도르·파나마·베네수엘라) 선포
1819년 1월 17일에 일명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 /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라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팔라시오스 이 블란코 (스: 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Palacios y Blanco, 1783년 7월 24일 ~ 1830년 12월 17일)는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함께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그란콜롬비아 (스: Gran Colombia)로 선포한다.
‘그란콜롬비아’ 또는 ‘대콜롬비아’ (스: Gran Colombia)는 1819년부터 1831년 사이의 콜롬비아 공화국을 가리킨다. 영토는 오늘날의 콜롬비아를 비롯한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 전체 및 코스타리카, 페루, 브라질, 가이아나의 영토도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 해방 및 독립의 선구자인 시몬 볼리바르가 스페인의 지배에 대해 개별적으로 저항하던 세력을 통합하여 미국의 예를 본받아 연방제로 운영되는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식민지 모두를 아우르는 그란콜롬비아 공화국 구상에 따라 설립되었다. 그러나 독립 쟁취 후 연방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미국도 아메리카 대륙에 통합된 강력한 국가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아, 이를 조정하려 했던 시몬 볼리바르 등이 사망한 후에는 해체되었다. 오늘날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의 국기는 그란콜롬비아 국기의 영향을 받았다.
– 이후 분리와 독립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가 탈퇴하냐는 투표가 열렸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에 찬성했으나, 시몬 볼리바르와 도밍고 카이세도, 그리고 호아킨 모스케라와 같은 대통령직에 있던 이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그란콜롬비아가 오래도록 존속하기를 원했으므로, 정작 이러한 행위를 안 좋게 보았다.
1830년 시몬 볼리바르가 사망하자, 독립운동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금지시키고,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처벌했다.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져만 갔다. 급기야는 정부를 위협하는 일을 두고 난리를 벌였다. 결국 1831년, 도밍고 카이세도는 에콰도르와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허가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 1783 ~1830)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 /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라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팔라시오스 이 블란코 (스: 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Palacios y Blanco, 1783년 7월 24일 ~ 1830년 12월 17일)는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리베르타도레스, Libertadores)로 불린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그란콜롬비아로 독립시켰다.
–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
.출생: 1783년 7월 24일, 스페인령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사망: 1830년 12월 17일 (47세), 그란콜롬비아 산타마르타
.국적: 스페인령 베네수엘라 → 그란콜롬비아
.부모: 부) 후안 비센테 데 볼리바르 이 폰테, 모) 마리아 데 라 콘셉시온 데 팔라시오스 이 블랑코
.배우자: 마리아 테레사 로드리게스 델 토로 이 알라이사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그란콜롬비아의 제1대 대통령
.임기: 1819년 12월 17일 ~ 1825년 5월 4일
.전임: 초대 / 후임: 도밍고 카이세도 (제2대)
○ 생애 및 활동
– 성장기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에 스페인령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에서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 (Juan Vicente de Bolívar y Ponte)와 마리아 콘셉시온 (Maria de la Concepción de Palacios y Blanco) 사이에서 2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바스크 태생의 에스파냐 출신 가문으로 그의 5대조 할아버지 돈 시몬은 베네수엘라 총독의 비서로 근무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시몬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로마 가톨릭 사제를 오게 해서 유아세례를 받도록 했다.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가, 남편이 별세한 뒤 건강이 더 안좋아져서 아이들을 돌보지 못했다. 그래서 시몬은 흑인 여종인 이폴리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는데, 이러한 성장환경은 시몬이 노예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갖게 하였다. 1792년 어머니가 별세한 뒤, 고아가 된 이들 남매들은 넉넉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당시 시몬은 외할아버지댁에서 살다가 외삼촌 카를로스 팔라시오스의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환경과 엄격한 성격의 외삼촌과의 갈등은 시몬의 정서를 불안하게 하여 반항아가 되게 하였다.
– 교육
결국 열두살때 외삼촌 집에서 나와버린 후, 결혼한 큰 누나 마리아 안토니아와 같이 살면서 시몬 볼리바르가 살던 시대에는 진보적 가치였던 정치적 자유주의의 신봉자인 시몬 로드리게스 (Simón Rodríguez, 1769 ~ 1854년)의 지도를 받았다. 당시 로드리게스는 장 자크 루소와 몽테스키외의 사상을 심어주면서 시몬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당시 남아메리카에서는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들인 크리오요 (Criollo)들을 비롯한 여러 인종들이 에스파냐의 식민통치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크리오요들은 농장을 경영할 정도로 뛰어난 경제력과 높은 교육수준을 갖고 있는데도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젊은 크리오요들은 자유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자신들을 차별하는 에스파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열정적인 투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로드리게스도 그중 하나였기 때문에, 시몬도 자연스럽게 많은 학식과 자유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가 투쟁에 가담했다가 적발되어 유럽으로 망명하면서, 누나 내외의 소개로 인문학자이자 교육가인 안드레스 베요 (스: Andrés Bello, 1781 ~ 1865년)의 지도를 받게 된다. 교육, 문학, 법학에 해박한 지식이 있던 베요는 시몬에게 에스파냐어와 웅변술을 가르쳤으며, 시몬이 14세가 되자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하였다. 후에 그는 칠레에 국립대학교를 설립하여 남아메리카 교육사업 발전에 공헌하였다.
– 유럽생활
1년 뒤인 1798년 준위가 된 시몬은 이듬해인 1799년부터 1802년까지 멕시코와 유럽을 여행하였다. 멕시코여행은 같은 크리오요들과의 만남을 통해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하였으며, 유럽 (에스파냐와 프랑스)여행은 남아메리카에서만 살던 청년 시몬에게 교양과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에스파냐의 지식인 우스타리스 후작과의 만남은 그 자신이 “우스타리스는 나의 지식의 후견인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시몬을 풍부한 학식을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시켰다. 마드리드에서 살던 외삼촌 페드로의 딸 마리아 테레사 (María Teresa Rodríguez del Toro y Alaysa)와 1802년 결혼하여 잠시 고향에서 살았으나 1803년 아내가 황열병으로 죽은 후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유럽에서 사는 동안 시몬은 1805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을 보면서 절대권력에 대한 멸시의 감정을 갖게 되었으며, 프랑스에서 망명생활하던 로드리게스의 영향으로 1807년 고향으로 돌아가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기전 시몬은 미국에 들르는데, 미국에서의 짧은 생활은 그에게 남아메리카가 독립할 경우 미국처럼 합중국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게하였다.
– 독립운동 지도
고향에 돌아온 시몬은 1809년 안드레스 베요, 런던 빈민가에서 빈한한 삶을 살던 독립운동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1750 ~ 1816년)가 합류한 독립운동을 이끌어 1811년 베네수엘라를 베네수엘라 공화국이라는 국체를 가진 국가로 해방시킨다. 하지만, 독립운동은 독립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왕당파의 카라카스 점령으로 실패하였고, 시몬은 검거를 피해 네덜란드령 퀴라소 섬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망명에 필요한 서류와 여권은 시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에스파냐 사람 이투르베가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손길이 미치자 콜롬비아의 항구도시 카르타헤나로 피신하는데, 이때 카르타헤나 선언으로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베네수엘라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독립전쟁을 지도하였다. 당시 시몬 볼리바르의 군대에는 에스파냐의 학정에 반감을 갖고 있던 청년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쟁은 연전연승하였고, 결국 1814년 8월 4일 카라카스에 입성하였다. 당시 베네수엘라 공화국에서 시몬에게 해방자라는 이름을 줄 정도로 그는 큰 영광과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에스파냐군은 카라카스를 다시 침공하는데 시몬의 부대는 전쟁에서 계속 지게 된다. 당시 복수심에 불탄 시몬은 포로들을 모두 총살하였다고 한다.
독립의회에서는 사병들이 경험이 부족한 신병들이었고 무기도 열악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나, 결국 전쟁에 패하여 아이티 공화국으로 망명하여야했다. 당시 아이티 대통령 알렉산드르 페숑 (프: Alexandre Sabès Pétion, 1770 ~ 1848년)은 남아메리카 독립시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조건으로 4개 대대 약 1200명의 군대를 지원했으나,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 부대로는 잘 훈련된 사병과 최신형 대포를 가진 에스파냐군을 이길수는 없는 일이었다. 1816년, 1817년 전쟁에서도 진 시몬은 대평원지대의 군벌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 (Jose Antonio Paez)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 전술로 에스파냐군과 전쟁을 벌여 1818년 2월 12일 승리하였다. 하지만 에스파냐군의 재공격으로 그해 3월 26일 시몬은 베네수엘라에서의 전쟁을 당분간 포기해야했다.
1819년 시몬은 2,500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5일간의 피스바 산 산행을 거쳐 콜롬비아로 건너간다. 콜롬비아에 도착한 시몬의 부대는 5,000여명의 영국군과 아일랜드군의 병력지원과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1819년 8월 7일 콜롬비아를 해방시켰으며, 그해 12월 17일 미국의 연방정부를 본뜬 그란콜롬비아를 선언하였다. 베네수엘라를 당시 공략한 시몬은 에스파냐군 총사령관과의 휴전을 협정한 뒤, 군인들을 훈련시켜 자신의 부대를 정예화 했다. 결국 시몬은 파에스와 함께 1821년 11월 16일 카라보보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그해 11월 21일 카라카스에 재입성하였으며, 아르헨티나의 독립운동지도자 호세 데 산 마르틴 (1777 ~ 1850년)의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해방에 자극받아 에콰도르를 해방시켰다.
산 마르틴이 페루와 아르헨티나의 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유럽에 망명하자 부하 수크레를 보내 1824년 12월 9일 페루 내 왕당파들을 제거하였고, 페루 왕당파들과의 전쟁을 마지막으로 남아메리카는 에스파냐로부터 해방되었다.
– 남아메리카 해방후의 삶
하지만 전쟁에 지친 시몬은 1825년 2월 10일 종신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그란콜롬비아 의회에 반납했으며 거액의 연금지불제안도 거부하였다. 하지만 권력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권력 투쟁과 그의 흑인 노예 해방 의지에 반감을 가진 지주들의 반발이 원인이 된 암살미수사건 (시몬은 자신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이 실패하자, 주모자 국외추방 및 관련자 석방이라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에 휘말렸다. 또한 그가 선언한 그란콜롬비아도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의 독립으로 와해되자, 시몬 볼리바르는 1830년 그란콜롬비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의미로 콜롬비아 보고타를 떠나 그에게 호의가 있는 호아킨 미에르가 제공한 별장에서 살았다. 지병인 폐결핵과 동료 수크레의 암살로 인한 상심으로 건강이 최악에 다달은 시몬 볼리바르는 요양을 하던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의 병자성사를 받은 뒤, 1830년 12월 17일 별세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