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년 11월 22일, 영국의 작가 조지 엘리엇 (George Eliot, 1819 ~ 1880) 출생
조지 엘리엇 (George Eliot, 1819년 11월 22일 ~ 1880년 12월 22일)은 영국의 소설가, 시인, 언론인, 번역자이자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 가운데 하나이다. 본명은 메리 앤 에번스 (Mary Anne Evans)이다.
– 조지 엘리엇 (George Eliot)
.본명: 메리 앤 에번스 (Mary Anne Evans)
.필명: 조지 엘리엇
.출생: 1819년 11월 22일, 영국 워릭셔 너니턴
.사망: 1880년 12월 22일 (60세), 영국 런던 첼시
.묘지: 영국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
.국적: 영국
.언어: 영어
.직업: 소설가, 비평가, 번역가
.사조: 빅토리아 시대, 자연주의
.부모: 로버트 에번스, 크리스티나 피어슨
.배우자: 존 크로스 (m. 1880), 조지 헨리 루이스 (1854 ~ 1878년 사이 동거)
.친지: 크리스티나, 아이작, 로버트, 페니 에번스 (형제자매)
.주요 작품: 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 (1860년), 사일러스 매너 (1861년), 미들마치 (1871년), 다니엘 데론다 (1876년) 등
.영향 받은 인물: 세르반테스, 발자크, 샬럿 브론테, 오스틴
.영향 준 인물: 프루스트, 만, 울프, 애트우드, 메일러, 에이미스
그녀는 《아담 비드》 (1859), 《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 (1860), 《사일러스 매너》 (1861), 《로몰라》 (1862–63), 《미들마치》 (1871–72)와 《다니엘 데론다》 (1876) 등 총 7권의 소설을 썼으며 그녀가 쓴 소설 대부분은 시골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 속에서 보여준 사실주의와 심리적 통찰로 유명하다.
당대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본명으로 책을 출판한 반면, 엘리엇은 여성 작가는 태평한 연애소설밖에 쓰지 못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필명을 사용했다. 또한 엘리엇은 편집인과 비평가로 이미 잘 알려진 자신과 자신의 소설이 분리되어 평가받기를 원했다. 그녀가 필명을 썼던 다른 이유는 아마도 대중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파해치는 것을 막아 그녀와 유부남 조지 헨리 루이스와의 관계가 초래할 스캔들을 피하고자 했다고 사료된다.
엘리엇의 미들마치는 소설가 마틴 에이미스와 줄리언 반스가 영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영국 워릭셔 너니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로버트 에번스 (1773-1849)와 지역 공장주의 딸 에번스(결혼 전 성씨는 피어슨, 1788-1836)의 세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메리 앤의 이름은 가끔 메리언으로 축약되기도 한다. 그녀의 형제 자매들은 크리시로도 알려진 크리스티아나 (1814-59), 아이작 (1816-1890)과 1821년 3월에 태어나 몇 일 안되어 요절한 두 쌍둥이 형제가 있다. 또한 그녀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전처 해리엇 포인턴 (?1780-1809)의 딸로 그녀에게는 이복오빠가 되는 로버트 (1802-63)와 이복언니 페니 (1805-82)가 있다.
아버지 로버트 에번스는 웨일스 혈통으로 워릭셔의 뉴디레이트 가문의 아버리 홀 토지 관리인이었으며, 메리 앤은 사우스 팜에 있는 토지에서 태어났다. 1820년 초 가족들은 너니턴와 베드워스 사이의 그리프 하우스라는 이름의 집으로 이사를 간다.
어린 에번스는 독서에 열중했으며 확실히 지적이었다. 육체적으로 아름답다고 보이지 않은 까닭에, 그녀는 본인 스스로 결혼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요인들과 그녀의 총명한 지능은 아버지로 하여금 당시 여자들은 보통 받지 못한 교육을 그녀에게 해주게끔 한다.
5살부터 9살까지 그녀는 누나 크리시와 함께 아틀버러에 있는 미스 라텀 학교에, 9살부터 13살까지는 너니턴의 월링턴 부인 학교에서, 13살부터 16살까지는 코벤트리의 미스 프랭클린 학교에서 기숙 생활을 했다.
월링턴 부인 학교에서 그녀는 복음주의적인 마리아 루이스ー현존하는 엘리엇의 편지 중 가장 초기의 것들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이다ー에게 교육을 받았다. 프랭클린 부인 학교의 종교적 색채속에서 엘리엇은 복음주의와 반대되는 엄숙하고 통제 잡힌 믿음에 노출되게 된다.
16살 이후로 엘리엇은 공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다. 아버지가 관리하던 토지 내에서 아버지가 누리던 중요한 위치덕에 엘리엇은 학식을 넓히며 독학할 수 있게끔 큰 도움을 받게 될, 아버리 홀 도서관에 드나드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녀의 고전 교육은 종점을 찍었다. 크리스토버 스트레이는 “조지 엘리엇의 소설들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 심히 빚지고 있으며 (그녀의 소설 중 단 하나의 소설만이 그리스 문자 활자 없이 제대로 출판이 가능하다) 그녀의 주제는 보통 그리스 비극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엘리엇은 그 토지를 자주 방문하면서, 토지에 사는 지주와 가난한 이들간의 빈부 격차와 그녀의 여러 작품들에서 재현될, 다양한 대비되는 삶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삶에 있어 다른 중요한 초기의 영향은 바로 종교였다. 그녀는 국교회 저교회파 가족으로부터 태어났으나 당시 미들랜즈는 비국교도의 수가 증가하던 지역이었다.
- 코번트리로의 이사
1836년 에번스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에번스는 (당시 16살) 가정 살림을 맡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지만서도 자신을 가르치던 마리아 루이스하고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가 21살이 되자 오빠 아이작은 결혼하며 집을 차지했는데 그런 고로 에번스와 그녀의 아버지는 코번트리 근처 폴실로 이사를 가게 된다.
코번트리 지역 사회와 가까이 지낸 결과로, 특히 찰스와 카라 브레이가 그녀에게 새로운 영향을 끼쳤다. 찰스 브레이는 리본 제조업자로서 부유해졌고 이렇게 모은 부를 학교 건물을 짓는다던가 하는 자선적인 일들에 사용했다. 가끔씩 종교적인 불신에 흔들리던 에번스는 급진적인 자유 사상가인 브레이 부부와 친한 친구사이가 되었는데, 브레이 부부네 “로즈힐” 저택은 바로 급진적인 관점을 갖고 논쟁하던 이들에게 천국과도 같았던 곳이다.
이 젊은 여성이 브레이 부부네 집에서 만난 사람들로는 오언, 스펜서, 마티노, 에머슨과 같은 이들이 있다. 이러한 이들을 통해 에번스는 더 자유적이고 불가지론적인 신학들을 접하게 되었고 성경 이야기가 말그대로 진짜 사실인지 의심하던 스트라우스나 포이어바흐 같은 작가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엘리엇의 첫 주요 문예 작품은 ‘로즈힐 서클’의 다른 구성원들이 번역을 하다 만 것을 그녀가 끝낸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1846) 영어 번역이라 할 수 있겠다. 훗날 그녀는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1854)을 번역하게 된다. 우정의 산물로 브레이는 엘리엇이 초반에 쓴 논평 등의 글 몇 편을 자신의 신문 <코번트리 헤럴드 앤 옵저버>에 실는다.
엘리엇이 자신의 종교적 신앙심에 관하여 의구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 엘리엇의 아버지는 그녀를 집 밖에 내쫓아버리겠다고 위협했으나 이 위협이 실행되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공손히 교회를 다니며 아버지를 위해 1849년 그녀가 30살이 되고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집을 지킨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거행된 날로부터 5일 후 그녀는 브레이 부부와 함께 스위스로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제네바에 혼자 머물기로 결정하며, 먼저 플롱종에 있는 호숫가에 살다가 (현재 유엔 건물 근처) 이후로는 그녀의 친구 프랑수아와 쥘리에 달베르 뒤라르가 소유한 샤누안 로 (현재 펠리세리 로)에 위치한 저택 2층에서 살게 된다.
그녀는 기뻐하며 “좋은 고목 위에 있는 폭신한 둥지에서 느끼는 것”같다며 말했다. 그녀가 이곳에 머문 사실은 건물 헌판에 기념되어 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엘리엇은 열심히 책을 읽으며 그녀 자신에게 큰 영감을 준 아름다운 스위스 시골을 산보했다.프랑수아 뒤라드는 그곳에서 엘리엇의 초상화를 그려주기고 했다
- 런던으로의 이사와 <웨스터민스터 리뷰>의 편집자일
같은 해에 잉글랜드로 돌아온 (1850) 엘리엇은 작가가 되고자하는 목적을 갖고 런던으로 이사를 갔으며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메리언 에번즈라 불렀다.
엘리엇은 전에 로즈힐에서 만난 급진적인 출판업자이자 그녀의 슈트라우스 번역을 출판해준 존 채프먼의 집에 머물렀다. 채프먼은 행동하는 좌파 신문 회사 <웨스터민스터 리뷰>를 얼마 전에 샀었고 에번즈는 1851년에 보조 편집자가 된다. 채프먼이 공식적으로는 편집자였지만 실질적으로 신문을 출간하는 작업을 하며 1852년 1월자부터 많은 수필과 논평을 기고하고 1854년 중반에 <리뷰>를 그만 둘 때까지 계속 일한 이는 에번즈였다.
엘리엇은 대륙 유럽에서 벌어진 1848년 혁명이 공감하였고, 그녀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점진적인 개혁 방안이 잉글랜드에 있어 최선이라고 믿은 것과 대조적으로 이탈리아인들이 “나쁜 오스트리아인”들을 롬바르디아에서 몰아내며 “쇠락한 군주정”들 역시 폐기 처분되길 희망하였다.
당대 여성 작가들은 흔했었지만 문예 잡지 여성 편집자로서의 에번즈의 역할은 꽤 드물었다. 이 시기 엘리엇은 채프먼(결혼했으나 아내와 정부와 함께 살던)과 허버트 스펜서에게 일방적으로 애정을 품었다.
- 결혼과 사망
결혼 생활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녀는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면서 유부남과 로맨스를 펼치는 등 지금에서도 파격적인 삶을 살아오기도 했다.
1880년 61세로 처음으로 21세 연하의 남자랑 정식 결혼을 했는데, 나이차가 많은 결혼으로 당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 결혼 생활은 그해 엘리엇이 사망하면서 끝났다.
조지 엘리엇의 작품 활동은 1878년 암으로 인한 루이스의 사망과 더불어 끝났다. 메리 앤 에번스를 소설가 조지 엘리엇으로 만든 루이스는 엘리엇이 자기 불신과 고독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면 자신감을 회복하도록 격려해 주곤 했다. 루이스의 병을 알지 못했던 엘리엇은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그를 잃은 슬픔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두문불출한 채 루이스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다음해 2월 말에 가서야 존 크로스의 방문이 허락되었다. 엘리엇이 크로스를 처음 만난 것은 1869년 4월 18일 로마에서였고, 당시 크로스는 29세의 키가 큰 미남이었다. 엘리엇은 『미들마치』의 성공으로 수입이 증가해서 1873년에는 약 5000파운드의 돈을 갖게 되었고, 루이스가 이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엘리엇은 루이스가 전담해 오던 재정 관리에 문제가 생기자, 크로스를 불러 자주 의논하게 되었다. 루이스를 잃은 엘리엇과 어머니를 잃은 크로스는 함께 단테를 읽으며 문학을 토론하다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1880년 5월 5일 엘리엇은 20년 연하인, 조니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크로스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엘리엇은 이 결혼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이 결혼으로 다시 한번 주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이 결혼을 통해 30년간의 공백을 깨고 오빠 아이작과 화해했다.
신혼여행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엘리엇과 크로스는 12월 런던에 새집을 마련하고 이사했지만, 시골 출신의 지적이며 진보적인 작가 조지 엘리엇은 그해 12월 22일 목의 통증이 악화되어 생을 마감하게 된다. 12월 29일 런던 교외에 있는 하이게이트(Highgate) 묘지에 루이스와 나란히 묻혔다.
○ 평가
조지 엘리엇은 19세기 영문학 사상 중요한 작가로,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지 엘리엇을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황무지(The Waste Land)>를 쓴 T. S. 엘리엇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자는 19세기 영국의 여성 소설가이며 후자는 20세기 영국 시인이다. 19세기는 영문학사상 유례없이 소설 장르가 융성한 시기이며 그 시기에 활약한 많은 작가 중 조지 엘리엇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다. 엘리엇은 1819년 워릭셔 아베리에서 태어났으며, 36세라는 늦은 나이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여성 작가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편견 때문에 본명인 메리 에번스 (Mary Evans)라는 이름 대신 조지 엘리엇이라는 남성의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몇 작품이 발표될 때까지 독자는 물론 평론가까지도 모두 그녀를 남성 작가로만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성 작가들의 어리석은 소설들 (Silly Novels by Lady Novelists)>이라는 에세이에서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상투적 로맨스나 쓰는 당시의 여성 작가들을 경멸하면서 자신은 그런 작가들과 다름을 천명했다. 그녀는 『웨스트민스터 리뷰 (Westminster Review)』라는 비중 있는 잡지의 부편집장을 지냈으며, “남성처럼 생각하는 여자 셰익스피어”라 불릴 정도로 지적인 작가였다. 이처럼 그녀는 여성 작가라기보다 당대의 어느 남성 작가에 견주어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위대한 작가로 평가된다.
20세기 저명한 문학 비평가 리비스 (F. R. Leavis)는 그의 저서 『위대한 전통』에서 위대한 영국 소설의 전통이 제인 오스틴→조지 엘리엇→토머스 하디→데이비드 로런스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처럼 그녀는 여성의 감성을 뛰어넘은 탁월한 지적 작가이자 도덕적 작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깊이 천착한 작가이자 인간의 심리를 잘 묘사한 작가, 그리고 여성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지닌 작가로서 평가되고 있다.
지금은 엘리엇이 더 유명하지만, 당대에는 엘리엇보다 훨씬 더 저명한 문학 비평가였던 루이스 (G. H. Lewes)의 격려로 그녀는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엘리엇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유부남인 루이스와 동거한 문학 외적인 사실로 더 유명했다. 이 동거는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으며 이로 인해 그녀는 오빠 아이작과 의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로서 매우 파격적인 이 사건에 대해서는 루이스의 아내가 자유연애주의자로 이미 남편 친구와 동거 중이었지만, 가톨릭교도인 루이스가 아내와 이혼할 수 없었다는 점,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루이스의 아내가 낳은 아이들까지 엘리엇이 부양했으며 루이스가 엘리엇의 남편이자 문학적 스승이었다는 사실 등을 참작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조지 엘리엇의 작품 활동은 1878년 암으로 인한 루이스의 사망과 더불어 끝났다.
○ 작품
조지 엘리엇은 모두 여덟 편의 장편 소설을 썼는데, 평자들의 통상적인 구분상 전기의 『목사 생활 풍경 (Scenes of Clerical Life)』, 『애덤 비드 (Adam Bede)』(1859), 『플로스강의 물방앗간 (The Mill on the Floss)』(1860), 『사일러스 마너 (Silas Marner)』(1861)와 후기의 『로몰라 (Romola)』(1863), 『펠릭스 홀트 (Felix Holt)』(1872), 『미들마치 (Middlemarch)』(1871∼1872), 『대니얼 데론다 (Daniel Deronda)』(1876)로 나누어진다. 이 여덟 편 외에 노벨라 <들춰진 베일 (The Lifted Veil)>과 드라마 <스페인 집시 (The Spanish Gypsy)>, 시 <암거트 (Armgart)>가 있다. 이 중에서 『미들마치』는 단연 대표작으로 꼽힌다.
- 소설
아담 베드 Adam Bede, 1859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The Mill on the Floss, 1860
사일러스 마너 Silas Marner, 1861
로몰라 Romola, 1863
진보주의자, 펠릭스 홀트 Felix Holt, the Radical, 1866
미들마치 Middlemarch, 1871–72
다니엘 데론다 Daniel Deronda, 1876
벗겨진 베일, 1859
- 시
런던 화방에서 In a London Drawingroom, 1865
두 연인들 Two Lovers, 1866
보이지 않는 성가대 The Choir Invisible, 1867
스페인 집시 The Spanish Gypsy, 1868
아가사 Agatha, 1869
형제와 자매 Brother and Sister, 1869
리사는 어떻게 왕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How Lisa Loved the King, 1869
암가트 Armgart, 1871
스트라디바리우스 Stradivarius, 1873
주발의 전설 The Legend of Jubal, 1874
당신에게 충분한 이별을 준다 I Grant You Ample Leave, 1874
아리온 Arion, 1874
사소한 선지자 A Minor Prophet, 1874
대학교 아침식사 파티 A College Breakfast Party, 1879
모세의 죽음 The Death of Moses, 1879
잃어버린 그날을 세라 Count That Day Lost, 1887
- 번역서
플로스강의 물방앗간 – 출간: 민음사 / 번역: 이봉지, 한애경, 2007.03 / 출간: 신아사 / 번역: 한애경, 2010.12
미들마치 – 출간: 주영사 / 번역: 이가형, 2019.06
벗겨진 베일(단편) – 출간: 민음사 / 번역: 정윤희, 2019.07
사일러스 마너 – 출간: 지만지(지식을 만드는 지식) / 번역: 한애경, 2012.12
아담 비드 – 출간: 현대문화센터 / 번역: 유종인, 2007.09 / 출간: 나남출판 / 번역: 이미애, 2009.08
다니엘 데론다 – 출간: 한국문화사 / 번역: 정상준, 2016.12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