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1월 24일, 대한제국 초대 황제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1821 ~ 1898) 출생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1821년 1월 24일 / 음력 1820년 12월 21일 ~ 1898년 2월 22일 / 음력 2월 2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대한제국의 추존왕이다.
–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본명: 이하응 (李昰應)
.출생: 1820년 12월 21일, 조선 한양
.사망: 1898년 2월 22일, 조선 한양
.묘지: 흥원
.배우자: 여흥부대부인
.자녀: 고종, 흥친왕, 조정구, 이재선, 이윤용, 조경호
.형제자매: 흥인군, 흥완군, 흥녕군.조카: 이재긍, 이희하, 이재원, 이재완
한성 출신으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 (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
○ 생애 및 활동
본명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이다.
– 쇄국
영향력이 있었던 풍양 조씨 세도 집안과 양주 조씨 고급 관료 집안, 안동 김씨 세도 집안에게 각기 서예(붓글씨)를 써서 바치고 서화(그림) 등을 그려다가 바쳐 보신책을 강구한 그는 1864년 1월 21일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 서원철폐와 종교 탄압
또한 서원을 철폐 및 정리를 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 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고 박해하였다.
– 명성 황후의 간택과 갈등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 황후를 간택하였으나, 도리어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1873년 11월 명성황후와 유학자 및 (신)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 황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일본인과 결탁하여 며느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유길준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차라리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완흥군, 이재선 등을 조선 군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무리한 경복궁 중건 과정,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유폐 생활
1895년말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유폐생활을 강요당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하여 다시 양주로 가서 은거하다가 1898년 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 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 (正寢)에서 죽었다.
– 별세와 장례
그의 장례식에 아들 고종은 불참하였다 한다.
사망 직후 윤 3월 26일 ‘아소당’ 뒤뜰에 묻혔으며, 묘호는 흥원 (興園)이라 명명되었다.
만년에는 국태공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고종은 을미사변 사건의 배후의 한 사람으로 흥선대원군이라 봤다.
1898년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아들 고종이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부자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그가 죽자 한성부에서는 7일장을 했으나,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은 그의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고, 흥친왕 이재면은 혹시나 자신도 죽임당할까봐 대원군의 부음을 알리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주저했다. 그러나 상여가 노제를 한 뒤 서문 (西門)으로 나갈 때 고종은 마루에 서서 담넘어로 바라보며 오랫동안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통곡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상여가 공덕리로 가는 것을 보고 서대문 밖까지도 쫓아갔다고도 한다.
순종 즉위 후 1907년 8월 26일 장례원경(掌禮院卿) 이중하(李重夏)가 그를 대원왕으로 추존할 것을 건의하였고,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이에 따라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이라고도 부른다.
– 묘지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아소당 뒤뜰에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1898년 5월 16일 한성부 성저십리 서강방 상수일리에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합장, 이장되었다.
1908년 (융희 2년) 1월 30일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 (雲川面 大德洞) 산 동쪽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1907년 왕의 예로써 다시 장례하라는 명이 내려진 이후 흥원의 천봉은 융희 (隆熙) 원년 (1907년) 11월10일에 시작돼 융희 2년 (1908년) 2월1일에 마무리됐다.
1966년 6월 16일 다시 경기도 남양주군으로 이장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