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5년 1월 8일, 미국의 발명가로 조면기 (cotton gin)를 발명한 ‘미국식 기술의 아버지’ 엘리 휘트니 (Elias <Eli> Whitney, 1765 ~ 1825) 별세
일라이 휘트니 (Elias Whitney, 1765년 12월 8일 ~ 1825년 1월 8일)는 미국의 공학자 및 발명가였다.
1765년 12월 8일 매사추세츠주에서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나 1792년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다. 가정교사로 일했으며, 1817년 1월 6일 헨리에터 에드워즈와 결혼해 네 아이를 두었다.
그는 목화의 씨앗을 쉽게 분리하는 조면기 (cotton gin)를 발명해 18세기 미국 면화산업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발명가다.
– 일라이 휘트니 (Elias Whitney)
.출생: 1765년 12월 8일, 미국 매사추세츠 웨스트버러
.사망: 1825년 1월 8일, 미국 코네티컷 뉴헤이븐
.국적: 미국
.부모: 엘리 휘트니 시니어, 엘리자베스 페이
.배우자: 헨리에타 에드워즈 (1817 ~ 1825)
.자녀: 수잔 에드워즈 휘트니, 엘리자베스 페이 휘트니, 프란시스 에드워즈 휘트니 등
.주요업적: 조면기 (cotton gin) 발명
미국에서는 초기 유럽에서 건너온 정착민들에 의해 남부 지방에서 목화재배가 시작됐다. 기후가 적당해 농사가 잘됐고 질도 뛰어났다. 미국 정착민에게 면화를 유럽으로 수출하는 것은 좋은 돈벌이가 됐다. 노동력은 전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들에 의존했다.
면화생산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은 목화송이에서 솜과 씨를 분리하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솜 1lb, 약 450g의 씨를 분리하는 데 평균 6시간이나 걸렸다. 그런 속도로는 도저히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일라이 휘트니 (Eli Whitney)가 1793년에 만든 조면기는 상당히 간단한 구조였지만 이 기계는 30명 내지 50명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처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1793년 미국의 면화 생산량은 세계 생산량의 1%에도 못미쳤다. 그러나, 조면기가 등장한 이후인 1860년경에는 전 세계 면화의 70%를 미국에서 생산했고, 그중 80%는 영국으로 수출됐다. 미국의 농장주들은 갈수록 많은 노예를 필요로 했다. 1860년에는 그 수가 400만 명에 달했다.
○ 생애 및 활동
일라이 휘트니는 1765년 북동부 매사추세츠 웨스트보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라이 휘트니 시니어는 농토를 많이 가진 농장주였다. 일라이 휘트니는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기계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이 불과 14살 때는 자신이 개발한 장치로 못을 만들어 내는 기술자가 됐다.
휘트니는 1789년 예일대학에 들어가 3년 만에 졸업을 했다. 그는 계속 법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학비가 모자라 포기하고 대신 사우스캐롤라이나에 개인 교사 일자리를 구해 떠나게 됐다. 휘트니는 사우스캐롤라이나로 가는 배 안에서 독립전쟁의 영웅 나다니엘 그린의 미망인과 그의 가족들을 만났다.
그린 장군의 부인 캐서린은 조지아주 멀베리에 있는 자신의 대 농장으로 휘트니를 초청했다. 18세기가 저물어 갈 무렵 남부의 조지아주는 돈을 벌려는 야심가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휘트니는 개인 교사 자리는 포기하고 조지아로 갔다.
그린 부인도 대규모 목화 농장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휘트니에게 목화씨 분리를 쉽게 하는 방법이 없겠는지를 물었다. 휘트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하던 중 농장에서 고양이가 닭을 잡아먹으려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고양이는 철장 안에 있는 닭을 밖으로 끌어당겼지만, 닭은 못잡고 털만 뽑히고 말았다.
거기 착안한 휘트니는 약 1주일 만에 초보적인 조면기를 만들어 보였다. 가는 철사가 붙은 원통형 나무를 서로 엇갈려 돌리고 그 사이에 목화를 집어넣으면 철사에 의해 솜은 뜯기고 씨는 그 사이로 빠져나오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휘트니는 1794년 조면기 특허를 추진했다. 미국 남부 전역의 목화 농장에서 이를 사용하게 하고 그것으로 얻어지는 이익의 5분의 2를 권리금으로 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구는 만들기가 쉬워 복제품이 널리 사용됐다. 농장들은 약간씩 변형해서 만들기도 했다.
휘트니는 여러 해 동안 복제판 사용을 막기 위한 법적 투쟁을 벌여야 했다. 18세기가 다 갈 무렵 휘트니는 적당한 가격에 사용권에 합의할 수 있었다. 휘트니는 사실상 거의 수입이 없었으나 농장주들은 거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복제품 범람으로 별다른 수익이 없게 되자 휘트니는 또 다른 사업에 눈을 돌렸다. 그것이 바로 호환 가능한 부품 시스템 개발이었다. 결국 그것은 미국의 총기 대량 생산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됐다.
프랑스와의 전쟁 가능성이 대두되자 미국 정부는 화기를 대량 공급할 수 있는 민간 업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휘트니는 2년 안에 1만 정의 소총을 납품하겠다고 제안해 정부 계약을 따냈다. 연 5천 정씩 생산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소총은 한 기술자가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거치며 하나씩 만들어냈다. 그러다 보니 총 한 자루마다 각기 디자인이나 성능이 달랐다. 숙달된 장인을 보유한 총기 회사라도 연간 500 ~ 700정밖에 만들지 못했다. 코네티컷에 공장을 차린 휘트니는 노동자들에게 각기 맡은 부품만을 반복해 만들어 내도록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량의 부품을 조립만 하면 완제품이 나오도록 한 것이다.
휘트니는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처음 몇 년 동안은 정부에 약속한 양의 극히 일부밖에 만들어 내지 못했다. 약속대로 1만 정을 만드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다. 그래도 휘트니는 정부로부터 1만5천 정을 더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제 노하우가 쌓인 휘트니는 불과 2년 동안에 주문량을 다 채워 납품할 수 있었다.
휘트니는 회사의 주택 단지를 건설해 직원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시작한 코네티컷주의 마을이 오늘날의 휘트니빌이라는 곳이다. 그는 고용주와 근로자들 간의 화목한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휘트니는 1825년, 59세 생일을 넘긴 지 한 달 만에,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으로 고생하는 도중에도 그는 자신의 통증을 줄이기 위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었다.
휘트니는 근면, 금주, 절약을 강조하는 청교도 정신에 바탕을 두고 가족적인 공장 시스템을 발전시킨 미국식 산업혁명의 선구자였다. 현대의 조립 라인 시스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휘트니는 ‘미국식 기술의 아버지’로도 불리고 있다.
– 발명품
.조면기
휘트니는 1793년 세계 최초로 조면기를 만들었다. 조면기는 면의 씨앗을 빼내는 기계로, 전에는 모두 수동으로 작업이 진행됐다. 조면기는 많은 양의 면을 제조했던 미국 남부 주들의 경제적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조면기는 톱날 모양의 이를 가진 원통과, 목화씨보다 약간 작은 홈이 나있다. 원통을 회전시키면 원통의 둘레에 박혀 있는 톱날 모양의 뾰족한 철사끝이 홈 위에 있는 목화의 면모 (綿毛)만을 홈을 통해서 밖으로 뽑아내고, 씨는 홈 위에 남는 구조로 되어 있다.
휘트니의 조면기는 빼내기 어려운 면의 씨앗을 빼내는 기계여서 실용적이고 혁신적이기는 했지만, 제작이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쉽게 만들어서 팔 수 있었다. 결국 휘트니의 사업은 1797년에 문을 닫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