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1월 7일, 대영제국의 화가 토머스 로렌스 (Thomas Lawrence, 1769 ~ 1830) 별세
토머스 로렌스 (Thomas Lawrence PRA FRS, 1769년 4월 13일, 영국 브리스톨 ~ 1830년 1월 7일, 영국 런던) 경은 영국의 초상화 화가이자 왕립 아카데미의 제4대 회장이었다.
– 토머스 로렌스 (Thomas Lawrence)
.출생: 1769년 4월 13일, 영국 브리스톨
.사망: 1830년 1월 7일, 영국 런던
.시대: 낭만주의
.부모: 토마스 로렌스
.분야: 초상화 화가
.소속: 왕립 아카데미 (제4대 회장)
영국의 화가 토머스 로렌스 (Thomas Lawrence, 1769 ~ 1830)는 일찍부터 화가의 소질을 보였다.
신동인 그는 브리스톨에서 태어나 Devizes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Market Square에 있는 Bear Hotel의 여관 주인이었는데 일찍부터 소질을 보였고, 그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레이놀즈 사망 후 23세에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일생 동안 우미 (優美)함과 귀족취미로 인기를 지켰다.
○ 생애 및 활동
토마스 로렌스는 영국 브리스톨에서 여관업을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여관업은 그다지 형편이 좋지 못해서 그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그를 돈벌이에 이용했다.
그런데 여관 손님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거나 초상화를 그리던 이 꼬마가 그림에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냈다.
1779년, 여관업이 파산하면서 ‘바스’로 이사한 후에는 본격적인 파스텔 초상화가로 나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정도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고작 열 살이었다.
재능 있고 매력적인 이 어린 소년은 곧바로 바스의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사랑을 받았다.
주변의 부유한 사람들이 소유한 명작을 모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렇게 독학으로 계속 성장해 나갔다.
18살에는 런던으로 건너갔고 곧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21살부터는 이미 왕실 초상화를 주문 받았다.
영국 미술의 자랑인 조슈아 레이놀즈가 사망하자 불과 23세의 나이로 궁정화가로 임명되었고, 25살에는 왕실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
1815년에는 기사 작위를 수여 받고 당시 섭정이던 조지 4세의 후원으로 워털루 연합의 유럽 군주들과 외교관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때 그린 유럽 각국 수반의 초상화는 지금도 런던 윈저성 워털루 채임버 (Waterloo chamber)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
1820년에는 영국 왕실 아카데미의 회장에 올라 1830년 6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토머스 로렌스 (Thomas Lawrence)는 1830년 1월 7일, 영국 런던에서 별세했다.
○ 작품들
William Linley, 1789
Sir Graham Moore, c.1792
Duke of Portland, 1792
Duke of Leeds, c.1792-96
Rebecca, Lady Simeon, early 1790s
The Two Sons of the Earl of Talbot, 1793, Neue Pinakothek
Amelia Stewart, Viscountess Castlereagh, 1794
Lord Mount Stuart, 1795
The Young Lord Liverpool, 1796
Sir Edward Pellew, 1797
John Philip Kemble, 1798
Captain Herbert Taylor (around 1800), Museum of the Shenandoah Valley
Alexander MacKenzie, (c. 1800–1801), National Gallery of Canada
Codrington Edmund Carrington, 1801
Princess Charlotte of Wales, c. 1801
Lord Thurlow, 1803
Sir James Mackintosh, 1804
Portrait of Caroline of Brunswick, 1804
Sarah Siddons, 1804
William Lamb, later Viscount Melbourne, c. 1805
Lady Caroline Lamb, c.1805
Lord Ellenborough, 1806
William Pitt, 1807
Sir John Moore, c. 1808
Portrait of George III in State Opening of Parliament dress, 1809
Portrait of Lord Castlereagh, 1809
Thomas Campbell, circa 1810
Benjamin West, 1810
Mirza Abolhassan Khan Ilchi, 1810
Robert Southey, 1810
Anne Frances Bankes, Countess of Falmouth 1810-15
Warren Hastings, 1811
John Philip Kemble as Cato, 1812
Lady Hinchingbrook as “Hope”
Count Matvei Platov, 1814
Austrian Chancellor Klemens von Metternich, c. 1815
King Frederick William III of Prussia c.1814
Prince Frederick, Duke of York, 1816
Countess of Plymouth, 1817
Portrait of Francis I of Austria, c. 1818
Archduke Charles, 1819
Count John Capo d’Istria, between 1818 and 1819, Royal Collection
Frances Vane, Marchioness of Londonderry 1818
Lady Selina Meade 1819
King George IV’s Coronation Portrait 1821
Portrait of Marguerite, Countess of Blessington, 1822, Wallace Collection, London
Lady Maria Conyngham, 1824–25, Metropolitan Museum of Art
Portrait of the Honorable Mrs. Seymour Bathurst, 1828, Dallas Museum of Art
Francis Humberstone MacKenzie of the 78th Highlanders
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
Portrait of George Canning, 1826
The Children of Ayscoghe Boucherett
Miss Marthe Carr (Museo del Prado)
Abraham Redwood
Shute Barrington (Merton College, Oxford)
Sir William Forbes, 1803
Portrait of Sir Charles Stewart, 1812
Marquess Wellesley, 1813
Portrait of Marshal Blücher, 1814
Portrait of the Duke of Wellington c.1815
Ernest Frederick, Count Munster, c.1815
Lord Uxbridge, c.1816
Antonio Canova, 1818
John Bloomfield, 2nd Baron Bloomfield, 1819
Alexander Chernyshyov, 1818
Count Nesselrode, 1818
Portrait of the Duke of Richelieu, 1818
Prince of Schwarzenberg, 1819
Napoleon II, c. 1819
Portrait of Lord Liverpool, 1820
Humphry Davy, 1821
Leopold I of Belgium, 1821
John Julius Angerstein, 1824
Portrait of Frederick Robinson, 1824
Duke of Devonshire, 1824
Wilhelmina Bowlby (1798–1834), circa 1825
Portrait of Charles X of France, 1825
Louis Antoine, Duke of Angoulême, 1825
Duchess of Berry, 1825
The Red Boy or Master Lambton 1825
Anne, Lady Bentinck, 1825
Henry Brougham, 1825
Sir Walter Scott, c.1826
King William IV, then Duke of Clarence, 1827
Portrait of Julia, Lady Peel, 1827
Sir Jeffrey Wyatville, c.1828
John Fawcett, 1828
Frances Anne Vane, marchioness of Londonderry 1827-28
Lord Aberdeen, 1829
Maria II of Portugal, 1829.
Duke of Wellington 1814-1815
○ 주요 작품 해설
- ‘엘리자베스 패런’
토머스 로렌스 (Thomas Lawrence, 1769 ~ 1830)의 모든 경력은 그가 21세에 그린 작품 ‘엘리자베스 패런’에서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모델, 엘리자베스 패런 (1759 ~ 1829)은 아일랜드계 배우이다.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으며 풍부한 표정에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그녀는 배역도 대체로 유쾌한 코미디에서 미모의 고상한 아가씨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이 그림이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었을 당시에는 이미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전시 제목은 지금과 달리 그저 ‘여배우의 초상’이었다. 엘리자베스 패런은 “유명” 여배우이 초상도 아닌 그냥 여배우의 초상이라는 제목에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언론들은 ‘활기차면서도 우아하며 매력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 완벽한 엘리자베스 패런’이라고 찬사했다. 모델을 몰라볼 리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매력도 고스란히 재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를 전혀 모르는 우리가 봐도 한눈에 그림 속 모델이 활기차고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이 보인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상화는 그래서 재밌다. 초상화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을 먼저 예상해 보고 모델에 대해 알아보면 그 작품이 왜 박물관에 걸려 있는지 수긍이 간다.
로렌스는 연극 무대의 한 장면을 포착하여 이 작품을 구성했다. 그 결과 마치 객석에서 올려다 본 모습처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시점의 전신 초상이 되었다. 일반적인 실내가 아닌 폭풍이 몰아칠 듯 어두운 배경도 극적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하늘 아래의 엘리자베스 패런은 막 돌아서 달아나는 것 같으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눈빛과 미소로 마치 따라 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녀를 따라 가야만 할 것 같다. 반짝이는 망토와 가죽장갑, 모피, 부슬거리는 머리카락 하나 하나도 모두 눈으로 만져질 듯이 부드럽다.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림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패런은 줄기차게 로렌스에게 그림을 수정해달라고 졸랐다는 사실이다. 그림을 관람한 팬들이 엘리자베스 패런이 쥐면 꺾일 듯, 불면 날아갈 듯 너무 말라 보인다고 걱정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패런은 로렌스에게 자신을 좀 더 통통하게 만들어 달라고 편지했다. 요즘을 사는 우리의 시각으로는 배부른 투정인 셈이다. 하지만 로렌스는 그림 속의 그녀가 실제 있는 그대로의 그녀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고 그림에 더 손대지 않았다.
그림 완성 후 7년 뒤인 1979년, 엘리자베스 패런은 더비 백작과 결혼해서 백작부인이 되었다. 고전판 그레이스 켈리쯤 된다 할 수 있겠다. 토마스 로렌스는 이 작품으로 앞 세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의 계승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초상화가로서의 탄탄대로가 열렸다. 평생동안 단 2점의 역사화를 제외하고는 초상화 한 길만 걸었던 토마스 로렌스는 일생 동안 우아하고 아름다운 인물묘사로 최고의 초상화가로서의 인기를 누렸다.
다만 한 가지, 로렌스 경은 이 작품 이후 그렇게 명성과 수입이 쌓여가는 와중에도 항상 빚에 시달렸다. 그는 정렬적으로 열심히 일했으며 사치한 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빚에 허덕이다가 후원자 덕에 겨우 위기를 모면해 나가곤 했다. 종국에는 무일푼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체로는 그의 가족에게 과하게 많은 경제적 지원을 했던 점이 그 원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가의 그림을 사 모으는 데에 지출이 많았다. 독학으로 성장하다 보니 보고 배울 고전 작품들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엘리트 미술 교육 코스를 밟지는 않았지만 토마스 로렌스는 분명 최고의 화가들을 스승으로 두었고, 그 자신이 최고의 화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 ‘레드 보이’ (1825년)
17세기 후반부터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이성의 힘이 세지고 18세기 절대왕정이 쇠락함에 따라 교회의 힘은 서서히 약해졌다. 종교의 영향력이 사그라들자,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개인의 자유 추구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미술이 그동안 종교와 사상을 담는 매체였다면,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개인의 경험을 기념하고 추억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으며 화가의 시선도 개인의 삶으로 향했다.
영국은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경제 발전을 겪으며 예술을 보다 다양한 사람이 향유할 수 있게 됐고 이에 따라 초상화가 유행했다고 한다.
그중 토머스 로렌스의 ‘찰리 윌리엄 렌튼’이라는 그림이 가장 인상 깊었다. 일명 ‘레드보이’라고도 불리는 빨간 벨벳 옷을 입은 소년이 주인공이다. 이 그림은 영국 우표에 실린 최초의 그림이기도 하다.
하얗게 빛나는 얼굴과 눈빛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로 꼽힌 토머스 로렌스 (1769 ~ 1830)의 대표작으로 일명 ‘레드 보이’ (1825년)다.
땡글땡글한 눈과 새초롬하면서도 어딘가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 벨벳 질감의 붉은 옷. 소년의 존재감이 강렬해 그림이 사랑받는 이유가 이해됐다.
소년에게 집중하느라 배경은 얼핏 보고 실내인 줄 알았으나 뒤로는 달빛이 강물에 반사된 자연 풍경이 자리하고 있다.
알고 보니 소파가 아닌 나무나 돌로 추정되는 자연물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주변에 꽃이 작게 펴있는데 배경이 두루뭉술하고 초상화의 주인공에 확 집중된다.
붉은 벨벳 재질의 화려한 옷을 걸친 소년이 화폭 속에서 허공을 응시한다.
영국의 1대 더럼 백작 존 조지 램튼의 주문을 받아서 그의 아들 찰스 윌리엄 랜튼의 6 ~ 7세 때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아이는 1831년 13세에 결핵으로 사망했지만 그림은 영국 국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고 1967년에는 영국 최초로 우표에 실린 그림이 됐다.
- ‘핑키’
어른이 되는 문턱에서 서성거리는 11살의 소녀는 발아래 풍경위를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광대한 하늘의 구름을 빠른 속도록 움직이게 하는 상쾌한 바람으로 소녀의 치마와 공단 리본이 하늘거리며 위로 올라가고 있다. 이 그림은 이미지 자체에서 나오는 에너지·광휘·로맨스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핑키’는 토마스 로렌스 (1769 ~ 1830)의 전형적인 그림이다. 그는 잘 생겼고 멋지며 독학으로 그림을 익힌 천재였다. 미천한 태생이었던 그는 당시 영국의 주요 초상화가로 성장했으며 왕립아카데미의 원장이 됐고 기사의 작위까지 수여받았다. 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 로렌스는 고작 20대 중반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었고 왕실의 화가였다.
핑키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사라는 영국 식민지 자메이카의 부유한 가문 출신 소녀였다. 아홉 살 때 사라가 런던에 있는 학교에 들어가게 되자, 자메이카에 있던 대모 (代母)는 사라가 너무 그리울 때 보려고 그녀의 초상화를 주문했던 것이다.
매우 보기 드문 낮은 시점은 사라를 바람이 부는 하늘의 일부분으로, 자연의 아이로 보이게 만든다. 이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낭만주의 사상을 반향하는 것이다.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사라의 드레스는 숨이 막힐 듯 능숙하고 유려한 붓질로 표현됐다.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감촉의 것들이 뚜렷한 윤곽선으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그림은 시대를 초월해 영구적인 젊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이미지의 하나로, 1920년대에는 캐드베리 초콜릿 통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젊음의 생기를 대변하는 그림의 모델이었던 핑키는 애석하게도 초상화가 완성된 그 다음 해 세상을 떠났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