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6월 27일,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 마리소피 제르맹 (Marie-Sophie Germain, 1776 ~ 1831) 별세
마리소피 제르맹 (프: Marie-Sophie Germain, 1776년 4월 1일 ~ 1831년 6월 27일)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철학자이다.

– 마리소피 제르맹 (Marie-Sophie Germain)
.본명: 마리소피 제르맹 (Marie-Sophie Germain)
.가명: 오귀스트 앙투안 르 블랑 (Auguste Antoine Le Blanc)
.출생: 1776년 4월 1일, 프랑스 파리
.사망: 1831년 6월 27일(55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분야: 수학, 물리학, 철학
.출신 대학: 괴팅겐 대학교 (명예 박사)
.지도 교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주요 업적: 수론, 미분기하학, 고체역학
프랑스의 수학자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르 블랑’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던 여성 수학자였다.
집안의 반대와 성차별로 인해 수학자로서의 삶이 힘들었지만, 당시 독일의 수학자였던 가우스가 극찬할 정도의 손꼽히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 생애 및 활동
제르맹은 부모의 반대와 성차별의 어려움 속에서도 아버지 서가에 있던 책들을 보며 공부하였고,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와 같은 유명한 수학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지식을 습득하였다.
제르맹은 파리 과학 아카데미가 개최한 탄성의 수학적 모형을 구하는 콘테스트에 논문을 제출하여 수상자가 되었다.
제르맹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의 증명에 기여하였고, 이후 1백 년 이상 후대 수학자들은 제르맹의 작업을 기초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제르맹은 당대의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다른 분야에서 경력을 쌓을 수 없었지만 평생 동안 독자적인 학문 활동을 하였다.
제르맹은 1776년 4월 1일 프랑스 파리 생드니 가 (프: Rue Saint-Denis)에서 아버지 앙브루아즈프랑수아 제르맹 (프: Ambroise-François Germain)과 어머니 마리마들린 제르맹 (프: Marie-Madeline Germain)에게 태어났다. 대부분의 자료에서 아버지 앙브루아즈프랑수아는 부유한 비단 상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아메리칸 대학교의 수학 및 통계학 석좌교수인 메리 그레이 박사는 앙브루아즈프랑수아가 금세공사였다고 적고 있다. 1789년 앙브루아즈프랑수아는 부르주아의 대표로서 삼부회 의원으로 선출되고, 그해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혁명 이후 국민의회의 의원이 되었다. 소피 제르맹은 아버지가 친구들과 정치와 철학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앙브루아즈프랑수아는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은행 이사가 되었는데, 그레이는 이 때문에 제르맹이 성인이 된 후에도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제르맹에게는 안젤리크앙브루아즈 (프: Angélique-Ambroise Germain)라는 여동생과 마리마들린 (프: Marie-Madeline Lherbette)이라는 언니가 있었다. 소피의 어머니 이름 역시 마리마들린이었다. 식구들 대부분이 “마리”였기 때문에 제르맹은 자신이 “소피”로 불리기를 바랐다. 언니 마리마들린의 아들인 아르망자크 레르베트 (프: Armand-Jacques Lherbette)는 제르맹이 죽은 후 철학과 관련한 몇 가지 제르맹의 저작을 출판하였다.

- 수학에 입문
제르맹이 13세가 되었을 때 바스티유 습격이 일어났다. 도시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았고 제르맹은 안전을 위해 집 안에만 머무르게 되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 제르맹은 장 에티엥 몬투클라가 쓴 《수학사》에 적힌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제르맹은 아르키메데스가 당대에 가장 순수한 수학이라 여겨지던 기하학에 그토록 열중하였다면, 수학은 배워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제르맹은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수학과 관련된 모든 책을 읽어나갔다.
아이작 뉴턴과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저작을 읽기 위해서 스스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독학하였고, 에티엔 베주의 《산술 연구》를 읽은 다음, 자크 앙투안 조세프 쿠진의 《미분 계산》마저 읽었다.
《미분 계산》의 저자 쿠진은 어느날 제르맹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제르맹의 학습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제르맹의 부모는 딸이 갑작스레 수학에 빠져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당시 사회 통념상 수학은 여성이 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부모는 딸이 침실에서 수학 공부하는 것을 막고자 불씨를 끄고 옷가지도 치웠지만, 제르망은 담요로 몸을 둘둘말고 촛불 하나에 의지해 가며 공부를 계속하였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의 여성학 교수 린 오센은 “아침이 되어 제르맹의 침실로 갔을 때, 얼어붙은 잉크와 잔뜩 계산이 적힌 석판을 옆에 둔 채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는 딸”을 발견한 부모는 더이상 말릴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어머니는 몰래 제르맹을 돕기 시작하였다.

- 남자 이름으로 제출한 과제물
소피가 19살이 되었을 때 프랑스에서는 과학기술 분야의 최고 교육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닉(École polytechnique)이 설립되었다. 당시의 다른 고등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에콜 폴리테크닉은 여학생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소피는 여러 교수의 강의 노트를 부지런히 모아서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라그랑주(Joseph Louis Lagrange)의 해석학 강의는 그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당시에 에콜 폴리테크닉은 학생 자신이 공부한 것을 학기말에 보고서로 제출하도록 하는 새로운 교육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소피는 그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남학생인 르블랑 (Le Blanc)의 이름으로 과제물을 제출했다. 그 과제물의 독창성에 깜짝 놀란 라그랑주는 수업 시간에 르블랑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라그랑주는 르블랑을 찾으려고 수소문한 끝에 그가 소피 제르맹이라는 젊은 여성임을 알았다. 라그랑주는 소피의 집을 방문해 그녀를 유망한 수학도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러던 중 1798년에는 프랑스의 수학자인 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가 『수론』을 출간했다. 소피는 『수론』을 자세히 읽은 뒤 그 책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 편지를 르장드르에게 보냈다. 그 후 소피와 르장드르 사이의 서신 교환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그 분량이 책 몇 권에 달할 정도였다. 르장드르는 소피를 사실상의 공동연구자라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수론』 2판을 찍을 때에는 그녀가 발견한 사실을 부록에 실어 주었다.
그러나 당시의 프랑스 사회에서 소피 제르맹처럼 과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진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18세기부터 프랑스에서는 상류층 여성을 위한 흥미위주의 과학 서적이 출판되었고 그것은 사교 모임에서나 사용될 만한 저속한 이야기 거리를 제공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알가고티 (Francesco Algagotti)의 『숙녀용 뉴턴철학』이었다. 그 책은 후작 부인과 가정교사의 대화로 꾸며져 있는데, 후작 부인은 과학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정사(情事)에만 관심이 있는 전형적인 상류층 여성이었다. 한번은 가정교사가 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후작 부인은 그것이 사랑에도 적용된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남녀가 8일 동안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첫날보다 64배로 사랑이 식는다고 응수했다.
소피는 이렇게 저속한 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과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비슷한 종류의 책을 출간하자 그와 절교를 선언하기도 했다. 진지한 과학 연구자였던 소피는 통속적이나마 과학에 관심을 가진 여성은 물론 자신의 친척 여성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 중심의 과학자사회가 여성인 소피에게 공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사회가 가진 높은 벽을 절실히 느끼면서 여성 수학자의 길을 쓸쓸히 걷고 있었다.
- 탄성 연구
제르맹은 파리 과학 아카데미가 내건 에른스트 클라드니의 금속판 탄성 실험에 대한 콘테스트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파리 과학 아카데미는 “에른스트 클라드니의 실험 결과에 부합하는 신축성 표면의 진동에 대한 수학적 이론”을 주제로 콘테스트를 개최하였다. 라그랑주는 이 문제의 해답에 새로운 분야였던 해석학을 적용할 것을 주문하였고, 최종 후보로 시메옹 드니 푸아송과 제르맹을 선정하였다. 아카데미는 제르맹 대신 푸아송을 선택하였고, 제르맹은 경쟁에 참여한 사람으로만 인정되었다.
1809년 제르맹이 콘테스트를 위한 논문 작업을 시작할 때, 르장드르는 방정식, 참고문헌, 연구 동향 등을 제르맹에게 알려주며 격려하였다. 제르맹은 1811년 초가을에 논문을 제출하였지만 수상에는 실패하였다. 심사위원회는 제르맹의 논문에 대해 “실험 결과와 정교하게 부합한다”면서도 “운동의 참된 방정식은 확립되지 않았다”고 평하였다. 라그랑주는 제르맹의 방정식이 “특수한 조건에서 운동에 정확히 부합한다”고 평했으며 제르맹의 방정식을 바탕으로 일반적인 경우를 도출해 내었다.

.재도전
콘테스트는 2년간 연장되었고 제르맹은 다시 한 번 도전하였다. 이 번에도 처음에는 르장드르가 도움을 주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두었다. 1813년 제르맹은 익명으로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 논문에서도 제르맹은 여러 부분에서 수학적 오류를 범했는데, 특히 중적분을 도입하는 과정에 결함이 있었다. 그 때문에 파리 과학 아카데미는 “신축성 표면의 운동 이론에 대한 기초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콘테스트는 다시 한 번 연장되었고 제르맹 역시 세 번째로 도전하였다. 제르맹은 세 번째 도전에서 푸아송과 의견을 주고 받았다. 1814년 푸아송은 탄성에 대한 독자적인 논문을 발표면서 제르맹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푸아송은 실재로는 제르맹과 함께 탄성을 연구하였고 아카데미 심사위원회에 제출한 논문에서도 제르맹의 연구를 사용하였다.
1816년 1월 8일 제르맹은 세 번째 논문인 〈표면 탄성 이론에 대한 연구〉를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하였고, 심사에 통과하였다. 이로써 제르맹은 파리 과학 아카데미의 첫 번째 여성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수상식에는 나가지 않았다. 제르맹이 최종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아카데미는 방정식이 완벽히 만족스럽지는 않다고 평했다. 제르맹은 완벽한 미분 방정식을 유도 하였지만, 실험 결과를 예측하는 정확도는 떨어졌다. 이것은 오일러의 연구에서 가져온 방정식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오일러의 방정식은 경계 조건이 불명확하였기 때문이다.
콘테스트 수상 뒤에도 제르맹은 학회에 입회할 수 없었는데, 이는 회원의 아내를 제외한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카데미의 관습 때문이었다. 7년 후 제르맹은 아카데미의 서기였던 조제프 푸리에의 친구가 되어 입회자격을 얻었다.

.탄성에 대한 후속 연구
제르맹은 1821년 수상 논문을 자비로 출간하였는데, 푸아송의 것에 대비되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공표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1826년 제르맹은 기존의 연구에 대한 개정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탈리아 페라라 대학교의 안드레아 델 켄티나는 제르맹이 개정 논문에서 “분명하게 단순화한 가설을 도입하여” 기존의 불명확했던 부분을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평하면서, 아카데미가 제르맹의 논문을 “하찮고 불충분한 것”으로 취급하였으며 제르맹이 “대학 교수에 필적하는” 사람이나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거부”하였다고 지적한다. 논문을 심사한 오귀스탱 루이 코시는 제르맹에게 출판을 권했고, 제르맹은 그 조언에 따랐다.
탄성에 대한 제르맹의 후속 연구인 《표면 곡률에 대한 기록》은 1831년에 출간되었다. 여기서 제르맹은 극소곡면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사용하고 있다.
- 철학 연구
제르맹은 수학뿐만아니라 철학과 심리학도 연구하였다. 제르맹은 자명하게 존재하는 사실들을 분류하고 심리학과 사회학의 법칙에 비추어 일반화하고자 하였다. 오귀스트 콩트는 제르맹의 철학을 높게 평가하였다.
제르맹은 《다양한 견해》(Pensées diverses)와 《서로 다른 세대의 문화에서 보이는 과학과 문학의 상태에 대한 일반적 고찰 》(Considérations générales sur l’état des sciences et des letteres aux différentes epoques de leur culture)라는 이름의 두 철학 논문을 썼고, 사후에 조카인 레르베트에 의해 출판되었다. 《견해》는 과학과 수학의 역사를 제르맹의 견해를 곁들여 서술한 것이고, 《고찰》은 과학과 인문학사이에 차이점이 없다는 제르맹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콩트는 《고찰》에 담긴 제르맹의 사상을 지지하였다.
- 만년
1829년, 제르맹은 자신이 유방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르맹은 엄습하는 고통 속에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제르맹은 탄성 고체의 운동과 평형 법칙을 발견한 공로로 《화학 물리 연보》 (Annales de chimie et de physique)에 수록되었다. 1831년 7월 27일, 제르맹은 사보이 13가에 있는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 평가
미시건 대학교의 베스나 페트로비치 교수는 1821년 출간된 제르맹의 수상 기념 소고인〈고결함에서 평범에 이르기까지〉(ranged from polite to indifferent) 에 대한 당시 학계의 반응을 발견하였다. 1821년 제르맹의 논문에 대해 코시는 “저자의 이름과 논문이 다루고 있는 주제 모두 수학계의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하였다. 클로드 루이 나비에는 H. J. 모잔이 쓴 전기는 “불명확한데다 미심쩍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여성에 대하여 쓴 글을 몇몇 남자만이 (이해하며) 읽을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라고 평하였다.
제르맹과 공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그녀의 업적에 대해 쓴 글도 호의적이다. 오센은 “가스팔드 남작은 제르맹을 19세기의 히파티아로 부르곤 하였고, J.J 비오는 주날 데 사방 (프: Journal des sçavans, 과학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제르맹은 성별이 무엇인지 때문이 아니라 수학으로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우스는 수학은 여성이 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학문이라 여기던 당시 유럽의 문화적 풍토가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로서 제르맹을 높이 평가하였다.
현대의 평론가들은 제르맹이 수학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취약한 부분이 있다고 평한다. 그레이는 “제르맹의 탄성에 대한 연구는 기본적인 해석학 연습이 부족한 때문인지 엄밀하지는 않다”고 평하고 있다. 페트로비치는 “이러한 것들때문에 수학자들은 제르맹이 신동은 아니었다고 여긴다”고 덧붙인다.
그레이는 제르맹의 이론에는 불명료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탄성 이론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H. J. 모잔은 에펠 탑이 만들어지면서 새겨진 동판에는 에펠 탑이 세워질 수 있었던 과학적 기반을 마련한 72명의 과학자 이름이 적혀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탄성에 대한 기반을 마련한 제르맹의 이름이 빠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제르맹의 이름이 빠진 것은 여자였기 때문일까? 그런 것 같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