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3월 22일, 독일의 작가 · 철학자 · 정치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 1832) 타계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일 ~ 1832년 3월 22일)는 독일의 낭만주의 성향 작가이자 철학자, 과학자이다. 바이마르 대공국에서 재상직을 지내기도 하였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출생: 1749년 8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사망: 1832년 3월 22일 (82세), 독일 연방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바이마르
.직업: 시인, 소설가, 극작가, 철학자, 과학자
.국적: 독일
.활동기간: 1767 ~ 1832년
.장르: 시문학, 소설, 희곡
.배우자: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
.주요 작품: 파우스트
.저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색채론(괴테전집 12), 친화력 등
.연극: 파우스트, 에그몬트,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에, 토르콰토 타소, Faust, Part One 등
.약력: 1765년 라이프치히대학교 법학, 1771년 변호사 개업, 1775-1785년 베츨러 고등법원-바이마르공국 재상, 1791년 궁정극장 감독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 (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 (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 (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 (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 (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 (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 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 (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 생애 및 활동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다. 왕실고문관인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르 사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학과 성경을 읽었다. 그는 북독일계 아버지에게서 ‘체격과 근면한 생활 태도’, 남독일계 어머니에게서 예술 사랑과 ‘이야기 짓는 흥미’를 이어받았다. 어린 나이에 신년시를 써서 조부모에게 선물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67년에 첫 희곡 ‘연인의 변덕’을 썼다. 1770년 슈트라스부르크 ( 스트라스부르) 대학 재학 당시 호메로스, 오시안,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에 눈을 떴으며, ‘ 질풍노도 운동 (Sturm und Drang)’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법률 사무소 견습생일 때 약혼자 있는 샤를로테 부프와 사랑에 빠지는데, 이때 체험을 소설로 옮긴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이다. 그는 1775년 바이마르로 이주했으며, 이 도시를 문화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 했다. 행정가로 국정에 참여해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고,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지질학, 색채론 등 인간을 설명하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786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했고, 1794년 실러를 만나 함께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1796년에 대표적인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썼다. 1805년 실러의 죽음으로 큰 충격에 빠지지만, 이후 창작 활동과 연구는 끊임이 없었고, ‘색채론’ (1810),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1821), ‘이탈리아 기행’ (1829) 등 완성했다. 스물네 살 구상하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완성한 역작 ‘파우스트’를 마지막으로 1832년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천재교육을 받았으며, 7년 전쟁 중 그의 고향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 극과 회화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레트헨과의 사랑 (1763 ~ 1764년)이 깨어진 후 16세 때 입학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 (1765 ~ 1768년), 안나카타리나 쇤코프와 연애를 하였고, 이 체험을 통해 로코코풍의 시나 희곡을 발표하였는데 목가조의 희극 ‘애인의 변덕’, ‘공범자’가 그것이다. 분방한 생활로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하여 요양 중 (1768 ~ 1770년), 수산네 폰 클레텐베르크 (1723 ~ 1774)와의 교제를 통하여, 경건한 종교감정을 키웠으며, 또한 신비과학이나 연금술에 흥미를 기울였다. 회복 후, 177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법률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러던 중에 헤르더와 상봉해, 문학의 본질에 눈뜨고 성서, 민요,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에 친숙해졌다. 그의 영향으로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당시 지배적이었던 프랑스 고전주의 미학에의 반발이 심해졌다.
제센하임의 목사의 딸인 프리데리케 브리온을 사랑하여 민요풍의 청신소박한 서정시를 지었고, 대승원의 건물을 보고 고딕 건축의 진가를 터득 하기도 하였다. 귀향후 변호사를 개업 (1771년) 하였으나, 관심은 오히려 문학에 쏠려 ‘괴츠 폰 베를린힝겐’ (1773년)의 초고를 정리하고 다름슈타트의 요한 메르크 (1741 ~ 1791)와 친교를 맺었다. 1772년 법률실습을 위해 베츨라어 고등법원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샤를로테 부프 (1753-1828)를 알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슈투름 운트 드랑기의 대표작인 희곡 ‘괴츠 폰 베를린힝겐’ 및 비극 ‘클라비고’, 비극 ‘슈텔라’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여 작가적 지위를 확립했다.

– 초기 바이마르
1775년 4월 릴리 쇠네만과 약혼했지만 얼마 후 파혼하고, 당시 18세였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 카를 아우구스트 (de)에게 초청되어 11월 바이마르에 도착했다. 바이마르 시절 전기의 약 10년간 (1775 ~ 1786년)에는 정무를 담당하여 추밀참사관, 추밀고문관, 내각수반으로서 치적을 쌓는 한편 광물학·식물학·골상학·해부학 등의 연구에도 정진했다.
그 밖에 카를 아우구스트 공의 모후 아나 아말리아, 시인 크리스토프 빌란트, 고전적 교양미가 풍부한 폰 크네벨 (de) 소령, 궁정가수 코로나 슈뢰터 (de) 등 궁정 사람들과 밀접하게 친교했다.
괴테는 이런 정무나 사회 및 자연연구를 통하여 자연과 인생을 지배하는 법칙을 터득하고 자기 억제를 배우며 슈투름 운트 드랑적인 격정을 극복하여 점차 평정과 원숙의 도를 더해 갔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샤를로테 폰 슈타인 (de) 부인에 의한 감화가 있었음을 지적해야 한다. 그녀는 우아하고 감성적인 일곱 아이의 어머니였으나, 괴테의 이상적인 여인상이었다. 부인에 대한 애정과 동경, 절도와 체념 등이 한 덩어리로 시인에게 내면적 평정을 주었다. 이 내적 변화를 그린 저술이 비극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 (de)’ (산문판 1779년), ‘토르콰토 타소 (괴테) (de)’ (작성: 1780. 3. 30 ~ 1789. 7. 31)와 서정시 ‘인간성의 한계’, ‘신성’ (神性) 등의 시 작품들이다.

– 이탈리아
그러나 다른 한편 초기 바이마르의 이 10년간은 궁정생활의 중압으로 마음의 안정을 빼앗겨 정돈된 창작활동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으므로 1년반에 걸쳐서 이탈리아로 (1786 ~ 1788년) 여행을 떠났다. 이에 관해서는 후일 ‘이탈리아 기행’ (1816)과 ‘제2차 로마 체재’ (1829)에 자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 괴테는 남국의 밝은 자연과 고미술에 접함으로써 고귀한 내용을 완성된 형식으로 표현하는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 (운문판 1786년)와 ‘토르콰토 타소’ (최초출판: 1790년 2월)는 그의 대표작이며, ‘에그몬트’ (1787)는 슈투름 운트 드랑에서 고전주의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작품이다.
– 바이마르
괴테는 1788년 6월 무렵에 독일로 귀국하여, 그해 7월에는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와 동거하여 1789년 12월 25일 장남 아우구스트를 낳았다. 그런데 1789년 7월 14일에 발발된 프랑스 혁명으로 괴테는 1792년에는 아우구스트 공을 따라 제1차 대프랑스 전쟁에 종군하여 발미 전투 (1792년 9월)와 마인츠 포위전 (1793년 4월 ~ 1793년 7월)에 참전했다.
그리고 그 직후 독일 문학사상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괴테와 실러의 상봉이었다. 1794년 7월말, 예나 자연과학 회의의 귀로에 종합적, 직관적인 괴테와 이념적, 분석적인 실러는, 괴테의 식물변형론을 통해 상호 이해하여, 1805년의 실러 별세 때까지 친교를 계속했다. 양자간에 교환된 서한은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가장 귀중한 자료로 되어 있다. 실러와 사귀는 동안에 저술된 주요작품에는 교양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1795/1796)와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 (1797) 가 있다.
실러의 사후, 만년에 접어든 괴테는 ‘시와 진실’ 등 일련의 자서전을 저술하기 시작하는 한편, 이미 착수했던 창작의 완성에 힘썼다. ‘친화력’ (親和力),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와 ‘파우스트’를 완성했고, 또한 ‘서동시집’ (1819), ‘마리엔바트의 애가’ (1823)를 저술했다. 그의 만년에 관해서는 요한 페터 에커만 (1792 ~ 1854)의 ‘괴테와의 대화’에 상술돼 있다.

– 다재다능
문학가로서도 명성이 높지만 이 외에 여행기도 쓰고 연극 감독으로서 궁정무대를 통솔하기도 했다. 특히, 연극무대 경영 · 연출 · 배우 교육에도 재능이 상당해서 자신의 희극들을 유감없이 연극으로 잘 묘사하여 연극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둬들였다.
거기에 식물학에도 관심이 깊어서 전문가급의 연구를 했으며 과학자들을 후원하고 식물학에 대한 책도 집필했다. 이 저서는 식물학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식물학자인 베르너 라이히트아젠은 괴테에게 “식물학자로 연구하셔도 되겠습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괴테씨의 열정과 지식을 봐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라는 편지까지 썼다. 실제로 괴테의 과학적 업적은 당대 생물학자중에서 최고수준이었다.
다만 식물학과는 별개로 물리학자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괴테 본인이 물리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물리학은 아이작 뉴턴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반면, 괴테는 독일의 낭만주의자로서 뉴턴과 대척점에 서있었다. 괴테는 자연을 나누어 수량화 하는 뉴턴 역학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자연은 연속적인 것’이라는 유기적 우주관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을 극과 극 간의 조화로 설명하는 자신만의 자연철학까지 시도했었다. 심지어 괴테는 광학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 뿐이라고 했으나 물론 현대의 승자는 뉴턴이 된다.
더불어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 재상으로 재직할 당시 정치인으로서 재능이 상당함을 보여줬다. 프랑스군과 전쟁을 대비하고 물자비축 및 비상 체제로 들어가 자신이 재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다했다. 발미전투에서는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1735 ~ 1806)의 참모로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다만 전쟁의 결과에서 나타나듯이 괴테에게 군인이나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없었다. 그러나 괴테는 글을 잘 쓰는 재능으로 당시 참전 기록에 대하여 세세한 묘사를 했다. 사실 공작부터가 군인으로 유능한 데다 그의 곁에는 이미 화려한 참모진이 있었기에 굳이 괴테가 참모로서 책임을 다 할 필요도 없었다.
또 그는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평생 동안 그림 작품이 1000점이 넘을 정도로 예술에 있어서도 그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 말년
괴테는 만 82살까지 장수했지만 아들과 아내 모두를 먼저 여의었기에 이를 늘 서글퍼했다. 10살 밑이던 후배 실러와도 친구처럼 지냈는데 1805년 실러도 46살 한창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 때의 일화로 1805년 새해 연하장을 실러에게 쓰던 괴테는 실수로 새로운 해를 마지막 해라고 잘못 써서 기겁하고 다시 연하장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괴테는 뭔가 느낌이 안 좋다며 실러를 걱정했고 예상대로 실러는 그 해에 사망했다.
괴테는 실러가 죽었단 소식을 듣고 ‘그래? 어쩐지 예감이 안 좋았어’라고 말하곤 조용히 서재로 들어가 홀로 울며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괴테의 임종 당시 그의 곁을 지킨 식구는 과부가 된 며느리인 옷틸리에 폰 괴테 (1796 ~ 1872)와 손자인 베르터 폰 괴테 (1818 ~ 1885), 프라이헤르 폰 괴테 (1820 ~ 1883), 손녀인 알마 폰 괴테 (1827 ~ 1844) 이렇게 4명이었다. 괴테는 며느리에게 잘 대해주었으며 당연히 재산을 그녀에게 모두 물려주었다. 살아있을 때에 이미 부와 명예, 모든 것을 누렸기에 괴테의 80살 생일 때는 고향 마을에서 그날을 경축일로 기리며 잔치를 열었을 정도였다. 죽기 전에 온 여러 유명인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며느리 손을 잡으면서 이제 마음껏 살라는 말을 한 다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좀 더 빛을… 조금 더 빛을…”
또는 하인에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전해다오… 빛이 더 들어오게….”라고 번역한 것도 있다.
더불어 괴테는 침대에 누워 죽었다고 알려졌는데, 괴테는 의자에 앉아 삶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괴테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유언을 남겼고 침대로 모시려는 가족들에게 그냥 여기서 잠들게 해달라고 하여 거기서 숨을 거뒀다. 당연하지만 그 안락의자는 그대로 지금도 괴테 하우스에 남아있다.
그밖에 평생을 쓰던 많은 펜이니 책상이니 무수한 흔적은 200년이 되어간 지금도 남아있다.
○ 업적
궁정극장의 감독으로서 경영·연출·배우 교육 등 전반에 걸쳐 활약했다. 1806년에 ‘파우스트’ 제1부를 완성했고 별세 1년전인 1831년에는 제2부를 완성했으며, 연극을 세계적 수준에 올려놓았다. 자연과학 분야에 까지 방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연극면에서는 셰익스피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고전작가들을 평가했고, 또한 그리스 고전극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 종교
괴테는 루터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리스본 지진 (1755)과 7년 전쟁 (1756 ~ 1763)을 계기로 신앙에 회의를 가졌다. 1782년 괴테는 “난 반 기독교인이나 말뿐인 기독교인 (un-christian)이 아니라 비 기독교인 (non-christian)이다.”라고 말했다.

○ 작품
– 주요 작품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이탈리아 기행
파우스트
서동시집
시 〈프로메테우스〉
연인의 변덕
공범자들
괴츠 폰 베를리힝겐
에르빈과 엘미레
클라비고
스텔라
에그몬트
흥분된 사람들
이피게니에
헤르만과 도로테아
사생아
색채론
시와 진실

* 작품들 목록
–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친화력
– 희곡
파우스트
오누이
에그몬트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토르콰토 타쏘
– 시
프로메테우스
산 위에서
발견
마왕 – 젊은 날의 시. 이하 출처는 문예출판사 “괴테 시집”, 송영택 옮김.
강가에서
봄의 축제
매정한 아가씨
기쁨
슬픔의 기쁨
아모르의 무덤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는
이별
희망
회색으로 흐린 아침
채색된 리본
사냥꾼의 저녁 노래
크리스텔 생각
들장미
오랑캐꽃
물레질하며
내 곁을 떠나지 마라
호수 위에서
새로운 사랑, 새로운 삶
벨린데에게
산 위에서
귀여운 릴리
릴리에게
목에 걸고 있던 하트 모양의 금메달에게
근심
용기
.초기 바이마르 시절의 시
밤의 생각

나그네의 밤 노래
나그네의 밤 노래 – 위의 시와 제목이 같다. 괴테가 마지막 생일날, 키켈한이라는 산장 벽에 젊은 시절 적어둔 이 시를 찾아가 읽으며 눈물지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명심
쉴 사이 없는 사랑
법정에서
달에게
인간의 감정
훈계
물 위의 영혼의 노래
간청
쌀쌀맞은 아가씨에게
잃어버린 첫사랑
외롭게 사는 사람은
슈타인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슈타인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코프타의 노래
눈물과 함께 빵을 – 내용은 1연은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수많은 괴로운 밤을 잠자리에서 울면서 새운 적이 없는 사람은 너희들은, 하늘의 힘을 모른다. 2연은 너희들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고, 불쌍한 자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그러고는 심한 가책을 느끼게 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세상이니까. 여담으로 위 소개가 이 시를 인용해서 설명하였다.
그림움을 아는 사람만이
신성
그대는 아는가
.이탈리아 여행 이후의 시
나는 이 곤돌라를
사람의 일생
소위 자유의 사도라는 것이
로마의 비가 V
로마의 비가 VIII
로마의 비가 IX
로마의 비가 X
로마의 비가 XVII
로마의 비가 XVIII
바다의 고요
운이 좋은 항해
이 새하얀 옷을
말하라고 하지 마시라
문간마다 가만가만 다가가서
필리네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미뇽에게
그것이 참다운 사랑이다
저는 왜
모든 계층을 통틀어서
회상
리나에게
일찍 찾아온 봄
자기기만
양치기의 서러운 노래
그리움
마법사의 제자
– 여행기
이탈리아 기행 :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문학적, 예술적 가치가 상당하다.
○ 명언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울먹이며 다음날을 기약하면서
캄캄한 절망의 시간을 지내보지 않은 사람은,
그대 어두운 힘을 모르리.” – 빌헬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외국어를 모르는 자는 모국어에 대해서도 모른다.”
“나는 인류의 모범을 찾기 위해 역사를 살펴보았고 결국 무함마드에게서 그 모범을 찾았다.”
어떤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 내포보다는 외연을 살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