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3년 7월 29일,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이끈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 ~ 1833) 별세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년 8월 24일 ~ 1833년 7월 29일)는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이끈 정치인이다.

–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출생: 1759년 8월 24일, 영국 킹스턴어폰헐
.사망: 1833년 7월 29일, 영국 런던 카도간 플레이스
.배우자: 바바라 윌버포스 (1797 ~ 1833)
.자녀: 사무엘 윌버포스, 헨리 윌버포스, 로버트 윌버포스, 윌리엄 윌버포스
.학력: Hull Grammar School, St John’s College, Pocklington School
.직업: 정치인
.업적: 노예제 폐지
미국에 에이브러햄 링컨이 있다면 영국엔 윌버포스가 있다고 할 정도로, 영국 정치인들이 닮고 싶어하는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귀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인물이다.

○ 생애 및 활동
할아버지인 윌리엄 윌버포스 (1690년 – 1776년)는 발트 교역에서 부자가 되었고, 아버지는 로버트 윌버포스 (1728년 – 1768년)이다. 윌버포스는 만 18세인 1776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학생들의 모임에 몰두하고 공부에 열중하지는 않았다. 친구 중에서, 특히 윌리엄 피트를 사귀었고, 둘의 우정은 평생 계속되었다. 만22세인 1781년에 학사학위를, 만29세인 1788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성공회 교회사에서는 윌리엄 윌버포스를 로버트 레이크스, 존 벤 신부(Rev. John Venn) 등과 더불어 18세기 성공회의 3대 복음주의자로 평가한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성공회 신자였기 때문에 그의 노예제 반대운동을 기독교적 정치운동의 모델로도 볼 수 있다.
18세기 당시 영국은 경제의 주된 원동력이었던 노예제 폐지 문제로 국회가 매일 대립각을 세우며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윌버포스는 1784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1787년부터 노예제 폐지운동에 평생을 몸바쳤다. 다행인 것은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윌리엄 피트가 총리여서 반대파들의 공격을 방어해 주었다는 점이다.
1807년 드디어 영국 내에서의 노예무역금지법안이 통과되었다. 이후 1814년에는 노예제 자체를 폐지시키기 위하여 온갖 운동을 조직, 법안을 만들었고 1833년 7월 29일 생을 마감하기 3일 전인 26일, 노예제도 폐지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것을 목격하고 눈을 감았다.
윌버포스가 주장한 노예제 폐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도덕- 윤리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보다 현실적인 국익 문제도 걸려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윌버포스는 노예무역 금지법안에 대해 “필요에 따라선 영국이 다른 국가의 선박도 수색해서라도 노예 무역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를 적용할 경우 노예 무역의 단속을 한다는 빌미로 영국 해군이 마음대로 타국 선박들을 수색, 억류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다. 물론 당장 노예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막대한 상황에서 자국의 법을 억지로 타국 상선에까지 적용시켜 국제적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노예무역금지법을 통과시킨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 이익이 될 수 없었다. 또한, 당시 영국은 최강의 해군을 갖춘 나라였지만, 타국의 상선을 마음대로 수색할 정도는 아니었고, 군함으로 상선을 마음대로 수색하면 영향력이 확대되는 게 아니라 전쟁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조치였지만 법안이 통과된 때는 바야흐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 있던 나폴레옹 전쟁 시대 (미국과도 전쟁철)이었으므로, 영국은 국력뿐 아니라 명분과 실리까지 쥐고 수만 명의 노예를 바다 위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서도 이러한 노예무역 폐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빈회의에서 노예무역 폐지조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노예무역 폐지를 빌미로 타국 선박을 수색한 사례도 극히 적었다.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법안에 대해서 미국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타산적인 부분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산업혁명의 초입으로 흘러가는 시대의 경제적인 동기도 있지만 윌버포스가 정치인이었던 것만큼 그에게 동조했던 정치인들은 당시 영국내의 정치적 상황이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자식 중 새뮤얼 윌버포스가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셋째 아들). 새뮤얼은 영국 성공회 주교로 활동하였는데 과학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화론에 대한 논쟁에서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그 원숭이는 당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중 어느 쪽 조상입니까?”라고 말했다가 토머스 헉슬리에게 “나는 진리를 왜곡하려 드는 당신 같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원숭이의 자손이 되겠습니다.”라고 반격을 당한 사람이 바로 그이다.
이 때문에 새뮤얼 윌버포스를 변호하는 쪽에서는 새뮤얼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인종차별에 민감했고, 진화론이 인종차별에 악용될 것이라고 생각해 반감을 가졌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주장도 무시당하거나 반론당하는데 바로 용불용설에 나오듯이 이걸 체계적으로 주장한 라마르크가 죽을 때 조사로 비웃던 고생물학자 조르주 쿠비에 (Georges Cuvier, 1769 ~ 1832)만 해도 종의 정착이라면서 창조 이후 종은 그 모습 그대로라고 진화론과 반대였음에도 흑인이나 아시아인은 원숭이리고 인종차별을 주장해오고 신이 원래부터 차별하여 백인과 차별을 두었다고 믿던 사람이었다. 이렇듯이 얼마든지 진화론 아닌 이들도 인종차별에 창조론을 인종차별에 이용하는 것도 얼마든지 있기에 진화론만 악용되는 게 아니다. 참고로 쿠비에는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끌려와서 서커스 구경거리로 비참하게 살던 흑인 여인 사라 바트만 (Sarah Baartman, 1789 ~ 1815)이 죽자 해부하곤 원숭이에 가깝다고 주장하던 인물인데 같이 해부에 참여한 다른 이들이 백인이나 차이가 없다고 반론할 때도 화냈던 바 있다.
– 행동하는 신앙
교회사에서는 윌리엄 윌버포스를 로버트 레이크스 (주일학교 창설자), 존 벤 신부 (Rev.John Venn)등과 더불어 18세기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자중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 성공회 신자로서 그의 노예제도 반대운동을 기독교 정치운동의 모델로 볼 수 있다
– 한계
윌리엄 윌버포스는 정치 및 사회 제도에 대해 그의 정치적인 동지이기도 한 에드먼드 버크의 영향을 받아서 신분제에 대해 보수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애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인해 불평등한 인간의 신분제에 대한 도전과 인권에 대한 주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윌버포스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토머스 페인이 저술한 ‘인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이는 당시 영국의 시민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 기타
– 영화화 : 어메이징 그레이스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국 하원의원인 윌리엄 윌버포스가 노예제를 폐지하는 과정을 그렸다. 한국에서는 2008년 3월에 개봉하였다.
영화는 고증이 상당히 잘 된 영화이며, 윌버포스와 클래펌 파의 정치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적인 정치운동인 설탕 불매운동과 포스터 및 배지 제작, 서명운동 등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 일을 진행하면서 윌버포스가 어떻게 몸이 망가져 가는지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 서적 : 윌리엄 윌버포스의 위대한 유산
.윌버포스는 노예해방의 십자군일 뿐 아니라, 기독교 개혁가로서 그의 저작 ‘윌리엄 윌버포스의 위대한 유산’ 은 오늘날 교회의 부흥에도 필요한 음성을 들려준다. 고전이 된 그의 저서「이 나라의 상류층과 중산층에서 자칭 기독교인들 가운데 널리 퍼진, 진정한 기독교와 전혀 다른 신앙 체계에 대한 실제적 고찰」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고래가 된 새우’ 윌리엄 윌버포스를 알게 될 것이다. 윌버포스의 가장 큰 소망과 기도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였다.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게 되기 바란다.
○ 어록
“이 이야기를 듣고서도 현실을 외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 이후로는 이 사실을 몰랐다고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