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6년 1월 3일, 일본의 무사 • 사업가로 에도막부 타도와 메이지유신에 영향을 준 사카모토 료마 (坂本 龍馬, 1836 ~ 1867) 출생
사카모토 료마 (일: 坂本 龍馬, 덴포 6년 음력 11월 15일 / 1836년 1월 3일 ~ 게이오 3년 음력 11월 15일 / 1867년 12월 10일)는 도사번 고시 (鄕士) 계급 출신으로, 일본의 무사 (武士) 겸 사업가이다.
료마는 탈번하여 지사 (志士)로서 활동하면서 무역회사와 정치조직을 겸한 가메야마 조합을 세웠고, 이 회사는 훗날 개칭해 가이엔타이가 되었다.
그리고 삿초 동맹의 알선, 대정봉환의 성립 등을 위해 노력하여 에도 막부 타도 및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주었다.
대정봉환 1개월 후, 교토의 여관 오미야에서 료마는 암살당했다.
이러한 업적을 남긴 료마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후, 지명도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에도 막부 말기의 풍운아로서 일본 국민의 인기를 얻었다.
쇄국과 개화의 갈림길에서 과감한 결단으로 역사를 개척한 료마의 드라마틱한 모습은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 연표 [연호 (서기) 연령, 료마의 동향, 전국의 동향]
덴포 6년 (1835년) 1세 (11월 15일) 료마 출생.
고카 3년 (1846년) 12 (이 해) 쿠스야마 사숙에서 공부하다가, 곧 그만둠. (이 해) 어머니 사카모토 고 사망.
가에이 원년 (1848년) 14 (이 해) 히네노 벤지의 도장에 입문해 오구리 류 검술을 배움.
가에이 6년 (1853년) 19 (4월) 에도로 유학, 북진일도류 지바 도장에 입문. (6월~9월) 페리 제독 내항 당시, 도사 번의 임시 시나가와(品川) 해안 경비대로 복무. (12월) 사쿠마 쇼잔의 사숙에 입문.(6월 3일) 페리 제독이 흑선(黑船)을 타고 우라가(浦賀) 해안에 내항.
안세이 원년 (1854년) 20 (6월 23일) 검술 수행이 끝나 도사에 돌아옴. (이 해 겨울) 가와다 쇼료의 사숙에 들어가 서양 문물과 세계 정세에 대해 배우고 계몽됨.
안세이 2년 (1855년) 21 (12월 4일)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 사망. (3월 31일) 미일 화친 조약 체결.
안세이 3년 (1856년) 22 (이 해) 다시 임시 해안 경비대로 에도에 옴. (이 해) 다시 지바 도장에서 유학.
안세이 5년 (1858년) 24 (1월) 지바 도장에서 《북진일도류 장도 병법목록(北辰一刀流長刀兵法目錄)》1권을 하사받음. (9월) 검술 수행을 마치고 귀국.(6월 28일) 미일 수호 통상조약 체결. (9월 7일) 안세이 대옥(安政의大獄) 시작.
안세이 6년 (1859년) 25 (2월 26일) 도사번 번주 야마우치 도요시게 은거, 이 때 부터 야마우치 요도(山內容堂)라고 불림. (10월 11일) 막부로 부터 칩거, 근신 명령이 내려짐.
만엔 원년 (1860년) 26 (3월 24일) 사쿠라다 문 밖의 변 발발.
분큐 원년 (1861년) 27 (9월) 도사 근왕당에 9번째로 가입. (10월 11일) 다케치 즈이잔(武市瑞山)의 밀서를 가지고, 조슈로 향함.
분큐 2년 (1862년) 28 (1월 14일) 조슈의 하기(萩)에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와 면담., (3월 24일) 사와무라 소노죠(澤村惣之丞)와 함께 탈번. (10월 경) 가쓰 가이슈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제자로 들어감. (1월 15일) 사카시타 문 밖의 변(坂下門外의變) 발발. (4월 8일) 도사 번의 중신 요시다 도요 암살.
분큐 3년 (1863년) 29 (2월 25일) 가쓰의 중재로 탈번의 죄를 용서받음. (4월 2일) 오쿠보 이치오(大久保一翁)와 면담, 대정봉환론을 배움. (4월 23일) 고베 해군 훈련소 설립을 허가받음. (5월) 고베 해군 훈련소 설립 자금 조달을 위해 가쓰의 사신으로서 에치젠 국 후쿠이 번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슌가쿠에게 천냥을 빌리러 감. (10월) 고베 해군 훈련소 책임자가 됨. (12월) 도사 번으로부터 돌아오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수행하지 않고 다시 탈번. (5월 10일)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에서 양이 결행. (6월) 도사 번이 도사 근왕당 탄압을 시작. (8월 18일) 발발. (9월 21일) 다케치 즈이잔과 도사 근왕당 주요 당원 투옥.
겐지 원년 (1864년) 30 (2월 10일)외국의 조슈 번 공격의 중재자로서, 가쓰가 나가사키에 파견되어 료마 일행도 참석. (2월 14일) 가쓰의 사신으로서 구마모토에 있는 요코이 쇼난을 방문. 나라사키 료를 만남. (5월 14일) 고베 해군 훈련소 발족. (8월 경) 가쓰의 사신으로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방문. (11월 10일) 가쓰가 군함 부교직에서 파면당함. 고베 해군 훈련소가 사실상 폐쇄, 료마 일행은 사쓰마 번의 보호를 받게됨. (1월) 산요회의가 시작됨. (6월 5일) 이케다야 사건 발발. (7월 19일) 금문의 변 발발. (7월 23일) 막부가 제 1차 조슈 정벌 명령을 내림. (8월 25일) 시모노세키 전쟁 발발.
게이오 원년 (1865년) 31 (5월 1일) 가고시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의 집에서 체류. (5월 19일) 다시 구마모토의 요코이 쇼난을 방문. (5월 24일) 다자이후 천만궁(太宰府天滿宮)에서 산죠 사네토미 (三條實美)를 알현. (음력 5월 6일) 기도 다카요시 (木戶孝允)와 면회. (윤 5월 29일) 나카오카 신타로 (中岡愼太郞)와 함께 시모노세키를 떠나 상경. (음력 5월) 사쓰마 번의 원조를 얻어, 가메야마 조합을 설립. (6월 24일) 사쓰마의 다이묘 저택에서 사이고와 회견해 사쓰마 번의 명의로 조슈 번의 무기를 구매하는데 동의를 얻음. (음력 5월 11일) 다케치 즈이잔, 할복.
게이오 2년 (1866년) 32 (1월 21일) 료마의 알선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모여 삿초 동맹을 체결. (1월 23일) 데라다야 사건 발발. (2월 5일) 기도 다카요시에게 요청받고 삿초 동맹 맹약서에 서명을 함. (3월 5일) 데라다야 사건으로 인한 부상 치료를 위해 사이고의 권유로, 아내 오료와 함께 가고시마를 여행함 (3월~4월). (6월 17일) 시모노세키에서 조슈 대 막부 전쟁에 참여. (7월) 이 무렵, 경영난으로 가메야마 조합 해산을 고려. (6월 7일~) 제 2차 조슈 정벌 시작. (8월 1일) 조슈 번의 공세로 고쿠라 번이 고쿠라 성을 함락당함.
게이오 3년 (1867년) 33 (1월 13일) 미조구치 히로노죠 (溝淵廣之丞)의 주선으로 도사번 산세이 (參政) 고토 쇼지로 (後藤象二郞)와 만남. (4월 초순) 가메야마 조합 대장이 되어 조합을 개편해 가이엔타이로 개칭함. (4월 23일) 기슈 번 메이코마루 호와 충돌해 이로하마루 호가 가라앉음. (5월 29일) 기슈 번으로부터 거액의 배상금 지불을 약속받음. (6월 9일) 고토 쇼지로와 함께 선중팔책을 책정. (6월 22일) 사쓰도 맹약 (薩土盟約) 성립. (7월 29일) 영국 이카루스 호 선원 살해 혐의가 가이엔타이에 회부됨. (9월 10일) 이카루스 호 사건 해결. (10월 10일) 막부의 와카도시요리 (若年寄) 나가이 나오유키(永井尙志)를 만나 대정봉환 건의의 채용을 요구. (10월 16일) 오자키 사부로 (尾崎三良)와 함께 《신관제의정서 (新官制擬定書)》를 작성. (11월 상순)《신정부강령팔책》의 초안을 작성. (11월 15일)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 오미야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암살당함 (오미야 사건). (1월 9일) 메이지 (明治)왕, 천조(踐祚). (7월 6일) 이카루스 호 사건 발생. 사쓰마 번이 도사 번에 사쓰도 맹약 파기를 통보. (10월 3일) 도사 번이 대정봉환 건의 안을 제출. (10월 14일)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대정봉환을 상주(上奏), 이 날 사쓰마 조슈 양 번에 막부 타도의 밀약이 내려짐. (12월 9일) 왕정복고 (王政復古) 정변 발발.
○ 소설 ‘료마가 간다’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는 시바 료타로의 장편소설이다. 산케이 신문 석간에 1962년 6월 21부터, 1966년 5월 19일까지 연재되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분게이슌주에서 간행되었다.
에도 막부 말기의 일본을 선도한 사카모토 료마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이며, 인기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대표작이다. 당시까지 료마는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는데, 메이지유신 (명치유신)의 숨은 공로자로 료마라는 인물이 있었음을 많은 일본인들이 알게되었고, 일본에서의 료마의 이미지는 이 작품으로 인해 만들어졌다고 말해진다. 작가가 역사 속에 숨어있는 인물을 발굴해서 대중에게 널린 알린 케이스다. 작품 안에서 료마 (竜馬)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료를 ‘龍’라고 표기하지 않은 이유는 작가 자신이 픽션으로써의 그를 썼기 때문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도사번 상인계급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료마는 어린시절 변변치 않은 아이였다. 그런 그가 도쿄로 상경하여 무사수업에 나선다. 그런 수업기에 1853년 미국의 군함 4척이 나타나 대포를 쏘는 사건이 발생한다. 흑선의 압력으로 일본은 개국으로 방향을 틀고 많은 인사들은 막부의 무능함에 실망한다.
이 작품은 료마를 중심으로 막부에 대항하는 수많은 개혁파 인물들이 등장한다. 교토를 중심배경으로 벌어지는 싸움과정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중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인물들이 메이지유신 후 일본 개혁의 중심들이 되는데,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 등이 그런 인물이다. 료마는 안타깝게도 그 혁명의 완수를 보지 못하고 교토에서 1867년 사망했다.
료마는 약간 특이한 인물이었다. 뭔가 어리숙해 보이고 부족해 보이면서도 낙천적인 기질이었으며 무술은 또 고수였다. 료마는 도사번에서도 이류 계급출신이고 개혁파의 선구자도 아니었다. 전란을 통해 많은 뛰어난 인재들이 희생되면서 그의 역할이 서서히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무술 고단자이면서도 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당시 우국지사들과는 달리 해군의 중요성과 무역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세계관이 넓었던 막부인물인 가쓰 가이슈를 스승으로 모시며 시국관을 나누고 해군을 키우는 데 노력한다. 료마를 따르던 도사번의 인물 중에는 후에 미쓰비시 그룹의 창립자인 이와사키 야타로도 있었다.
– 반막부
개혁파는 조슈 번 (현재 야마구치 현)과 사쓰마 번 (현재 가고시마 현)이 중심이었는데 이들은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싸우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특히 개혁파의 선도세력 조슈 번의 피해가 컸다. 이때 이들 세력을 중재한 것이 료마였다. 아울러 눈치를 보던 도사 번 (현재 시코쿠의 고치 현)까지 개혁파에 합류시킴으로써 메이지 유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유신 후 조슈 번은 육군의 핵심세력이 되고, 사쓰마 번은 해군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대하드라마나 각 민영방송국에서 수차례 드라마화 되었다. 한국에서는 제국의 아침 (료마가 간다 번역판)이라는 소설로 번역되었다. 최근에는 다시 <료마가 간다 (전 10권)> (시바 료타로 지음, 이길진 옮김, 창해)로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도 료마를 주인공으로 하는 일본만화들도 번역 출판 중에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단치 않은 인물 료마를 지나치게 미화해서 그렸다는 평가도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