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8년 7월 8일, 독일의 발명가•공학자이자•군인•외교관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 (Ferdinand Adolf August Heinrich Graf von Zeppelin: 1838 ~ 1917) 출생
페르디난트 아돌프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폰 체펠린 백작 (독: Ferdinand Adolf August Heinrich Graf von Zeppelin: 1838년 7월 8일 ~ 1917년 3월 8일)은 독일의 발명가, 공학자이자, 군인, 외교관으로, 남북전쟁과 보불전쟁에 참가했으며, 체펠린 비행선의 개발자이다.

– 페르디난트 아돌프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폰 체펠린 백작 (Ferdinand Adolf August Heinrich Graf von Zeppelin)
.출생: 1838년 7월 8일, 바덴 대공국 콘스탄츠
.사망: 1917년 3월 8일 (79세),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부모: 프리드리히 제롬 빌헬름 칼 그라프 폰 체펠린, 아멜리 프랑수아즈 폴린
.배우자: 이자벨라 폰 볼프 남작부인
.자녀: 헬라 폰 브란덴슈타인 체펠린, 헬렌 폰 체펠린
.기타 이력: 독일 백작 작위자이며 발명가
.수상: 흑수리 훈장, Order of the Zähringer Lion, Albert Order, 왕관장 등
*바덴 대공국 (1855~1917년), 독일 제국 (1871~1917년)
.복무 기간: 1858년 ~ 1890년
.근무: 독일 제국 육군 보병군단
.최종 계급: 독일 제국 육군 중장
.지휘: 군단장
.주요 참전: 미국 내전, 보불 전쟁
페르디난트 그라프 폰 체펠린은 독일의 군인이자 비행선 제조자다.
오늘날 변속기로 유명한 자동차 부품 회사 ZF도 그가 창립했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애
체펠린은 1838년 7월 8일 보덴호에 있는 콘스탄츠에서 태어났다.
이후 17세가 되어서 체펠린은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중위로 입대한 뒤 23세 때 남북전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전쟁에 환멸을 느낀 체펠린은 미시시피 강의 지리학 탐험대에 참가했고 기구를 접하게 되었다.
이윽고 유럽으로 돌아온 뒤 체펠린은 보불전쟁에 참가했다.
체펠린은 보불전쟁에서 무훈을 세우고 1872년 장군이 되어 퇴역했다.
보불전쟁이 끝나고 체펠린은 외교관이 되었으나 빌헬름 2세와 의견충돌로 싸우고 난 뒤 화가 난 황제에 의해 모든 공직을 빼앗겨 버렸다.
1873년에 비행선의 건조를 청하는 서류를 당국에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0년 7월 2일에, 길이 128m의 루프트쉽 체펠린 1호 (통칭 LZ 1)가 완성했다.
체펠린 백작은 1917년 3월 8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장례식장에 그의 비행선이 위를 지나가자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독일 국가를 불렀다.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 Ueber Alles in der Welt!”
독일! 모든 것 위의 독일! 세상의 모든 것 위의! _ 독일인의 노래 1절 패러디

- 경식 비행선 개발
체펠린은 1893년, 설계도를 당국에 제출했다. 11마력 가솔린 엔진 2기의, 길이 117m의 크기였다.
그러나 검토 위원들은 “금속 뼈대로 된 것은 하늘에 뜰 수가 없고 뜬다고 해도 너무 크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로 기각해 버렸다.
체펠린은 결국 자비로 비행선을 만들었다. 격납고를 만들 땅은 없었기 때문에 보덴 호수의 수면에 만들었다.
1900년 7월 2일에, 길이 128m의 루프트쉽 체펠린 1호 (통칭 LZ 1)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비행하고 15분쯤 뒤, 비행선이 부러져 버렸다. 수리 이후 다시 비행을 했으나, 두 번째 비행에서는 공중에서 엔진이 멈춰 버렸다. 자금이 모자라진 체펠린은 결국 LZ 1을 해체하여 모두 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개량한 LZ2와 LZ3을 만들었으며, LZ3은 1907년에 성공적으로 비행함으로써 어느 정도 관심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한다.
이후 그는 LZ4를 만들었고, 이 비행선을 본 독일 정부는 “24시간 동안 성공적으로 비행하면 지원”을 약속한다.
LZ4는 1908년 6월 20일에 비행을 시도했고 이 비행은 많은 사람들의 큰 관심을 불러모았지만, 폭풍을 피하기 위해 착륙했다가 사고로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 사고로 전 독일이 울었다. 모든 독일인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체펠린 백작에게 새 비행선을 만드는 데 쓰라고 성금을 보냈고, 독일 정부는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체펠린 백작에게 지원금을 보내줘야 했다.
이후 체펠린 백작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그의 비행선 개발은 모든 독일인의 지지 하에 성공적으로 계속되게 된다.
그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신문 만평에서 유럽의 열강들을 비행기로 표현하면서, 독일만 비행선으로 그려놓았을 정도였다.
이 외에도 그의 비행선이 장례식장 위를 지나가자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독일 국가를 불렀다.

- 영향
경식 비행선을 완성시켰고, 독일의 상징으로 인기를 누렸다.
비행선을 Zeppelin이라고 부르는 게 체펠린 백작에서 따온 것이다.
체펠린 백작이 사망한 뒤에는 후고 에케너 (Hugo Eckener,1868 ~ 1954)가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경식 비행선 개발과 사업을 이어나갔다.
에케너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한 리버럴이었기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 등 나치 패당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비행선은 나치 시절까지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힌덴부르크 사고를 계기로 완전히 몰락했다.
에케너는 나치가 정권을 잡자 무척 고생했지만 끝까지 나치에 대한 충성을 비치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점 덕분에 2차대전이 끝나고 나치에 항거한 사업가로서 무사히 지내게 되었다.
비록 비행선 사업은 힌덴부르크 사고 이후로 몰락했으나 에케너는 2차대전이 끝난 뒤, 반나치 강연을 하며 나치즘에 대한 경고와 또 다시 일어날지 모를 그러한 파시즘을 우려하며 파시즘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지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