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8년 1월 6일, 새뮤얼 모스 (Samuel Finley Breese Morse, 1791 ~ 1872)가 전신 실험을 처음으로 성공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 (Samuel Finley Breese Morse, 1791년 4월 27일 ~ 1872년 4월 2일)는 미국의 화가 겸 발명가로 1838년 1월 6일에 전신 실험을 처음으로 성공했다.
–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 (Samuel Finley Breese Morse)
.출생: 1791년 4월 27일,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 찰스타운
.사망: 1872년 4월 2일, 미국 뉴욕주 뉴욕
.부모: 제디디아 모르스, Elizabeth Ann Finley Breese
.형제자매: 시드니 에드워즈 모르스, 리처드 캐리 모르스, 메리 K. 모르스, 엘리자베스 앤 모르스 외
.배우자: 사라 엘리자베스 그리스월드 (1848 ~ 1872)
.자녀: 윌리엄 모르스, 찰스 모르스, 제임스 모르스, 수잔 모르스, 코넬리아 모르스, 에드워드 모르스 등
.직업: 화가, 발명가
미국의 화가 겸 발명가이다.
모스 부호의 이름의 유래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 생애 및 활동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 (Samuel Finley Breese Morse, 1791년 4월 27일 ~ 1872년 4월 2일) 는 매사추세츠주 찰스타운에서 출생했다.
1810년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뒤, 화가가 되기 위하여 1811년 영국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하였다.
1815년 귀국하여 ‘라파예트 후작'(1825) 등의 그림을 그렸고, 1826년 미국 화가 30명과 함께 국립디자인협회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1830년대 중반 워싱턴 D.C.의 상원의사당에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벽화를 그리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실의에 빠지게 되었고 전신을 개발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전신 실험에 성공한다.
– 화가 모스
1810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전통적인 직업을 갖기 원했던 아버지의 권유로 출판사에 입사하게 된다. 하지만 일은 잘 맞지 않았다. 결국 부모는 예술가의 길을 걷고 싶어 하는 모스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한다. 1811년 7월 모스는 그림 공부를 위해 부모의 지원을 받아 영국으로 떠난다. 몇 년간의 공부를 마친 그는 1815년 집으로 돌아온다.
모스는 직업 화가의 길을 걷기로 한다. 하지만 그의 화풍은 미국 내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나마 생계를 위해 그렸던 초상화는 반응이 좋았다.
1816년에는 존 애덤스(John Adams) 전 미국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렸고 1819년에는 당시 대통령이던 제임스 먼로(James Monroe)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부유층의 초상화를 자주 그려주곤 했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초상화가로 명성을 쌓던 그에게 평소처럼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가 하나 들어온다. 1825년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살던 모스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워싱턴 D.C.로 잠시 떠난다. 모스의 아내는 당시 셋째를 임신하고 출산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초상화 작업이 한창이던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아내가 출산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편지였다.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 슬퍼할 시간도 없이 장례식이라도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로 집으로 달려가지만, 모스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례식이 끝난 뒤였다. 당시 편지를 전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편지로 소식을 전달받고 출발하면 며칠이 훌쩍 지나가 버리기 마련이었다.
아내의 사망과 전신 기술 발명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밝혀진 것이 없다. 하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한동안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모스는 다시 예술가로 경력을 이어간다.
1829년 프랑스 파리에서 몇 년을 보내다 183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그는 미국 과학자 찰스 토마스 잭슨(Charles Thomas Jackson)을 만난다. 잭슨은 전자기학과 관련된 자신의 최신 연구를 소개했다. 이때 모스는 전기를 이용하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뜻밖의 만남으로 전신 기술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신기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뉴욕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전신기 연구를 이어갔다.
– 전신의 발명
1825년 고향을 떠나 워싱턴D.C에서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프랑스 라파예트 후작의 초상화를 그릴 때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온 메신저가 ‘아내가 아프다’는 내용의 아버지가 쓴 편지를 전해줬다. 모스는 즉시 뉴헤이븐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까지 끝난 뒤였다. 아내의 임종을 하지 못한데 자책감을 느낀 모스는 화가의 꿈을 접은 채 ‘어떻게 하면 소식을 빠르게, 멀리까지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골몰한 끝에 1837년 모스 전신기를 만들었다. 1844년 5월 24일은 워싱턴 D.C와 볼티모어간에 세계 최초로 전신이 공식 개통한 날이다. 그의 전신 방식과 모스 부호는 세계적으로 채택되었으며 해저 전신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전신기 개발에 어려움을 겪는 그를 보고 같은 학교 (뉴욕대학교)에서 근무하던 레너드 게일(Leonard Gale)은 전자기학과 관련된 조셉 헨리(Joseph Henry)의 연구를 소개한다. 헨리는 게일과 친구 사이였다. 헨리의 연구는 모스의 전신기 기술 개선에 큰 영향을 줬다.
전신기 제작에는 모스의 친구였던 알프레드 베일(Alfred Vail)이 도움을 준다. 베일은 자신의 가족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전신기를 만들기 위한 재료와 노동력을 지원한다. 게일과 베일은 이후에도 모스의 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모스의 첫 전신기는 1835년쯤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기능 개선과 연구를 통해 기술을 고도화했다.
1837년 10월에는 특허청에 전신기 특허를 출원했다. 이듬해 1월 6일에는 전신에 사용하는 모스부호를 소개하고 전신기 시연에 성공한다.
필요한 것은 자금과 정부 지원이었다. 그의 연구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대부분 불가능한 도전 정도로 치부했었고 일부는 대놓고 그의 행동을 비웃었다. 하는 수 없이 연구에 필요한 돈은 자비로 해결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자금 지원이 절실했던 모스는 꾸준히 의회에 지원을 요청했다. 응답은 없었다. 마침 대학교 동문이었던 헨리 엘즈워스 (Henry Ellsworth) 당시 미국 특허청장이 그를 도왔다. 엘즈워스는 의회에 요청해 모스가 진행하는 연구에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모스는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엘즈워스의 딸에게 전신으로 보내게 될 공식 메시지를 부탁하기도 한다.
1844년 5월 미 연방정부의 지원으로 워싱턴 D. C.와 볼티모어 간 전신 메시지 전송에 성공했다. 최초의 원거리 통신이었다. 모스가 알프레드 베일에게 보낸 신호는 무사히 전달된다. 이때 전달된 메시지는 “신은 무엇을 만들었나 (What hath God wrought)”라는 문장이었다. 구약성경 민수기 23장 23절에 나오는 구절로 엘즈워스의 딸이 직접 선택한 문장이었다.
사람들은 전신 기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단순한 신호 교환정도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 나타난 것과도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밋빛 앞날이 펼쳐질 것만 같았던 모스는 한동안 법정 다툼을 진행해야만 했다. 전 세계에 특허를 등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가에서 그의 발명을 인정하지 않았고 기술 사용에 대한 정당한 사용료 지급도 이뤄지지 않았다. 치열한 공방 끝에 결국 자신의 전신 기술을 인정받고 사용료를 받게 된 후에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모스의 성공적인 발명에 세상은 관심을 가졌다. 모스 전신 발명 이후 민간 회사가 주축이 돼 동북부 지역 일대에 전신선을 설치했고 10년도 안 돼 미국에는 2만 마일이 넘는 전신선이 깔린다. 전신선은 미국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구축됐고 전신사무소도 생겨났다. 전신을 통해 매년 3200만 건이 넘는 전신 메시지도 오고 갔다.
1851년에는 뉴욕과 미시시피 밸리 인쇄 전신 회사 (New York and Mississippi Valley Printing Telegraph Company)가 설립돼 전보 통신 회사로 번성했다. 몇 년 뒤 회사는 이름은 웨스턴 유니온 (The Western Union Company)으로 변경했다. 1861년 웨스턴 유니온은 미국 최초로 대륙을 횡단하는 전신선을 구축했다.
1866년에는 미국과 유럽이 대서양을 횡단하는 전신선으로 연결됐으며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에도 전신 시스템이 구축됐다.
군 지도자가 전장에 명령을 내리고 매체가 새로운 뉴스를 빠르게 전달할 때 전신은 큰 도움이 됐다.
전신기는 모스 이전에도 있었다. 1794년 클로드 샤프 (Claude Chappe)가 발명한 시각전신기는 1000km 떨어진 곳까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고 1837년 영국 발명가 윌리엄 쿡 (William F. Cook)과 찰스 휘트스톤 (Charles Wheatstone)은 전자기 전신기를 발명해 철도 산업에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날씨에 영향을 받거나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다. 단일 전선 시스템으로 빠르고 정확했던 모스의 기술은 전신 기술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현대적인 전기 통신 시대를 알렸던 새뮤얼 모스. 전신 기술과 모스부호의 등장으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말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도래했다. 시간이 흘러 더 효율적인 통신 수단이 나타나 모스부호를 사용할 일은 없게 됐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른 통신 수단 사용이 어려울 때 정보를 담아 전달하는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신호의 짧고 길다는 차이만 전달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 해군 함정에서는 전기나 전파 방해가 생기면 구조요청을 위해 발광 신호로 모스부호를 사용한다.
– 일화
유럽에서 2년동안 작품 활동을 하고 미국으로 되돌아오다가 최신 전자기학에 관해서 알게 되었고, 이렇게 기도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특별한 재능이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보고 묘사할 수 있게 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바라기는 저를 더 사랑해 주셔서 전신을 발명할 수 있는 총명함을 허락해 주옵소서.”
그는 1년 7개월 동안 노력 끝에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전신을 발명한 것이다.
전신기를 완공하여 축하식을 거행할 때 제일 첫 통신으로 성경 구절을 발신했다. 그 이후에 각국에서 전신을 개통할 때는 반드시 먼저 신약 성경 한 구절을 송신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전신기 발명에 성공한 후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이 발명품에 대하여 내게 찬사를 많이 보내주지만 사실 나는 그런 찬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류를 위하여 누군가에게 그것을 알리셔야만 했으며 그 대상이 바로 저였을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