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6월 3일, 청나라의 임칙서 (林則徐)가 아편을 폐기함으로써 제1차 아편 전쟁 촉발
1839년 당시, 중국의 아편 문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당시 중국에 수입되는 아편의 양은 연간 4만 상자에 달했다. 한 상자의 아편을 대략 백 명의 아편중독자가 소비한다고 볼 때, 중국의 아편중독자는 4백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그것은 당시 중국 인구의 1퍼센트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매년 급속히 늘어갔다. 1만 상자에서 4만 상자로 되기까지 10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적 문제도 심각했다. 18세기 후반에 중국은 영국에 차를 팔아서 대량의 은을 얻고 있었으나, 이후 영국이 은 대신 인도산 아편으로 차의 대금을 치르는 정책으로 바꾸자 1807년을 기점으로 중국이 아편 때문에 은을 영국에 지불하는 형태로 역전되었다. 1827년에는 1800년 기준 전국 유통량의 20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은 유출량이 심각해졌는데, 당시 중국의 세금은 은납제였으므로 국가재정과 국민의 살림살이가 동시에 급격히 나빠져 갔다. 실로 아편은 “이대로 수십 년 후에는 세금을 낼 사람도, 무기를 들 사람도 모조리 없어질 것이다!”는 우려가 과장이 아닐 정도의 위협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위기는 영국의 부도덕한 무역 정책에 앞서 중국 청왕조 스스로의 부패와 실정 때문이라는 인식이 의식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공감을 얻고 있었다. 공자진(龔自珍)이나 위원(魏源)은 “눈이 있으면 북경과 그 일대를 돌아보라! 일찍이 부유했던 집안은 가난한 집이 되었고, 가난했던 집안은 굶주림으로 허덕이게 되었다”면서 그 원인을 잘못된 정치, 부패한 관료, 실용과 거리가 먼 학문에서 찾았다. 그들은 또한 서양인들을 오랑캐라며 무작정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장점과 강점을 본받아야 하며, 상업과 공업을 키워 국력을 길러야 한다고도 보았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제도를 고쳐(變法)”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自强)”는 그들의 사상은 강유위, 양계초 등의 변법자강 사상의 선구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고위관료로 임칙서 (林則徐, 1785년 8월 30일 ~ 1850년 11월 22일)가 있었다.
1832년에서 1838년까지 임칙서 (林則徐)는 강소성 순무와 호광성 총독을 잇달아 맡았는데, 낡은 수리시설을 개축하고 재해를 입은 지방을 구호하는 일에 관의 힘만이 아니라 상인들의 조직을 적극 활용했다. 그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관료집단보다 상인의 조직이 훨씬 현지 사정에 밝고 행동도 효율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상인들을 활용할 뿐 아니라 그들의 상업 활동을 장려, 후원하고, 소금 판매 문제 등에서 상인들에게 최대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시책을 썼다.
1838년 말, 임칙서는 도광제의 아편 근절 특명을 받고 흠차대신으로서 광동성에 파견된다. 광동성의 광주(廣州)는 오래 전부터 해외무역의 창구였으며, 따라서 서양에서 아편이 들어와 전 중국으로 퍼지는 출발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편이 중국에 정식으로 수입되기 전에, 주로 밀수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분명한 통계를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략 1800년경에는 4,570상자, 1817년부터 12,375상자, 1826년 19,386상자, 1830년대는 매년 33,906상자, 1837년 44,637상자, 1839년 50,350상자로 늘어났다. 또한 아편의 수입대금을 은으로 결재하였으므로 이 동안 중국에 수입된 아편으로 유출된 은의 양은 대략 6억 냥 정도로 추정한다. 아편의 수입량 증가로 인하여 무역수지는 역전되고, 청나라의 은 보유고가 격감하여 은과 동전의 교환 비율이 1:800에서 1:1,500~2,100에 이를 정도로 은값의 급등을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은의 유출은 지정은제를 위협했다. 결국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아편 수입량이 급증하면서 중국의 백은 (白銀) 유출량이 유입량에 비해 많아지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자, 1833년 광동안찰사 (廣東按察使) 허내제 (許乃濟) 등은 아편 이금(弛禁) 정책의 실행을 주장하였다. 1839년 3월 이에 청나라의 황제 도광제 (재위: 1820년~1850년)는 ‘아편엄금론’을 주장한 임칙서를 광둥 성으로 보내게 된다. 흠차(欽差) 대신 임칙서는 외국인 상관(상점)을 봉쇄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1839년 6월 3일 임칙서는 23일에 걸쳐 영국 무역 감독관이 거두어 보낸 외국 상인들의 아편 20,000 상자를 모두 녹여버리는 등 철저히 아편 단속을 했고, 마약상들은 당시 자그마한 섬이었던 홍콩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자, 영국 산업 자본가들은 ‘청나라가 무역의 자유를 침해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했다.’고 비난하며 영국정부와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이에 영국정부는 1839년 10월 원정군 파견을 결정하였는데, 이로써 ‘제1차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다.

○ 아편전쟁 개관
– 아편이란
아편은 양귀비로 만들어지는 마약의 일종이다. 마취제 또는 이질이나 설사의 치료에 쓰이며, 모르핀이나 코데인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아편은 크게 3가지로 생아편, 의약용 아편, 흡연용 아편으로 나눌 수 있다.
생아편은 양귀비 열매에 상처를 내고 흘러나오는 액을 건조시켜 덩어리로 만든 것을 말하고, 의약용 아편은 생아편을 가루로 만들어 의약용으로 쓰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마약’으로 생각하는 흡연용 아편은 생아편을 물에 녹여 증발시키고 농축해 아편 엑기스로 만든 것으로 곰방대를 사용해 흡연하거나, 액체를 직접 주사하기도 한다. 아편이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마약류가 그렇듯이 ‘중독’ 때문이다. 마약인 아편은 습관성이 되고, 만성중독증을 앓게 하기 때문에 점차 다량을 사용하지 않으면 효과가 떨어지게 된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점점 다량의 아편을 원하게 되고, 종국에는 생활이 피폐해지며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이게 된다.
– 아편전쟁 배경
황제 통치 하의 청나라는 아직 중세시대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눈에 서양은 미개한 나라로 비치고 있었다. 청나라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 밖을 보지 못할 때, 영국에는 기계를 갖춘 공장이 돌아가고 있었으며, 산업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국력이 막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이러한 발전상이나 국력에 대해 청은 잘 알지 못했다. 산업혁명으로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된 영국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었고 인도마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영국은 중국에도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청나라는 통상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서양 강대국을 거절하다 ‘광동’ 한 곳만을 무역하는 곳으로 지정해 두었다.당시의 무역 현황을 살펴보면,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하여 갔으나, 중국인들은 “미개한 나라 물건은 구입할게 없다.” 라면서 영국 제품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영국이 지속적으로 대중 무역 적자를 보게 만들었다. 당시의 영국은 차를 마시는 문화가 지배적으로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는 양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은 차를 수출하는 대가로 은(당대의 화폐)만을 징수했다. 이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은을 중국에 지불해야만 했고, 이는 심각한 무역 불균형을 초래한다.
– 1차 아편전쟁의 전개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옹정제 초기인 1729년에 이미 첫 번째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다. 강희 · 옹정 · 건륭제의 통치기, 이른바 3대의 황금기는 끝났다. 부패한 관료들에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만한 생산성의 향상이나 제도적 보완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중국 국민들은 아편의 잠재적인 수요자가 되어, 현실의 쾌락이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아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780년 무렵 약 1,000상자에 불과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에는 1만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은 무게로 치면 거의 300만 톤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고위관료, 지주, 상인, 군인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서부터 떠도는 유민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웠다. 아편은 마약이기 때문에 한번 중독이 되면 쉽게 끊을 수 없어 죽을 때까지 피울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여러 차례 금지령을 내렸으나 통하지 않았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의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선택했다. 플래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동인도회사가 인도의 벵갈 지방(방글라데시와 그 남쪽)에서 아편을 재배해 상인을 통해 중국 근해로 운반한 다음 몰래 중국에 파는 방법을 썼는데(삼각 무역) 1829년 말부터 쾌속 범선이 등장하여 항해시간이 짧아지면서 더 많은 아편을 밀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도광제는 임칙서를 특사(흠차대신)로 파견하여 광주의 아편거래를 막게 했다. 1839년 정월, 광주에 도착한 임칙서는 상황을 주의깊게 살핀 다음 과감하게 손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에게 남은 아편을 관청에 넘기고 다시는 아편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고시했다. 외국인들은 이 조처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른 관리들처럼 뇌물로 매수하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한 달 후 임칙서는 바로 군대를 동원해 13행을 포위하며 행동을 개시했다. 광주에는 자기 나라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 통상 감독 엘리어트(찰스)가 군함 2척을 이끌고 들어와 있었다.
엘리어트는 교묘하게 영국 상인들로부터 아편을 자신에게 넘기도록 하였다. 영국 상인들의 아편이 대영제국의 아편으로 둔갑했다. 그는 2만 80상자의 아편을 내놓았다. 도광제는 승리에 흥분했고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가 아직도 더 많은 뇌물을 위해 흥정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임칙서는 호문에서 아편을 불태웠다.
청나라의 강경한 아편무역 금지조치에 대해 영국의 자본가들은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당시 영국은 휘그당과 토리당의 양당에 의한 의회정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무렵 영국 정부를 이끌었던 휘그당의 파머스턴 내각은 중국무역을 안정된 기초 위에 두는 데 필요한 조건의 획득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20척의 함선과 4,000여 명의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영국 의회는 토리당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이를 승인하였다. 영국 의회는 결국 자본의 요구에 굴복한 것이다.
마침내 전권대사 엘리어트(조지)는 1840년 6월 육해군 약 4,000여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광동 앞바다에 도착했다. 인도 정부가 영국을 대표하여 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대포와 강한 해군을 갖춘 영국군 앞에 중국의 군대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재래식 범선이 대부분이었고 군사 장비는 240여 년 전에 주조된 낡은 것이었다.
영국은 주산 군도를 점령하여 양자강 하구를 봉쇄하고 천진(톈진) 인근까지 함대를 파견하여 청나라를 위협하면서 타협을 시도했다. 천진에서 교섭을 책임지고 있던 직례총독 기선은 오랑캐를 다독인다면서 일단 영국군을 무마하여 광동으로 돌려보냈다. 임칙서가 파면되고 그 자리를 차지한 기선은 광동에 도착하자 영국군의 힘을 깨달았다. 12월 영국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기선은 엘리어트와 개인적으로 배상금 600만 냥의 지급 · 홍콩 할양 · 평등 대우 등을 조건으로 한 기초협약인 ‘광동협정’을 맺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크게 노한 도광제는 기선을 파면하고 체포하였다.
1841년 가을, 전쟁이 재개되어 영국군이 영파를 점거했다. 이제 영국군의 병력은 1만으로 불어나 있었고, 증기선 14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강구와 주산에서 중국군이 용감하게 저항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한편 정부의 무능과 굴욕적인 태도는 중국인들을 분노케 했다. 중국인들은 곳곳에서 침략적인 외국인들에 대항하는 자위조직을 결성하였다. 농민군이 영국군을 포위 공격하여 영국군 사상자가 생긴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영국은 중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1842년 6월 상해를 점령하고 남경(난징)으로 진격했다. 청나라는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라도 타협을 할 수밖에는 없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1842년 8월 영국함대의 갑판에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역사적인 ‘남경 조약’이 체결되었다.
.남경 조약의 내용과 성격
1. 홍콩을 영국에 넘겨준다. 2. 광동, 하문, 복주, 영파, 상해 등 5개 항구를 개항한다. 3. 개항장에 영사를 주재시킨다. 4. 중국은 전쟁 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 등을 3년 안에 영국에 지불한다. 5. 공행의 독점무역을 폐지한다. 6. 수출입의 관세를 정한다. 7. 동등한 지위에 있는 양국 간의 문서 교환은 동등한 형식을 사용한다. 이후 관세에 관한 내용, 영사 재판권, 최혜국 대우, 5개 항에서의 군사 정박권 등을 추가시키게 된다.
이 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며 불평등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중국이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중화사상은 여지없이 깨졌으며 중국사회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광주에만 제한시켰던 외국상인들의 활동은 확대되었고, 문제가 되었던 아편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아편무역을 계속하겠다는 영국의 입장이 관철된 것이다.
이후 중국은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서양 여러 나라들과도 영국과 맺은 조약의 내용과 비슷한 불평등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844년에는 미국과 망하조약, 프랑스와는 황포조약을 맺게 되고 중국대륙은 서구 열강에 의해 서서히 잠식되어가기 시작했다.

– 제2차 아편 전쟁의 전개
1857년 영국은 애로호 사건을 구실로 프랑스와 연합군을 구성해 광저우 시내로 침입하여 이 해 12월, 광저우는 점령되고 시가지 곳곳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죽였다. 영국-프랑스군은 광저우를 점령한 이후에도 3년 동안 지방관의 괴뢰정권을 앞세워 연합군위원회(영국, 프랑스)의 점령행정이 실시 되었다. 이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1858년 북상하여 다구포대(大沽炮台)를 점령하였고, 북경의 관문인 톈진까지 점령하자 청 정부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톈진조약을 맺었다. 미국과 러시아는 전쟁 후반기에 협력을 제의하였으나, 실제로 군사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다구포대를 잃은 불리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약이 체결되긴 하였지만, 청 정부의 강경파들은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이에 청 황제는 강경파들에게 심적으로 동요하여 1858년 후반 베이징에서 톈진조약 비준을 강행하려고 하는 영프 연합군을 막기 위해 다구포대에 포대와 기병을 추가 배치하였다. 따라서 조약을 체결하려는 영프 연합군과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청나라 군대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 함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근방에 있던 미국함대의 도움을 받아 철퇴하게 되었고, 이 잠깐의 승리로 인하여 청 정부에서는 강경론이 득세하였다.
하지만 1860년 6월 영국과 프랑스는 전년도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1859년의 소함대의 8배가 넘는 병력과 군함을 모아서 나타났다. 이들은 발해만의 여러 항구를 점령하고 다구포대에서 떨어진 곳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다구포대와 청 정부의 방어군을 격파한 영-프 연합군에 놀란 청 조정은 평화협상을 제의하였지만 영-프 측은 협상을 거절하였다. 이윽고 그들은 10월 베이징에 입성하였지만, 점령하지는 않고 베이징 근교에 머물렀다. 베이징에 머무는 과정에서 수많은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청 황제는 베이징에서 멀리 북쪽으로 떨어진 여름별장에 피신하였고, 황제의 형제 중 한 명인 공친왕을 남겨 협상을 하게 하였다.
공친왕과 영-프 연합군의 협상에 의하여 전쟁은 종결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중재하에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베이징 조약에 의해 청 조정은 천진 조약(톈진 조약)을 인정하게 되었고, 아편의 거래도 합법화 되게 된다. 여기에 추가로 외국공사의 베이징 주재, 톈진을 포함한 11개 항구 개항, 내지에서의 여행, 통상, 포교의 자유, 양쯔 강 및 통상항으로의 군함진입권,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 허용, 영국-프랑스에 전쟁배상금으로 은 800만냥, 그리고 영국에 홍콩의 인접한 구룽반도(주룽사)를 할양 조차하는 등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이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는 데 중재하여 도움을 준 러시아 제국에게도 연해주 지역을 할양하게 된다.
.텐진 조약의 내용과 의의
1.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은 외교사절이 베이징에 상주할 권리를 가진다. 2.무역을 위해 10개의 항구를 개방한다. 3.외국 상선의 자유로운 장강 통상을 승인한다. 4.이전에 금지했던 중국 내 외국인 여행을 허가한다. 5.아편무역을 합법화한다. 6.개항 항구를 확대한다. 7.기독교를 공인한다. 8.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대한 배상금으로 은 200만 냥을 지불한다. 9.영국 상인에게 재산 손실의 위로금으로 은 200만 냥을 지불한다. 10.배상금을 낼 때까지 광둥성과 보장을 점령한다. 11.애로호 사건의 결과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광범위한 외국의 특권을 규정하고 있어, 이후 불평등 조약의 근간이 되었다.
.제2차 아편전쟁의 의의
2차 아편전쟁의 패배는 모든 동양인들에게 1차 아편전쟁의 패배보다 훨씬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청 황제의 피신과 베이징의 점령은 단순한 전쟁의 패배가 아니라 모든 중국인과 동양인의 머리 속에 박혀있던 중화사상을 그 뿌리부터 뒤흔들게 되는 사건이었다.
이후 서양 문물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청 조정은 양무운동을 실시하게 된다. 그리고 청 조정과의 조약으로 중국 내에서의 이권을 확보한 서양세력은 아직까지 중국 남부에서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태평천국을 토벌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아편전쟁의 역사적 의의
난징조약은 막대한 배상금 지불과 공해제 무역의 폐지, 꽝뚱·상하이·닝포·푸조우·샤면의 개방, 홍콩 할양, 관세율 설정을 규정한 것이었고, 다음해에는 추가로 호문조약이 맺어져 최혜국 대우, 영사재판권, 5항의 군함출입의 자유 등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이런 형세를 관망하던 미국과 프랑스도 청에 강요하여 1844년 각각 망하조약과 ‘황포조약’을 맺었다. 난징조약은 중국이 유럽세력에 굴복한 첫걸음인 동시에 중화사상의 붕괴를 가져왔다. 또 중국은 이것을 계기로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에 휩쓸려 들어감으로써 중국의 상품시장화와 원료공급지화가 시작되어 봉건사회가 근본적으로 동요하면서 반식민지화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이렇듯 청이 유럽 세력앞에 속수무책일 때 꽝뚱 주변의 중국 민중은 스스로 무장하여 영국군에 항전하였다. 이것이 삼원리 사건으로 비록 본격적인 민중운동이 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유럽세력에 대한 민중의 항전과 자각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 임칙서 (林則徐, 1785~1850)
임칙서 (林則徐, 1785년 8월 30일 ~ 1850년 11월 22일)는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다. 자는 소목(少穆), 호는 문충(文忠)으로 청나라의 흠차대신을 두 번 역임하였다. 임칙서는 영국에 의한 아편 밀수를 강경하게 단속하여 영국과의 아편 전쟁이 일어난 계기를 만들었다. 양무운동의 중요인물인 양강총독 겸 남양대신 심보정의 장인이다.
.Born: 30 August 1785, Fuzhou, China
.Died: 22 November 1850, Puning, Jieyang, China
.Education: Aofeng College
.Battles and wars: First Opium War
.Children: Lin Puqing
.Parents: Chen Zhi, Lin Binri
– 관리생활
1785년 푸젠성 푸저우 민허우 현의 후관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과거에 낙방하여 궁핍한 훈장 생활을 하였다. 임칙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학문에 힘써 1811년(가경 16년), 27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베이징의 한림원에 들어간 임칙서는 많은 행정 자료를 읽으면서 연구에 힘썼다고 한다. 그 후로 지방관을 역임해, 농촌의 재건과 치수 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부정한 관리들을 처벌했다. 그의 지방 행정관으로서의 수완은 오늘날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 그의 아편 근절의 대처도 지방관으로 일하면서 쌓은 경험을 발휘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아편문제
.광저우 파견
1837년(도광 17년)에 호광총독(현재의 후베이 성, 후난 성을 합친 지방 장관)이 된다. 이때에 관내에서의 아편 근절에 실적을 올리고 황작자(黄爵滋)의 ‘아편엄금론’에 동참해 글을 올렸다. 도광제는 그 실적과 논의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 1838년에 임칙서를 아편 수입을 막는 흠차대신으로 임명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영국의 아편이 대량 유입되어 은이 밖으로 흘러나가 국가재정이 줄어들 정도였다. 아편 수입을 금지했으나 효과가 없자,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삼아 광저우에 파견하였다.
.아편소각
1839년 3월 10일, 임칙서는 두 달의 여정을 거쳐 광저우에 도착했다. 주 강의 양쪽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흠차대신을 맞이했다. 광저우 전역이 흠차 대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임칙서는 이튿날 두 장의 공고문을 써 붙였다. 한 장은 자신이 흠차대신의 신분으로 광저우에 온 목적은 항구를 불태운 사건을 조사한다는 내용이었고, 나머지 한 장은 아편 단속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는 흠차대신인 임칙서가 광저우의 관리와 백성, 그리고 외국인에게 최초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복잡한 숙제를 풀어가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광저우로 가는 도중에 임칙서는 광범위하게 조사를 했으며, 광저우에 도착해서도 6~7일의 현장 조사를 진행한 다음 3월 18일에 13행(行)의 행수를 소환해 심문을 했다. 13행이란 청 정부가 대외 무역을 특별히 허가한 13개의 상점으로, 차와 비단 무역 등을 독점했다. 이들은 대외 무역의 특권을 누리는 관료 상인으로, 흡화행의 오소영, 광주행의 노계광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3행은 외국 상인과 결탁해 아편 밀매를 돕는 외국 상인의 대리점이었다.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로부터 차와 교환한 아편에 석회를 묻혀 바다로 폐기해 버렸는데(아편은 석회와 소금을 만나면 화학 반응이 일어나 못쓰게 되기 때문이다), 이 조치에 분노한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에게 항의하였고, 결국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영국과의 외교분쟁
현지의 영국 상인을 지원하기 위해서 파견된 영국의 동양함대는 광둥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가까운 톈진에 출몰하였다. 바로 코 앞에 닥친 함대를 맞이한 청의 지도부는 당황하며 임칙서를 해임하였고, 영국에 저자세로 대처하였다. 임칙서의 후임 기선(琦善)은 오로지 영국에 저자세로 일관하였고, 그 결과 청나라가 대폭 양보한 난징 조약을 맺게 된다.
.러시아의 위협 확인
1840년 흠차대신에서 해임된 임칙서는 신장으로 좌천되어 그 곳에서 운귀 총독을 지냈다. 그러나 임칙서는 여기서 선정을 펴서 주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임칙서에게 있어서도 이 곳에서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의 위협을 실제로 살필 수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으며, 진사 후학들에게 “장래 청나라의 최대의 위협은 영국보다 러시아일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훗날 좌종당 등이 새방파를 형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849년(도광 29년)에 은둔생활을 하던 중에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면서 난을 진압하기 위한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임지로 가는 도중에 병사했다.
– 평가
임칙서는 호문(虎門)의 아편 소각 사건을 주도하여 외세의 침략에 신음하던 중화민족의 호기를 만방에 떨친 정치가로 유명하다. 그는 외세에 항거하는 조직을 결성하여 아편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는 한편, 선진의 문물과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낡은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세계로 시야를 넓힐 것”을 중국인들에게 외친 최초의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다. 임칙서가 해임된 이유 중 하나로 당시의 청의 관료사회는 광둥의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임칙서에 의해 그 돈이 끊긴 일을 원망하는 관료가 많았다고 한다. 만약 임칙서가 그대로 광둥에서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영국을 격퇴했었을 수도 있었다고, 후세의 중국인은 안타까워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