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3월 21일, 러시아의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Modest Petrovich Mussorgsky, 1839 ~ 1881) 출생
모데스트 페트로비치 무소륵스키 (Modest Petrovich Mussorgsky, 러: Моде́ст Петро́вич Му́соргский, 1839년 3월 21일 ~ 1881년 3월 28일)는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Modest Mussorgsky)
.본명: 모데스트 페트로비치 무소륵스키 (Modest Petrovich Mussorgsky)
.출생: 1839년 3월 21일, 러시아 제국 프스코프현 토로페츠 군 카레보마을
.사망: 1881년 3월 28일 (42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제국
.직업: 작곡가
.장르: 오페라, 피아노 음악
.사조: 낭만주의
무소륵스키는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로 흔히 러시아 5인조라 불리는 러시아의 민족주의 작곡가 중 한명이며 이 5인조 뿐만 아니라 19세기 러시아 작곡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남겼다.
18세기 후반부터 비롯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음악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작곡가로, 러시아 음악의 고유한 색채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의 영향력은 러시아를 벗어나 각국의 민족주의 음악과 프랑스의 인상주의에도 미쳤다.
그의 많은 작품이 러시아 역사와 민담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러시아 민요나 토속음악을 주요한 소재로 사용하였는데, 그의 대표작인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그러한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무소륵스키는 흉내낼 수 없다. 모든 음악 국가들 중 가장 특징 없는 국가인 독일에서조차도 그의 방식으로 작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음악학자

○ 생애 및 활동
모데스트 페트로비치 무소륵스키 (Modest Petrovich Mussorgsky)는 1839년 3월 21일 오늘날의 프스코프 주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피아노를 공부했으나 사관학교에 지원 (당시 러시아는 음악원이 없었다), 1856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청산하고 농노 해방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한 뒤 창작에 몰두하였다.
미하일 글린카의 뒤를 이어 러시아의 국민 음악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작곡가로서 지식은 빈약하였으나, 타고난 음악적 재능으로 좋은 작곡을 하여, 프랑스 인상파 등 현대의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모데스트 무소륵수키 작곡가,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민둥산의 하룻밤》으로 더 널리 알려진 교향시 《성 요한의 민둥산의 하룻밤》, 그의 친구인 건축가 빅토르 하르트만을 기리기 위해 쓴 피아노, 관현악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이 있다.
전람회의 그림은 후에 쓰여진 모리스 라벨의 관현악 편곡이 유명하다.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호반시나》, (소로친스크의 시장) 가 있다

○ 평가
무소륵스키는 러시아 5인조 뿐만 아니라 러시아 음악사상 가장 독창성이 뛰어난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괜히 전문가들이 무소륵스키를 흉내낼 수 없는 작곡가라고 평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독창적인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그가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음악에 재능을 보였지만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작곡도 처음에는 거의 취미 수준으로 했고 그나마 음악 교육은 성인이 된 후 발라키레프에게 잠시 받은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화성학이나 대위법 등 초보 음악전공자들도 다 익히는 기초적인 문법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아마추어가 만든 조잡한 곡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문제점들이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의 가치를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본적으로 무소륵스키의 음악은 그와 같은 시기 같은 나라에서 활동한 작곡가였던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완전히 반대의 위치에 있다. 차이콥스키가 우아하고 세련된 서구식 작법에 러시아적 감성을 도입하여 주로 귀족 성향의 음악을 창작한 작곡가라면, 무소륵스키는 다듬어지지 않고 질박한 날것의 감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좀더 서민과 민중의 삶과 정서에 주목한 작곡가였다.
무소륵스키는 전술한 이유 때문에 주제의 전개나 변화, 성부간의 어울림과 같은 구조적인 양식미를 추구하기 보다는 특정한 상황이나 느낌, 인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데 탁월했는데, 특별한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덕분에 이런 감성을 특정한 양식이나 유형에 맞추어 변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의 개성이 넘치는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또한 특유의 투박하고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음향은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나타나는 묘사적/풍자적인 분위기와 딱 맞아 떨어진다.
이처럼 구조보다 인상을 중요시하는 경향은 후대의 반낭만주의 경향, 특히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에 제대로 영향을 주었다. 또한 무소륵스키는 20세기 이후 러시아 (소련) 작곡가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작곡가이기도 한데,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람 하차투리안 등을 비롯한 많은 후배 러시아 작곡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생애 항목에 있듯이 무소륵스키는 일생 내내 인생사가 순탄치 않았던 데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 완성한 작품이 그리 많지 않으며 대부분의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거나 스케치 상태에서 중단되었다. 현재 연주되는 그의 작품 상당수는 그의 재능을 아꼈던 동료 작곡가나 후배 작곡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특히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쇼스타코비치가 그의 작품을 연주회로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동안 무소륵스키가 음악의 기초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가 남긴 원전을 좀더 세련되게 고치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가 대표적인 예인데,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쇼스타코비치 등의 작곡가들은 이 작품의 오케스트레이션 전반에 걸쳐 화성과 선율 처리 등의 문제점을 대폭 수정 보완한 수정판을 내놓았으며 한동안은 이 수정판만 연주되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통상적인 어법에서 많이 벗어난 무소륵스키의 화성과 관현악법 등을 굳이 결함으로 볼 것이 아니라 무소륵스키만의 독창적인 음악언어로 인정해야 된다는 분위기가 우세해졌으며, 현재는 최소한의 수정만을 가한 작곡자의 원전판을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 주요 작품
모데스트 무소륵수키 작곡가,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민둥산의 하룻밤》으로 더 널리 알려진 교향시 《성 요한의 민둥산의 하룻밤》, 그의 친구인 건축가 빅토르 하르트만을 기리기 위해 쓴 피아노, 관현악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이 있다.
전람회의 그림은 후에 쓰여진 모리스 라벨의 관현악 편곡이 유명하다.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호반시나》, (소로친스크의 시장) 가 있다.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은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와 ‘전람회의 그림’일 것이다. 이 보리스 고두노프는 역대 러시아 (구 소련 포함) 오페라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러시아어로 된 오페라 가운데 가장 자주 연주된다. 한편 그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하르트만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쓴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 역시 굉장히 독특하고 인상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나중에 모리스 라벨에 의해 관현악으로 편곡되었는데, 현재는 편곡된 관현악 버전이 더 자주 연주된다. 그런데 항목에도 있지만 이 작품은 관현악 뿐만 아니라 온갖 악기로 편곡되어 연주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은 1867년 작곡된 관현악곡으로 러시아에서 1년 주기로 열리는 성 요한제의 전설에 영감을 얻어 작곡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곡가 생전에는 출판되거나 연주된 적이 없으며, 현재 연주되는 교향시 버전은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그의 악보를 바탕으로 재편집한 것이다. 한편 이 곡은 그의 미완성 오페라 ‘소로친스크의 시장’ 3막의 간주곡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외에 그의 가곡들도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인데, 음악적인 가치도 훌륭하지만 당시의 부조리한 시대상을 비판하고 풍자하거나 민중의 고달픈 삶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서정에 치중하는 독일 및 서유럽의 가곡과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같은 괴테의 시를 바탕으로 한 무소륵스키의 ‘벼룩의 노래’와 베토벤의 ‘벼룩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 차이를 바로 알 수 있는데, 전자가 당시 러시아 관료들의 부패와 위선을 제대로 풍자하고 있다면 후자는 단지 유머러스한 시의 내용에 충실하게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로 일관하고 있다. 그가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좀 의외인 대목이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 최초의 1869년 판본과 러시아 황실극장 위원회의 금지처분을 피하기 위해 만든 1872년 판본이 있다. 무소륵스키 사후 주로 1872년 판본이 연주되었고 종종 두 판본을 절충한 연주가 행해졌는데, 현재는 두 판본을 독자적인 작품으로 보고 따로 연주하는 것이 대세이다. 한편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쇼스타코비치 등이 작품을 대폭 개정한 수정판을 내놓기도 했는데, 전술한 것처럼 원전 판본을 연주하는 것이 대세가 되면서 최근에는 수정판의 연주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오페라 호반시나 – 이 오페라는 무소륵스키가 피아노 스케치만 남겨놓고 사망했는데, 후대에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쇼스타코비치가 독자적으로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하였다. 두 작곡가가 똑같이 관현악의 대가이긴 하지만 각자 개성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관현악 파트의 악기 편성의 차이가 크고 오페라의 구성도 다소 차이가 있다. 현재에는 쇼스타코비치 버전이 좀더 자주 연주되며, 두 작곡가의 편곡을 절충한 공연도 행해진다.
.오페라 소로친스크의 시장 –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무소르그스키가 직접 대본을 작성한 후 작곡에 착수했는데 작곡자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나마 호반시치나는 피아노 스케치라도 온전하게 남아 있는 반면, 이 작품은 전체 대본의 상당 부분이 아예 손도 대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후 세자르 큐이를 비롯, 니콜라이 골로바노프 (Nikolai Golovanov) 등 몇몇 작곡가들이 미완성 부분을 독자적으로 작곡해서 완성한 버전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들의 작곡 실력이 무소르그스키의 독창성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이 오페라 완성본들은 평작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로친스크의 시장은 위의 두 오페라만큼 자주 공연되지는 않는다.
.피아노/관현악곡 전람회의 그림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가곡집 죽음의 노래와 춤
.가곡집 아이들의 방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