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년 9월 16일,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 김대건 (金大建, 1821 ~ 1846) 새남터에서 순교
김대건 (金大建, 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은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순교자, 여행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 김대건 (金大建)
.출생: 1821년 8월 21일, 조선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
.선종: 1846년 9월 16일 (25세), 조선 한성부 새남터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시복: 1925년 교황 비오 11세
.시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매장지: 미리내성지
.축일: 7월 5일
.수호: 한국인 성직자
어린 시절 이름은 김재복 (金再福)이었으며, 세례명으로 쓰일 때는 대건 안드레아로 한다.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 (기념일)은 7월 5일이다. 그의 세례명 안드레아는 아버지 김제준의 동생이자 순교자인, 김대건의 작은 아버지 김한현 (김종한이라고도 함)의 세례명을 이어받았다
○ 생애 및 활동
증조부 김진후 (金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김택현 (金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836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 (Maubant, P.)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최방제 (崔方濟) · 최양업 (崔良業)과 함께 15세 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 (巴里外邦傳敎會東洋經理部)로 가게 되었다. 그 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 (Libois, N.)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 (Ferreol, J. J .J. B.)의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 (副祭)가 되었다.
그 해 말에 서북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 1월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자리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당신학교 (萬堂神學校)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 (神品聖事)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주교 페레올, 신부 다블뤼 (Daveluy, M. N. A.)와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할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 (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반국지율 (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 (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 (首先鐸德)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 (大主保)로 삼고 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19년 11월 유네스코는 제40차 총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했다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 색도화 (色圖化)해서 정부에 제출하였다.
○ 사목과 순교
– 가톨릭 부제서품과 상해행
김대건은 1844년 12월 가톨릭 부제서품을 받았다.
부제 때 조선에 잠시 들어온 김대건 부제는 당시 돈 146원으로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천주교 신자 12명과 함께 제물포항 (현 인천항)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고틀랑 신부가 쓴 편지에 따르면, 나침반을 보고 항해한 작은배 라파엘 호는 서해에서 배가 가라앉을 뻔 했지만, 김대건 부제는 성직자로서 평신도들에게 성모 마리아의 상본을 보여주며 위로하고 격려했다. 중국 선장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에 온 김대건은 영국 영사의 환대를 받았다.
– 예수회 고틀랑 신부의 환대
연락을 받고 온 예수회 (예수회에서 천주교 상하이 교구를 책임졌음)고틀랑 신부는 김대건 부제의 부탁으로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밤이 늦도록 정성껏 천주교 신자들의 고해를 들었고, 천주교 신자들도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서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성사인 고해성사에 참여하였다. 김대건 부제는 한국말을 모르는 고틀랑 신부를 배려하여 통역을 했는데, 고틀랑 신부는 “신학을 마카오에서 공부했고, 조선에서 온 천주교 신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김대건 부제의 속깊음을 칭찬했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쟈샹 (金家港,금가항)성당(2001년 상하이 시에서 지방법원 부속건물을 짓기 위해 철거,한국 천주교회에서 은이성지에 진쟈상 성당을 복원했음. 가톨릭 신문에 의하면, 철거된 진쟈상 성당도 본래 성당이 있던 곳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다시 건축하였고,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기 위해 라파엘 호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경당을 지었음.)에서 세번째 천주교 조선교구장인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의 서품성사 집전으로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같이 따라간 조선의 천주교 신자 12분, 선교사, 중국 천주교 신부 1분등이 서품을 축하했다. 특히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이 교회를 사랑하셔셔 조선 처음의 천주교 사제가 서품받았다”라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일주일 후인 8월 24일 상하이 진쟈상 성당에서 30킬로미터가 떨어진 상하이 횡당성당 (상하이 예수회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천주교 미사를 드렸다. 상하이 예수회 고틀랑 신부가 예수회 장상에게 보낸 1845년 7월 8일자 서한(9월 12일 추신을 적어 발송)에는 “… 그 (김대건 신부)는 그의 첫 미사를 8월 24일 주일, 다블뤼 신부의 복사를 받으며 완담 (즉 횡당) 신학교에서 드렸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8월 23일, 박지순 기자)1845년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Daveluy) 신부를 모시고 함께 갔던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하이 항을 떠났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 (현재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에 표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2∼3일 정도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포구를 떠난 김대건 신부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다. 즉, 김대건은 1845년 10월 조선에 도착하였다. 12월까지 한양과 경기도 일대에서 기해박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인 선교사들의 순교로 교회가 무력화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사목을 했으며, 남편과 사별한 후 박해를 피해 전전하던 어머니를 위로했다.
– 순교
김대건은 1845년 10월에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항로를 알아보았다.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년 6월 5일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중국어선을 관헌에서 징발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신분이 드러났다고 한다.
학식이 출중하여 옥중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말로 옮김과 함께 색칠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옮긴 지도는 헌종에게 바쳐졌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갈 수 있는데, 김대건의 시체는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되었다. 이민식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장례를 치렀다. 프랑스 해군의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항해해 왔으나, 김대건이 순교하기 전까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당시 그의 유언은 “주교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어머니의 안위를 부탁한 것이었다. 또한 순교하기 전 하느님을 경외하고 죄를 짓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 김대건, 참수형을 당하기 전에 한 말
“임금이 희정당 (熙政堂) 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학 죄인 (邪學罪人) 김대건 (金大建)을 효수 (梟首)하라고 명하였다. 김대건은 용인 (龍仁)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 (廣東) 에 들어가서 양교 (洋敎)를 배우고, 계묘년 (1843년, 헌종 9년)에 현석문 (玄錫文)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 (都下)에서 교주 (敎主)가 되었다. 이 해 봄에 해서 (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 (唐船)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 (洋漢)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 (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포청 (捕廳)에서 한 달에 걸쳐 힐문하였는데, 그 말하는 것이 교활하여 양박 (洋舶)의 강한 것을 믿고 협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마침내 그 교 (敎)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은전 (銀錢)을 흩어서 경외 (京外)에서 흔하게 쓰는 재화는 다 양한이 책중에서 실어 보낸 것이다.’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양외의 제번의 말에 능통하므로, 천주교 신부로서 각국을 위하여 통사한다.’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현석문과 아울러 같이 주벌 하였는데, 현석문은 신유년 (1801년, 순조 원년)의 사도로 처형된 현계흠의 아들이다”. -《헌종실록》 13권 12년 (1846년) 음력 7월 25일 (무신) 1번째 기사, 《헌종실록》 헌종 대왕 행장
– 장례
신봉승 사극작가에 따르면 김대건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 (현재 서울 노량진)에서 12명의 사형집행인에 의해 참수되었으며, 목이 군문에 걸려 효수되었다. 본래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가도록 되어 있지만 김대건의 시체는 가매장되었다. 비밀리에 천주교 신자인 이민식이 김대건의 시신을 미리내 성지 (경기도 안성)로 옮겼다. 1960년 7월 5일 김대건의 시신은 혜화동의 가톨릭대학교안의 성당에 이장되었다.
○ 사후
– 시성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김대건을 가경자로 선포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복자로 선포하였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 영성
김대건은 하느님을 가리켜 임자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세상을 만든 임자이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그분을 배반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는 것이 김대건의 영성이었다.
– 열정
김대건은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마카오 신학교에 다니던 때에 선생들이 “김대건 신학생이 천주교 사제가 될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고, 세실 제독의 제안과 “건강이 나쁜 김대건 신학생이 프랑스 해군에서 생활하면 건강해질 것”이라고 기대한 페레올 주교의 생각으로 프랑스어통역을 할 때에는 독감에 걸렸다. 그런데도 성직자로 살아내었음은 김대건이 열정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몸이 약하다는 단점을 열정으로 이겨낸 성직자들로는 성 바울과 존 웨슬리가 있다.
○ 가계
– 계보
목경(牧卿) – 보(譜) – 도문(到門) – 근(覲) – 효분(孝芬) – 진손(震孫) – 영정(永貞) – 세균(世鈞) – 종수(從壽) – 희현(希賢) – 의직(義直) – 수완(守完) – 대영(大榮) – 정하(挺夏) – 희서(曦瑞) – 진후(震厚) – 택현(澤鉉) – 제준(濟俊) – 대건(大建)
– 가족 관계
증조부 : 김진후 비오(金震厚, 1743년 ~ 1804년 10월 20일 순교) 통정대부
증조모 : 숙부인 기계 유씨(杞溪兪氏, 1743년 1817년 7월 9일)
조부 : 김택현(金澤鉉, 1766년 ~ 1830년 4월 9일)
조모 : 이 멜라니아(경주 이씨, 1766년 ~ 1821년 9월 9일)
아버지 :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5년 ~ 1839년 9월 16일 순교)
어머니 : 고 우르술라(장흥 고씨, 1798년 ~ 1864년)
동생 : 김난식 프란치스코(金亂植, 1827년 ~ 사망)
제수 : 안동 김씨(安東 金氏)
백부 : 김제봉(金濟鳳, 1790년 ~ 1821년 9월 9일)
백모 : 청송 심씨(靑松 沈氏)
숙부 : 김제철(金濟哲 1803년 ~ 1855년 4월 14일) 통정대부
숙모 : 숙부인 목천 마씨(木川 馬氏, 1798년 ~ 1852년 12월 9일)
종조부 : 김종현(金淙鉉, 1764년 ~ 1824년, 김대건의 큰할아버지)
종조모 : 진주 강씨(晋州 姜氏, 1761년 ~ 1814년, 김대건의 큰할머니)
종조부 : 김한현 안드레아(金漢鉉, 1768년 ~ 1815년 순교)
종조부 : 김희현(金僖鉉, 1785년 ~ 1827년)
○ 세계기념인물 (UNESCO)
김대건 신부가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2019년 11월 14일, 유네스코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제40차 총회를 열고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했다.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의 삶과 업적이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부합한다는 점을 들어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충남 당진시는 2019년 6월에 프랑스, 베트남, 필리핀 등 3개국으로부터 지지 선언을 확보한 뒤 유네스코에 세계기념인물 지정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에따라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2019년 10월 17일 제207차 회의에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김대건 신부를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할 것을 권고했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가 일치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 명사의 기념일을 유네스코 연관 기념행사로 선정해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과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선정된 바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