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 3월 9일, 영국의 화석 수집상•고생물학자 메리 애닝 (Mary Anning , 1799 ~ 1847) 별세
메리 애닝 (Mary Anning 1799년 5월 21일 ~ 1847년 3월 9일)은 영국의 화석 수집가이자 고생물학자이다.

– 메리 애닝 (Mary Anning)
.출생: 1799년 5월 21일, 영국 라임 레지스
.사망: 1847년 3월 9일, 영국 라임 레지스
.매장: 1847년 3월 15일, 영국 라임 레지스 St Michael the Archangel
.국적: 영국, 잉글랜드
.부모: 메리 무어, 리차드 애닝
.저서: Jurassic Coast Fossils
.형제자매: 조셉 애닝, 메리 애닝
잉글랜드 남부 도싯 주의 라임 리지스에 있는 영국 해협을 마주한 절벽에서 이크티오사우루스 등 쥐라기 해양 생물의 화석을 발견하였다. 애닝의 발견은 당시 과학자들이 생각하던 고생물과 지질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생애 및 활동
메리 애닝 (Mary Anning)은 1799년 5월 21일, 영국 라임 레지스에서 출생했다.
잉글랜드 남부 도싯주의 라임 리지스에 있는 영국 해협을 마주한 절벽에서 쥐라기 해양 생물의 화석을 발견하였다.
애닝의 발견은 당시 과학자들이 생각하던 고생물과 지질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녀의 오빠 조지프가 이크티오사우루스의 두개골을 발견하였고 메리는 1년뒤 나머지 골격을 찾아 수집가에게 약 23파운드에 판매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그녀는 불과 십대초반이었다. 해당 화석은 5년뒤 대영박물관이 45파운드에 사들였다.
애닝은 블루 라이어스 절벽에서 화석을 채집하였다.
특히 겨울철 절벽에서 사태가 나면 새롭게 화석이 드러났는데, 애닝은 화석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가기 전에 재빨리 수집하였다.
1833년에는 절벽이 무너지면서 그녀의 애견 트레이를 덮쳤고 애닝 스스로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녀는 최초로 어룡의 골격을 발견하고 정립하였으며, 거의 완벽한 두 개의 수장룡 골격도 발견하였다.
독일로 가서 진행한 조사에서 애닝은 익룡 화석과 중요한 어류 화석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당시 위석으로 잘못알려져 있던 분석을 발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애닝은 또한 오징어와 같이 먹물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두족류인 벨렘나이트 화석을 발견하였고, 지질학자인 헨리 드라베시는 최초의 고생물 복원도인 《두리아 안티퀴오르》(Duria Antiquior, 도싯의 고생물)를 그리면서 애닝의 화석 수집품을 기초로 삼았다.
드라베시는 그림 판매 수익을 애닝과 나누었다.
거의 대부분 성공회를 신봉하는 젠틀맨이었던 19세기 영국 과학계는 애닝을 그들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았다. 가구 장인이었던 아버지가 10세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애닝은 가난한 가족들과 함께 돈벌이에 나서야만 했다.
화석 수집가로서 애닝은 영국과 유럽, 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런던 지질학회에 가입할 수 없었고 그녀가 이룬 업적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사실, 그녀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세상은 제게 너무나 불친절합니다. 저는 그때문에 모두에게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여져지고 있어요.”
메리 애닝이 생전에 과학 저술에서 언급 된 것은 단 한 차례였는데, 1839년 《저널 오브 네츄럴 히스토리》는 자신들이 출간한 논문에 의문을 제기한 애닝의 서신을 실었다.
애닝은 1847년 3월 9일 유방암으로 죽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녀는 이미 몇 해전부터 화석 채집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건내준 아편제가 오히려 더 고통을 주었다. 마을에선 애닝이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질학회는 1846년 애닝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회원들이 갹출하여 기금을 모았다. 이 기금은 애닝의 치료와 애닝의 공로를 기념하여 새로 개장한 도싯 카운티 박물관의 설립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애닝은 3월 15일 라임 교구의 세인트 마이클 교회 묘지에 묻혔다.
1850년 지질학회가 애닝을 기념한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에 기증하였다.

스테인레스에는 기독교의 여섯 가지 자선 (굶주린 자를 먹이고 목마른자 마시게 하며 헐벗은 자를 입히고 집 없는 자 쉬게하고 갖힌자와 병자를 방문하는 것)을 묘사하였다.
스테인드글래스 밑에는 “이 창문은 1847년 3월 9일 죽은 이 교구의 메리 애닝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는 런던 지질학회 여러 회원의 대리자로서 지질 과학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을 뿐만아니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신실한 삶을 살았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애닝이 죽은 뒤 헨리 드라베시는 지질학회 회장으로서 그녀에 대한 찬사를 학회의 분기 정례 모임에서 낭독하였다. 이것은 지질학회가 최초로 발표한 여성에 대한 찬사였다. 찬사의 서두는 아래와 같다.
“나는 한 명의 죽음이 우리에게 준 손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학회의 편안한 자리에 있지 않았고 매일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녀의 재능과 연구가 없었다면 우리는 라임 지지스 인근의 거대 고생 파충류를 비롯한 다른 화석 생물에 대한 지식을 조금도 갖추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 “
1865년 2월 찰스 디킨스는 애닝의 생애에 대한 글을 문학 잡지인 《그 해 내내》에 발표하였다. 디킨스는 “목수의 딸은 스스로 명성을 쌓았고 그 명성에 걸맞았다”고 추도하였다.
1908년 테리 설리번은 “그녀는 해변가의 조개껍질을 팔았지.” (She sells seashells on the seashore)라는 잰말 놀이를 내놓았다.
2010년 왕립학회는 애닝의 사망 163년만에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녀를 꼽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