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2월 22일, 프랑스에서 루이 필리프 국왕을 상대로 한 ‘프랑스 2월 혁명’ (French Revolution of 1848, February Revolution) 발발
프랑스 2월 혁명 (French Revolution of 1848, February Revolution)은 1848년 혁명의 한 흐름으로 프랑스에서 1848년 2월 22일에서 24일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다. 의회 내 반대파가 일으켰으며, 이 사건으로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이 해산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 1세가 입헌 군주로서 즉위하였지만, 입헌 군주정은 소수 부유한 지주층이 권력을 잡은 체제였다. 프랑스의 산업 혁명으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지는 선거법의 개혁을 요구하고 민주적 입헌정과 공화정을 갈망했다. 한편 근대공업의 성립과 함께 노동자 계급이 성장, 그 비참한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반영하여 사회주의 사상도 점차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1847년에 성립된 기조 내각이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했기 때문에 개혁파는 ‘개혁연회’ (改革宴會)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847년 불황은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미 1846년의 소맥 흉작은 농민 폭동을 일으켰는데, 도시의 식량 부족과 물가 오름은 생활을 압박하고, 중소기업 도산으로 실업 증대도 겹쳐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경제 공황에 대해서도 정부는 아무런 타개책도 강구하지 못했고,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의 전국 개혁연회에 대한 금지령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튿날 기조 내각이 사임하였으나 민중의 폭동은 가라앉지 않고 격렬한 시가전으로 확대되었다. 24일 왕이 퇴위하였다.
2월 혁명 결과 루이 필리프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공화주의파와 루이 블랑 등의 사회주의파가 대립했으며 무산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국립작업장 (Atelier nationaux)이라는 조직이 생겨났다. 1848년 4월 말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를 실시했는데, 이때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낙선했다. 1848년 6월, 정부가 국립작업장을 폐쇄하자 많은 노동자들이 바스티유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고 정부는 카베냐크 (Cavaignac) 장군을 보내 시위를 무참히 진압했다. 그동안에 은행가·대지주·산업자본가들이 힘을 되찾아 질서당을 결성, 온건한 헌법을 의회에서 승인하게 했다. 앞선 혁명으로 부유층은 떠났어도 다시 기득권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사회는 다시 혼란에 빠졌고 사람들은 강력한 힘으로 프랑스를 이끌던 나폴레옹에 향수를 느꼈으며 그 결과, 남성 보통 선거의 도입으로 농민들이 선거권을 가지게 된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보나파르트가 승리하였고 제2공화정이 성립되었다. 농민들은 나폴레옹 1세의 영광을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다시 재현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충환, 저널리즘에서 사실성,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제 2제정시대를 열었으며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2월 혁명은 7월 혁명보다 유럽 사회의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을 완벽히 바꾸어 새롭게 하는 변화를 몰고 왔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추방되고 빈 체제가 붕괴되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통일 운동이 일어나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고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통일을 논의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이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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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2월 혁명 (1848년)
.시작: 1848년 2월 22일
.종료: 1848년 12월 2일
.장소: 프랑스
.결과: 루이 필리프의 왕정 해산, 프랑스 제2공화국 성립
1848년은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몰아 넣었고, 빈 보수 체제를 붕괴시켰다. 그 소용돌이의 중심은 프랑스 2월 혁명이었다. 더구나 19세기의 프랑스는 모든 의미에서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의 계속적인 발전이었다. 즉 사회적·정치적 평등 이념이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으로 구체화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 영국과 프랑스였고, 내셔널리즘을 지주로 하는 자유 통일의 방향을 명확히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 독일, 이탈리아 및 기타 후진국들이었다. 전자는 선거권의 확대와 노동자 계급의 권리 요구가 되고, 후자에 있어서는 봉건적 체제의 타파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저류를 이루는 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조류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프랑스에서는 7월 왕정하에서 정부를 좌우한 것은 대은행가나 대상인을 중심으로 한 대부르주아이며 신흥 중소 부르주아·노동자·농민의 입장은 부당하게 억압을 당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의 진전은 이와 같은 불합리한 대부르주아의 지배에 대한 신흥 부르주아의 정치적인 불만과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적인 요구가 반(反)정부 운동이라는 귀결점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해서 부르주아 공화파와 사회주의의 혼합정권이 실현되었다.
○ 프랑스 2월 혁명 (Révolution de Février)의 개요
7월 혁명으로 집권한 루이필리프의 7월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의 자유주의 혁명으로, 전 유럽으로 번져나간 1848년 혁명의 시초이다.
– 배경
“우리는 지금 화산 위에서 잠자고 있다. (…) 대지가 다시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으며, 폭풍우는 지금 지평선 저 위까지 다가왔다.” (Nous dormons sur un volcan (…) Ne voyez-vous pas que la terre commence à trembler? Le vent de la révolte souffle, la tempête est à l’horizon) – 알렉시스 드토크빌, 2월 혁명 발발 직전 의회 연설에서
루이필리프는 비록 입헌군주제를 지향했고 선량한 인물이었으나 완전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았고 의회에게 권한을 주는 것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편 183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산업 혁명이 활발하게 진행되자 세력이 커진 산업자본가와 노동자들이 7월 왕정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재산 보유액에 근거하여 제한적으로 투표권을 주었는데, 문제는 이 재산 보유액의 기준이 오로지 토지였다는 것. 이로 인하여 정치권력은 소수의 지주들에게 집중되었고 이 시기 한창 부를 쌓아가던 산업자본가들은 철저히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당한다. 대다수가 빈곤한 삶을 영위하던 노동자들이 제외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때 이웃국 영국이 1832년 선거법 개정을 통하여 중산층들에게 정치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산업자본가들의 불만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게다가 1846년 무렵이 되어 유럽 전역에 흉년과 경제 불황이 발발하면서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분노는 임계점으로 치닫고 상황은 일촉즉발에 다다른다.
– 진행
1848년 2월 파리 마들렌 광장에서는 선거권 확대와 관련되어 공개토론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소요를 우려한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토론회 개최를 방해하자, 그동안 쌓여 있던 시민들의 불만이 한번에 터져나온다. 2월 22일 무렵이 되면 파리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7월 왕정의 핵심인물로 시민들의 원성을 한 몸에 받아왔던 프랑수아 기조 (François Guizot) 수상이 다음날인 23일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수상식에서 사퇴한다.
기조 수상의 사퇴에 고무된 군중들이 정부 청사로 몰려들었고 정부 측에서는 병력을 동원하여 군중을 통제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발포가 이루어졌고 무려 52명의 시민들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난다.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전 파리가 들고 일어섰다. 파리 전역이 1500개의 바리케이드로 뒤덮이자 국왕 루이필리프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결국 24일 스스로 퇴위하여 영국으로 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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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국왕의 퇴위 다음날인 25일 파리에서는 임시 공화국이 선포됐다. 임시 공화국을 구성하는 양대 세력은 부르주아들이 주축이 된 온건 자유주의자와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혁명이 진행될 당시만 하더라도 두 세력은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혁명의 성공 이후 수립된 새로운 공화국의 청사진을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실은 동상이몽에 불과했음이 분명해져간다.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자들은 노조 허용, 근로시간 제한과 같은 사회개혁안을 추진했고 부르주아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개혁안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이처럼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커져가는 와중이었던 4월에 새로운 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된다. 선거권 제한 여부가 혁명을 불러온 핵심 원인이었던 만큼 임시정부는 보통선거를 도입했고, 이에 따라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30만 명에서 950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새로 선거권을 부여받은 이들 중 대다수는 시골의 농민들이었고 이들은 총선에서 부르주아들에게 표를 몰아준다.
선거에서 참패한 사회주의 세력들이 임시정부에서 대거 밀려 나가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는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6월이 되자 임시정부는 한층 더 노동자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4일에 걸쳐 10만명의 노동자들이 정부에 대항하는 소위 6월 봉기를 일으켰지만 정부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진압된다.
이어 12월 10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샤를루이나폴레옹이 당선되었는데, 농민과 노동자들의 몰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보수 세력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위대였던 지방 농민들은 ‘위대한 프랑스의 재현’을 부르짖으면서 나폴레옹 1세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표를 몰아주었고, 노동자들 역시 6월 봉기 당시 자신들을 무참히 진압한 부르주아 세력들에게 치를 떨면서 나폴레옹에게 대거 표를 던졌다.
– 평가
이 혁명은 단순히 프랑스의 7월 왕정이 무너지는데 그치지 않고 전 유럽으로 번지게 되어서 그 해 3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수상이 실각하여 빈 체제가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통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계급적 관점에서도 이 혁명은 상당히 중요한데 부르주아들과 대중들의 갈등 구도가 이 혁명을 통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프랑스 혁명과 7월 혁명의 경우에는 부르주아들과 대중들이 동맹 관계에 가까웠다. 부르주아들이 자유주의, 계몽주의와 같은 이념적 로드맵을 제시하는 역할이었다면 대중들은 정부를 전복시키는 물리력을 제공했던 것. 하지만 1830년대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성장하면서 노동자들을 포함한 대중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부르주아들이 이에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두 세력 간의 결별이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1848년 혁명 이후 유럽 전역에서 실질적으로 정치 권력을 손에 쥔 부르주아들은 기득권화되어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하는데 몰두한다.
다음은 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한 1848년 혁명에 대한 에릭 홉스봄의 평가다.
1848년 혁명들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혁명으로부터 몸을 뺐다. 그들은 프랑스의 지도 아래 서로 보강해 가면서 옛 지배자들의 부활을 막거나 연기시키고, 러시아가 개입해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다시 한 번 ‘위대한 국민’이 된다는 보수와 그것에 따르는 위험보다는 국내의 사회적 안정 쪽을 택했던 것이다.
루이 필리프 1세 (Louis-Philippe Ier, 1773 ~ 1850)에 대하여
루이 필리프 1세 (Louis-Philippe Ier, 1773년 10월 6일 ~ 1850년 8월 26일)는 프랑스인의 왕 (재위: 1830년 ~ 1848년)이다. 본명은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 (Louis-Philippe d’Orléans)이다. 그의 아버지의 별명이 평등한 필리프 (Philippe Égalité)인 고로 프랑스 혁명 중에는 평등한 자의 아들 (Égalité fils)로 불렸으며 나중에 1830년부터 1848년까지 프랑스의 왕으로 지냈다.
그는 자신의 통치 모델로 선택한 영국의 정치 제도에 열광하였으며, 그의 통치기간 동안에는 금융과 수공업 부르주아들이 빠르게 자본을 쌓아갔던 반면 노동자들은 극도로 비참했다. 그로 인한 끊임없는 민중 반란이 그의 통치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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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필리프 1세 (Louis-Philippe I)
.휘: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
.출생: 1773년 10월 6일, 프랑스-나바르 왕국 파리 팔레 루아얄
.사망: 1850년 8월 26일 (76세), 영국의 기 영국 서리 클레어몬트
.매장지: 드뢰 왕립성당
.왕조: 카페 왕조
.가문: 오를레앙 가
.부모: 부) 루이 필리프 2세 도를레앙 공작, 모) 마리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도를레앙 공작부인
.배우자: 마리아 아말리아 테레사 디 시칠리아 왕녀
.종교: 천주교
* 프랑스인의 왕
.재위: 1830년 8월 9일 – 1848년 2월 24일
.즉위식: 1830년 8월 9일
.전임: 샤를 10세 / 후임: (왕정 폐지)
* 안도라 공동대공
.재위: 1830년 8월 9일 – 1848년 2월 24일
.전임: 샤를 10세 / 후임: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오를레앙 공작
.재위: 1793년 11월 6일 – 1830년 8월 9일
.전임: 루이 필리프 2세 / 후임: 페르디낭 필리프
.군주: 루이 18세 (1815년-1824년), 샤를 10세 (1824년-1830년)
○ 초기 생애
파리에서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은 오를레앙 공작 (duc d’Orléans)이며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이라고 알려진 루이 필리프 조셉 도를레앙 (1747년 – 1793년)과 루이즈 앙리에트 마리 아데라이드 드 부르봉 (1753년 – 1821년)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5년 죽은 그의 할아버지의 발루아의 공작 (duc de Valois)의 작위를 1774년 출생할 때 수여받았고 그리고 이어서 샤르트르의 공작 (duc de Chartres)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프랑스 혁명에 참여하였다. 그는 사령관으로써 발미, 제마프, 네르빈덴 전투에 참전하였다.
1790년 자코뱅 당에 들어갔다가 1792년 아버지가 처형당하자 그의 상관인 뒤무리에 장군을 따라서 루이 필리프는 1793년을 오스트리아에서 보냈고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4년을 망명하는 등 인생의 방황기를 보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았지만 그의 추방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1809년 루이 필리프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공주이고 페르난도 1세의 딸인 마리 아멜리 드 부르봉 (1782년 – 1866년)과 결혼을 한다. 그들은 열명의 자녀를 두었다.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사임을 한 후, 루이 필립은 프랑스로 돌아와서 살기 시작했고 자유사상을 보호하는 데 힘썼으며 팔레 루아얄과 오를레앙공작 (duc d’Orléans) 작위를 받았다. 그는 프랑스 혁명 중 재산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보상법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본 사람이다.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치하의 부르봉 왕정복고기간 동안 루이 필리프의 인기는 커졌다. 그는 극단적인 왕권주의에 반대했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잊지 않았다. 루이 필리프는 자녀들을 일반고등학교에 보냈고 겸손하고 평범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았다. 루이 18세가 죽은 다음날, 그는 새로운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에 의해 왕위계승권을 얻었다.
○ 프랑스인의 왕
– 즉위 과정
1830년 7월 혁명이 샤를 10세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났다. 샤를 10세는 ‘루이 필리프’를 왕실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루이 필리프는 금융 귀족들의 지지로 하원 의회에 의해 ‘프랑스인의 왕’으로 발표되었다 (‘프랑스의 왕’이 아니다). 이 새로운 직위는 국민에 국민의 왕정정치를 나타내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러므로 루이 필리프의 왕정은 국민의 대표와 왕사이의 하나의 계약서가 기반이 되는 계약 왕정이었다. 7월 왕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새로운 왕정의 다른 상징은 왕정복고 때의 하얀 국기를 현재의 프랑스의 국기로 교체한 것이다. 국민들의 지지와 함께 루이 필리프가 권력에 오르는 것은 유럽 각국 왕궁의 적대감을 샀고 루이 필리프는 ‘폭동왕’ 혹은 ‘시민왕’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 통치
루이 필리프의 왕권에 이의를 제기한 앙리 5세의 지지자들은 정통왕정파를 이루었다. 사실 ‘진짜’ 왕정파들은 샤를 10세가 왕위에 있는 것처럼 여겼으며 그의 왕위 계승은 무효라고 여겼다.
1832년 루이 필리프의 딸, 루이즈가 레오폴 1세와 결혼함으로써 벨기에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1832년 5월, 영국,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라는 세 열강국 간의 회의가 영국 런던에서 열렸다. 이 런던 회의는 그리스에 안정적인 정부를 성립하기 위해 모인 국제 회의였다. 이 협상으로 바이에른 왕자 오톤을 임금으로 세워 그리스 왕국이 성립하였다. 같은 해 6월 5일부터 6일까지, 7월 왕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공화주의자들이 국왕의 유력한 조력자이자 추밀원 의장인 카지미르 피에르 페리에가 5월 16일에 사망하고, 뒤이어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자 자유주의 정치가인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가 6월 1일에 사망한 것을 계기로 봉기 (6월 봉기)를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1829년 임기를 개시하였는데,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나폴레옹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 선박들의 나포에 따른 약탈에 보상 요구가 긴장 관계를 야기하였다. 프랑스 해군이 미국 선박들을 나포하고 어떤 보상이나 사법적 절차도 없이 강제 노역을 시키고서는 스페인의 항구로 그 배들을 끌고 갔었다. 미국의 국무장관 마틴 밴 뷰런에 따르면, 미국과 프랑스 간의 관계는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잭슨 정부의 주(駐)프랑스 공사 윌리엄 캐벨 리브스는 외교를 통하여, 배상금으로 2500만 프랑 (500만달러)를 지급하는 배상금 조약에 프랑스가 서명 (1831년 7월 4일)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내부의 재정 결핍과 정치적 어려움으로 납부를 연체하였다. 루이 필리프 1세와 그의 내각은 프랑스 대의원 (代議院)을 비난하였다. 1834년까지도 프랑스 정부가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자, 잭슨은 분노하였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1834년 12월 1일자, 메시지를 통한 제6차 국정 연설에서 프랑스 정부의 납입 연체를 단호하게 질책하고, 미연방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단단히 실망했다는 점을 표명하고, 프랑스에 대한 무역 보복을 승인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하였다. 잭슨의 성명에 모욕감을 느낀 프랑스인들은 사과를 요구하였다. 1835년 12월 7일자, 메시지를 통한 제7차 국정 연설에서 잭슨은 사과하기를 거절하면서, 그는 프랑스인들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의도는 평화적인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는 조약의 배경이 되는 역사에 대해서 길고도 자세하게 설명하였고, 또한 프랑스 정부가 의도적으로 지급을 지연하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도 설명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잭슨의 교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1836년 2월에 마침내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1838년 루이 필리프는 멕시코 제과전쟁을 위하여 군대를 파견한다.
1842년부터 코트디부아르 점령이 시작된다. 프랑스 군대는 먼저 아씨니부터 점령했다.
1843년 에티오피아 쉐아의 지도자 사흘레 셀라시에와 우호와 통상 협정을 맺다.
프랑스와 영국이 협정을 맺으면서 루이 필리프는 1844년 윈저 성을 방문하지만 루이 필리프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그의 성에서 1843년과 1845년에 두 번 맞는다.
몇 년 동안, 루이 필리프는 그의 선임자들이 보여주었던 거만하고 막대한 지출을 하는 것을 피하며 겸손하게 국가를 운영했다. 처음에는 그는 시민왕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인기는 그의 내각이 점점 왕정주의와 보수주의로 변모하자 추락하기 시작했다. 일반 시민들의 삶의 질이 악화되었고 봉급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1846년부터 1848년 사이의 경제위기는 공화당 당원들이 왕에 대항하는 새로운 혁명모임을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산업 자본가 · 공화파의 소시민층 · 노동자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되어, 1848년 2월 혁명 때 왕위를 잃고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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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양위와 추방
폭동의 전개 이전, 루이 필리프는 1848년 2월 24일 자신의 어린 손자 필리프 드 파리 백작에게 왕권을 양도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일을 겪을까봐 그는 변장을 하고 ‘Mr Smith’라는 평범한 마차를 타고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상원의회는 그의 손자를 왕으로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바꿔서 여론을 쫓아 프랑스 제2공화국의 발표를 결정한다.
루이 필리프와 그의 가족은 영국에서 그의 죽음 (1850년 8월 26일)까지 클레어몬트에서 지낸다. 1876년 그의 시신과 그의 부인의 시신은 1816년 드뢰에 루이 필리프의 어머니가 건설하고 1820년대 루이 필리프가 성장한 왕실 성당으로 옮겨졌다.
○ 가족 관계
– 형제
앙투안 필리프 몽빵시에 공작
아델라이드
루이 샤를 보졸레 백작
– 자녀 (이름, 생일~사망, 기타)
.페르디낭 필리프 도를레앙 공작, 1810년 9월 3일 ~ 1842년 7월 13일 (31세), 오를레앙 공작, 도팽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헬레네와 결혼, 2남
.루이즈, 1812년 4월 3일 ~ 1850년 10월 11일 (38세)
.마리, 1813년 4월 12일 ~ 1839년 1월 6일 (25세)
.루이, 1814년 10월 25일 ~ 1896년 6월 26일 (81세) , 네무르 공작
.프랑수아즈, 1816년 3월 26일 ~ 1818년 5월 20일 (2세)
.클레망틴, 1817년 3월 6일 ~ 1907년 2월 16일 (89세), 아우구스트 폰 작센코부르크 공작과 결혼, 3남 2녀
.프랑수아, 1818년 8월 14일 ~ 1900년 6월 16일 (81세)
.샤를, 1820년 1월 1일 ~ 1828년 7월 25일 (8세), 요절
.앙리, 1822년 1월 16일 ~ 1897년 5월 7일 (75세)
.앙투안, 1824년 7월 31일 ~ 1890년 2월 4일 (6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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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