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2월 23일, 미국의 제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John Quincy Adams, 1767 ~ 1848) 타계
존 퀸시 애덤스 (John Quincy Adams, 1767년 7월 11일 ~ 1848년 2월 23일)는 미합중국 제6대 대통령 (1825 ~ 2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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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퀸시 애덤스 (John Quincy Adams)
.출생: 1767년 7월 11일, 미국 매사추세츠 브레인트리
.사망: 1848년 2월 23일, 미국 워싱턴 D.C.
.정당: 휘그당
.배우자: 루이자 캐서린 애덤스 (1797 ~ 1848년)
.자녀: 조지 워싱턴 아담스, John Adams II,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시니어, 루이자 캐서린 아담스
*미국의 제6대 대통령
.재임: 1825년 3월 4일 ~ 1829년 3월 3일
.부통령: 존 C. 칼훈 (1825 ~ 1829년)
북서 태평양 지역의 영토인 워싱턴 준주와 플로리다 준주를 매입했다.
먼로 독트린을 만들자고 먼로에게 앞장섰다.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에게 패한 뒤 20년 간 죽을 때까지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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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존 퀸시 애덤스 (John Quincy Adams, 1767년 7월 11일 ~ 1848년 2월 23일)는 매사추세츠에서 존 애덤스와 애비게일 퀸시 애덤스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가인 애덤스 가문과 외가인 퀸시 가문은 보스턴의 명문가이자 보스턴 지역을 대표하는 가문들이다.
유년기부터 외교 업무로 유럽에 출장을 다닌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가정 교육을 받는데 유년기의 경험은 애덤스의 국제적 안목과 외국어 학습에 큰 도움이 준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1791년에 유럽 각지를 다니며 외교 사절로 근무한다. 이후 귀국하여 여러 공직을 거치다가 제임스 매디슨에 의해 프로이센 대사와 영국 대사를 지내며 미영전쟁 종전 협상인 겐트 조약에도 참석하며 외교 분야에서 명석함을 발휘한다.
제임스 먼로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임명되는데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와 북서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교섭을 맡았고 매입을 성사시킨다. 매입 성공으로 미국의 영토는 태평양에서 대서양에 이른다. 먼로 독트린을 구상하고 작성한 사람 역시 애덤스이다. 먼로 행정부 8년을 국무장관으로 일하였는데 업적이 매우 커서 현대에도 유능한 미국 국무장관으로는 상위권을 기록한다.
화려한 언변과 뛰어난 외교 능력 덕분에 애덤스에게는 ‘노련한 능변가 (Old Man Eloquent)’라는 별명이 붙는다.
1820년, 존 퀸시 애덤스는 민주공화당의 또다른 후보로 나가서 제임스 먼로에게 무려 231:1의 엄청난 대패를 당하고 대통령의 꿈을 접었으나, 4년뒤인 1824년 대통령 선거때 또다시 후보로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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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4년 대통령 선거
많은 미국인들은 애덤스가 대통령으로서 먼로를 따라가야 한다고 믿었다.
매디슨과 먼로는 둘다 국무부 장관을 지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애덤스는 또한 자신이 선출되어야 한다고 느꼈으나 투표를 몰려드는 데 약갼의 일을 하였다.
4명의 민주공화당원들 – 존 C. 칼훈, 헨리 클레이, 윌리엄 H. 크로포드와 앤드루 잭슨이 애덤스를 반대하였다.
칼훈은 빠져나가 부통령에 선출되었다.
잭슨은 99개의 선거 투표를 얻었고, 애덤스는 84개, 크로포드는 41개, 클레이는 37개의 투표를 얻었다.
아무도 다수를 가지지 못하자, 미국 하원은 첫 3명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였다.
클레이는 자신의 지지를 애덤스에게 던지자, 애덤스는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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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8년 대통령 선거
애덤스는 인기를 얻지 못하였으며, 아마 그의 냉담한 매너의 이유였으라 숙고된다.
그는 잭슨과 그의 부하들이 자신을 공격할 때 자신을 방어하는 데 노력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잭슨이 위대한 인기를 얻었으며,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과 러닝메이트 칼훈 부통령이 178석의 투표를 얻었다.
애덤스와 재무 장관 리처드 러시는 83석에 그쳤다.
- 사망
1848년 2월 21일 애덤스는 하원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상태가 악화되어 연설자의 방으로 옮겨졌다가 이틀 후에 사망하였다. 향년 81세.
그는 매사추세츠 주 퀸시의 퍼스트 유니테리언 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부인 루이사 여사도 1852년 5월 15일에 사망하여 남편 곁에 묻혔다.
후에 그들의 유해는 교회의 토굴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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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퀸시 애덤스의 리더십
- “공직에 차등이란 있을 수 없다”
존 퀸시 애덤스는 제2대 미국 대통령 존 애덤스 아들로서 미국 안팎에서 당대 최고 교육과 경험을 체득한 건국 2세대 중 대표적 엘리트였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주재공사를 지냈고, 연방 상원의원을 거쳐 국무장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미국 역사상 최고 국무장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그는 유명한 ‘먼로 독트린’을 구상하고 실현시킨 주인공이었다.
1824년에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파와 지역분쟁으로 점철된 정치적 현실로 인해 대통령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돼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무려 18년이나 하원에서 공복(公僕)으로서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전직 대통령이 하원의원에 출마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파격적인 사례다.
당대 미국인들은 의아해했지만, 존 퀸시 애덤스는 그의 선택에 담담했다.
대통령이든 하원의원이든 공직자 지위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본질에는 차등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유럽 전제정 틀을 깨고 공화정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권위와 위계질서에 바탕을 둔 관료제 그늘을 쉽게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직자 (public servicemen)라는 개념은 아직 정립되지도 않았던 시대였다.
진정한 평등사회와 민주주의는 공직의 평등개념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존 퀸시 애덤스는 공직 개념을 새로 정립한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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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문제 등 ‘불편한 진실’ 꾸준히 지적
존 퀸시 애덤스의 가장 두드러진 성품은 정직이다. 정직의 배양분이 원칙과 소신이라면, 그 열매는 때론 소외와 따돌림이다.
그는 오랜 공직생활 내내 그러한 정직의 떫은 열매를 맛보았다. 상원의원 재임 시 그는 제퍼슨 대통령의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매사추세츠주를 포함한 북부 정치인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결국 그는 아버지 혼이 담긴 연방파에서 탈퇴하고 상원의원 직에서 사퇴했다.
하원의원 시절 애덤스는 대다수 의원들에게 ‘저승사자’와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그가 노예해방을 주창했기 때문이다. 당시 의회에서는 골치 아픈 노예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함구령 (gag rule)’ 을 제정해서 의사당 내에서 노예에 관한 언급을 일절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덤스 의원은 자유, 평등, 그리고 언론의 자유와 같은 건국이념을 내세우며 지속적으로 노예문제를 거론했다. 이런 애덤스는 다른 의원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하지만 애덤스에게는 동료 의원들과 친분이나 정치력보다 건국이념을 지키는 원칙과 소신이 더 중요했다.
- 미국 공직자 롤모델로 자리매김
존 퀸시 애덤스는 미국 초기 역사에서 ‘잊힌 인물’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가 세운 공직자상의 그루터기 위에 건국의 이상은 새롭게 돋아나게 되었다. 1846년 하원의원 초년생으로 의사당에 입성한 링컨은 외로이 노예해방을 외치는 애덤스 모습에서 공직자의 롤모델을 찾았다. 링컨이 있기 전에 퀸시 애덤스가 있었고,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하기 전에 애덤스의 노예해방 투쟁이 있었다.
개인 체통보다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실한 공직자로서 사명을 더 귀중하게 여겼던 존 퀸시 애덤스의 유산은 미국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재현된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대법원 판사로 봉직하거나, 자신이 소속된 정당과는 다른 후임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무를 수행하거나, 평화와 인권의 사도로서 후임 대통령 특사 노릇을 기꺼이 수행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공직의 평등개념을 세웠던 존 퀸시 애덤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_ 김봉중 전남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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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