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1월 29일, 러시아의 의사•소설가•극작가 안톤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1860 ~ 1904) 출생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러: 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년 1월 29일 ~ 1904년 7월 15일)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 안톤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출생: 1860년 1월 29일, 러시아 타간로크
.사망: 1904년 7월 15일, 독일 Badenweiler
.부모: 예브게니야 체호프, 파벨 예고로비치 체호프
.배우자: 올가 크니페르 (1901 ~ 1904)
.저서: Entana Cekhava ki cunida kahaniyam,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사랑에 관하여 등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활동했던 러시아의 극작가, 소설가, 의사이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중 한 명이다.
푸시킨에서 시작되어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로 절정을 이루었던 러시아 문학 황금시대의 마지막 작가로 꼽힌다.
○ 생애 및 활동
체호프는 1860년 흑해 위에 있는 아조프 해 연안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Taganrog)에서 식민지 수입 상품점을 하는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Pavel Egorovič)와 어머니 예브게니야 야코브레브나 모로조바 (Evgenija Jakovlevna Morozov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조부는 원래 농노였으며 부친은 조그마한 채소가게를 했었다. 체호프는 어릴 때부터 가게를 도와야만 했다.
1867년 고향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예비학교를 다닌 후, 1869년 고전 교육을 목표로 하는 타간로크 인문학교에 입학한다. 1872년 성적 불량으로 3학년 과정을 반복하며, 3년 뒤 고대 그리스어 시험에 낙제하여 다시 5학년 과정을 반복한다.
지방정치와 교회합창에 너무 열중한 부친은 파산, 체호프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며, 학교 때문에 홀로 남은 체호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스크바로 나왔다. 15세의 체호프는 큰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문학 창작에 열중한다. 두 형 알렉산드르와 니콜라이 그리고 동생 이반이 5년 과정으로 타간로크 학교를 졸업한 반면, 체호프는 1879년 8년 과정으로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대학 진학 자격을 얻는다. 같은 해 타간로크 모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모스크바로 올라가 그 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부모 형제들과 재회하며, 같은해 10월 모스크바 대학의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체호프는 의학공부를 하는 한편 타간로크에서 받는 장학금과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의 잡지에 유머 단편을 써서 그 기고료로 부모와 세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엄청난 수의 단편 소설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데 1886년 한 해에만 무려 116편의 단편을 썼고, 1887년엔 69편을 썼다. 물론 작가 생활 초기에는 정말 취미 정도의 이야기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글을 많이 쓰게 되면서 점점 작가로서 성장하며 진지한 주제를 많이 쓰게 되었다.
1887년 연극 이바노프의 첫 상연이 있기까지 체호프는 문학잡지 《귀뚜라미 (Strekoza)》, 《파편 (Oskolski)》, 《자명종(Budilnik)》, 《페테르부르크 신문》 등에 100줄에서 150줄로 한정된 짧은 단편과 수필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기고한다.
특히 1883년에는 《Oskolski》에 매 이주일마다 모스크바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컬럼을 맡는다. 체호프의 글은 호평을 받았으며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신진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이처럼 글을 써 돈벌이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83년 10월부터 의학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하여 다음해 9월 졸업을 했다. 그러나 23세 때 걸린 폐결핵 이 체호프의 건강을 늘 위협하게 된다. 그 해 11월에 처음 결핵 증세로 요양하게 되었다.
1884년에는 또한 첫 단편집 《멜포네네의 우화》가 출판된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 시베리아, 사할린 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 작품 세계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 (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 (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 (1888)이나 <결혼신청> (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 (1899), <세 자매> (1901), <벚꽃동산> (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 (會話劇)을 확립했다.
<갈매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바냐 아저씨>는 앞서의 <숲의 정>을 다시 쓴 것으로서 그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세 자매>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 (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 (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 (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 (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 (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 (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 평가
희곡, 단편 소설에서 러시아, 더 나아가 세계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대작가다.
단편소설의 선구자이자 대가이며, 단편소설만으로 일가를 이룬 대문호라는 평가를 받는다. 수많은 후대의 소설가들이 체호프의 단편 소설과 문체에 영향을 받았는데, 레이먼드 카버, 어니스트 헤밍웨이, 버지니아 울프, 서머싯 몸, 캐서린 맨스필드, 네이딘 고디머 등 그 이름을 나열하기도 버거울 정도이다. 작품의 소재도 러시아 농민들의 삶이나 공무원들의 고생부터 말도둑, 심지어는 탐정물까지 쓴 적이 있을 정도로 그 범위가 매우 다채롭다. 유명한 작품중 하나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단편소설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정확한 필치로 생의 장면들을 잘라 그려낸 듯한 작풍이 특징이며, 글의 길이가 대체적으로 짧은 편이다. 개중엔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한 작품도 있다. 또한, 미사여구를 구사하기 보다는 평이하고 단순한 일상어를 바탕으로 문장을 간결 명료하게 구성하는 문체를 구사한다.
아무튼 이런 단편을 한해에 100편 넘게 쏟아냈다. 이렇다보니 아직까지 그의 단편들이 전집 수준으로 번역되지는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 나온 것들도 출판사 별로 제각기 중복되어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소설가로서의 위상도 독보적이지만, 극작가로서의 명성이 더 높다. 노르웨이의 헨리크 입센, 스웨덴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함께 현대 희곡의 아버지로 꼽힌다. 전 세계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함께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이다. 러시아 근대문학을 배울 때에도 소설가로서보다는 극작가로서 더 쳐주는 경향이 짙고, 러시아 사람들은 체호프를 소설가라기보다는 극작가로 생각하는 편이다. 그 자신도 문단보다는 연극계 쪽으로의 인연이 더 깊었다. 부인 올가도 모스크바 예술극단의 대배우였다. 러시아의 연극배우 지망생들에게는 셰익스피어 작품 이상으로 파고들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연기와 연출의 방법론을 두고 19세기 러시아의 스타니슬랍스키와 메이어홀드가 논쟁을 벌였을 때, 그 대상이 체호프의 걸작 벚꽃 동산을 어떻게 무대에 올릴 것인가가 주제였기 때문에, 배우와 연출가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가이다. 서브텍스트라는 개념이 바로 체호프의 연극의 극화 과정에서 심도 깊게 연구된 개념이다.
대표 희곡으로는 단막극 ‘청혼’, ‘곰’과 흔히 체호프 4대 장막극으로 불리는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자매’, ‘벚꽃 동산’ 등이 있다. 체호프가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평생에 걸쳐 38편의 작품을 남긴 셰익스피어와 달리 단명한 체호프는 불과 4편의 장막극만을 남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와 함께 극작의 양대산맥으로 거론된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얼마나 많은 위대한 작품을 더 남겼을지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체호프의 총’이라는 ‘클리셰 법칙’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1막에서 벽난로의 총이 공들여 묘사되었다면, 그 총은 극이 끝나기전에 적어도 한 번은 발사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한국내에서는 복거일이 이영도의 작품을 비판하면서 체호프의 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체호프의 총’과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 ‘맥거핀’이다. 중요한 소재인 것처럼 초반부에 등장하였다가, 서사를 진행시키는 기능만 수행하고 슬며시 사라지게 하는 서사 기법으로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이 유명해지게 한 서사 기법이다.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을 쓴다는 인상이 있는데 관리의 죽음, 드라마 같은 유머러스한 작품도 많이 썼다. 그의 단편작 중 상당수는 읽다보면 지금 기준으로도 웃음을 자아내는 내용이 많다. 체호프 본인도 꽤나 유쾌한 성격이었다고 알려지며, 스스로를 코미디 작가라고 생각했다. ‘갈매기’는 아예 서문에 4막으로 구성된 코미디(희극)이라고 명시되어 있을 정도이다.
당연히 모국 러시아에서는 위대한 대문호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체호프의 소설 중 하나인 ‘6호 병동’을 읽고 “나 자신이 ‘6호 병동’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두려워진 나는 창 밖으로 뛰쳐나갔다”라는 평을 남긴 뒤 큰 충격을 받아 혁명가가 된 사람이 있다.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 작품
1880년대 전반 몇 년 동안에 ‘관리의 죽음’, ‘카멜레온’, ‘하사관 프리시베예프’, ‘슬픔’ 등과 같은 풍자와 유머와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많이 남겼다. 그후 ‘황야’, ‘지루한 이야기’, ‘등불’ 등을 발표하며 작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굳혔고, 30세 때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기점으로 사회 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다루며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근대연극에서 기분극 (氣分劇)의 창시자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희곡으로는 ‘이바노프’ (1887), ‘갈매기’ (1896), ‘바냐 아저씨’ (1897), ‘세 자매’ (1901), ‘벚꽃동산’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은 러시아 근대 리얼리즘을 완성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88년에는 단편 소설집 ‘황혼’ (1887)으로 푸쉬킨 상을 수상했다.
- 전집
Sočinenija (작품), 10권, 편집 A. f. Marks, 1899-1902, 페터스부르그 (최초의 안톤 체호프 전집).
30권 전집, 편집 Belčikov, D. D. Blagoj, G. A. Bjalyj, A. S. Majsnikov, L. D. Opulskaja, A. I. Revjakin, M. B. Chrapčenko, 1974ff. 모스크바.
- 대표 작품
•단편
〈관리의 죽음〉(1883)
〈우수〉(1885)
〈키스〉
〈사랑에 대하여〉
〈귀여운 여인〉(1898)
〈약혼녀〉(1902)
〈개를 데리고 있는 여인〉(1899)
〈카멜레온〉(1884)
〈초원〉(1888)
〈6호 병실〉 (1892)
〈사할린 섬〉(1890)
〈아리아드나〉
〈결투〉(1892)
•극
《이바노프》
《갈매기》(1896)
《세 자매》(1901)
《바냐 아저씨》
《벚꽃 동산》(1903)
《곰》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