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4월 5일, 수운 (水雲) 최제우 선생이 동학 (東學) 창설
동학 (東學)은 1860년 (철종 11) 수운 (水雲) 최제우 선생이 창건한 신흥 종교이다. 이후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계승되어 발전한다.

– 배경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각지의 반란, 외국의 간섭, 정치의 문란, 사회적인 불안과 긴장이 계속되었으며 한편 종래의 종교는 이미 부패 또는 쇠퇴하여 민중의 신앙적인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 성립
이와 같은 정세를 배경으로 경주 출신인 최제우는 제세구민 (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1860년 서학 (西學: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 동학 (東學)이라 이름 짓고 종래의 풍류 사상과 유 (儒) · 불 (佛) · 선 (仙)의 교리를 토대로 ‘인내천’ (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므로 모든 사람은 멸시와 차별을 받으면 아니된다.), ‘천심즉인심’ (天心卽人心,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다.)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인내천’의 원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의 이념 즉,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자는 이념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권과 평등사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 신앙의 구체적 방법은 21자의 주문 ‘至氣令至, 願爲大峰,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를 외우고 칼춤을 추며 ‘弓弓乙乙’이라는 부적을 태워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제병장생 (濟病長生), 영세무궁 (永世無窮)한다는 기본적인 것이었다.
– 전파
한편 동학은 조선의 지배논리인 신분 · 적서제도 (嫡庶制度) 등을 부정하는 현실적 · 민중적인 교리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되던 삼남지방에 재빨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최제우는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1864년 혹세무민 (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당하고, 최시형이 2대 교주가 되어 비밀리에 교조의 유문 (遺文) ‘동경대전’, ‘용담유사’ (龍潭遺詞)를 간행하는 한편 교리를 체계화하고 교세를 확대시켰다. 그 후 동학 혁명이 일어나 최시형도 처형을 당하고 동학은 천도교 (天道敎)와 시천교 (侍天敎)로 분열, 3대 교주에는 손병희가 되어 꾸준히 교리 정비와 교세 확장에 힘썼다.
– 조직
동학의 교회 조직은 최시형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즉 전국 각지에 세포 조직인 포 (包)를 설치하여 접주 (接主)로 통솔케 하고, 접주 (接主) 중에서 유력한 사람을 도접주 (都接主) 또는 대접주 (大接主)라 하여 여러 포를 통솔하는 한편 교장 (敎長) · 교수 (敎授) · 도집(都執) · 집강 (執綱) · 대정 (大正) · 중정 (中正)의 6가지 직분을 두었다.
– 영향
동학의 혁명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 동학 농민 혁명 (東學 農民 革命)
동학 농민 혁명 (東學 農民 革命), 동학 혁명 (東學 革命), 동학 농민 운동 (東學 農民 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 農民 戰爭)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 (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 (2차)와 음력 9월의 전주 · 광주 궐기 (3차)로 나뉜다.
– 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날짜: 1894년~1895년
.장소: 충청도, 전라도 일대
.결과: 동학농민군이 초기에 우세했으나 결국 실패
– 배경
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도화선이 되어 농민운동을 일으켰다.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청나라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톈진 조약을 파기시킬만큼) 민씨 정권에서 청나라 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진압하자, 일본은 일본대로 청나라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화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급기야 그것은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 개요
.고부 봉기와 자진 해산
1894년 2월 15일 (음력 1월 10일)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곧 중앙정부의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로 향했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대원군은 이 기회를 이용, 동학 농민군과 접선하여 손자인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1886년 흥선대원군은 민씨 정권이 ‘조약’을 체결하자 불만을 품은 위안스카이 (袁世凱)와 결탁하여 장남 이재면 (李載晃, 고종의 형, 완흥군 / 흥친왕)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 세력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학 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실현되지 못하였다. 동학군 중에는 전봉준과 같이 대원군의 문하에 출입하던 인물들도 있었고, 폐정개혁과 대원군 추대, 민씨 외척세력 척결과 개화파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도 강력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은 민씨 정권의 부패정치와 지방에 파견된 탐관오리들에 대한 반발을 주목했다.
한편 정부에서 안핵사 (按覈使) 이용태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하자 고부군의 동학군은 해산하였다.

.1차 봉기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첫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 (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 이용태의 강경책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태인 대접주 김개남, 무장 (茂長) 대접주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1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 등으로도 불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 손화중을 장령 (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궐기한 뒤 전주성을 점령한다.
한편 동학농민군은 고부의 황토현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에서 4월 7일 (양력 5월 11일) 전주감영군을 격파했다. 이에 크게 놀란 조정에서는 전라도병마절도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 양력 5월 27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4월 27일 (양력 5월 31일)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1894년 3월 21일 고부에서 봉기한 지 석 달,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청, 일에게 군사주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갑오개혁의 시작이되는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
.전주화약과 청일 양국군의 주둔
사태가 확산되자 고종과 왕비는 당황해하였다.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텐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불법으로 조선 궁궐 경복궁을 침범 (갑오왜란) 명성황후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제1차 김홍집내각, 즉 친일 내각은 일본공사 오토리의 입김 아래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조선정부와 동학농민군과 맺은 자주적인 개혁 전주화약을 간섭한 친일내각의 갑오개혁이다.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전주화약 당시에 설치된 교정청을 폐지 이후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교정청 출신인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
.2차 봉기와 실패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전쟁은 두 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해산되었던 동학농민군이 외세배격을 기치글 내걸고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전쟁을 감행했다.
봉기한 동학농민군 제1대는 전봉준의 지휘 하에 공주성으로 다가들었고, 제2대인 김개남의 지휘하에 청주병영으로 진격했다. 농민군의 최종 목표는 서울로 쳐들어가 부패한 정치가들과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있었다. 교조신원운동에서 고부 봉기, 그리고 제2차 봉기까지 전봉준과 농민군은 오직 그 날을 위해 달려갔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 해 12월 패배하여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교조 신원운동과 대원군의 개입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동학도들은 동학도들 대로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편 1893년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 천도교 (天道敎)
.주요 인물: 최제우 · 최시형 · 손병희 · 박인호
.경전: 동경대전 · 용담유사 · 해월신사 법설 · 의암성사 법설
.교리: 시천주 · 사인여천 · 인내천 · 후천개벽
.역사: 동학 · 동학 농민 운동
.관련 단체: 천도교중앙총부 · 천도교연원회
천도교 (天道敎)는 동학을 계승하여 발전된 한국의 신흥 종교이다. 조선 말기에 최제우 선사가 1860년에 ‘서학’ (천주교)의 유입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신앙을 제창하며 창립한 동학을 1905년에 3대 교주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편하였다. 1907년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1860년을 포덕 원년으로 삼으며 동학을 계승한다. 초창기에는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활발한 교세를 이어갔었다. 또한 ‘포덕’ (布德)이라는 연호가 존재하는데, 최제우가 용담정에서 한울님에게 계시를 받았다는 1860년 (조선 철종 11년)을 원년 (1년)으로 하여 천도교 내에서 지금까지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