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11월 7일, 무굴 제국 황제 바하두르 샤 자파르 / 바하두르 샤 2세 (Bahadur Shah II, 1775 ~ 1862) 타계
아부 자파르 시라줏딘 무함마드 바하두르 샤 자파르 / 바하두르 샤 2세 (1775년 10월 ~ 1862년 11월 7일, 재위 1837년 9월 28일 ~ 1857년 9월 14일)는 인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티무르 황조의 마지막 군주다.
– 바하두르 샤 2세 (Bahadur Shah II, 1775 ~ 1862)
.출생: 1775년 10월 24일, 인도 델리 올드 델리
.사망: 1862년 11월 7일, 미얀마(버마) 양곤
.매장: 1862년 11월 7일, 미얀마(버마) 양곤 Tomb of Bahadur Shah Zafar
.부모: 아크바르 2세, 랄 바이
.배우자: 지나트 마할 (1840 ~ 1862년)
.자녀: 미르자 무갈, 미르자 샤 압바스, 미르자 자완 바크흐트, 미르자 카이즈르 술탄 등
.손주: 미르자 아부 바크흐트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제19대 황제인 악바르 2세의 아들이며,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이름은 자파르 (Zafar)다.
○ 생애 및 활동
라지푸트 족 악바르 2세와 랄바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7년 9월 28일, 악바르 2세가 사망하자 무굴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훌륭한 서예가이자 우르두어 시인이었지만, 즉위 이전부터 무굴 제국은 점차 쇠퇴하고 있었으며,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를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던 시기인 탓에 정치에 있어서는 허수아비나 다름 없었다. 1857년에 동인도 회사에 반발하여 일어난 세포이 항쟁을 지원하였다가, 전세가 역전되는 바람에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퇴위하였다. 이로써 무굴 제국은 멸망하였고, 부인 지낫 마할과 함께 영국령 버마로 유배되었다가 양곤에서 사망하였다.
- 세포이 항쟁
1857년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불만을 품은 인도인 용병 세포이들이 대대적인 반란 (세포이 항쟁)을 일으켰다.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종교 사회였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끌어줄 구심점이 필요했다. 반란군의 지도자들은 바하두르 샤 2세를 적임자로 생각하였고, 인도를 하나로 통일하여 영국과 대항하기 위해 바하두르 샤 2세를 “인도의 황제”로 추대하였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영국의 정책에 반대하여 인도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
“인도의 모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에게 이르노니, 지금 고심 끝에 백성들을 향한 나의 임무를 받아들여, 나의 백성들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였도다.
이 시점부터 누구든지 겁을 먹거나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저 간악한 영국을 돕는 것이며, 그들은 곧 속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영국은 그들의 신뢰의 대가로서 오우드의 군주들에게 대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갚아줄 것이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은 영국에 대한 반란에 신속하게 그리고 반드시 참여해야만 한다. 그들은 고향의 영주들의 지시에 따라 우리 나라의 질서를 회복해 나가야만 한다.
모든 백성들은 이 기사를 복사하여 모든 마을의 중요한 장소마다 전시해 놓기 바란다. 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무장한 다음 영국에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
처음에는 세포이와 인도의 독립세력이 우세하였지만,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전세는 점차 역전되었다. 영국군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바하두르 샤 2세는 후마윤 묘지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영국군의 끈질긴 추격으로 1857년 9월 20일에 체포되었다.
다음날, 영국군 장교 윌리엄 허드슨은 바하두르 샤 2세의 아들이자 무굴제국의 황자였던 미르자 무굴, 미르자 카지르 술탄, 그리고 손자인 미르자 아부 바크르를 즉결 처형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바하두르 샤 2세는 충격에 빠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델리에서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영국령 버마로 추방되었다. 결국 그는 부인 지낫 마할을 포함하여 살아남은 약간의 가족들과 함께 양곤으로 떠났다. 이로써 3백 년을 계속된 무굴 제국은 멸망하였다.
1862년 11월 7일에 유배지였던 양곤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인도로 돌아오지 못하고, 훗날 바하두르 샤 다가로 불리게 되는 양곤의 슈웨다곤 파고다 인근 지역에 매장되었다. 부인 지낫 마할은 그 곳에서 빈곤하게 살다가 1886년에 사망하였다. 바하두르 샤 2세는 평소 인도 메라우리 지역에 위치한 대리석으로 치장된 전임 황제들의 수피교 양식의 묘당 옆에 함께 묻히고자 했으나, 이 곳은 현재 주인 없는 빈 터로 남아 있다.
- 묘비명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방 벽에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썼다.
“내 마음은 이 빼앗긴 땅에 쉴 곳이 없고
그 누가 이 쓸모없는 세상에서 성취감을 맛보랴?
나이팅게일은 감시꾼이나 사냥꾼 때문에 불평하지 않는다
운명은 봄의 추수기간 동안 감옥에 갇혔구나
열망은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하자
이 추잡해진 마음 어느 구석에 사망이 자리잡겠는가?
꽃에 앉은 나이팅게일이 대단히 기뻐하는데
나의 마음에는 가시들을 흩뿌리누나
난 긴 교복을 청했지만,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이틀은 희망으로, 이틀은 기다림으로.
생명의 날은 끝났고, 저녁이 다가왔다
나는 내 묘에 다리 뻗어 잠들어 있겠지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나의 사랑하는 대지에서 땅 2야드조차 갖지 못하였으니.”
- 사후
1959년에 인도의 첫 반영 항쟁에 대한 공헌을 널리 기리기 위하여 바하두르 샤 자파르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인도의 많은 영화들에는 세포이 항쟁 당시의 역할을 조명하는 내용이 방영되었다. 뉴 델리 등 많은 도시들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길들이 놓여졌고, 바라나시 지방에는 동상도 건립되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옛 다카의 빅토리아 공원이 바하두르 샤 자파르 공원으로 개명되었다. 파키스탄에서도 그의 이름을 딴 많은 도시와 대로, 그리고 쇼핑 센터들이 건설되었다.
○ 가족
- 부인 : 4명
베굼 아슈라프 뽕알
베굼 아크타 뽕알
베굼 지낫 뽕알
베굼 타지 뽕알
- 딸 : 3명
라베야 베굼
베굼 파티마 술탄
쿨숨 자마니 베굼
- 아들 : 6명
미르자 다라 바크 미란 샤
미르자 샤 루크
미르자 파크루
미르자 무굴
미르자 카지르 술탄
미르자 바크
미르자 콰이샤
미르자 샤 아바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