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4월 20일, 루이 파스퇴르와 클로드 베르나르, 최초로 ‘저온 살균법’ (低溫殺菌法, pasteurization) 실험 성공
저온 살균법 (低溫殺菌法, pasteurization)이란 액체 (일반적으로 음식)를 100 °C 이하의 온도에서 가열하여 병원균 (박테리아, 원생동물문, 곰팡이, 효모 등), 비내열성 부패균과 변패균 등을 부분적으로 살균하는 가열 살균법이다. 저온 살균법은 1117년 중국에서 술을 보존하기 위하여 가열하는 것에서부터 유래하였다고 1568년 일본의 다문원일기 (多聞院日記)의 기록이 되어 있으나, 현대판 저온 살균법은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미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가 고안 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파스퇴르 살균법 (pasteurization)이라고도 부른다. 첫 번째 저온 살균법은 1864년 4월 20일 루이 파스퇴르와 그의 동료 클로드 베르나르에 의해 실시되었다. 이 살균법은 포도주와 맥주 등 주류의 산화를 방지하는 방법으로 고안되었다.
- 역사
밀폐용기속의 음식을 살균하는 시도는 18세기 프랑스의 요리사 니콜라 아페르의 연구로 병조림이 완성되었다. 19세기말 독일의 화학자가 원유에 이 살균과정을 적용하였고 열처리는 세균을 파멸하는데 효과적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보존과정으로 떠올랐을 뿐 아니라 소비자의 건강과 식품품질을 보존하기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위생의 척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 보존과정은 이후 파스퇴르의 발견과 과학적 증명으로 인해 퇴보되었다.
루이스 파스퇴르가 생존했던 19세기의 독일의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를 포함한 일부들은 발효가 순수하게 화학적이고 살아있는 유기체에 대한 간섭은 불필요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1864년,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요구로 파스퇴르는 포도주와 맥주가 시간이 지나면 쉬게 되는 원인을 조사하게 되었다. 이 식품들의 자연 부패는 프랑스 상업에 거대한 경제적 손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파스퇴르는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명령으로 자신의 유년기시절의 마을인 아흐부와로 돌아와 아흐부와의 포도원에서 그 문제를 연구하였다. 그는 현미경을 사용하여 이스트와 초산균이라는 두 가지의 복잡한 미생물의 형태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나중에 이스트와 초산균은 발효과정의 핵심이었고 알코올과 쉬어서 시큼해진 포도주 같은 다른 젖산은 식초를 생산하게 되었다. 파스퇴르는 포도주와 맥주의 질을 떨어트리는 미생물을 죽이기 위하여 단단히 밀봉된 탱크에 액체를 저장한 후, 짧은 기간 동안 온도를 44°C 로 끌어 올리는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였고 실험의 결과에서 아세트산균의 개체수가 확연하게 줄어들고 보존성이 향상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이 열처리법을 파스퇴르가 파즈보일링 (Paz-boiling)이라고 명명하였다. 생산초기에 포도주를 데운다는 생각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포도주의 가열과 비가열에 대한 많은 실험으로 살균과정의 효과성이 확정적으로 입증 되었다. 파스퇴르가 죽은 후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새로운 살균공법을 “파스퇴라이제이션 (Pasteurization)”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 살균법은 우유와 같은 액체 식품에 적용되었다.
하지만, 저온 살균법이 우유에 적용되기 까지는 소비자들의 반대로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고 1898년, 낙농선진국 덴마크에서 파스퇴라이제이션법이 법제화 되어었다. 저온살균법은 오늘날 식품산업의 기초과정으로 위생의 표준으로 적용되고 현재 전 세계의 많은 식품안전의 보증이 되었고 미국에서는 찰스 노스는 1907년에 우유에 같은 파스퇴르 공법을 적용하는데 성공하였다.

○ 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 1822 ~ 1895)
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 1822년 12월 27일 ~ 1895년 9월 28일)는 프랑스의 생화학자이며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질병과 미생물의 연관관계를 밝혀냈고, 분자의 광학 이성질체를 발견했으며, 저온 살균법, 광견병, 닭 콜레라의 백신을 발명했다.
파스퇴르는 1822년 12월 27일, 가죽 가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미술에 소질을 보였지만 1843년에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1846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학을 전공했지만 처음은 재능을 보이지 못하고 지도한 교수의 한 명은 그를 “평범하다”라고 평가했다.
- 주석산의 성격 해명
초기 화학자 시절의 업적으로는 주석산의 성질을 해명 (1849년)한 것이 있다. 천연물, 특히 포도주의 침전물로부터 취할 수 있는 이 화합물의 용액은 통과하는 빛의 편광면을 회전시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공적으로 합성된 주석산은 화학반응이나 분자식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효과를 갖지 않는다.
파스퇴르는 주석산의 미세한 결정을 조사하고서 결정에는 비대칭인 2 종류가 있어, 각각이 서로의 거울상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끈질기게 분류 작업을 한 결과 2 종류의 주석산을 얻을 수 있었다. 한 종류의 용액은 편광면을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키는 데 반해, 한편은 반시계회전으로 회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2 종류를 반반씩 혼합한 것은 편광에 대해서 어떤 효과도 미치지 않았다. 이것으로부터 파스퇴르는 주석산의 분자는 비대칭인 형태를 하고 있고 왼손용 장갑과 오른손용 장갑과 같이 서로 거울상 관계에 있는 2종류의 형태가 있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추론했다. 처음으로 키랄 분자를 실증한 것도 큰 실적이었지만, 이후 파스퇴르는 한층 더 유명한 실적을 완수하는 생물학·의학의 분야로 나아가고 있었다.
-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교수
파스퇴르는 결정학에 관한 박사 논문에 힘입어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의 화학의 교수의 지위를 얻었다. 1854년엔 릴의 새로운 이과 대학의 학장으로 지명되고, 1857년에는 고등사범학교의 사무국장 겸 이학부장이 되었다.
- 자연발생설 비판
1861년의 저작 ‘자연발생설 비판’에서 발효가 미생물의 증식 때문이란 사실을 보였고, 동시에 영양분을 포함한 고깃국물에서 미생물이 증식하는 것은 자연발생에 의한 것이라는 종래의 설을 뒤집어 보였다. 먼지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필터를 통해 바깥 공기를 접촉할 수 있는 용기에 새로 끓인 고깃국물을 놔 두거나, 필터는 없지만 ‘S’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플라스크를 사용해 티끌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 공기를 접촉하게 하면, 고깃국물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했다. 따라서, 고깃국물에 발생하는 미생물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티끌에 붙은 포자 등 미생물에 의한 것이며, 고깃국물중에서 자연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하여 파스퇴르는 자연발생설을 비판했다.
루이 파스퇴르가 세균설을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다. 세균설은 벌써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 프리드리히 헨레 등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었다. 파스퇴르가 한 것은 세균설(생물 속생설)의 올바름을 실험으로 명백하게 보여줘서, 유럽 사람에게 납득시킨 것이다.
- 살균법
파스퇴르의 연구는 발효 음료를 오염하는 미생물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로부터 파스퇴르는 우유 등의 액체를 가열해 그중에 포함되어 있는 박테리아나 곰팡이를 모두 죽이는 방법을 발명했다. 파스퇴르와 클로드 베르나르는 1862년 4월 20일에 최초의 실험을 실시했다. 이 방법은 곧바로 가열살균법 (파스퇴라이제이션)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음료 오염으로부터 미생물이 동물이나 인간에게 감염된다는 결론을 내린 파스퇴르는 미생물이 인체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스코틀랜드의 외과의사 죠제프 리스터가 외과 수술 소독법을 개발하는 데에 이르렀다.
- 누에병 치료
1865년 파스퇴르는 양잠업의 구제에 착수했다. 그 무렵 미립자병으로 불리는 병에 의해 많은 누에가 죽고 있었다. 이 도중인 1867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왼쪽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수년에 걸치는 조사의 결과 병의 원인은 누에의 알에 세균의 감염인 것을 증명해 치잠사육소로부터 이 세균을 구제하는 것으로 미립자병을 막을 수 있는 것을 나타냈다.
- 혐기성균 발견
파스퇴르는 혐기성균, 즉 공기 없이 증식 하는 미생물을 발견했다. 1895년 미생물학으로 최고의 영예인 레이웬훅크메달 (Leeuwenhoek medal)을 수상했다.
- 별세
1895년, 1868년부터 일련의 발작에 의한 합병증이 원인이 되어, 파리 근교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프랑스 정부의 주도로 국장으로 치러졌다. 노트르담 대성당에 매장되었지만, 곧 유해는 파스퇴르 연구소의 지하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 클로드 베르나르 (Claude Bernard, 1813 ~ 1878)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년 7월 12일 ~ 1878년 2월 10일)은 프랑스의 생리학자이다. 근대 실험 의학의 시조이다.
빌프랑슈쉬르손 근처의 상줄리앙에서 태어났다. 리옹에서 약제사의 도제가 되기도 하고, 극작가가 되려고도 하던 소년기를 거쳐 어떤 사람의 충고에 따라 의학의 길을 택했다. 처음 오테르 디우에서, 이어서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프랑수아 마장디의 조수를 지냈다. 비샤의 생기론에 지배되고 있던 프랑스의 생리학계에 실증주의적인 생각을 도입한 것은 마장디였다. 그 밑에서 공부한 베르나르가 실험 사실과 억설을 엄밀히 구분하여 귀납법을 생물학 연구의 근본원칙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843년에 위액과 그 소화기능에서의 역할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고, 이어 소화기능에서의 이자액의 기능, 연수의 천자에 의한 인공적 당뇨의 발현, 간장의 당원 생성 등 많은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1852년 소르본 대학 교수, 1855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186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일반 과학의 이법에 의해 생리 현상을 설명하려는 실험적 방법을 완성시킨 점은 큰 공적이며, 처음으로 ‘내분비’라는 용어를 썼다. 베르나르가 1865년에 저술한 『실험의학 서설』은 그의 실험의학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제시한 것으로서 불후의 고전이 되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