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2월 17일, 쑹 자매 (송 자매)의 아버지 쑹자수 / 송가수 (宋嘉樹, 1863 ~ 1918) 출생
쑹자수 / 송가수 (宋嘉樹, 1863년 2월 17일 ~ 1918년 5월 3일)은 감리교 목사, 기업인다. 쑹 자매의 아버지로 자식들은 모두 20세기초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영어식 이름 은 찰리 존스 쑹 (Charles Jones Soong). 자는 야오루 (耀如).

– 쑹자수 (宋嘉樹)
.본명: 한교준 (韓教准)
.한문: 宋嘉樹, 한국식 독음 송가수
.영문: Sòng Jiāshù
.영어이름: Charlie Soong, Charles Jones Soong
.자: 요여 (耀如)
.출생: 1863년 2월 17일, 청나라 광동성 문창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하이난성 원창시)
.사망: 1918년 5월 4일 (향년 55세), 중화민국 상하이 (現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국적: 청나라 → 중화민국
.가족: 장녀 쑹아이링, 차녀 쑹칭링, 삼녀 쑹메이링, 장남 쑹쯔원
.학력: 트리니티 칼리지 혹은 밴더빌트 대학교 졸업
.직업: 기업인, 정치가
쑹은 청나라 광둥성 원창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하이난성 원창) 출신 객가인으로 본래 성씨는 한 (韓)으로 본명은 자오준 (敎準)이다. 12살 때였던 1875년에 자녀가 없던 외가로 입양되어 쑹 (宋)씨가 되었다. 3년간 동인도 제도에서 생활을 한 후 미국으로 와서 15살에 개신교에 신자로 입문하여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였고 감리교 선교사가 되었다. 1886년 중국으로 돌아와 그 이듬해 결혼했다. 청나라 타도를 위해 결성된 비밀결사단체에 가담하고 출판업에 착수하여 구어체로 된 값싼 중국어 성서 인쇄를 시작했다. 그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인 사업가의 도움으로 담배, 면화등 사업을 벌여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실업가가 되었다.
1894년에 상하이에서 쑨원을 만나 중국 혁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중국동맹회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재정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다. 그의 둘째 딸인 쑹칭링은 나중에 쑨원과 결혼했다. 1918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 생애 및 활동
- 미국으로 가다
1863년, 현재의 하이난성에 속하는 청나라 광동성 해남도 문창현 주진 고로원촌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한교준으로 빈농인 한홍익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홍익의 집이 너무 가난하였기 때문에 한홍익은 동생 한금이에게 한교준을 양자로 보냈지만 한금이 역시 한교준을 먹일 능력이 없어서 부인 송씨의 친척들이 사는 매사추세츠 보스턴으로 보내서 그곳에서 가게 심부름꾼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1875년, 12세의 한교준은 해남도 청란항에서 배를 타고 미국을 떠나게 되었는데 한교준은 미국에서 신식교육을 받기를 기대했지만 기대와 달리 허구한 날 두들겨맞는 허드렛일꾼 신세가 될 뿐이었다. 한교준은 이에 불만을 품고 1877년에 가출하여 미국 국세청 소속의 선박 앨버트 갤러틴 호에 밀항하였다.
한교준은 화장실에 숨어서 한동안 숨어 있었지만 얼마 안가 선원들에게 잡혀서 선장인 에릭 가브리엘슨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중국인 꼬마가 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브리엘슨 선장은 한교준에게 이제 선원들의 법도대로 바다에 던져 상어밥으로 주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한교준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그러면 상어들은 배를 채우겠지만 당신의 구두를 닦아줄 사람이 없어서 당신의 손만 힘들어질 것이라고 대꾸했다. 가브리엘슨 선장은 한교준이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재치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찰스 손’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정식으로 선원으로 고용했는데 당시 쑹자수의 나이가 14세에 불과했으므로 선원으로 고용될 수 있는 나이인 16세가 된 1879년 1월 8일에야 법적으로 신고했다. 찰스 손이 된 한교준은 처음에는 보스턴 항에 정박했을 때 자신을 쫓아낼까봐 두려워 숨는 소동을 벌이곤 했으나 정식 선원이 되면서 마음놓고 일할 수 있게 되었고 훌륭한 일솜씨로 인하여 선원들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정식 선원으로 등록된 후에 변발도 밀어버렸다고 한다.
- 금의환향
가브리엘슨 선장은 찰스 손이 신식교육을 받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알고 서양의 역사, 지리, 고전, 기독교 교리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그러다가 찰스 손은 상해사람 온병충과 우상주를 알게 되었는데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이 두 사람은 청나라 청년들의 미국 유학을 주선하는 사업을 벌이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찰스 손에게 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가브리엘슨 선장도 찬성하여 찰스 손을 지지하려 했지만 1880년 1월, 보스턴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워밍턴으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찰스 손은 후원자를 잃고 막막한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슨 선장이 미군의 로저 무어 대령에게 찰스 손을 소개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1880년 11월 7일, 찰스 손은 정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고 인쇄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어 찰스 손에게 세례를 준 리카우드 목사가 트리니티 칼리지(현 듀크 대학교) 학장 블랙스톤 크레이븐 박사에게 찰스 손의 입학을 부탁하여 승낙을 받았다. 리카우드 목사는 또한 노스캐롤라이나의 부호인 줄리앙 카에게 찰스 손의 학비와 생활비를 후원해줄 것을 요청하여 이 역시 승낙을 얻었다. 1881년 3월, 찰스 손은 정식으로 카 부부를 만나 인사를 드린 후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찰스 손의 영어실력이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예비생으로 등록되어 읽기, 쓰기, 산술을 배우게 되었다. 찰스 손은 영어 실력이 완벽해지면서 자신의 이름을 정식으로 찰리 쑹으로 고쳤고 3년 후, 뛰어난 성적으로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당시 대학 학장이었던 맥타이어 주교와의 논의 끝에 찰리 쑹은 1886년, 중국에서 선교사업을 하기 위해 귀국하였다.

- 가정을 꾸리다
찰리 쑹은 월급 15달러를 받고 상해 오송구의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만국공보의 발행인이자 그의 상관인 알렌 목사는 그를 그저 포부가 큰 농부 정도로 우습게 보고 차별대우를 하였다. 알렌이 주는 월급이 너무 적었던 관계로 본 교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가르친 학생 중 한명이 후스였다. 찰리 쑹의 강의는 인기를 얻어 곧 학생 수가 2배로 늘게 되었으나 자신에게 상해말을 가르쳐주던 선교사 찰리 마샬과 마찰로 곤산의 순회 선교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식 옷차림과 생활이 몸에 배어 있던 그는 농민들에게 이방인으로 백안시당해서 한동안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그에게 학문을 권했던 우상주와 재회하게 되었는데 우상주는 처제인 성공회 신자 예계진을 소개시켜주었다. 마침 온병충도 예계진의 언니와 결혼한 상태였고 온병충과 우상주는 찰리 쑹을 예씨 집안에 정식으로 소개해주었고 1887년, 찰리 쑹은 예계진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한동안 찰리 쑹은 조용한 목회자의 삶을 사는 듯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상해의 청방 및 홍방 조직원들과 접촉하며 차차 혁명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88년, 정식으로 목사가 된 찰리 쑹은 1889년 상해 지구로 전근을 가게 되었으며 1890년 순회포교를 그만두고 상해 교외 천사 지구의 선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찰리 쑹은 미국성서협회의 상해 대리인 자격으로 미국의 종교 서적을 싼값에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 상하이의 거물 혁명가
찰리 쑹은 사업을 위해 한동안 아이를 낳지 않다가 1890년에 첫 딸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쑹아이링이다. 찰리 쑹은 자신의 학업을 후원한 카 부부를 기리기 위해 낸시 카의 이름을 따서 쑹아이링의 세례명을 낸시로 정했다. 이후 쑹씨 가문의 사업은 날로 융성해졌고 1893년 쑹칭링을 낳고 리카우드 목사의 딸 로자먼드 리카우드의 이름을 따서 로자먼드로 세례명을 지어주었다. 우상주와 온병충이 찰리 쑹의 사업에 자금을 지원해주었고 홍방 조직원들도 투자금을 제공함에 따라 찰리 쑹의 사업은 날로 커져 프랑스 조계지 안에 집을 구입하고 인쇄기를 설치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찰리 쑹은 미국의 카 부부와의 연줄을 이용하여 미국의 신식 중기계들을 도입하는 브로커 역할도 하여서 상하이의 민족자본가들과 미국 재계를 이어주었고 그 대가로 역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름없는 목회자에 불과했던 찰리 쑹은 1893~1894년 즈음이 되면 상하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 되었다. 1894년, 찰리 쑹은 장남 쑹쯔원을 낳았고 1897년에는 막내딸 쑹메이링을 낳았다. 이어 쑹쯔량, 쑹쯔안 형제를 잇달아 낳았다.
한편 찰리 쑹은 1892년, 광저우에서 기독교청년회 문제로 쑨원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중국의 미래에 관해 열띤 토론을 하였고 찰리 쑹은 위험을 무릅쓰고 쑨원의 혁명활동을 돕기 시작했다. 그는 쑨원의 혁명활동의 후원자이며 비서, 조직가로 활동했고 심지어 쑨원의 불온 출판물을 몰래 인쇄해서 배포해주기도 했다. 1894년, 쑨원이 입헌제 개혁 청원이 실패하자 하와이로 건너가 흥중회를 조직했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청나라가 패배하자 쑹자수는 쑨원의 귀국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쑨원은 상하이에 체류할 때마다 늘 찰리 쑹의 집에서 지냈으며 찰리 쑹의 자녀들도 쑨원을 집안 삼촌 정도로 보며 따르게 되었다.
반만 민족주의 사상과 서양에서 배운 경험이 풍부했던 찰리 쑹은 자녀들에 대해 획기적인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딸들은 감리교파에서 만든 상하이 한커우로 중서여학교로 진학했다. 찰리 쑹은 자식들이 넓은 세계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03년, 쑹아이링을 웨슬리언 대학교로 유학을 보내주었다. 쑹아이링은 높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1907년 귀국하여 쑨원의 영문 비서가 되었다. 그해에 쑹칭링과 쑹메이링을 미국에 유학보냈다. 찰리 쑹은 상하이 사교계의 명사 중의 명사로 하비로에 있는 그의 저택에는 상하이의 저명인사들이 자주 방문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 발생 후 위안스카이가 총통이 되어 독재를 휘두르자 쑹자수는 1913년 계축전쟁에 참가하여 위안스카이 타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쑨원, 장녀 쑹아이링과 함께 도쿄로 망명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쑹아이링은 쑨원의 영문 비서가 되었는데 윌리엄 헨리 도널드의 회고에 따르면, 쑨원이 미국 시찰 여행을 떠났을 때 쑨원은 기차 안에서 쑹아이링에게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 쑨원과의 악연
결국 쑨원은 쑹아이링에게 홀딱 반해서 찰리 쑹에게 쑹아이링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했다. 찰리 쑹은 이미 그녀와 비슷한 나이 뻘의 아들 쑨커를 두고 있는데다가 아내가 이미 있는 쑨원에게 중혼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결국 쑹아이링은 쑨원의 비서를 그만둔 후 1914년, 산서성 출신의 사업가이며 YMCA 일본 간사였던 쿵샹시와 결혼하였다. 그러자 새롭게 쑨원의 비서가 된 것은 그전부터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쑨원과 찰리 쑹의 뒷바라지를 하던 쑹칭링이었는데 1915년, 쑨원이 이번에는 쑹칭링에게 반해서 청혼하였다. 쑹칭링 역시 쑨원과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50살이나 되었는데다가 아내까지 있는 쑨원이 자신의 금쪽같은 22살 딸과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데에 찰리 쑹은 당연히 발칵 뒤집혀졌다. 찰리 쑹은 쑹칭링을 방에 가둬버렸지만 쑹칭링은 기어이 창문을 넘어 달아나 쑨원이 있는 고베로 달아나버렸다. 격노한 찰리 쑹은 일본까지 좇아가 일본 정부에게 이 결혼을 막아달라고 청원했지만 요쿄하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쑨원이 10월 25일에 쑹칭링과 결혼식을 올린 후였다. 찰리 쑹은 쑨원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당신, 당신이 담도 크게 감히 내 딸을 속이고, 우리의 우정을 배반하는 행위를 한 것은 우둔하기 짝이 없네. 우리가 함께 분투하던 지난 20년을 잊어서는 안되네.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지금 도리어 의지를 상실하고, 천지가 고통스러워하고 원수가 통쾌하게 여기는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쑹칭링이 쑨원을 두둔하며 용서를 청하였지만 찰리 쑹은 매몰차게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쑹칭링이 계속 쑨원을 옹호하자 결국 쑹칭링에게 의절을 선언하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 충격으로 찰리 쑹은 급격히 노쇠하였다.
- 사망
1917년, 예계진이 몸져눕게 되자 찰리 쑹은 쑹메이링을 중국으로 도로 불러들였다. 찰리 쑹은 감리교회에서 일하는 젊은이 주자청을 셋째 사위로 점찍고 그를 쑹메이링과 만나게 했다. 이때 쑹메이링은 이미 자신이 미국에서 사귀던 연인이 있었다고 밝혀 아버지를 놀라게 했지만 주자청과 만나라는 지시를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이듬해인 1918년에 이르러 위암에 걸린 찰리 쑹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줄리앙 카를 비롯한 미국의 지인들이 마지막으로 찰리 쑹을 만나기 위해 1918년 5월 3일, 방문하였다. 쑹칭링도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는데 찰리 쑹은 그런 딸을 둔 적이 없다고 성을 내면서 쫓아내라고 했지만 줄리앙 카가 마지막으로 딸을 한번 만나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쑹칭링과 만났고 결국에는 딸을 용서하였다. 이후 쑹씨 일가들은 마지막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했다.
줄리앙 카가 미국에서 암에 효과가 좋다고 밝혀진 신약을 구입해서 왔지만 이미 암이 많이 진행된 찰리 쑹은 5월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때 예게진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안될 것 같소. 지금부터의 길은 아직도 매우 길다오. 나는 당신과 애들에게 미안하오. 쯔량, 쯔안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으니 당신이 애써 키워야 되겠소. 인재가 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소원이지만 안된다 해도 억지로 하지 마오. 쯔원은 미국에서 배우고 있으니까 자주 편지를 보내 문안해주시오. 그는 희망이 있는 애요. 나머지 세 자매 중 결혼하지 못한 것은 메이링 뿐이오. 메이링은 당연히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되오. 그애는 자질이 총명하기 때문에 친구를 선택할 때도 신중히 하기 바라오. 아이링은 큰언니로써 많이 힘써야 하고.”
그가 사망하고 50년이 지난 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어닥치자 장칭은 쑹칭링을 미워하여 그의 아버지인 쑹자수를 반동 매판 부르주아로 공격하면서 홍위병들에게 그의 무덤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 학력
텍사스 샌 안토니오 트리니티 대학교 신학사
밴더빌트 대학교 대학원 신학석사
- 인간 관계
찰리 쑹자수는 청년 시절부터 여우례 (尤列), 쑨원, 양허링 (楊鶴齡), 루하오둥 (陸皓東), 천사오보 (陳少白), 관징량 (關景良)과 절친한 친구 관계였다.

○ 가족 관계
아들 : 쑹쯔원 – 국민정부의 재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역임
아들 : 쑹쯔량 – 뉴욕에서 사업가가 됨
아들 : 쑹쯔안 – 홍콩 광동은행 은행장
딸 : 쑹아이링 – 부유한 은행가이자 중화민국 재정부 장관을 지낸 쿵상시의 부인
사위 : 쿵상시
딸 : 쑹칭링 – 쑨원의 부인
사위 : 쑨원
딸 : 쑹메이링 – 장제스의 부인
사위 : 장제스

○ 송씨 (宋氏) 가문 세 자매의 결혼
송경령-손문, 송미령-장개석, 송애령-공상희의 결혼 후 “애령은 돈을, 경령은 중국을, 미령은 권력을 사랑했다”는 말 중국에서 유행
- 송씨 세 자매의 아버지 송가수는 손문과 혁명동지
1875년, 중국 광동성 해남도가 고향인 한교준이라는 14살의 소년이 중국을 떠나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으로 건너갔다. 소년의 아버지가 먹고살기 힘들어 아들을 동생에게 양자로 보냈는데 동생이 미국 보스턴에 살고 있는 송씨 성의 처남을 도우라며 소년을 미국에 보낸 것이다. 소년은 미국에서 매를 맞아가며 일을 하는 것이 싫어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 항구에 정박 중인 대형 어선에 올라탔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선장의 배려 덕에 소년은 선원으로 근무하며 서양의 역사와 지리를 배우고 기독교에 귀의해 1880년 11월 세례를 받았다.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찰리 송 (영문명), 송가수 (중국명)로 바꿨다.
송가수 (쑹자수, 1861 ~ 1918)는 인쇄공장에서 인쇄 기술을 배우면서 트리니티대의 특별예비생으로 학교에 다녔다. 영어가 익숙해지자 밴더빌트대 신학과로 전학·졸업하고 목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886년 1월, 11년 만에 귀국, 순회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1887년 부유한 집안의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상류사회에 진입했다. 1888년 반청 (反淸)을 기치로 내건 상해의 비밀결사 ‘삼합회’에 가담·활동하면서도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1889년 성서 등 종교 관련 서적을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하고 곧 인쇄소를 차려 중국어판 성경을 찍고 서양의 다양한 서적을 인쇄·판매했다. 돈이 쌓이자 밀가루 공장을 세우고 미국산 기계 대리점을 운영했다. 거부 소리를 들었다.
1892년 가을 상해에서 손문 (쑨원)을 알게 되어 혁명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 모두 삼합회 회원이었고 같은 광동 사람이었으며 외국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기독교 신자였다. 송가수는 백만장자가 되었는데도 혁명당의 요직을 맡아 손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 송씨 세 자매,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도 서로 다른 인생 행로 걸어
송가수는 애령, 경령, 자문, 미령, 자량, 자안 등 3남 3녀의 6남매를 두었다.
큰딸 송애령 (쑹아이링, 1888 ~ 1973)은 16살 때이던 1904년 미국의 명문 사립여대인 웨슬리언대로 유학을 떠나 1910년 졸업하고 귀국했다.
아버지를 도와 손문의 영문 비서로 활동하던 중 1913년 7월 신해혁명 제2혁명에 실패한 손문과 아버지가 일본으로 망명할 때 따라가 계속 손문의 비서로 활동했다.
그 무렵 손문과 친했던 호주 출신 신문기자 도널드는 “손문은 송애령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농담이 아니라 아주 진지했다. 부인과는 어쩔 심산이냐고 물으면 이미 이혼을 요구했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큰일 날 사람이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송애령은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 산서성 최대 금융 재벌 집안의 공상희 (쿵샹시)를 일본에서 만나 1914년 9월 결혼했다. 공상희는 공자의 75대 직계 후손으로 나중에 국민당의 재정부장과 중앙은행 총재를 맡아 막대한 개인 부를 챙겼다. 송애령이 공상희와 결혼하자 손문이 한동안 “애령이 고리대금업자 놈에게 시집갔다”며 분통을 터트려 주위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 또한 도널드의 기록이다. 송애령은 경령·미령 두 여동생과 달리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직간접적으로 국가 대사에 이런저런 영향을 미쳤다.

- 송경령, 손문과의 결혼이 혁명 사업과 이상의 결합이었음을 인정
송경령 (쑹칭링, 1893 ~ 1981)과 송미령 (쑹메이링, 1897 ~ 2003)은 각각 14살, 10살 때이던 1907년 송애령이 재학 중인 웨슬리언대로 유학을 떠났다. 송경령은 1913년 대학을 졸업한 뒤 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1914년 결혼한 언니의 뒤를 이어 손문의 비서 겸 혁명적 동지로 손문의 곁을 지켰다. 손문 저작을 영어로 번역하고 손문이 외국의 정치가들과 만날 때는 통역을 했다. 그 과정에서 불굴의 인내력을 보이는 손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손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손문에게는 송경령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을 비롯해 3명의 자녀와 부인이 있었다. 나이 차도 27살이나 났기 때문에 아버지는 딸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했다. 송경령을 일본에서 상해로 불러들여 집에 가두기까지 했으나 송경령은 일본으로 몰래 건너가 1915년 10월 25일 요코하마에서 손문과 결혼을 강행했다. 당시 손문의 나이는 49살이었고 송경령은 22살이었다.
손문을 평생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일본인 실업가 우메야 쇼키치 집에서 열린 결혼식은 초라했다. 하객이 거의 없었다. 다들 연락은 받았지만 참석하기를 껄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친구들 외에 중국인이라곤 혁명 동지인 요중개 (랴오중카이) 부부와 진기미 (천치메이) 정도였다. 손문은 송경령에게 “19발은 적에게 사용하고 1발은 급할 때 자신을 위해 쓰라”며 실탄 20발과 권총 한 자루를 결혼선물로 주었다.
아버지가 뒤늦게 알고 일본으로 쫓아갔으나 이미 결혼한 뒤였다. 송가수는 딸 경령에게 “오늘부터 너 같은 딸이 없는 셈 치겠다”고 선포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3년 후인 1918년 5월 숨졌다. 송경령은 훗날 에드거 스노에게 “그때의 감정은 연애라기보다는 구국 운동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며 손문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말해 자신의 결혼이 혁명 사업과 이상의 결합이었음을 인정했다.
송경령은 손문이 1925년 죽은 뒤에도 손문이 지향한 연소용공 (聯蘇容共)과 농공부조 (農工扶助)의 유지를 지켜나갔다. 그러다가 1927년 4월 장개석이 ‘상해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자 “손문의 뜻을 등지고 민족 분열을 획책한다”고 비난한 뒤 소련으로 사실상 정치적 망명을 떠났다. 1927년 8월 1일 공산당의 남창봉기 때는 혁명위원회 주석단으로 이름을 올려 반 (反) 장개석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27년 12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유럽으로 건너가 로맹 롤랑, 조지 버나드 쇼 등 세계적인 반전·반파시즘 인사들과 교류했다. 유럽에서 열린 국제반제동맹 대회 명예회장으로 선출되고 각종 반제·반파시즘 대회에 참석하다가 1931년 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그해 일어난 일본의 만주 침략에 맞서 항일 민족 통일전선 구축에 주력했다.

송미령은 미인에다 세련되고 교양과 언변까지 갖춰 상해 사교계의 샛별 같은 존재
송미령은 190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때 나이가 10살에 불과해 특별생으로 대학에 입학했다가 1912년 정식으로 입학했다. 보호자 노릇을 하던 언니 송경령이 대학을 졸업하고 1913년 귀국하자 오빠 송자문 (쑹쯔원, 1894 ~ 1971)이 재학 중인 하버드대가 있는 매사추세즈주의 웰즐리대로 전학해 1917년 졸업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YWCA 위원, 영화검열위원, 아동노동위원으로 활동했다.
송미령이 아동노동위원으로 병원의 실태와 입원 중인 아동노동자들을 살피고 있을 때 장개석 (장제스)이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아갔다가 송미령을 만났다. 장개석은 기혼자인데도 이미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송미령을 보고 마음속으로 연정을 품으며 때를 기다렸다. 당시 장개석은 아직 손문의 신임을 받지 않을 때여서 상해의 기생집을 돌아다니며 방탕한 생활을 하거나 상해의 암흑가 조직인 ‘청방’과 어울리며 지내고 있었다.
송미령은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지만 미모, 교양, 외교력 등을 두루 갖춘 서구형 여성이었다. “나에게 동양적인 것은 오직 얼굴뿐”이라며 서구적 사고방식과 생활을 즐겼다. 미인이고 세련되고 교양과 언변까지 갖춰 상해 사교계의 샛별 같은 존재였다.
그 무렵의 장개석은 두 번 결혼하고 한 번 동거하는 등 여성 편력이 심했다. 장개석이 처음 결혼한 것은 14살이던 1901년이었다. 장개석보다 5살이 많은 이 여인은 장개석의 유일한 아들인 장경국 (훗날 대만 총통)을 낳았다. 배우지는 못했지만 본부인이고 시어머니의 유일한 손자를 낳았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해 장개석에게서 버림받은 후에도 장개석의 고향 집에 눌러살았다. 두 번째 여자는 기생집에서 만났는데 결혼은 하지 않아 첩으로 분류된다.
진결여라는 이름의 세 번째 여자는 장개석과 동거하다가 장개석이 첫 부인과 법적으로 이혼한 1921년 결혼했다. 당시 장개석은 34살이었고 진결여는 15살의 소녀였다. 장개석은 매독에 걸린 상태에서 결혼했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매독을 치료했다. 그 무렵 매독을 치료하러 갔다가 송미령을 만난 것이다.

- 장개석, 손문 사후 승승장구하자 송미령에게 애정 공세 펼쳐
장개석이 손문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 것은 1922년 6월 손문의 부하인 진형명이 광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손문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손문과 그의 아내 송경령을 구해내면서였다. 그 덕에 1923년 2월 손문이 비상 총통으로 있는 광동 정부의 참모장에 임명되고, 손문의 뜻에 따라 1923년 7월 소련을 방문해 반 년간 소비에트군을 관찰·연구하고 돌아왔다. 1924년 6월에는 손문이 야심차게 설립한 황포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장개석은 손문의 인정을 받아 요직에 오르자 결혼한 몸인데도 송미령의 형부인 손문에게 중매를 부탁했다. 송미령은 장개석의 존재를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미덥지 않아 보이고 자신도 약혼자가 있어 결정을 하지 못했다. 송미령의 어머니는 극렬 반대했다. 두 번의 결혼에 첩까지 있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던 중 1925년 3월 손문이 죽어 장개석의 국민당 내 지위가 더욱 높아졌다. 장개석은 1926년 여름 국민혁명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손문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을 단행했다. 북벌군은 장사 (8월), 무한 (9월), 무창 (10월), 남창 (11월) 등을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1927년 3월에는 상해와 남경까지 점령, 양자강 이남을 사실상 국민당의 지배 지역으로 만들었다. 장개석은 1927년 4월 12일 ‘상해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고 4월 18일 남경에 국민정부를 정식 발족시킴으로써 국민당 우파의 대표 주자로 급부상했다. 이로써 중국에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의 연합 정부인 무한 정부, 장개석이 주도하는 국민당 우파의 남경 정부, 북경의 군벌 정부, 이렇게 세 정권이 대립했다.
그런 가운데 무한 정부와 남경 정부 간의 정통성 시비와 군사적 대치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충돌은 1927년 8월 13일 장개석의 갑작스러운 하야 선언으로 가까스로 모면했다. 장개석은 당주석,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 등 자신이 맡고 있는 모든 직무에서 사임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 장개석의 야망과 송미령의 퍼스트 레이디 꿈이 맞아떨어진 결합
한가해진 장개석은 송미령 집안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더욱 열렬히 애정 공세를 퍼부었다. 송미령의 큰언니 송애령은 “장개석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중국을 통치하는 황제와 결혼하는 것”이라며 동생을 꼬드겼다. 송애령은 산서성 최대 금융 재벌 집안의 공상희와 결혼한 사람답게 현실주의자였다. 결국 송미령은 장개석의 끈질긴 구애와 퍼스트 레이디가 되고 싶은 자신의 야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여자 관계가 복잡하고 매독에 걸려 있는 장개석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장개석의 다음 수순은 진결여와의 이혼이었다. 진결여는 장개석의 마음이 이미 떠난 것을 확인하고 장개석의 금전적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33년 중국으로 돌아와서도 장개석이 제공한 자금으로 생계를 꾸렸다.
장개석의 마지막 작업은 송미령의 어머니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장개석은 1927년 9월 일본에 있는 미래의 장모를 찾아가 “전 부인과 이미 이혼을 하고 기독교를 믿겠다”며 결혼 허락을 간청했다. 장모는 달갑지 않았지만 그 말을 믿고 결혼을 허락했다. 다만 손문의 부인 송경령은 ‘상해 반공 쿠데타’를 일으킨 장개석을 극도로 혐오해 결혼을 반대했다. 장개석과 송미령은 1927년 12월 1일 상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중국인들 사이에는 “애령은 돈을, 경령은 중국을, 미령은 권력을 사랑했다”는 말이 유행했다.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은 송미령의 집안을 배경으로 삼아 천하를 얻겠다는 장개석의 야망과, 중국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고 싶어한 송미령의 꿈이 맞아떨어진 결합이었다. 송미령의 언니 송경령은 “그들의 결합은 정치이지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해 결혼의 성격을 잘 짚어냈다.
- 송미령은 장개석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며 발군의 능력 발휘
장개석이 하야한 후 남경 정부 내에서는 권력 암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리더는 없고 권력만 다투는 바람에 거의 무정부 상태로 치달았다. 결국 국민당은 장개석을 대신할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장개석에게 복직을 요청했다.
장개석은 한 달간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1928년 1월 8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복직하고 전군 지휘를 맡았다. 또한 중앙상무위원회, 중앙정치회의, 군사위원회 주석까지 꿰참으로써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한 최고 실세가 되었다. 장개석은 1928년 4월 2차 북벌을 시작해 6월 8일 북경을 무혈점령하고 1928년 10월 남경을 수도로 하는 남경 정부의 주석에 취임했다. 이로써 송미령은 그토록 소망하던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다.
송미령은 장개석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며 개인 비서, 통역관, 참모, 조언자, 외교 고문으로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1936년 장개석이 서안에서 장학량에게 납치·감금되는 이른바 ‘서안사변’은 송미령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송미령은 장개석을 구하기 위해 서안으로 달려가 주은래와의 협상에서 두둑한 배짱과 놀라운 협상력을 발휘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졌을 때는 공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유창한 영어 실력과 외교력을 발휘해 120대의 비행기 원조와 항공외국용병대 설치를 얻어냈다. 이런 그를 가리켜 서방은 “중국에서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극찬했다. 송미령은 1943년 카이로 회담 때도 장개석의 통역으로 활약하고 1943년 외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국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연설을 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루스벨트는 “선교사가 중국에 예수를 전했듯이 송미령은 미국에 중국을 알렸다”고 극찬했다. ‘타임’지는 이런 송미령을 두 번이나 표지 인물로 올렸다.
장개석은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후 대륙의 주인이 되기 위해 공산군과 대대적인 내전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패해 1949년 대만으로 쫓겨가 철권통치로 27년을 집권한 후 1975년 4월 5일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송미령은 장개석 사후, 미국에서 살다가 2003년 10월 23일 10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 세 자매,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후 죽을 때까지 서로 만나지 못해
장남이자 셋째인 송자문 (쑹쯔원)은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학사·석사,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1917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송자문 역시 매형 공상희의 뒤를 이어 국민당 재정부장과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하면서 장개석 커넥션의 한 축을 이뤘다. 다만 동생의 남편인 장개석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겉으로는 협력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갈등했다. 장개석에게 뺨을 맞을 때도 있었고 장개석에게 연금되기도 했다. 1944년 1월 가족회의 때는 장개석이 던진 찻잔을 이마에 맞아 피가 흐르는 ‘찻잔 풍파’도 겪었다.
송씨 세 자매는 같은 성장 환경과 교육 여건 속에서 자랐는데도 결국 각기 다른 인생관을 갖고 서로 다른 인생 행로를 걸었다. 특히 송경령과 송미령 사이에는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있었다. 송미령은 송경령이 장개석을 극도로 싫어하고 공산당 쪽에 기울자 언니와 갈등을 빚었다.
세 자매가 처음으로 일치단결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기였다. 세 자매는 각국 정부와 국민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지원을 받을 때는 송애령·공상희 부부, 송미령·장개석 부부, 송자문은 엄청난 축재를 했다. 훗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들을 이렇게 비난했다. “국민당을 돕기 위해 우리가 모은 돈은 모조리 바닥났다. … 그중 많은 돈이 장개석과 그의 부인, 그리고 송자문 및 공상희 집안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다.”
세 자매는 1949년 대륙이 공산화된 후 세기의 이산 자매가 되어 죽을 때까지 서로 만나지 못했다. 송애령은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편안한 여생을 보낸 후 1973년 사망했다. 송자문은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1971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송경령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살다가 1981년 북경에서 눈을 감았다. 송경령이 사망하기 전 중국 정부가 미국의 송미령에게 전보를 쳤으나 오지 않았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