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1월 7일,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 서재필 (徐載弼, 1864 ~ 1951) 출생
서재필 (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은 조선의 문신, 대한제국의 정치인·언론인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의사이다. 또한 미국에서 병리학자·의사·시인·소설가로 활동하였다. 1977년 11월 30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 서재필 (徐載弼)
.출생: 1864년 1월 7일, 전라도 보성군 문전면 가천리
(現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
.사망: 1951년 1월 5일 (86세),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219호
.국적: 조선 (1864 ~ 1890), 미국 (1890 ~ 1951)
.자: 윤경(允卿) / 호: 송재(松齋), 쌍경(雙慶)
.조부: 서상기, 양조부 서상요
.부모: 아버지 생부 서광효, 양부 서광하
.배우자: 뮤리얼 메리 암스트롱 (Muriel Mary Armstrong)
.자녀: 슬하 1남 3녀 – 장녀 스테페니 제이슨 보이드 (Stephanie Jaisohn Boyd), 차녀 뮤리엘 제이슨 (Muriel Jaisohn), 손자 필립 제이슨 하디간 (Philip Jaisohn Hardican)
.학력: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세균학 / 학사),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원
.병역: 조선 관군 병조 조련국, 미합중국 육군
.종교: 유교 (성리학) → 개신교 (감리교회)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동복군에서 태어나 논산에서 자랐다. 자 (字)는 윤경(允卿), 호는 송재 (松齋) · 쌍경 (雙慶)이다. 본관은 대구(大丘)이며 이름 대신 일명 “피제손”과 필명은 오시아(N. H. Osia)를 사용하였다.
김성근,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며 1879년 초시에 합격 이후 1882년 (고종 20년) 증광시에 급제해 교서관부정자 (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과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끝났다. 이후 일본을 경유,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였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그해 7월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개화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재미 한국인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의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하였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정부의 최고고문 역을 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1948년 미국으로 출국하여 1951년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미국에서 병사하였다. 1864년에 태어났고, 1951년에 사망하였다.
○ 생애 및 활동
일곱살 때에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성근 (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2년 3월에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세번째로 합격하여 교서관 (校書館)의 부정자 (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김옥균 (金玉均) · 서광범 (徐光範) · 홍영식 (洪英植) · 박영효 (朴泳孝)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하며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 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 [戶山陸軍學校]에 유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동료 14명과 함께 1년간 현대 군사 훈련을 교육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하여, 국왕으로부터의 승낙을 받아 조련국 (操鍊局)을 만들어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사관생도들을 지휘해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에 의해 성립된 신정부의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 (後營領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이 망명객들을 냉대하자, 도착한 지 4개월 뒤인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때 서재필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 자살하고, 동생 서재창 (徐載昌)은 참형되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 공부를 하였다. 1886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힐맨고등학교 (Harry Hilman Academy)에 입학했는데, 1889년 6월 졸업 당시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자가 될 정도로 성적이 특출하였다.
그런데 서재필이 학교에 입학할 때, 미국 국적을 가지고 제이슨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당시 역적으로 몰려 있었고, 가족들 모두가 희생되어 본국에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생활을 위해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졸업 후, 1889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튼시에 있는 라파예트 (Lafayette)대학에 진학했으나 학비를 조달하기가 어려워 워싱턴시로 가서 낮에는 육군의학도서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아의과대학야간부 (Columbia Medical College: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3년 6월 2등으로 졸업한 뒤, 학교의 병리학 강사가 되었다.
다음해 6월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 암스트롱 (Amstrong, G. B.)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무렵 학생들의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적인 행위가 심하자, 이에 분개하여 모교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해 의료 사업을 시작하였다.
한편, 1894년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으로 대개혁이 단행되고 있었으며, 동시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들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그리고 1895년 5월 박정양내각 (朴定陽內閣)은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갑자기 귀국할 수 없었다.
그 뒤 김홍집내각에서 내부대신이었던 박영효가 고종 폐위 음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미국에 들려 또다시 귀국을 종용하자, 사업을 정리하고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1896년 1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귀국 후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 국민의 계몽이며, 정부의 개화 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의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고 신문 발간사업을 추진하였다. 정부로부터 4,400원의 재정 지원을 받고,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으로 순 한글로 간행되어 폐간될 때까지 국민을 계몽하고 우리나라의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에 성공하자 뒤를 이어 개화독립세력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창립 후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소임을 다 하였다. 독립협회의 창설과 함께 종래의 영은문 (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제의하였다. 그런데 국민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속에 1897년 11월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이 건립되었다.
또한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896년 11월 교내에 협성회 (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하였다. 협성회는 서울의 청년학생들을 교육, 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신문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알리는 한편, 민족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를 비판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자, 이를 꺼려한 수구파 정부와 국제 열강들은 합의해 다시 미국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3·1운동 봉기 때까지 다시 병원을 개업, 의료사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전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해 우리나라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전세계에 규탄하였다. 한편, 한인친우회 (Friend of Korean)를 조직해 재미교포들을 결속시키고 미국인친우들을 모아서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영자 독립신문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를 간행하여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언론 활동과 외교 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개최되자 우리나라의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일본대표의 갖은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의 만행을 폭로, 규탄하며, 독립운동에의 지원을 전세계에 호소하였다.
이렇듯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가재 (家財)가 완전히 파산되어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강사로 나가는 한편, 여러 병원의 고용 의사로 종사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장관 하지 (Hodge, G. R.)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하였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이 선포되고 미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 평가
- 긍정적 평가
미국 교민사회에서 서재필은 미국 주류 사회에 최초로 성공적인 진입을 이룩한 인물로 기려지고 있다. 미주지역에서 한국의 통일운동을 전개해 온 임창영, 현봉학 등이 가졌던 서재필에 대한 존경심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들은 서재필을 이승만과 대비되는 자유민주주의와 통일운동의 선구자로 간주하였다.
조병옥은 그가 우리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미국식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배우고 나가서는 그 현실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최초의 선각자라고 평가하였다.
서재필은 개화사상가, 혁명가, 독립운동가, 군인, 의사, 정치가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생계를 돌보지 못하면서까지 한인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송건호는 “그는 이 땅에서 다시 견줄 바 없는 개혁, 구국, 자유, 독립의 애국투사였으며 조국의 장래와 동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사랑의 봉사자였다.”라고 하였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초당파적 정치가’를 염원하는 중도파에 의해 1년2개월 동안 귀국했던 서재필 (徐載弼)은 조국의 통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최후의 봉사를 한 셈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에서 추방당하면서 2만 4,400원이라는 거액의 위약금을 요구한 것에 대해 서울대학교 교수 신용하는 “이 부채 (서재필이 받아간 2만 4400원을 가리킴)는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7만 6,000 달러를 모두 독립운동에 투입함으로써 충분히 청산하였다.”며 “이때 그는 병원 외에도 60 ~ 70명의 종업원을 둔 문방구점과 분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파산하였다. 여기서 그의 헌신적 애국심과 그의 인품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이때 그가 가져간 2만 4,400원은 비난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평하였다.
사학자 최태영은 “일부에서는 서재필선생이 미국 국적을 가졌고 이름도 미국식으로 바꿨다고 비판하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생각했지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진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며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대전대 총장을 역임한 이광린 (李光鑛)과 언론인 송건호 (宋建鎖)는 서재필을 ‘한국의 볼테르’라고 평하였다. 그리고 (학자들 중에도) 서재필을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와 견주어 ‘한국의 볼테르’라 부르는 학자도 있다.
- 부정적 평가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에 의하면 “그에게서도 역시 강렬한 양반의식 (양반으로서의 우월의식)을 느낄수 있었다.” 고 평가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태도는 이미 상당히 미국화되어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허정은 그가 차갑고 냉소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그는 독립신문 설립 과정에서 단 한 푼의 자본을 댄 바가 없었음에도 신문사를 자기 명의로 등록했으며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소유권을 일본에 양도하려 했었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운영만 윤치호에게 넘긴 채, 자신은 하는 일 없이 편집인의 명목으로 많은 연봉을 받기로 계약을 맺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가 한국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 역시 부정적인 평가가 되고 있다.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서재필은 귀국후 철저하게 미국인 제이슨으로 행세하였다. 또한 미국인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정식 관리가 아닌, 고문관이 되어 최고의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자기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는 경우에도 제손박사 또는 피제선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1994년 유골 송환 직전 TV에서 방송된, 미국 메디아에 있던 그의 유골항아리) 텔레비전을 유심히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의 묘비명에도 역시 필립 제이슨으로 적혀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1898년 4월 남은 7년 10개월분 봉급에다가 두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여비까지 보태어 받아냈다. 이 때 <독립신문> 창간 비용은 공제되었다. 빈약한 재정에 시달리고 있는 조국에 그렇게 막대한 돈을 강요하였던 것이다’고 하였다.
또, 주진오는 “‘독립신문’ 등을 통해 그는 동학혁명이나 의병 운동을 철처하게 비난하고 있으며 열강의 이권 침탈과 시장 개방 요구를 ‘문명화’로 합리화하거나 옹호했고 심지어 독립신문사에서 각종 서양 물품을 판매하기도 했다.”고 비판하였다. ‘그가 미국 땅에 묻혀 있는 것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다. 그에게는 여러 차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거부하였고, 자기가 선택한 미국 시민으로 살다가 죽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방선주 박사 (한림대 교수)도 ‘서재필은 과거를 회상할 때 무책임할 정도로 시일을 혼동하였고, 냉엄한 이국 사회에서의 처신 상 그때그때 적당히 호도하는 습성이 있었다’고 하였다.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 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던 점이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역사 재해석이 유행이 된 최근에 와서는 서재필이 친일파 이완용과 친밀해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을 정도였다는 점과 독립신문의 시국관, 친미적 시각 등 부정적인 평가문제들도 역사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미국인으로서 <독립신문>을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미화하였다.’는 비판도 있다.
- 여론조사 및 지지율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5%가 서재필을 지목하였다.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지목되지 않았고,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 (누가 초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18표로 3위를 하였다.
- 성격
차갑고 냉정했다는 평가가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을 지낸 허정 (許政)은 후일 그가 매우 정열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회고하였다. 그의 독립심과 투지는 대단하였다. 박영효나 서광범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라는 자존심과 함께 노동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같은 양반집 도련님인데도 철도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마쳐 의사가 되었다. 고 하였다. 또한 개인주의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조선 체류 중 서재필은 죽은 부인의 묘를 한번도 찾아 돌보지 않았는데, 1898년 1월 15일, 갑신정변으로 고신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된 서재필의 전 부인 김씨의 친정아버지가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서재필은 그에게 2달러의 돈을 주고 쫓아냈다. 윤치호는 이를 보고 고상하지 못한 행동이라며 한탄했다.
허정 등에 의하면 ‘서재필이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유학생들의 나약함을 지적하며 사람들을 상당히 싫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힘이 닿는 대로 유학생들의 생계와 학비를 지원해주는 등 조국의 유학생들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가끔 그를 찾아오는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그는 언제나 다정한 보호자의 역할을 하였다.
“조국의 내일을 위해서 여러분은 오늘 열심히 연구하고 실력을 기르는 데 열심하여야 하오. 훗날 조국이 다시 빛을 찾는 날 여러분은 선진 민주주의 생활 방식과 그동안 기른 실력을 조국을 위해 발휘하여야 할게요. 아무쪼록 열심히 연구하시오.”
그는 오천석 (吳天錫), 조병옥, 김활란 등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경제적인 보조를 많이 하였으며, 이들을 적극 격려하였다. 후일 오천석은 서재필의 종손인 서명원에게 유학 당시를 회고하며 서재필에게 경제적인 보조를 받았다고 술회하였다.
- 서재필과 윤치호의 비교
서재필이 급진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정국에서 서재필과 달리 점진 노선을 택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가족 또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재적인 신변의 위협 때문에 결국 유학이란 명분으로 망명객이 되어 십년 이상 외국을 떠돌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서재필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혈혈단신으로 고투하였던데 반해,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에서도 교회와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에 연설의 경험을 풍부하게 축적할 수 있었다. 작은 일까지 매일 기록하는 꼼꼼한 성격과 겸손하며 성찰적인 태도 덕분에 남의 장점을 수용하여 늘 나아가고자 노력한 윤치호의 연설에는 깊이가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 망명 후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와 그 세속화된 형태의 미국의 시민종교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은인 홀렌백이 ‘선교사가 된다면 대학교 학비를 대겠다’는 요청을 뿌리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잊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그 자체가 사회운동을 대체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때로는 과하다고 할 정도로) 미국식 사유와 생활 방식을 조선에 이식하여 그 근본적인 급진성을 통해 사회운동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반면에 윤치호는 기독교 개종 이후 삶의 중심을 언제나 신앙에 두었다. 개종의 동기는 개인적 차원이었지만 개종과 동시에 민족적 차원에서 기독교와 조선을 언제나 결부시켰다. 조선 문화에 깊게 뿌리박은 가족주의적 습속을 돌파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하고, 그 낡은 구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조선의 사회에 예수의 가르침을 설파할 책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종교와 민족을 하나로 놓고 사유하는 윤치호의 선지자적 태도는 독립협회 회원 및 참여 민중 대부분에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서재필이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힘이 넘치고 주장이 명확한 연설로 유명하다면, 윤치호는 특유의 온화함과 차분함으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시켜 감화시키는 연설이 특징이라는 평가도 있다.
서재필이 배재학당의 젊은 학생들과 애국적인 시민을 독립협회로 모으는 데 기여했다면, 윤치호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양심적인 중견 관료들과 개혁적인 젊은 관료들을 하나로 묶어 독립협회의 내적 통합에 기여했다.
○ 저서
《한수의 여행》 (1922년): N.H.Osia라는 필명으로 쓴 영문소설 단행본, 최초의 한국계 미국 소설. 문학분야에서 그의 주요 작품은 영어로 쓴 소설집 《한수의 여행》이며, 벤저민 프랭클린 등의 영향을 받았다.
《서재필박사 자서전》 (김도태 정리, 수선사, 1948)
《서재필본 영한사전》 (1895년) (미완)
○ 상훈
1945년 미국 국방성 표창장 (2차 세계대전 참전 공로)
1977년 12월 13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학위
컬럼비안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 졸업(전문학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세균학과 졸업(세균학 학사)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 M.D.
.명예 박사 학위
시카고 대학교 명예철학박사
○ 가족관계
형 서재춘의 손자 서태원(전 감신대 교수)은 6·25 전쟁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되어 갔고 6.25 전쟁 이후의 생존 자손으로는 종손자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서희원, 서태원의 아들이며 서재필의 종증손자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변호사로 있는 서동성 등이 있었다. 서동성은 변호사업 외에 이민100주년남가주기념사업회 공동회장과 서재필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종손 서명원은 생부를 잃고 백부의 손에 자랐다 하며, 후일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서재필이 귀국할 무렵에 살아남은 일족은 형 서재춘의 후손인 서찬석, 서태원, 서명원, 동생 서재우의 아들 서호석 등이 있었다. 그밖에 신분을 숨기고 살던 여동생 서기석의 후손들도 존재하였다. 1983년 당시 종손 서희원의 증언에 의하면 서재필의 친족이 50여 명 정도가 미국에 살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그밖에 그의 넷째 이모의 아들 이승학은 해방 후 감사원장과 총리 서리를 지낸 법관 이한기의 증조부였다.
조부: 서상기(徐相夔)
조모: 울산김씨, 김구조(金龜祖)의 딸
양조부: 서상요(徐相堯)
양부: 서광하(徐光夏, 생부 서광효의 6촌)
양모: 안동 김씨(安東金氏, ? – 1884년), 김온순의 딸
생부: 서광효(徐光孝, 1800년 8월 22일 ~ 1884년 12월 19일<음 11월 2일>), 자는 성규(聖規), 다른 이름은 광언(光彦)
생모: 성주 이씨(星州李氏, 1830년 ~ 1884년 12월 19일<음 11월 2일>)
친누나: 서씨, 갑신정변 이전에 이미 결혼하였으므로 연좌제를 면할수 있었다.
매형: 정해은(鄭海殷, 본관은 연일).
친형: 서재춘(徐載春, 1859년 3월 4일 ~ 1888년 9월 5일, 음독자살)
형수: 은진송씨(1860년 ~ 1916년 2월 14일)
친동생: 서재창(徐載昌, 1866년 ~ 1884년 12월 13일, 조선의 군인, 참형되었다.), 일설에는 그가 1865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제수: 조씨(趙氏)
친동생: 서재우(徐載雨, 1868년 9월 5일 ~ 1929년 1월 24일, 정3품 통정대부 면천군수)
제수: 안동권씨
여동생: 서기석
매제: 이OO
서모: 이름 미상
이복형: 서재형(徐載衡, 1851년 ~ 1884년 12월 13일, 처형되었다.)
처: 경주이씨(慶州李氏, 1860년 ~ 1880년?), 자녀 없음
처: 광산김씨(光山金氏, 1862년 ~ 1885년 1월 12일, 음독자살), 김영석(金永奭, 1837년 – 1902년, 자는 보경 <保卿>)과 반남박씨(潘南朴氏, 박호수 <朴鎬壽>의 딸)의 딸
딸: 대구서씨, 생몰년 미상
사위: 김두진(金斗鎭, 선원 김상용의 10대손)
아들: 요절(1882년 ~ 1885년 1월 12일?)
처: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 (Muriel Mary Armstrong, 다른 이름은 뮤리엘 조세피네 암스트롱 <Muriel Josephine Armstrong>, 1871년 ~ 1944년 8월), 2녀,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 (George Buchanan Armstrong, 1822년 10월 27일 – 1871년 5월 5일) – 미국 육군 대령 퇴역, 철도국장 역임
딸: 스테페니 제이슨 보이드(Stephanie Jaisohn Boyd, 1896년 ~ 1991년 4월 5일)
사위: 파울 보이드(Paul C. Boyd, ? – ?), 스테페니 제이슨의 남편
외손자: 보이드(1923년 – ?)
사위: 하디칸(? – 1982년), 미국인, 스테페니 제이슨의 남편
외손자: 필립 하디칸(Philip Hedican, ? – 1993년 3월)
딸: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 1898년 – 1987년 6월 16일), 화가, 독신으로 살면서 아버지를 곁에서 도왔다.
처형: ?
처남: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 1848년 – 1915년)
처남: 가이 H. 암스트롱(Guy Halifax Armstrong, 1868년 – 1915년 1월 2일)
처의붓아버지: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 – ?, 미국 육군 대위 ) – 조지 암스트롱 사후 재혼
외조부: 이기대(李箕大, 다른 이름은 이영석, 1792년 10월 4일 ~ 1858년 3월 18일)
외조모: 장흥 임씨, 1남 5녀, 5녀가 그의 어머니이다.
외조모: 경주 김씨, 1남
양 외조부: 김온순(金蘊淳, 1812년 ~ ?)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